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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충주3대철불1) 충주 단호사(丹湖寺) 철불여래좌상(鐵佛如來坐像)
현림 추천 0 조회 40 18.04.23 06: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충주3대철불1) 충주 단호사(丹湖寺) 철불여래좌상(鐵佛如來坐像)


우리나라에는 많은 불상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철불의 수는 적은 편이다.

그런데 충주 지역에 보물급으로 지정된 3기의 철불이 나란히 있어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충주 3대철불좌상으로 일컬어지는 철불상으로 엄정면의 백운암,

단월동 단호사와 지현동의 대원사에 모셔져 있다.

대개 철불상은 산 중턱 쭘에 모셔지는 데 백운암을 제외하고

두 사찰 모두 충주 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불상(佛像, Buddhar?pa)이라 함은 부처와 보살의 형상(形像)을 가리키는 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붓다루파(Buddhar?pa)라고 한다.

이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 붓다(Buddha 부처)와 형상을 뜻하는 루파(R?pa)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깨달은 자의 형상" 또는 "부처의 형상"이다.

원래는 부처의 형상, 즉 부처상만을 뜻하나 지금은 불상이라고 하면 보살의 형상도 포함한다.

한편, 보살의 형상은 보살상(菩薩像)이라고 하여 부처상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불상은 사용된 재질에 따라 석불상(石佛像) · 목불상(木佛像) · 주상(鑄像) · 화상(畵像) ·

 토상(土像) 등으로 나뉜다. 취하고 있는 자세에 따라

입상(立像) · 반가상(半跏像) · 좌상(坐像) · 와상(臥像)으로 나뉜다.

충주3대철불은 모두 좌상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 철불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철불(鐵佛)은 신라하대부터 고려초기에 이르는 이른바 나말려초기에만 유행했다.

 보통 철불은 주조과정이 끝나면, 상 표면에 호분을 입히고 채색을 하거나,

옻칠을 입히고 그 위에 개금(改金)을 하므로, 상 표면의 도드라진 이음매가 감춰져 완성된 후에는

원재료(原材料)가 철()인지 동()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중대 신라까지 금동과 소조, 목조, 석조불상이 주류를 이뤘던 것에 비해,

하대신라 9세기에 들어서 철불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 사회의 경제적인 측면과도 관련이 있다.

 철은 예전부터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던 재료로 사용되었으므로

호족이나 지방민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금속이었으며,

 신라말부터 철광채굴이 증가하여 철의 공급이 늘어났던 것도

 철불이 유행했던 이유의 하나로 작용했던 듯하다.

(경내 좌측에 조성된 미륵불상)   

철불이 집중적으로 造成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국시대 신라말로,

왕권의 약화로 중앙집권 세력이 약해지고 지방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現世求福을 기원하는 현실적인 조형의 철불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불은

충청남도 서산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철제여래좌상이다.

이 철불의 제작 시기는 8~10세기경으로 추측되며,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철불은 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우리나라의 철불은 중국과 일본보다 제작 시기가 빠를 뿐만 아니라 규모나 주조 기술도 뛰어나다.

한국과 일본에 현존하는 철불은 대략 신라철불 17점과 고려철불 55점에 이른다.

 충주3대 철불좌상은 모두 고려시대의 작품에 속한다.


(소나무 뒤에 삼층석탑이 있고 그 뒤에 대웅전이 있고 우측에 약사전이 있다.)

  

신라말~고려초에 제작된 철불은 이전 시대의 金銅佛에 비해

세부표현 기법이 섬세하지 못해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를 하지 못했다.

 불상 크기의 거대화에 따라 옷주름이 단순해지고 세부 표현력이 낮아져

 결과적으로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조형미를 발전시켜서 어느 시대보다도 친근하고 인간미가 돋보이는

가장 토속적인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동안 근엄하기만 했던 정형화된 부처님의 얼굴이

이제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며

누구나 해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친근한 이웃의 얼굴로 바뀐 것이다.




 

@보물제512호로 단호사 대웅전에 모셔진 이 철불좌상은 원래 단호사 노천에 방치되었던 것이었지만,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한 후 이안(移安)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단호사에 대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하여 약사(藥寺)라 하였고, 1954년에 단호사(丹湖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인근 대원사(大圓寺)에 봉안되어 있는

 보물 제98호 충주 철조여래좌상(忠州鐵造如來坐像)과 약간의 크기 차이만 있을 뿐,

형식이나 양식, 조각기법, 그리고 착의(着衣) 등에서 거의 일치하고 있어

동일한 작가 또는 공방(工房)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3대 철불좌상의 하나로 봉안되어 있는 단호사는 충주시 단월동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단호사의 전각들은 철불 좌상을 모신 사찰이라서 그런지 단출하다.

대웅전과 약사전 및 요사채가 전부다. 대웅전 앞에는 600년 생의 소나무가 멋진 경관을 자아내고 있으며

그 아래에 고려시대 작품인 3층 석탑(높이 2.14M)이 자리하고 있다.

 철불 좌상은 불상 전체에 짙은 황금색의 칠을 하여 불상 자체가 무엇으로 제작되었는지 모를 정도였으나

불상의 양 손목 부분의 다시 맞춘 흔적을 긁어 보니

 쇠 가루가 묻어 나왔다하여 철조(鐵造) 불상임이 세상에 밝혀졌다.

 

단호사(丹湖寺) 대웅전의 주존불(主尊佛)로 봉안되어있는 철불좌상은

 현 장소가 원 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성양식(造成樣式)이나 조각수법(彫刻手法)으로 보아

고려시대인 11세기경의 철불(鐵佛)로 추정된다.

불상의 크기는 좌고(坐高)1.3m, 두고(頭高)0.5m, 견폭(肩幅)0.6m이다.

전체 높이 130, 무릎 폭 97.5이다.

 

이는 같은 시기에 같은 양식을 갖춘 2구의 철불(백운암, 대원사)이 충주 지방에 전래한다는 사실과

이 지역의 많은 불교 유적지로 볼 때 충주지방의 불교 융성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불상이 고려시대 철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러한 양식은 곧 고려 시대에 충주지방 불사의 특징 및 불상제작 양식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철불좌상이 봉안된 단호사 대웅전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은 머리에 나발(螺髮)이 촘촘하며,

육계(肉髻)에는 정상과 중앙에 커다란 반달모양의 계주(髻珠)가 있으나, 그 경계가 확실치는 않다.

얼굴은 긴 타원형이며, 좁은 이마의 중앙에는 작은 구슬모양의 백호(白毫)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이목구비는 개성적으로 표현되었다. , 물결치듯 내려보는 버들잎 모양의 눈매,

돌출한 광대뼈, 눈썹에서 날카롭게 이어진 삼각형의 콧날,

앙다문 입술과 움푹 파낸 입 주변,

 힘을 주어 당긴 턱 등에서 풍기는 인상은 과장되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귓불을 뚫은 양 귀는 목 부분까지 길게 늘어졌으며,

링을 감은 듯 목에는 삼도가 굵게 돌려져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 착의법이며, 불신에 표현된 옷주름은 철저히 좌우 대칭을 이룬다.

 양어깨에는 평판적인 층단 주름이 사용되었고,

팔뚝에는 곡률의 변화가 있는 융기선들로, 복부에는 날 선 요철 주름으로,

넓은 다리에는 단순한 수평의 융기선 주름을 반복하여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양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다소 두꺼운 옷깃 사이로

리본 매듭으로 묶어 멋을 낸 내의(內衣)가 표현되었다.


 

다리 사이로는 석굴암 본존불상 이래 고려시대 불상까지 흔히 볼 수 있는 부채꼴 주름을 표현하였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것과 비교해 너무 형식적이고 도식화되어 시대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양 무릎에는 손가락으로 쿡 찍어 누른 듯한 3줄의 수직단선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모양의 주름은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이나 불국사 금동불상 등

통일신라 9세기 중·후반부터 등장하는 주름으로써,

이 불상도 이러한 9세기 불상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은 얼굴 부분의 세부 표현기법,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의 계주,

무릎 앞에 내려오는 부채꼴 주름 등에서 고려 불상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좁고 둥근 어깨, 볼륨감이 사라진 평평한 가슴,

상체가 전체적으로 각진 모습, 과장된 얼굴표현에서 오는 부자연스러움 등에서

형식화와 도식화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바로 인근 대원사에 소장되어 있는

충주 철조여래좌상과 같은 작가나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보이므로

불상 유파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지리적으로 인접한 원주지역에서

 출토된 철불과도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어

 당시 철불 제작의 양상과 이 시기 이들이 추구했던 미의식을 파악하는 데에 좋은 자료이다.


본존불 옆 불단에 아미타내영도가 걸려있다.


본존불 우측에 봉안된 칠성탱. 위는 예적금강, 아래는 동진보살이 부각되어 있다.


예적금강의 형상이 조금 특히하여 담아 보았다.








약사전


약사전에는 아미타를 본존으로, 협시불로 지장보살과 약사여래를 봉안했다.

단호사는 약사전에 일반 사찰의 삼성각에 모시는 산신, 독성존자를 함께 모셨다.




약사전에 모신 산신


독성


약사전에 모신 칠성탱



단호사에 들어서면 한 폭의 소나무가 시선을 압도하는데 약 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소나무는 마치 용트림을 하는 듯 장엄한 기상을 뿜어내고 있다.  

 이 소나무는 철불과 더불어 단호사의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초기 강원도에서 약방을 경영하던 문씨라는 사람이

 많은 재산을 모으고도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중 한 노인으로부터

충주 단월 지방의 단호사에서 불공을 드리면 득남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문씨는 곧 강원도에서 단신으로 이곳에 와 불당을 짓고 지성으로 소나무를 가꾸던 어느 날

잠자리에서 고향 집 마당에다 한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안방에 부처님을 모셔 놓은 꿈을 꾸게 됐다.

더욱 기이한 것은 부인의 꿈에는 단월 단호사 법당이 자기 집 안방으로 바뀌어 보였다는 것.

그 부인이 생각하기를 아마도 같이 살라는 암시인가 보다하고

 강원도에서 모두 정리해 가지고 법당 옆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그

 후 태기가 있어 득남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불도들이 찾아와 소원 성취했다고 전해진다.

이 소나무 아래 삼층석탑이 있다.





<단호사 3층석탑>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 높이는 2.14m이며, 본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대웅전 앞에 세워진 이 탑은 3층까지의 탑신과

옥개석은 완전하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까지 잘 남아 있다.

충주지방의 탑들이 대개 산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탑은 평지에 세워졌고 그 본래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탑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단층기단의 면석은 높이 43인데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표현되었고,

갑석(甲石)은 높이 16로 윗면에 1단의 탑신 괴임이 조각되어 초층 탑신을 받치도록 되어 있다.

초층 탑신은 40의 높이에 양 우주를 나타냈으나

서북쪽의 일부분이 파손되어 시멘트로 약간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초층 옥개석은 높이 25.5로 하단부에 2단의 옥개받침과

상부에 1단의 탑신 괴임이 조각되었고, 옥개석 하면에 낙수홈이 파여 있다

. 2·3층의 탑신 및 옥개석은 초층과 유사하며

노반은 방형으로 높이가 6.5로서 윗부분 중앙에 찰주공(擦柱孔)이 만들어져 있다.

 

이 탑은 부분적인 파손은 있으나 우주와 탱주의 모각 수법과 옥개석의 층급받침,

옥개석 낙수면의 원만함과 낙수홈 등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고적조사보고서(朝鮮古蹟調査報告書)

읍남약사전 삼층석탑 신라(邑南藥師殿三層石塔新羅)’라는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최근 이루어진 정밀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원래 5층 석탑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 탑을 3층으로 보고 3층 옥개 위에는 노반(露盤)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으나

이것은 노반이 아니라 3층 옥개에서 4층 탑신면의 우주가 각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단면석에 돋을새김을 한 우주와 탱주의 표현 수법이 일정하지 않지만,

 각층 탑신에는 우주의 표현이 정연하다.

탑의 체감비율로 볼 때 상당히 경쾌한 탑신부를 형성했으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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