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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 2. 23. 20:30
①중국사·일본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중국과 일본이 역사 조작한 근본배경 알아야
일본이 변조한 호태왕릉비는 추악, 중국 동북공정의 진원은 공자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6-06-12 20:00:28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및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이다. 이전에는 어류(魚類)가 단백질의 주류이기 때문에 일본인은 왜소했다.
광개토태왕의 비(碑)에는 4세기말에 일본군이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고구려 군과 격렬히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 증거로서 광개토태왕릉 비문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조작, 변조한 것이다.
4세기에는 일본이라는 명칭도 없었거니와 원시적 삶을 이어갔다. 3세기 야마토(大和)조정이 성립되었다 하나 당시 국가도 제대로 안정하지 못한 일본이 한일 간의 역사를 뒤엎어놓는 이런 역설적 기만행위는 그들만의 수법이다.
일본이라는 명칭은 사이메이 여왕(齊明女王 : 655~661)이 백제로부터 원군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죽고,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이 사이메이 여왕(齊明女王)의 뒤를 이어 텐지(天智 : 655~671)일왕이 되고 671년에 당의 승인을 얻어서 이 때부터 일본(日本)이란 국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이 명치유신 후 메이지 왕의 명령을 받은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광개호태왕의 비를 조작하고 이를 내세워 조선 진출을 연출하지만, 없었던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한다고 역사가 굳어지는 건 아니다. 사실 그 자체만이 역사가 된다.
일본은 진무덴노(神武天皇)의 기원도 조작 하고 있는데, 실제보다 천년 전에 탄생했다고 조작한 것은 일본학자들도 다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일본시조의 신무기원(神武紀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본 시조라는 진무덴노(神武天皇)의 신무기원(神武紀元)도 조작
일본의 시조의 신무기원(神武紀元)은 서기전으로 창작됐다. 진무덴노(神武天皇) 즉위 해가 결정된 때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수사사업(修史事業)과 관련해서다. 즉 중국의 참위설(讖緯說)의 신유혁명설(辛酉革命說)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내용인즉‘신유년(辛酉年)에는 혁명이 일어나나, 신유년(辛酉年)이 21회 반복되면 더욱 큰 혁명이 일어난다’는 사상이다. 스이코 덴노(推古天皇:592~628) 9년, 신유년(辛酉年)을 기점으로 해서 이보다 1260년의 신유년(辛酉年), 서기전 660을 진무덴노(神武天皇)가 즉위 해로 정했다.
이것은 일본 역사가 2600여년이나 된 것처럼 조작했는데 진무덴노(神武天皇)는 서기전 인물이 아니다. 가공의 인물이고 역사 또한 허구임을 말해준다.
일본의 초대 천황은 오진(應神:363~394)이다. 일본천황은 1대~14대까지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일본 학자도 천황가의 조작을 인정하고 있다. 전 와세다 대학의 미스노 유(水野祐)교수는 일본역사는 978년쯤 조작된 것이라 하고 있을 정도다.
더구나 이를 확실하게 해주는 방대한 사료가 1890년경 궁궐에서도 알 수 없었던 책이 후지산록 밑에 지하 서고에서 1200년간의 침묵을 깨고 공개되고 1921년 '신황기'(神皇紀)‘가 발간되면서 이러한 허구의 역사는 다 드러나고 만다.
그럼에도 일본은 허구의 역사를 지금도 교재로 가르치고 있다. 신황기(神皇紀)는 "백제인이 일본에 와서 일본인들을 깨우쳐, 문화를 전하고 천황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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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중국사·일본사는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중·일은 역사 위작 위해 사서부터 없애고 왜곡했다.
허구의 역사 동북공정과 식민사관, 한국사 자신들 역사로 둔갑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6-06-19 20:01:51
한국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뒤엎어졌고, 도둑맞아 말이 아니게 왜곡됐다.
우리고대사는 백제의 멸망 때 소정방(蘇定方)이 말살하고, 고구려가 멸망할 때 중국이 자기네들한테 불리한 사서는 다 불살랐다. 1905년 청일 간의 ‘간도조약’ 후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의 말살(抹殺)을 기도했다.
또한 일제(日帝) 조선총독부는 조선역사의 말살 정책을 펴, 한국의 역사자료 22만 수천 권을 약탈해 갔을 뿐 아니라 대마도(對馬島) 종가(宗家)에서 전래(傳來)돼 온 사서(史書)도 몰수해 일본 궁내성 문고(宮內省文庫)에 감춰 버렸다.
그리고 나서 거짓 역사를 만들기 위해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왜곡된 학설을 주장하게 했다. 상고사는 아예 없애고 고조선(단군조선)도 절반으로 절단하고 또 전설화시켰다. 우리는 그러나 ‘조선사 편수회’가 만든 35권의 한국사를 지금도 바이블처럼 가르치고 있다.
광복 71년이 되었지만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는 없어, 마치 ‘패배와 수치’의 역사가 우리 역사인양 방치하고 있다. 그 사이 중국과 일본은 우리 역사를 침식하며 왜곡을 더욱 가속시키고 있는데도, 당국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학자 중에서도 중국의 사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가 지금도 적지 않다. 중국의 사서란 거의 중국 중심으로 기술한 것으로, 허구가 너무 많아 절대 신뢰하면 안 된다.
“중국 역사는 5%도 안 된다”고 위안텅 페이(袁騰飛)의 말했다. 양심적인 학자이기에 핍박을 감수하며 한 말이다. 중국사는 거의 조작된 역사다. 오늘은 중국과 일본 사서의 방대한 내용을 다 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 이렇게 우리역사가 망가졌는지' 등에 관한 단면(斷面)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의 역사왜곡, 동이족 역사 중국역사로 편입 위해 조작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고구려의 ‘유기(留記)’를 비롯해서 ‘구 삼국사(舊三國史)’, ‘고기(古記)’, ‘단군기(檀君記)’, ‘조대기(朝代記)’ 등의 사서는 모두 망실(亡失)ㄷ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이 수십만 권을 다 없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부득이 나머지 부분을 불공정하고 불확실한 중국인의 고사에서 찾아내왔다. 그런 까닭에 오해하기 쉬운 역사적 사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첫째, 중국인은 스스로 중화(中華)를 자처하고 기타 사방의 다른 민족은 이(夷), 만(蠻), 호(胡), 혹은 융적(戎狄)이라 하며 오랑캐로 통칭
했다. 그 중, 동의 조선족만은 다른 족과는 구별하여 처음에는 인방(人方), 혹은 동인(東人)이라고 하다가 후에는 동이(東夷)라 불렀
다.
동이란 우리가 만든 표현도 아니고 듣기 좋은 말도 아니지만, 동방의 큰 활을 쓰는 큰 종족이라는 것을 뜻하며, 만물이 생성하는 바탕
(言仁 而好生, 萬物柢地而出)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의 ‘사원(辭源)’에도 이(夷)는 대야(大也), 열야(悅也), 동방야(東方也)라고 해설 하고 있다. 당시 중국은 동이(東夷)조선을“군
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 대국(大國)”이라고 예찬하고, 한족(韓族)은 유순, 근후(謹厚)하고 부인이 정신한 나라“라고 하였다.
둘째, 나라가 중국에 조알(朝謁),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많은데 그것은 예방(禮訪), 문화교류, 공적무역, 관광 등의 다른 목적으로 왕래한사
례를 집어넣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 또한 수천년에 걸쳐 조선 등, 주변국에 조공을 바쳤다.
셋째, 중국인이 타국인을 어느 나라의 왕이나 장군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많다. 웃기는 일이다. 어떤 나라가 건국되었거나 누가 왕위를 계승
했거나, 지위 혹은 권력을 이미 차지해 기정 사실이 된 후에 통고 받은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자기네가 ‘봉(封)하여 내린
것처럼’ 표현했다.
예컨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明)을 치려고 나선 적(敵)이었다. 그런데 명나라 신종(神宗)
은 도요토미를 일본 왕으로 봉했다고 했다.
이 처럼 용어(用語)와 사실상의 의미가 서로 다른 이유는 중국인의 상투적이고 과장된 표현 탓이다. 고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그 시대 정황과 왜곡된 중국 고사를 자료로 썼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져 버렸 듯이. 중국은 고대부터 역사와 지명, 지도를 자기네 중심으로 모두 고치면서까지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 나라임은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우리가 중국사서(中國史書)를 인용할 때 그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잘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조선은 요순(堯舜)시대에는 중국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으나 주(周)때 부터는 조선이 주력이 된 우리 한족(韓族)과 주(周)가 중심이 된 중국 한족(漢族)이 수백년 동안 대립 충돌을 계속했다. 따라서 문헌 인용 때 신중하지 않으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중국 은(殷)나라도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다. 은(殷)나라가 주(周)나라에게 패망하고, 주가 패권을 잡으면서 은(殷)의 역사를 중국 한족 위주로 뒤집기 위해 중국인들은 거짓말을 안할 수 없게 됐다. 당시 공자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공자가 주나라 말기에 쓴 역사서 ‘춘추(春秋)’는 은나라와 동이족을 밀어내려고 거짓으로 날조 한 책이다. 중국의 정통성은 동이가 아닌 한족(漢族)의 주(周)나라임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공자의 왜곡에 식민사관 변절자들 가세, 우리 역사 만신창이
공자의 역사 왜곡으로 그 때부터 우리 역사 왜곡의 서막이 시작됐지만, 사대주의자와 식민사관을 가진 변조자들에 의해 우리 역사는 만신창이 됐다.
중국과 일본이 고대에 우리 한민족을 지배했다는,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은 공자에서 비롯됐지만, 결국 역사를 뒤집은 건 한문이 자유로운 변조자들이었다. 그들은 공자의 말을 추종해 그가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중국이 우리를 멸칭(蔑稱)으로 부르던 오랑캐 이(夷)란 글자는 큰활을 쓰는 선진 자를 의미하는 만큼 동이라 해도 섭섭할 것은 없다. 또 우리는 큰 나라라는 자부심을 잊지 않았기에 그나마 왜곡된 역사를 되찾아 가려 하고있다.
환국, 배달국, 단군 고조선의 자부심을 갖고, 한 때 ‘소 중화(小中華)’니 ‘소국(小國)’이니 하면서도 대륙을 호령하던 우리는 현재까지도 중국인을 되놈, 오랑캐‘ 호(胡)라 부르고 호떡, 호콩, 호복(胡服)이란 말을 써 차별했다. “되(胡)‘란 멸칭(蔑稱)이 우리가 말하는 진짜 오랑캐다.
일본에 대해서도 왜구, 왜떡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한문을 배워 사고(思考)가 중국에 종속된 나머지 사대주의에 물들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종래 ‘대국과 되놈’ 두 가지 말을 쓰면서 호연지기를 이어오고 있다. 왜곡이 쉽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가 부실한 나라는 고금을 물론하고 자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위조하는 것이 통례다. 특히 중국과 일본이 심하다. 역사를 위조하는 까닭은? 자존적 위조(自尊的僞造)를 통해 위대한 역사, 강대한 역사를 창조한 예가 많기 때문이다. 국민의 자존심을 북돋으면, 그 자존심으로부터 용기와 인내력이 소생한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알고 또 실행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과 일본이다. 중국인들은 인류의 종주국(宗主國)임을 일방적으로 자처하며, 타 민족을 신복(臣僕)으로 간주(看做)해왔다.
무에서 유를 창출하기 위해 조선고대사 지운 중국
먼저 중국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기 위해서 중국의 조상은 하우(夏禹)가 아니고 우리 한민족인 신농(神農), 염제(炎帝), 헌원(軒轅)을 자기들 조상이고 그들 자손이라 선전하고 있다. 제 조상도 바꾸는 야만성을 자랑한다.
한국사를 자기들 역사로 둔갑시키며 우리 선조를 자기 선조라 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중국과 일본밖에 없다. 우리나라 속담에 가장 심한 욕은 ‘성가를 놈’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는 조상도 가는 나라가 바로 중국인 것 같다.
반면 고려의 후예인 명(明), 신라의 후예인 몽골, 금(金)나라와 고구려의 후예인 거란이나 가야의 후예인 청(淸)나라는 조상을 갈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은 이 나라들도 중국사에 넣고 있다. 그들의 조상은 동이족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은 상고사가 없고 고대사의 불실을 우리 역사에서 찾고 있다. 또한 신농(神農), 염제(炎帝), 헌원(軒轅)을 자기들 조상으로 둔갑시키어 탁록(涿鹿)지구에 삼조당(三祖堂)이라는 거대한 사당(祠堂)까지 지어 놓고 우리 조상을 모시고 있다.
우리 한민족의 조상을 화하족(華夏族)의 조상으로 둔갑시키고 자기들의 삼조(三祖)라고 하고 있다. 조상도 모르는 족속이 되고 있다.
한편 중국은 동북공정은 끝났다고 하나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세계최초의 문명인 ‘요하문명’을 일으킨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주역은 동이족인 우리 예맥족인데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지우려는 작업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다.
이미 밝힌바 대로 고대 중국인은 조선 민족을 처음에는 맥(貊)혹은 맥(貉)이라고 하다가 후에 예(濊)라하고, 때로는 이를 합쳐서 예맥(濊貊)이라고 했는데, 모두 같은 종족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다. 맥이란 말은 오래 전에 중국 고전에 나타났다.
맥(貊)이란 것이 전한(前漢)시대에는 고대의 우리 민족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 모두에 대한 공통의 칭호로 사용해 중국사기(中國史記)에도 “예맥 역시 조선에 속하며 그 예맥은 부여와 고구려와 삼한, 즉 백제, 신라, 등의 근원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사(古史) 중에는 맥전(貊傳) 과 예전(濊傳)밖에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같은 조상의 후예다. 우리 민족 전체에 대한 공통의 명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예맥에 천년 간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더욱 역사적 사실을 깨끗이 지우려 한다.
그래서 후한대(後漢代)에는 고대 조선과 후기 조선, 부여와 고구려 등 특수한 여러 국호(國號)에 대한 개별적인 명칭이 되었다가 점점 그 뜻의 범위가 줄어서 주로 동예(東濊)로 지칭하게 됐다.
일본도 중국과 다름없는 우리 역사 지워갔다.
중국은 일본인을 왜인(倭人)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은 중국의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라고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전부터 일본인을 ‘왜놈’이라는 말로 전해져 왔다.
일본인이 도리에 어긋나는 노략질과 해적행위를 하는데 그 체격이 왜소한데서 기원한 것으로 본다. 우리는 고대부터 목축을 하고 가축을 기르며 육식을 해 와서 체격이 큰데 반해 일본은 수렵(狩獵)과 어로(漁撈)에 주로 해서 체구가 왜소했다.
일본인이 소고기를 먹게 된 건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이다. 이전에는 어류(魚類)가 단백질의 주류이기 때문에 일본인을 왜소했다.
광개토태왕의 비(碑)에는 4세기말에 일본군이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고구려 군과 격렬히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 증거로서 광개토태왕릉 비문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조작, 변조한 것이다.
4세기에는 일본이라는 명칭도 없었거니와 원시적 삶을 이어갔다. 3세기 야마토(大和)조정이 성립되었다 하나 당시 국가도 제대로 안정하지 못한 일본이 한일 간의 역사를 뒤엎어놓는 이런 역설적 기만행위는 그들만의 수법이다.
일본이라는 명칭은 사이메이 여왕(齊明女王655~661)이 백제로부터 원군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죽고,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이 사이메이 여왕(齊明女王)의 뒤를 이어 텐지(天智655~671)일왕이 되고 671년에 당의 승인을 얻어서 이 때부터 일본(日本)이란 국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이 명치유신 후 메이지 왕의 명령을 받은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가 광개호태왕의 비를 조작하고 이를 내세워 조선 진출을 연출하지만, 없었던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한다고 역사가 굳어지는 건 아니다. 사실 그 자체만이 역사가 된다.
일본은 진무덴노(神武天皇)의 기원도 조작 하고 있는데, 실제보다 천년 전에 탄생했다고 조작한 것은 일본학자들도 다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일본시조의 신무기원(神武紀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본시조라는 진무덴노(神武天皇)의 신무기원(神武紀元)도 조작
일본의 시조의 신무기원(神武紀元)은 서기전으로 창작됐다. 진무덴노(神武天皇) 즉위 해가 결정된 때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수사사업(修史事業)과 관련해서다. 즉 중국의 참위설(讖緯說)의 신유혁명설(辛酉革命說)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내용인즉 ‘신유년(辛酉年)에는 혁명이 일어나나, 신유년(辛酉年)이 21회 반복되면 더욱 큰 혁명이 일어난다는 사상이다.’ 스이코 덴노(推古天皇(592~628) 9년, 신유년(辛酉年)을 기점으로 해서 이보다 1260년의 신유년(辛酉年), 서기전 660을 진무덴노(神武天皇)가 즉위 해로 정했다.
이것은 일본 역사가 2600여년이나 된 것처럼 조작했는데 진무덴노(神武天皇)는 서기전 인물이 아니다. 가공의 인물이고 역사 또한 허구임을 말해준다.
일본의 초대 천황은 오진(應神(363~394)이다. 일본천황은 1대~14대까지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일본 학자도 천황가의 조작을 인정하고 있다. 전 와세다 대학의 미스노 유(水野祐)교수는 일본역사는 978년쯤 조작된 것이라 하고 있을 정도다.
더구나 이를 확실하게 해주는 방대한 사료가 1890년경 궁궐에서도 알 수 없었던 책이 후지산록 밑에 지하 서고에서 1200년간의 침묵을 깨고 공개되고 1921년 '신황기'(神皇紀)가 발간되면서 이러한 허구의 역사는 다 드러나고 만다.
그럼에도 일본은 허구의 역사를 지금도 교재로 가르치고 있다. 신황기(神皇紀)는"백제인이 일본에 와서 일본인들을 깨우쳐, 문화를 전하고 천황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劉泳,海燕,‘赤蜂博物館’.외 다수서책을 참조, 본문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