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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궁 경복궁 서쪽 인왕산 자락에 있는 마을 서촌(西村)이다.
북악산 자락의 장동(壯洞)과 함께 성리학을 조선성리학으로 이끌었던
'율곡학파의 텃밭'으로 꼽히는 유서깊은 선비마을 서촌이다.
시문(詩文)과 그림에 우리의 진경(眞景)을 독특하게 그려낸
우계 성흔 구봉 송익필 송강 정철 백사 이항복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등
조선성리학의 거목들이 살면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곳이다.
백사 이항복의 집 필운대(弼雲臺)가 있었던 곳이다.
미국인 선교사 캠벨여사가 110여년 전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세운
배화학당 배화여자대학이 지금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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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명신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살던 필운대(弼雲臺)이다.'필운'은 그의 호이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 있는 큰 암벽 주위가 필운대다.
고려말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1499∼1564)의 아들이다.
그는 오성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 흔히 '오성대감'이라 불렀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1561∼1613)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항복은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의 딸과 결혼했다.
권율 장군과의 감나무 일화는 유명하다.그의 인연으로 그의 사위가 된다.
이항복의 집 마당의 감나무가 이웃해 있던 권율 장군의 마당으로 가지를 뻗자
세도 등등했던 그 집 하인들이 허락도 없이 감을 따 갔다.
이에 이항복이 권율이 기거하는 방문에 창호지를 뚫고
‘이 팔이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장군은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라고 답했다.
다시 이항복이 ‘저 마당의 감나무는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장군은 ‘그것도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라며 소년의 재치에 탄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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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은 율곡이 성균관에서 길러낸 인물이다.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이라며
선조에게 추천한 이항복이다.
그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선조를 모시며 각종 외교를 성사시켜
전란을 극복하는데 탁월한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를 모시고 호종길에 나선 이항복은 37세로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였다.
원병을 위해 명나라로 간 이덕형의 외교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마침내 4만의 원군을 끌고 조선으로 왔을 때
이항복은 이들을 맞이하는 접빈사가 되었다.
먼 조선까지 행군을 하느라 피곤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그의 군사들은
적당히 봐서 싸움을 하는 척만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했지 크게 싸울 의사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읽은 이항복은 일부러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눈에 대고 문질러
눈물을 흘리며 조선의 다급함을 호소하여 명군을 감동시켰다.
이항복은 10여 년 전에 ‘섧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좋다’고
화두처럼 율곡 이이가 남겼던 말의 의미를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이다.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벌였던 인물이다.
선조가 왜군을 쫓겨 신의주에서 명나라로 가려할 때
압록강변에서 선조의 못자락을 붙들고 만류한 도승지 백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난리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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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은 호걸스럽고 시원한 성품에 넓은 아량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젊어서는 이덕형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
문학으로 두 분이 함께 진출하여 현달했다.
정철은 항상 상서로운 기린과 봉과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광해군 일기에 나타난 백사 이항복이다.
이항복은 말년에 크나큰 어려움을 맞이하였다.
그는 1617년 이이첨등 광해군 주변인물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반대했다.
이복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던 광해군에 맞섰던 그였다.
이항복은 결국 1618년 삭탈관직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당시 63세의 노 정승이던 백사 이항복이귀양길에 오른 당시 철령을 넘으며
읊은 시는 지금까지도 신하의 충정을 담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철령 높은 고개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비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이항복은 귀양지 함경도 북청에서 5개월 만에 병사한다.
이항복은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평생을 학문에 힘쓰고 왜란 시에는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임금의 신임을 받았고,
전란 후에도 수습에 힘썼던 그의 공이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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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 왼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정자(正字)가 크게 새겨져 있다.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항복의 9대손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조상의 집을 찾아와
암벽에 '弼雲臺'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한양 경치가 가장 잘 보이는 필운대 근처에는 살구나무 등 여러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봄이면 꽃구경(賞花)을 위해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필운대는 한양의 도성 사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명당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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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 가운데 새겨진 시구는 이항복의 9대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
이유원의 장기인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현대적인 의미로 풀이한 그의 글이다.
" 아조구거후예심 (我祖舊居後裔尋 )
우리 할아버지 옛날 살던 집을 후손이 찾았는 데
창송석벽백운심 (蒼松石壁白雲深)
푸른 돌벽에는 흰 구름이 깊이 잠겼도다
유풍부진백년구 (遺風不盡百年久)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했으니
부로의관고역금 (父老衣冠古亦今)
부로의 의복과 모자가 옛날과 같다.
계유월성이유원제백사선생필운대
(癸酉月城 李裕元 題白沙先生弼雲臺)"
이유원은 고종때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항복으로부터 이유원까지 8명의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의 똑똑한 아들 6명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은 유명하다.
이들 6형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았기자 만주벌판으로 망명,독립운동을 한다.
우당 이회영은 비밀 독립 결사인 신민회의 창설멤버이자
무장독립운동의 기반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고
이상설과 함게 헤이그 밀사파견과 고종 망명계획을 주도했다.
유명한 신채호,김창숙과 함께 조선의열단과 다물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여러 사상을 검토하다가 아나키스트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1910년 12월 6형제를 거느리고 엄동설한에 만주로 떠났다.
이회영 형제는 독립운동을 위해 형제들의 전재산을 급매로 팔아
약 40만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하였다. 당시 쌀 한섬이 3원이었다.
이들 6형제에 딸린 가솔이 60여명이나 됐다고 한다.
이들 형제 가운데 시영은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한 인물로
만주에서 독립군양성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운영하였으며
해방 후 부통령을 지냈다.
다른 형제들도 만주 베이징 텐진 상하이 등을 오가며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이시영을 제외한 5명의 형제들은 모두 중국에서 죽었다.
우당은 1932년에 일제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여 만주의 대련감옥에서
고문사를 하게 된다.그의 자손으로 이종찬과 이종걸이 있다.
이종찬은 민정당 국회의원과 국정원장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학이고
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인 조계진이다.
이종걸은 그의사촌으로 민주당의 3선 국회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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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원의 싯귀 옆 바위에는 가객 박효관(朴孝寬·1800∼1881무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옆에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를 비롯한
10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이때 이 공사를 맡거나 감독한 인사들의 명단이다.
박효관은 필운대에서 시·술·노래·거문고·바둑을 즐기면서 살다간 당대의 명가객으로
분재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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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서쪽문 영추문(迎秋門)이다.
이 영추문 근처 마을은 궁궐에서 가깝고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영조가 가장 아끼던 장녀 화순옹주가 시집 가서
살던 궁가(宮家) ‘월성위궁’이 있었다.
이 궁가는 조선성리학의 맥을 이어 조선특유의 필체 추사체를
만들어낸 추사 김정희가 자라던 서촌의 또하나의 명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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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7대조 황해 감사 김홍욱은 효종에게 당시 금기로 여겼던
소현세자 빈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는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올리다 참형을 당했다.
이후 김홍욱의 집안은 산림(山林)사이에서 최고의 명문가로 떠올랐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듣고 가장 크게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를 풀어야 재변이 그칠 것”
“역적 조(趙:후궁 조씨)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김자점은 밖에서 조작해 서로 모여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강빈이) 사사(賜死)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온 가문의 노소가
남김없이 주륙당했으니 아, 참혹합니다”
“설령 그 어미가 죄가 있어도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은 원래 몰랐을 것인데,
하물며 그 어미의 죄가 그리 명백하지 않은데도 갑자기 유배시켜 끝내 애매하게 죽여
영원히 구천(九泉)에서 한을 품도록 만들었다”
김홍욱은 이 상소에서 "가믐의 원인은 허물이 없는 강빈을 죽인데 있다"며
금기로 여겼던 강빈사건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효종으로서는 이 사건이 더이상 확대되는 것을 차단해야 했다.
서둘러 엄명을 내렸다.
"강빈사건은 선대께오서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는 유언이 계셨다.
그런데도 이를 논란하는 신료가 있다니 이는 불충 중의 불충이다.
금부에 알려 압송해오라"
김홍욱은 언관으로 있으면서 효종에 대한 비판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홍욱은 바로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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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통의동 35-5번지 추사 김정희 생가터이다.
'통의동 백송'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이 백송은 높이 16m, 흉고둘레 5m에 달할 정도로 크고 또 수형이 아름다워
1962년 천연기념물 43호로 지정됐었다.
1990년 7월 태풍으로 넘어져 고사돼 그루터기만 남은 상태다.
조선후기 문신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며 ‘월성위’에 올랐다.
화순옹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영조는 경복궁 영추문 근처 창의궁을
월성위 김한신에게 하사하고 그 궁가를 ‘월성위궁’이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추사는 어린 시절을 증조부의 집인 월성위궁에서 보냈다.
이때는 추사가 정신적으로 왕성하게 성숙할 바탕을 마련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뿐만아니라 그에게는 감성적으로도 매우 예민하던 시기였다.
당시 그의 눈에 들어왔던 주변 사물은 이후 그의 예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당대 최고의 실학자인 박제가를 만나 학문 연구의 기초를 익힌 것도 이 시기였고,
중국을 통해 수입된 당대의 다양한 문물을 접하며
감성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는 자양분을 닦은 것도 이 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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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지극히 사랑하는 장녀 화순옹주를
경주 김씨인 계비 정순왕후의 조카 김한신에게 시집 보낸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된 것이다.
옹주가 태어난 잠저인 창의궁를 월성위 김한신에게 하사하고
김한신의 고향인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수천 평의 땅도 하사한다.
그 땅에 충청도 53개 군현이 한 칸씩 집을 지어주도록 한다.
김한신이 39세에 자식도 없이 요절한다.
열 받은 화순옹주는 식음을 슬퍼하며 전폐하였다.
영조가 이를 만류하였으나 끝내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조선왕조 5백년 왕실에서 배출된 최초,유일의 열녀 화순옹주이다.
영조는 피를 토하는 애도문을 내린다.
‘정성이 부족해 되돌릴 수 없으나 네가 따라간 그 정절을 아름답게 여기노라.’
그들 부부에게 자식이 없으니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들였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양아들 김이주를 편애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른다.
김이주의 막내아들인 김노경은 기계 유씨와 결혼해 월성위궁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한양에 천연두가 창궐해 수만 명 죽어나간다.
임신 중인 기계 유씨를 고향인 예산군으로 내려가 몸을 풀게 한다.
1786년 장남 추사 김정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