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동래 정공 묘지명 병서(東萊鄭公墓誌銘 幷序)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선조로 상서 복야(尙書僕射) 휘 목(穆)과 봉산군(蓬山君) 휘 호(瑚)와 그리고 봉원군(蓬原君)으로 시호가 양도(良度)인 휘 양생(良生)은 고려 시대 때부터 드러난 인물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구(矩)는 망국의 신하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는 의리를 지켜 여러 번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호는 설학(雪壑)이며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이분이 휘 선경(善卿)을 낳으니, 판관(判官)을 지냈고 증직이 판서(判書)이며 동평군(東平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이분이 휘 종(種)을 낳으니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훈으로 동평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3대 뒤 휘 사민(師閔)은 효성과 우애가 천성에 근본하였는데, 유언을 남겨 동생 임하(林下 호) 사철(師哲)과 함께 부모님의 묘소 아래 쌍분으로 묘를 쓰게 함으로 형제의 자손들이 모두 한 뜰에서 제향을 드릴 수 있게 하였으니, 이분이 공의 8대조가 된다.
고조부의 휘는 응구(應耉)이니, 문사(文詞)를 잘하는 것으로 추중을 받았다. 증조부는 휘가 숭령(嵩齡)이고, 조부는 휘가 후필(厚弼)이며, 아버지는 휘가 유섭(惟燮)이다. 어머니는 흥해 최씨(興海崔氏)로 문식(文寔)의 따님이며 감사(監司) 건동(健潼)의 후손이다.
순조 을축년(1805, 순조 5)에 공을 대구(大邱) 서부리(西部里) 집에서 낳았으니, 휘는 주욱(周郁)이고 자는 문언(文彦)이며 호는 병헌(丙軒)이다. 자품이 강의(剛毅)하고 지기(志氣)가 우뚝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이 효성스러웠기에 비록 글짓기를 잘 했지만, 혹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며 또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는 예절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과거시험 공부를 폐하는데 이르렀다.
무술년(1838, 헌종 4)에 어머니 상을 당함에 상례와 제례를 예의에 부합되게 하였고, 슬퍼하여 몸이 야위면서 마음을 극진히 하였다. 고을원 정시용(鄭始容)은 먼 친족으로서 공의 정성스러운 효성을 부러워하여 특별한 관례를 적용하여 힘써 도왔으며 또 칭찬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상을 마치고 겨우 일 년이 지나 또 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한결같이 어머니 상과 같이 하였다. 제삿날이 될 때마다 울어 눈물을 줄줄 흘렸으며, 제수는 지극히 풍성하고 정결하였다. 고종 계유년(1873, 고종10) 정월 28일에 돌아가시니 부(府)의 서쪽 응봉(鷹峯) 자좌(子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아, 공은 지극한 효행에다가 문학(文學)까지 성취하였다. 이런 재능을 위로 선조에게 미루어 추원재(追遠齋)와 우모정(寓慕亭)을 지은 것은 모두 공이 기획한 것이고, 아래로 자손에게 미루어 서가에 수천 권의 책을 마련한 것에는 공이 손수 초록한 것이 많았다.
스스로 지은 자신의 만사에는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끼치지 못함을 개탄하였고, 스스로 자신의 관을 만들어 부모께서 남겨주신 몸을 편안하게 눕힐 것을 살폈으니, 공과 같은 이는 참으로 종신토록 부모님을 사모한 사람이다. 이것이 어찌 다만 타고난 자품의 아름다움만으로 되는 것이겠는가. 또한 가정에서 교화를 받음에 특이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공의 시문 약간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은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양호당(養浩堂) 현보(玄寶)의 후손이며 재관(載寬)의 따님이니, 착하고 올바른 덕을 가졌다. 신유년(1801, 순조 1)에 태어나서 신유년(1861, 철종 12)에 죽었으며 묘소는 공과 같은 언덕에 있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봉래(鳳來)와 학래(鶴來)이고 딸은 김수(金璲), 이승흠(李承欽), 배헌규(裵憲奎)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봉래의 아들은 용구(容九), 용만(容萬), 용억(容億)이고 딸은 도재호(都在浩)와 이현민(李玄敏)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학래의 아들은 용무(容武)와 용표(容表)이고 딸은 최명열(崔命悅)과 장학규(張鶴規)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이하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맏손자 용구는 고아한 선비이니, 공의 행록(行錄)을 받들어 나에게 와서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청하기에 삼가 행록에 의거하여 찬술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빛나는 정씨여 / 赫矣鄭氏
봉지(封地)를 받은 네 분과 시호를 받은 세 분이 있네 / 四封三謚
공은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 / 公生是家
부귀를 뜬구름같이 보았네 / 富貴雲視
가슴 가득히 새기는 것은 / 滿腔服膺
효도 이외에 다른 것이 없었네 / 孝外無他
무릇 사람의 자식이 된 자는 / 凡爲人子
이 묘를 지나면서 공경을 표시해야 하리 / 式此墓過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
[原文]
東萊鄭公墓誌銘 幷序
東萊鄭氏之先。尙書僕射諱穆。蓬山君諱瑚。蓬原君謚良度。諱良生。著自勝國。至我朝。有諱矩。守罔僕義。屢徵不就。號雪壑。謚靖節。生諱善卿。判官贈判書。追封東平。生諱種。李施愛之亂。勳封東平。謚襄平。三傳至諱師閔。孝友根天。遺命與林下弟師哲。雙墓親塋下。使兄弟子孫。共享一庭。是於公爲八世祖也。高祖諱應耉。以文詞見推。曾祖諱嵩齡。祖諱厚弼。考諱惟燮。妣興海崔氏。文寔女。監司健潼後。純廟乙丑。生公大邱西部里第。諱周郁。字文彦。號丙軒。姿性剛毅。志氣卓犖。事親孝。雖善於文翰。慮或妨於溫凊𣺫瀡之節。至廢擧業。戊戌。丁內憂。喪祭稱禮。哀毁盡情。地主鄭公始容。以踈族。艶公誠孝。拔例助力。稱賞不已。服闋。纔一年。遭外艱。一如前喪。每當喪餘日。泣涕漣如。祭品極豊㓗。當宁癸酉正月二十八日卒。葬府西鷹峯負子原。於乎。公以至孝之行。濟之以文學。推以上之祖先。追遠齋, 寓慕亭。皆公所䂓畫也。推以下之子孫。揷架千卷書。多公所手抄也。自輓而慨令名之未貽。自治壽木而審遺軆之易安。如公眞終身慕父母者矣。是豈特天資之美。抑擩染家庭者。有以異焉耳。詩文若干卷。藏于家。配丹陽禹氏。養浩堂玄寶后。載寬女。有淑德。生卒辛酉。墓與公同原。生二男三女。男鳳來, 鶴來。女金璲, 李承欽, 裵憲奎。鳳來男容九, 容萬, 容億。女都在浩, 李玄敏。鶴來男容武, 容表。女崔命悅, 張鶴䂓。以下蕃不錄。公胄孫容九雅士也。奉公行錄。責福樞以墓銘。謹據以撰次。銘曰。
赫矣鄭氏。四封三謚。公生是家。富貴雲視。滿腔服膺。孝外無他。凡爲人子。式此墓過。
ⓒ한국문집총간 |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