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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0:1~18. 우리(sheep pen)와 우리 안에 있는 것. 2014.3.2
중,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모임에서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 있는데 동아리라고 부르는 서클, 울타리, 공동체가 있고, 두레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동아리, 두레, 써클, 우리, 공동체, 울타리 거의 같은 표현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은 학교 내에서 만이 아니라, 지역마다, 년령마다, 취미마다, 목적마다 다 다르지만 같은 의미의 동아리 써클, 두레, 공동체가 있습니다. 연극, 문화, 정치, 사회 어디를 가도 동아리가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교회안의 여성회, 전도회, 청년회, 이런 기관들이 있습니다. 일본의 선교사 모임도 재일 한국 선교사 협의회라는 동아리가 있습니다. 찬양 선교단이 있는데, 그 것도 지역마다 있습니다. 식문화에도 있습니다. 일본에 카코이 돈부리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카코이돈부리는 매일 매일 신선한 재료로 직접 조리하는 최고의 일본 가정식 덮밥입니다. 카코이돈부리란, 가코이담 울타리라는 뜻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행복과 정성을 담아 가정식 덮밥을 만들고자 하는 소박한 뜻이 담긴 음식점입니다. 언제나 정성 이 담긴 한 그릇의 음식 속에 행복한 이야기와 따뜻함을 담아 드리는 곳, 울타리입니다. 며칠 전에 히메지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목사, 신부 모임이 3월 20일에 있다고 일본인 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동아리에 가입하려면 면접이나 간단한 테스팅 정도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울타리가 허니까 이웃집 개가 드나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조건이 맞지 않으면 동아리의 목적도 희미해지고, 서로의 결속력도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어디에 있든지 소속감이 있고, 사회성이 있습니다. 좀 색다르고 자유로운 곳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독처하는 것이 안쓰럽게 보여서 하와를 아담에게 허락하시잖아요? 최초의 공간문화를 만들어 주잖아요? 가정이라는 울타리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문화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나름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어찌 되었든지 울타리 안에서 활동을 하고 재미를 느끼고, 행복을 만들고, 그러면서 삶의 한 부분 혹은 아니 전 인생을 다 쏟습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가 인생을 바꿔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울타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이 있고, 교회나 직장, 사업장이 있고, 우리가 사도 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라고 부르는 전 우주적인 교회도 하나의 예배 공동체로서 울타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공동체를 일컬어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바로‘우리’입니다. 인칭대명사 ‘우리’가 아니라 울타리로 둘러져 있는, 그래서 그 안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우리’입니다. 영어성경 NIV 버전엔 그 우리를 ‘sheep pen’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저와 여러분들을 양으로 비유하면서 설정해 놓은 울타리, 우리입니다. 그 우리가 울타리이고 동아리이고 공동체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몸과 피로 대신하여 세운 울타리, 우리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 울타리, 공동체, 두레, 동아리 안에 무엇이 있으며 왜 필요합니까?
1. 우리(sheep pen) 안에는 양과 목자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밖에도 목자가 있고 목자가 기다리는 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sheep pen)라는 표현에는 주님이 설정한 전제가 2가지가 있습니다. 유의 깊게 살펴볼 말씀,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개 있어 우리 안으로 인도할 터이니”이란 말씀인데, 이것을 뒤집어 해석하면 예수님께서 준비하시고 좋은 목자로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풍성한 삶이란‘우리’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밖에서는 선한 목자가 베푸시는 구원과 풍성한 삶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밖에 있는 양을 우리 안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우리에는 문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예수님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1차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그 분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풍성한 삶은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과해서 우리 안에 있어야 주어집니다. 구원과 축복이 우리 안에 있다는 신학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루어야 할 풍성함과 축복도 주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입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지상에서의 일을 위임하신 수많은 사역자들까지 확대시키면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 우리는 목자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란 울타리로 둘러져 있으면 다 우리냐? 그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 하나하나를 어떤 우리에 소속 시킬 때 반드시 좋은 목자를 함께 두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의,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는‘우리’라는 말은 헬라어로‘아우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air’, 공기입니다. air 없이 사람이 살수 없습니다. 아우레는 지붕이 없고 천정도 없는 열린 공간이란 뜻인데, 지붕이 없고, 기둥이 없고 천정이 없는 열린 공간, 아우레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아우레는 양들에게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기둥이 있고 문짝이 있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무슨 벽이나 지붕이 갖추어진 그런 외양간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때로 양과 염소들을 이끌고 멀리까지 갑니다. 어느 한 자리에서 웬만큼 풀을 뜯기면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서 좋은 목초지를 찾아 계속 떠돌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둥을 박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이어서 비바람 막는 우리를 만들 수 있겠어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들 중에서 가시가 돋아 있는 덤불들을 모으고 그것들로 둥글게 울타리를 치고, 문도 만드는데 문은 별 것 아닙니다. 그냥 양 한 마리 들어갈 만한 좁은 틈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덩어리의 덤불을 두어서 염불덩어리를 빼내면 문이 열리고, 그냥 두면 닫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물의 개념도 아니고, 장소의 개념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곳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 우리는 안전한 곳입니다. 반드시 우리의 삶과 생명이 보장 받을 수 있는 곳이고 보호받고 공급받고 행복하게 쉴 수 있는 공간, 아우레입니다. 그러면 울타리, 아우레가 이렇게 안전하고 영원하고 유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거기에는 좋은 목자, 선한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레, 에어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건물은 아니지요? Home 은 house 하고 다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정의 소중함을 안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나 많은 힘을 쏟고, 눈에 보이는 것을 너무나 소중히 여깁니다. 가정, 홈은 어떤 곳이지요? 내가 열심히 일해서 연소득을 높이고 집을 늘려 가는 것, 이 본질이 아닙니다. 가정은 목자 같은 내 남편, 내 아내가 있는 곳, 목자인 아빠와 엄마가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목자가 대궐 같은 집에 있으면 그곳이 나의 우리고, 저 들판에 버려져서 가시덤불로 둘려 쳐져 있어도 그곳이 나의 우리입니다. 여러분, 우리, 울타리가 잘못 되면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우리가 잘못되면 양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날 문제들이 왜 발생이 됩니까? 문제된 것을 분석해보면 적어도 90%는 사회의 문제이고 부모의 문제입니다. 울타리,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요즘은우리, 울타리 안에서는 그 구성원들에게 선한목자, 좋은 목자로서 많은 대화를 하며 인정해 주는 연습을 합니다. 요즈음 양들에게는 인정과 칭찬이 필요합니다. 비록 내 아이가 공부는 못하더라도 “넌 정말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참 잘 그린다.” 그 아이의 장점을 칭찬하고 인정해주는 일 “엄마는 힘들 때마다 우리 딸, 아들 생각하면 힘이 나! 딸, 아들 사랑해” 그 존재를 인정해 주고 사랑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 목자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울타리, 우리의 은혜는 바로 선한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의 삶에 복 주시기 위해 보내 주신 내 아내, 내 남편, 내 부모, 섬기고 있는 사역자들, 바로 그들이 있는 곳이 하나님이 나에게 복 주신 울타리, 우리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저와 여러분이 어떤 우리에 있든지 간에 - 그게 가정이 됐든 직장과 사업장이 됐든 교회가 됐든 간에- 하나님은 나를 위한 좋은 목자를 거기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나는 양이기도 하지만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보호받아야 할 양으로 어떤 우리에 들어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우리에 들어 있는 양을 보호할 책임도 있습니다. 나를 위해 마련하신 나의 우리, 울타리에 좋은 목자, 보호받아야 될 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로 우리 안에는 목자가 공급하는 매일의 꼴이 있습니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면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우리안에 있으면 꼴을 얻습니다. 아멘! 시편 23편을 보면 양과 목자에 대해 얽힌 말씀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 울타리는 어떻게 칩니까? 가시덤불 같은 것으로 울타리를 둥글게 쳐 놓으면 우리가 되고, 문은 양 한 마리 겨우 드나들 만한 틈을 두고 그 틈은 가시덤불 덩어리로 막거나 열어서 문이 되도록 합니다. 그런데 실제 목자들 중에는 문을 가시덤불로 채우지 않고 자기 몸을 뉘여서 문 역할을 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이 자기를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에 들 수 없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목자로서 자기 양들을 자기가 직접 확인하고, 양들도 목자에게 눈을 맞추고 우리 안에 들어가는데, 9절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그러면 구원을 얻고,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꼴을 얻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 희생의 도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은 우리 모두를 하나하나 확인하시고 드나들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풍성한 꼴을 주십니다. 각기 자기의 이름, 각자의 이름을 불러서 모아들이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먼저 양의 문 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가는 것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나의 삶과 연결시키면 가정이라는 우리, 직장, 교회 또는 하나님이 거룩하게 여기시는 어떤 공동체, 우리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큰 복이고 은혜이고 감사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역지사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본래 역지사지라는 말은 상대방의 처지·입장·관점·시각에서 생각해 본다는 뜻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역지사지'는 대부분 나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너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볼게'로서의 역지사지가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봐'의 역지사지입니다. 혹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하기보다는 관계에 있어서 보다 나은 위치를 선점하기 위하여 사용을 하는데 이는 역지사지의 전용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결국 사회는 '관계'의 총집합입니다. 그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갈등과 반목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만 관건은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발생한 문제에 대한 해결입니다. 그 해결을 어디서 합니까? 울타리, 우리 안에서 해야지요.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역지사지'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결국 '역지사지'에 실패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꿔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서 실패합니다. 내가 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열어서 타인을 받아들이거나 내가 나를 버리고 타인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주님의 울타리, 주님이 설정하여 놓으신 우리의 역지사지입니다.
또 울타리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안에는 좋은 목자가 있고 그 목자가 꼴을 공급해 줍니다. 그런데 꼴을 공급하여 주는 것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서 공급되는 꼴은 메뉴가 어떻던가요? 매일 달라지나요? 목자가 양과 염소를 데리고 매일 푸른 초장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그 양들이 먹는 메뉴가 풀 말고 다른 것이 있던가요? 똑같습니다. 매일 똑 같은 풀을 뜯습니다. 그래도 젖이 나오고 털이 자라고 살이 찝니다. 매일 달라지는 게 아니라 매일 똑 같은 꼴이 공급됩니다. 여러분! 정말 은혜롭고 감사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일 반복되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내일이 또 오늘처럼 반복된다는 것, 이 것이 복일까요? 아닐까요? 여러분, 우리가 감사치 못하는 이유가 뭐지요? 그 일상이 너무나 반복되기 때문에 그 귀함을 알지 못합니다. 반복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똑같은 꼴, 똑같은 맛나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꼴 때문에 처음에는 꿀맛, 얼마 지나서는 유과 맛, 그리고 맨 나중에는 박한맛, 물이 없으면 안 넘어가는 그런 꼴로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분, 먹는 꼴이 매일 달라진다면 정말 좋은 일일까요? 매일 밥과 김치, 국, 이런 걸 먹고 사는데 그게 싫다고 매일 메뉴를 바꿀 생각을 한 번 해 보십시요. 과연 좋기만 할까요? 지금도 매 끼마다 힘든데 아마 주부들은 몸살을 앓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자로 모시는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 또는 아빠 엄마, 직장상사, 목회자 등등 여러 모양이 있지요. 그런데 그 목자들이 주는 꼴이 매일 다르다고 생각해 보세요. 좋기만 할까요? 좋은 목자는 매일매일 감격스런 감동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일 변함없이 똑 같은 꼴을 먹이는 것이 좋은 목자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은 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똑 같은 꼴을 먹이는 것에 대해서 불평이 없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반복되고 같은 꼴로 행복을 찾고 은혜를 찾고,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 우리안에 있는 두 번째 진정한 의미입니다. 여러분! 똑 같은 일상이 지루하고 권태로우십니까? 그래서 사는 재미도 없고 짜증이 나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생각을 주님의 말씀에 맞추시기 바랍니다. 일상이 짜증스러우면 큰일 납니다. 우리가‘일상생활’이라는 말을 할 때 ‘일상(日常)‘은 매일이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일상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비상(非常)’입니다. 일상생활이 싫으신 분들은 비상생활을 하셔야 하는데 좋으시겠어요? 불 났을 때“비상!“ 지진이 나고, 쯔나미 날 때의 비상입니다. 그 비상이면 지루하지 않고 권태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이 아니면 언제든지 불안합니다. 여러분! 우리(sheep pen) 안에만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매일 똑 같은 꼴이 공급됩니다!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 부모, 아이들, 목회자가 매일 똑같습니다. 매일 같은 꼴이 공급되고, 일상이 반복되고, 목자들의 매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복입니다. 일상에 매일의 꼴로 입히시고 먹이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 안에는 주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목자는 늘 우리 안의 양을 지켜줍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지켜줍니다. 11~12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선한 목자로써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셔야 되는 가장 큰 사명으로써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선한 목자의 반대되는 개념이 여럿 나오는데, 도둑, 이리, 절도, 삯꾼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허락하신 우리를 허는 자들입니다. 아가서에도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가 나오는데, 우리들의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을 합니다. 그런데 그 모두는 우리 안에서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쳐들어오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이 돌연변이로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쳐들어 온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요, 우리의 행복을 자꾸만 우리 밖에서 찾도록 자극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둑질이고 멸망이고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십시요.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들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 위해 우리를 높여 줍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 안에 양, 저와 여러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키는 것은 늘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목자는 우리를 항상 지켜 줍니다. 그런 면에서 이 땅의 우리가 있는 남편도 아내도 엄마 아빠도, 인도자도 목사도 상사도 목자입니다. 그 목자가 울타리,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지켜야합니다. 이리, 도둑, 절도로부터 지켜내야 합니다.
그런데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달아나 버린대요. 왜냐하면 양이 제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목자는 선한 목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십자가로 사탄의 세력, 죄와 허물을 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르신 그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 한 번으로 완전한 제사가 됐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십자가는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에 대해 사명을 갖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가 순교해야 될 때가 오면 순교해야겠지요? 하지만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장에서, 양으로서 목자로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파리 광경을 다룬 다큐멘타리가 많지요?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장면 중에 의외로 기린이라는 동물은 약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은 동물입니다. 기린은 일부다처제이고 다닐 때도 항상 가족단위로 다닙니다. 그래서 맨 앞에 아빠 기린이 가고 그 뒤에 아기 기린 몇 마리가 가고 맨 뒤에 엄마 기린이 갑니다. 그 뒤에 하이에나 몇 놈이 따르고 있었는데요. 기회만 있으면 잡아먹을 심산이었는지 계속 기린을 따라 붙습니다. 그런데 맨 뒤에 엄마 기린이 알아챘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뒤돌아봅니다. 하이에나가 더 이상 접근을 못합니다. 그리고 아기 기린이 웬만큼 간 것을 보고엄마 기린도 다시 따라가고, 그러다가 다시 한 번 하이에나 쪽을 뒤돌아보고… 엄마 기린이 서 있는 이상은 더 이상 하이에나도 못 쫓아오더라구요. 그런데 아기 기린은 하이에나를 봤을까요? 못 봤을까요? 못 봤습니다. 아무리 야생의 천국이고 동물 간이라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혈투는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별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중에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혈투를 벌이는 내용이 없습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내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또는 인도자, 목사 상사가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이리들은 못 쳐들어옵니다. 나를 위해 혈투를 벌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만 있어도, 우리 울타리에만 있어도 지켜집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목자가 있어야 우리가 정말 안전하게 되고 회복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목자들이 별로 하는 일 없는 것 같아도 늘 늠름하게 있어 주는 것, 그것입니다. 여러분, 있는 존재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가끔 나를 지켜주고 나를 축복하는 좋은 목자들이 나를 위해 혈투를 벌이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감사를 못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양을 위해 십자가 외에 다른 혈투를 벌이신 것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존재만으로도 이리들을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존재 그 자체로만도 우리들의 우리는 지켜집니다. 물론 혈투를 벌여야 될 때는 당연히 그래야 되겠지만 존재외에 더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만족스러워 하고 불평을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양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실 지금 나의 나 된 것만도 목자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서로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를 잘 알면 알수록 좋은 걸 알게 되나요, 나쁜 걸 알게 되나요? 나쁜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잘 아는 사람일수록 사랑하기 어렵고 잘 아는 사람일수록 존경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일수록 존경하기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모두가 원래 죄인이고 악한 속성을 타고 나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잘 아는 것 때문에, 자세히 아는 것 때문에, 더욱 사랑하고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내가 아는 것만큼 사실은 나도 더 많이 알려졌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인정할 때 거기서부터 진정한 우리의 삶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목자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가 지켜진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주는 나의목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고 우리들에게도 선한 목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재림하실 텐데 그때 어린 양으로 재림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은 뒷모습은 목자요 , 앞모습은 양이 되어야 합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양의 시대는 선한 목자에 의해서 열리고 이루어집니다. 다윗 왕이 고난을 받고, 왕권은 물론이고 생명까지도 위협을 당한 환경을 시편 31편1절부터 13절에서 말씀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15절에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시대가 주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러분의 시대가 열립니까? 다윗은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습니다. 생명의 위기를 만날 때에도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소유자,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관하십니다. 다윗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일생과 모든 생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다윗은 여러 가지 핍박과 조롱과 비방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도 19절에 보면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라고 합니다. 여기서 쌓아두신 은혜는 두 가지는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때에 축복하심이고, 나에게 주시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한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하루하루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우리의 시대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뜻밖의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염려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우리를 지키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우리를 복된 곳으로 만드는 좋은 양, 좋은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 까지 소망 중에 성실하게 신앙을 지키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으로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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