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삶아서 소쿠리에 담아 놓은 보리쌀을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돌아와 배고픈 시골 아이들은 고추장에 슥슥 비벼 먹었다.
덜 익고 퍼지지 않아 입안에서 맴돌고 억센 맛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밭에서 돌아와 보리쌀이 눈에 띄게 줄어 든 소쿠리를 보면서 난감해 하시던 어머니의 표정이 떠오른다.
겉보리는 흡수성과 퍼짐성이 적어 한 번 삶은 후 밥을 해야 했다.
보리는 기원전 17,000∼15,000년 전의 구석기 시대에 이집트에서 재배가 되었을 만큼 재배역사가 오래된 작물이다.
이후 기원전 5000년경에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재배가 이루어졌으며 쌀, 밀, 콩, 옥수수와 함께 세계 5대 식량작물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농부들과 친구처럼 지낸 보리는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쓰임새가 중요했으며 서양에서는 위스키의 기본 원료이기도 하였다.
그리스 로마에서는 보리로 빵을 만들었는데 글루텐 함량이 낮은 탓에 그 자리를 밀에 내주었지만 ‘맥아’는 효모에 의해 발효되어 맥주로 태어나고 위스키를 만들 때도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도입되어 3000년 전부터 재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유사》동명왕편에 고구려 시조 주몽이 탈출하여 남하할 때 보리종자를 잊고 왔는데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비둘기를 통해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보리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쌀을 대신하여 서민의 배고픔을 이겨내게 해준 곡식이었다. 특히 여름작물인 쌀, 기장, 조와 같은 햇곡식과 묵은 곡식 사이의 식량연결 통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가을에 수확한 곡식은 바닥나고 햇보리는 여물지 않은 5∼6월 식량이 모자라서 고통 받던 시기에 ‘보릿고개’라는 말을 만들어 낸 곡식이다.
정약용은 《장기농가》에서 ‘보릿고개 험하고 험해 태항산을 닮았는데 / 단오가 지난 후에야 보리 추수가 시작되지 / 풋 보리죽 한 사발을 그 누가 들고 가서 / 비변사의 대감도 좀 맛보라고 나눠줄까’라고 하여 보릿고개가 얼마나 넘기 힘든 일인지 중국의 높고 험한 태항산에 비유할 정도였다.
조선시대 역관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여섯 차례나 다녀온 조수삼은 함경도 지방을 여행한 후 지은 시집 《북행백절》에서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소나무 껍질 벗겨 산은 온통 하얗고 / 풀뿌리 캐내어 들엔 푸른빛이 없네.
곧 보리가 익는다고 말하지 말라 / 누렇게 마른데다 벌레까지 먹었다오.
보리가 익을 때가 되었지만 벌레까지 먹었으니 성급하게 희망을 가졌다가 실망한 마음에 좌절할까 걱정하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
최근 진성 가수는 배고프게 살았던 어린 시절 가족의 먹거리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자식 걱정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 가슴시린 보릿고개길 / 주린 배 부여잡고 물 한바가지 /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 초근목피에 그 시절 /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 한 많은 보릿고개여 / 풀피리 꺽어 불던 슬픈 곡조는 /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윤용기 시인은 그의 시 「보릿고개」에서 ‘허기진 배로 잠 못 이루는 보릿고개를 어서 가라’고 염원하였다.
바깥껍질과 안 껍질이 단단하게 붙어 있는 겉보리는 과거에 식용으로 이용하였고 껍질과 종자가 잘 떨어지는 쌀보리는 식용과 주정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국수, 빵, 식초, 요구르트 등 가공이용에 적합한 품종과 기능성을 증진시킨 유색보리도 개발되고 있다.
보리는 쌀의 5배에 이르는 식이섬유가 있는데 소화과정에서 대장의 미생물에 의해 발효되면서 가스가 발생하여 방귀를 나오게 하는 특징이 있지만 변비를 없애 준다. 이스라엘에서 변비 환자는 밀가루 대신 보릿가루로 만든 비스켓과 케이크를 먹는다고 한다.
특히 장류는 물론 술, 떡, 미숫가루, 식혜 등 우리 전통음식의 중요한 식재료로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쌀 자급이 이루어지기 전인 1975년에는 보리쌀이 169만 4천톤이 생산되어 식량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쌀 자급이 이루어진 1977년 이후에도 국민들의 근검절약을 위해 정부에서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였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점심시간에 도시락 검사를 통해 혼식을 점검한 일은 추억거리가 되었다.
보리를 재배함으로서 얻어지는 이점과 환경적 효과는 매우 크다.
보리는 겨울을 지나는 작물로 유휴 농경지 100만ha를 재배로 전환하면 400만톤 이상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조사료나 농후사료로 이용이 가능한 작물로 중북부 지역에서도 이모작이 가능하다.
특히 공익적 기능이 큰 작물로 10월에 파종하여 이듬해 5∼6월까지 재배가 되면서 이산화탄소와 이황산가스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여 대기를 정화시키고 겨울철 푸르른 들판을 만들어 아름다운 농촌경관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식이섬유, 비타민, 무기성분이 풍부하여 쌀에 편중된 식생활에서 부족하기 쉬운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2021년 보리 생산량은 맥주보리를 포함하여 89천톤 수준으로 45년 전의 생산량에 비해 5%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새로운 건강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먹는 심장 약으로 불리는 베타글루칸 함량은 쌀과 옥수수의 몇 십 배에 이른다. 새싹 보리의 영양적 가치 또한 높다. 청보리 단지는 가축사료이기도 하지만 문화콘텐츠로 이용된다.
변화하는 보리의 도전에 응원을 보내며 새로운 역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