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식 속의 커피와 생물학적 커피는 엄연히 구분된다. 인간다운 인간과 생물학적 인간이 전혀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 도덕 등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들은 사회적 학습과 교육을 통해 습득되고 계발된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커피의 식물학적 정의는 커피나무에 매달린 커피종을 의미한다. 그러나 갓 수확한 커피원두는 옅은 회색을 띤 흰색에 향도 거의 없이 쓰기만 하다. 꽃향기에서 풀냄새, 초콜릿에 이르는 풍부한 향을 포괄하고, 시고 쓰고 떫은맛을 아우르며, 황토색에서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까지 다양한 갈색의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커피는 말리고 볶는 가공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커피원두를 가공하는 방식은 크게 건식법(dry method)과 습식법(wet method)이 있다. 자연식(natural method)이라고도 불리는 건식법은 가장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가장 단순하며 가장 기계를 적게 사용하는 방식이다. 건식법의 첫 단계는 빨갛게 익은 커피열매, 즉 체리를 수확하는 것이다. 수확하는 방법은 커피 농장의 규모, 시설물, 위치, 재배하는 커피의 품질에 따라 다양하다. 수확한 체리는 세척과정을 거쳐 키질을 통해 잘 익은 열매와 덜 익은 것, 손상된 체리로 선별한다. 먼지, 흙, 나뭇가지 등 원하지 않는 이물질은 바람에 날려 제거한다.
이렇게 선별한 체리는 커다란 콘크리트 블록, 벽돌 패티오 또는 돗자리에 펼쳐놓고 햇볕을 받도록 한다. 가을에 한국의 고추를 말리는 광경과 흡사하다. 체리는 꾸준히 갈퀴나 손으로 섞고 뒤집어 주면서 골고루 마르도록 한다. 체리가 최적상태인 12.5%의 수분을 머금을 때까지 2~3주간 말린다. 햇볕이 약하거나 습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최고 4주까지 말리기도 한다. 규모가 큰 농장에서는 더운 바람이 나오는 드라이어를 사용해 말리는 기간을 단축시키기도 한다.
건조작업은 커피의 품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체리가 너무 마르면 부서지기 쉬워 운송하는 동안 파손의 위험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덜 말리면 체리에 곰팡이가 피거나 썩거나 품질이 떨어진다. 따라서 너무 마르지도, 너무 습하지도 않은 12.5%의 수분 유지가 중요하다. 말린 체리는 공장에서 껍질을 벗길 때까지 특별히 고안된 사일로(silo : 탑 모양의 저장고)에 보관한다. 공장에서는 기계를 사용, 커피원두를 체리에서 분리해낸 후 선별과 등급을 매겨 포대에 담는다. 값싼 로부스타 커피원두는 대부분 가격이 저렴하고 손이 덜 가는 건식법을 통해 가공된다.
브라질에서 생산하는 아라비카 커피의 95%, 에티오피아, 아이티, 파라과이산 아라비카의 대부분, 일부 인도, 에콰도르산 아라비카도 건식법을 거친다. 습식법은 특별히 고안된 기계와 많은 양의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용이 높지만, 건식법보다 커피원두 본래의 맛과 향을 더 훌륭하게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두 훼손도 적다. 따라서 습식법은 대부분의 고급 아라비카 커피원두를 가공하는 데 주로 이용된다. 단, 브라질은 전체 아라비카 생산량의 95%를 건식법으로 가공한다.
건식법과 마찬가지로 수확한 체리는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탱크 속에서 세척 및 분류과정을 거친다. 익지 않은 체리와 잘 여문 것, 큰 것과 작은 것으로 선별한다. 선별작업이 끝나면 체리의 껍질과 과육을 제거한다. 이 과정이 건식법과 습식법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과육 제거에 사용되는 기계에는 움직이는 면과 고정된 면이 마주보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체리가 통과하면 껍질과 과육이 커피원두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두 면의 간격은 커피원두가 손상되지 않도록 조절이 가능하다. 체리를 수확한 후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커피원두 품질에 손상이 덜하다.
과육을 벗겨낸 커피원두는 진동판에서 2차 분류과정을 거친다. 과육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체리와 원두 사이에 섞여 있던 과육이 이 과정에서 제거된다. 커피원두는 다시 한번 탱크에서 물로 깨끗이 세척하는 과정을 거친다. 세척이 끝난 커피원두는 커다란 탱크에서 며칠간 발효된다. 발효과정을 거치면서 커피원두에 남아 있던 끈적끈적한 점액과 속껍질이 용해된다. 발효할 때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자칫 잘못하면 원두에서 불유쾌한 신맛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점액과 속껍질이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효소의 농도와 막의 두께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24~36시간이 걸린다. 발효과정을 거친 원두에는 얇은 은색의 막만이 남아 있으며, 미끈거리는 기운이 사라지면서 손으로 만져보면 조약돌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 발효과정이 끝난 원두는 다시 한번 세척된다. 이때 커피원두는 약 57%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다. 이상적 수분 함유량인 12.5%로 낮추기 위해 햇볕 또는 드라이어를 사용해 원두를 건조시킨다. 햇볕과 기계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햇볕에서 말릴 때에는 건식법과 마찬가지로 넓은 콘크리트 판이나 돗자리가 사용된다. 원두를 2-10㎝ 두께로 펼쳐 놓고 자주 뒤집어 골고루 마르도록 해준다. 8일에서 10일이면 말리는 작업이 끝난다. 드라이어는 거대한 커피 농장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커피원두를 상하기 전에 건조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이 과정을 마친 원두는 은색 막에 쌓여 있다고 해서 영어로 막을 의미하는 '파치먼트(parchment)'를 붙여 '파치먼트 커피'로 불리기도 한다.
건식법과 습식법을 통해 얻어진 커피원두는 수출되기 직전 큐어링(curing)이라고 하는 마지막 단계를 거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은색 막이 이 과정에서 벗겨지고 먼지와 불순물이 제거된다. 스팅커(stinker)라 불리는 기계를 사용해 눈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결점을 지닌 원두도 솎아낸다. 도매상들이 선택하고 주문할 수 있도록 원두에는 품질에 따라 여러 이름과 등급이 매겨진다.
이렇게 길고 복잡한 가공 과정에도 불구하고 커피원두는 아직 우리가 알고 있는 커피의 모습이 아니다. 회색빛을 띤 흰색에 풋내가 나는 상태이다. 인간으로 치면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라고나 할까. 로스팅(roasting) 또는 배전이라고 하는 볶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커피원두는 비로소 커피로 재탄생한다. 원두를 12~20분간 섭씨 180-250도에서 볶으면, 원두에 들어 있는 과당 등 당분이 캐러멜화하면서 커피기름으로 알려진 물질을 만든다.
캐러멜화는 어린 시절 불량식품의 대명사 '뽑기'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설탕을 쇠 주걱에 담아 불 위에 올리면 설탕이 녹으면서 구수한 향기가 나는 갈색 액체로 변화한다. 이것이 캐러멜화이다. 잘 볶은 원두는 힘을 주면 손가락 사이에서 부서지는 정도이며, 절대 태워서는 안 된다. 커피원두는 로스팅의 정도에 따라 라이트 로스트, 시티 로스트하는 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로스팅이 커피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커피원두는 로스팅의 강도에 따라 다양한 맛과 향을 얻는다. 로스팅은 대략 9가지 강도로 나뉜다. 라이트(light) 로스팅한 원두는 감미로운 향기가 나지만 커피를 끓였을 때 쓴맛, 단맛과 깊이는 느낄 수 없다. 노란색에 가까운 황토색을 띠며, 최약배전이라고도 한다. 시나몬(cinnamon) 로스팅은 원두가 계피(cinnamon)색이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원두는 황갈색이며 신맛이 뛰어나다. 약배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강배전이라고도 하는 미디엄(medium) 로스팅은 신맛이 중심을 이룬 가운데 쓴맛이 약하게 난다. 식사 중에 마시기에 적당하다. 미국에서 많이 소비된다고 해서 아메리칸(American) 로스트로도 불린다.
갈색이 완연한 하이(high) 로스팅에서부터 신맛이 엷어지며 단맛이 나기 시작한다. 중강배전이라고도 한다. 시티(city) 로스팅 또는 중중배전을 거친 원두는 맛과 향이 균형 잡힌 표준적 커피이다. 독일에서 특히 선호되어 저먼(German) 로스트라고도 부른다. 풀 시티(full city) 로스팅은 신맛이 거의 없으면서 쓴맛과 진한 맛이 강해서 진한 갈색 원두답다. 에스프레소 커피용으로 많이 사용된다. 아이스커피에도 좋으며, 중강배전이라고 한다.
프렌치(French) 로스팅은 프랑스에서 선호하는 진한 커피에 쓰이는 원두라는 의미로, 쓴맛과 진한 맛이 묵직한 느낌을 준다. 커피기름이 표면에 끼기 시작하는 단계로 강배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두는 검은색을 띤 갈색이다. 최강배전, 이탈리안(Italian) 로스팅은 진하기와 쓴맛이 극대치에 달한 원두이다. 탄내가 나기도 한다. 에스프레소용으로 이전부터 애용되는 로스트이나, 최근에는 가벼운 풀 시티 로스팅에 조금 밀리는 추세이다.
로스팅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소비국에서 주로 이뤄진다.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게 로스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브라질을 제외한 대부분의 커피 생산국들이 로스팅 기술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유럽과 미국의 소비자들은 커피원두를 집에서 직접 로스팅하거나, 커피 상점들이 로스팅한 원두를 구입해 사용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커피 시장은 이른바 로스터(roaster)라 불리는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장악했다. 커피의 품질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로스터들은 여러 지역에서 생산한 다양한 커피원두를 배합해 상품화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커피의 가공방법 (커피 이야기, 2004. 5. 15., ㈜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