백담사는 과거 한계사로 창건 후 1772년(영조51년)까지 운홍사, 삼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가 1783년에 최붕과 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웅덩이)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 데에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웅덩이가 많은곳에 사찰을 지은것은 백담사는 창건이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지어지고를 수없이 많이 하여
당시 주지승이 꿈을 꾸었는데, 도포를 입고 머리가 백발인 산신령이 나타나서 "대청봉에서 절 터까지 웅덩이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라." 하였고 날이 밝자 주지가 일어나 꿈에서 들은 대로 산에서부터 절까지 물 웅덩이 수를 세어보았더니 꼭 100개였으므로 절 이름을 백담사(百潭寺)라고 지었다 한다.
백담사는 내설악의 아주 깊은 오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찾기 힘든 수행처였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는 1905년 이곳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조선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친하였으며, 일제의 민족 침달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가로서도 이름을 높였다.
이에 백담사에가면 만해기념관이 있다.
현재 백담사에는 극락보전, 나한전, 산령각, 법화실, 화엄실등 기존 건물 외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사상과 불교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만해기념관과 만해 교육관 외에도 일주문, 금강문, 불이문, 만복전, 요사채, 만해당, 농암실, 적선당 등 24개의 건물들이 있어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로 인정받고 있다.
운이 좋게도 백담사를 갔을때 마침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스님께서 백담사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시고 계셨는데
40여분을 따라다니면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절에 대한 또다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다음에 템플스테이에 꼭 오라고 스님이 그러셨는데 안오면 머리깍으라고 하셨는데 언제 갈 수 있을려나...
백담사에 간날
비가와서 흙으로 된 바닥이 질척거려서 다니기가 좀 불편하기도 했고,
혼자 가서 둘러보고 나온다면 볼것없다 실망할수도 있을법한 절이다.
그저 예전 대통령을 지냈던 전 뭐시기가 와 있었다의 정보만 가지고 왔다면...
백담사 극락보전 안에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는 이 목불좌상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조선 영조 24년(1748)에 만들어졌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며 가는 눈, 작은 입, 오똑한 코로 인해 독특한 인상을 나타낸다. 넓은 가슴과 둥근 어깨가 당당한 인상을 주는 상체는 다소 평판적이며, 하체는 넓고 큼직하여 상체와 조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이 당시의 나무로 만든 불상 가운데 대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꺼운 편으로 옷주름이 곡선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가슴에는 U자형의 중복된 주름을 보이는데 이러한 주름들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 이어진 것이다.
18세기 전반의 불상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목불상은 불상의 조성연대를 알려주는 발원문(發願文)과 많은 복장물이 있어 특히 주목된다.
극락보전앞에 3층석탑이 있었는데 석탑에 대한 설명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