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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시인의 본명은 백기행이고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9세때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문단에 데뷔했고, 일본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조선일보 출판부에 근무하기도 했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1936년에 첫시집 <사슴>을 간행했고, 광복 후 고향에 머물다가 1995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백석시인은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하여, 당대문단은 물론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백석시의 특징을 나름대로 간단히 정리해보면
첫째로, 시의 구조적인 면에서 대부분 서사적 구조를 택하고 있다. 대상과 자아를 일체화시키는 서정시와는 달리 대상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자세에서 경관, 정황, 사건들을 담담히 서술한다. 서술에는 반복과 나열등을 즐겨 사용하여 정서의 심화를 꾀하고 있다. 이는 판소리 사설에 원형을 두고 있다.
두번째로, 시어의 면에서 보면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서술어나 어미가 아니라 명사에 방언을 사용함으로, 그의 시를 감상하는데는 상당히 어려움이 있다. 동시대 다른 시인들이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서구적인 분위기와 어휘로 낯설게하기를 시도한 데에 비해 백석시인은 우리 전통의 평안북도 방언으로 낯설기를 시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세번째로, 시의 소재면에서 시인은 음식과 동물을 많이 사용했다. 특히 음식은 생활, 풍속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동물은 어린아이의 놀이대상이며 친구라는 점에서, 시인은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생활 모습을 시세계로 끌어들였다고 하겠다.
네번째로, 시인은 시각과 청각이 주류를 이루었던 당대의 시단의 감각이미지면에서 후각적 이미지를 새롭게 발굴하면서 감각이미지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로, 백석시에는 사람의 생활냄새가 물씬 풍긴다. 자연의 풍광을 읊더라도 그 풍광에 그치지않고 사람들의 삶과 풍속이 끼어든다.
이렇게 백석시인은 시의 구조, 구문, 이미지, 시어, 소재등 시의 다방면으로 혁신을 꾀한 문제시인이었고, 그의 시로 우리 시문학은 새로운 영역을 열어갔다. 민족의 잊혀져가는 언어와 풍속에 대한 애착과 새로운 시형식에 대한 추구가 백석시의 양대산맥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시인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는 여기까지하고 직접 작품을 감상하도록 하겠다. 작품감상을 위해서 이해가 어려운 방언과 고어를 작품 하단에 풀이해 놓았고, 더불어 필자의 짤막한 작품해설도 추가하였다. 감상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정주성定州城
산山턱 원두막은 뷔였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성城터
반디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 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 이 시는 1935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작품으로 백석의 시로서는 데뷔작이다. 정주성은 백석의 고향에 있는 고성으로, 정주성은 앞으로 나아갈 그의 시 방향에 나침판 역할을 한다.
산턱 빈 원두막, 외로운 불빛, 문허진 성터 등에서 쇠락해가는 역사의 분위기를 제시하면서도, 그 성터에서 우리 민족의 혼을 찾고, 훤한 하늘빛을 기대하면서, 아침마다 청배를 팔러오는 늙은이처럼 사람들의 생활은 이어져간다.
* 어데서 말있는 듯이; 어디서 말소리가 나는 듯이
* 한울; 하늘
* 청배; 푸른 배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젖 담그려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었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이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하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께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멫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멫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이 시는 시인의 초기 대표작으로 뽑힌다. 제목에서 '여우난골'은 산골마을의 지명이며, '족'族은 친족을 뜻한다. 즉 '산골마을의 친족'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싶다. 제목부터 순우리말의 토속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작품내용 또한 우리의 전통적인 명절풍속이 그려져 있다. 서사적이며 그 진술이 반복과 나열, 부연을 통해 장황하게 진술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법들이 유년화자의 정서를 점층적으로 환기시킨다. 이는 우리 전통문학인 판소리 사설과 흡사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 말수와 같이; 말할 때마다
* 고무; 고모
* 오리치; 오리를 잡는 도구
* 반디젖; 낸댕이젓
* 잔디; 짠지
* 숨굴막질; 숨바꼭질
* 아르간; 아랫간
* 조아질; 공기놀이
* 화디; 등잔걸이
* 사기방등; 사기로 만든 등잔불
* 홍게닭; 새벽닭
* 텅납새; 추녀(처마끝)
* 동새; 동서同壻
흰밤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백석시의 특징 중 하나는 풍경을 묘사하더라도 서사에 접목을 한다는 점이다. 1연부터 3연까지는 풍경을, 마지막 4연에서는 사건의 진술로 정서의 완성을 꾀한다. 옛성, 묵은 초가지붕의 쇠락함과 하얗게 빛나는 달빛의 괴이함이 수절과부의 자살로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고야古夜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山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느 산山골짜기에서 소를 잡어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아래 고래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山 어늬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고무가 고개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귀를 들고 쇠든밤을 내여 다람쥐처럼 밝어먹고 은행여름을 인두불에 구어도 먹고 그러다는 이불 우에서 광대넘이를 뒤이고 또 누어굴면서 엄매에게 웃목에 두른 평풍의 새빨간 천두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무더러는 밝은 날 멀리는 못 난다는 뫼추라기를 잡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흰가루손이 되여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녀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우에 떡돌 우에 곱새담 우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혀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 여우난골족과 같은 서사적구조이지만, 각연이 독립적 서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유년시절 밤의 추억을 모자이크 식으로 서술하여 전통적인 풍속의 세계를 전해준다.
* 노나리꾼; 소를 밀도살하는 사람
* 날기멍석; 낟알을 널어 말릴 때 쓰는 멍석
* 니차떡; 찰떡. 인절미
* 청밀; 꿀
* 조마구; 조막. 조무래기
* 재밤; 한밤
* 삿귀;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의 가장자리
* 쇠든 밤; 시든 밤
* 밝어먹고; 발라먹고
* 째듯하니; 환하게
* 냅일날; 납일臘日
* 냅일눈; 납일에 내리는 눈
* 눈세기물; 눈이 섞인 물, 즉 눈이 녹아서 생긴 물
* 제주병; 제사 때 쓰는 술병
* 진상항아리; 허름하고 보잘것없는 항아리
* 갑피기; 이질
가즈랑집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山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즘생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즘생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멫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엔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山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넷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어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山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네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멫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이 하로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이 시는 시인이 유년시절 가즈랑집에 놀러가서 지냈던 경험을 즐겁게 서술하고 있는데, 역시 서사적형식을 취한다. 수식절+명사의 구문이 특히 눈이 띄는데, < ~ 가즈랑집 할머니>를 수차례 반복함으로 할머니에게 촛점을 맞추며 가즈랑집과 할머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낸다.
* 깽제미; 징
* 막써레기; 담배 이파리를 썰어놓은 것
* 구신간시렁; 귀신을 모셔놓은 곳의 선반
* 당즈께; 도시락
* 아르대; 아래쪽
* 즘퍼리; 축축이 젖어 있는 땅
* 집오래; 집에서 가까운 부근
여우난골
박을 삶는 집
할아버지와 손자가 오른 지붕 위에 한울빛이 진초록이다
우물의 물이 쓸 것만 같다
마을에서는 삼굿을 하는 날
건넌마을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왔다
노란 싸리잎이 한불 깔린 토방에서 햇츩방석을 깔고
나는 호박떡을 맛있게도 먹었다
어치라는 산山새는 벌배 먹어 고읍다는 골에서 돌배 먹고 아픈 배를 아이들은 띨배 먹고 나었다고 하였다
** 여우난골이라는 산골마을의 토속적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글로 <여우난골족>에 비해 간결한 표현히 인상적이며, 특히 4연의 언어유희가 재미있게 다가온다.
* 삼굿; 삼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수증기로 삼(대마)을 익히는과정
* 한불; 한 무리
* 햇츩방석; 햇칡방석
연자간
달빛도 거지도 도적개도 모다 즐겁다
풍구재도 얼럭소도 쇠드랑볕도 모다 즐겁다
도적괭이 새끼락이 나고
살진 쪽제비 트는 기지개 길고
홰냥닭은 알을 낳고 소리치고
강아지는 겨를 먹고 오줌 싸고
개들은 게모이고 쌈지거리하고
놓여난 도야지 둥구재벼 오고
송아지 잘도 놀고
까치 보해 짖고
신영길 말이 울고 가고
장돌림 당나귀도 울고 가고
대들보 위에 베틀도 채일도 토리개도 모도들 편안하니
구석구석 후치도 보십도 소시랑도 모도들 편안하니
** 연자간은 연자맷돌을 차려놓은 방앗간이다. 연자맷돌은 말이나 소가 돌려서 곡식을 찧는 맷돌인데, 마을에서 공동으로 이용하는 연자간은 대체로 마을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 시에서는 연자간의 풍경을 3음보와 4음보의 운율과 운을 이용해서 흥겹게 표현하고 있다. 백석시에서 드물게 보이는 서사적이지 않은 전통적 형식의 서정시이다.
* 도적개; 도둑개
* 풍구재; 풀무. 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
* 얼럭소; 얼룩소
* 쇠드랑볕; 쇠스랑 모양의 창살로 볕이 들어오는 모양
* 홰냥닭; 홰에 올라앉은 닭
* 게모이고; 개들이 침을 흘리며 정신없이 모여드는 모습
* 동구재벼 오고; 돼지가 물통터럼 들려오고 있는 모습
* 보해; 뽀해. 뻔질나게
* 신영; 친영親迎
* 장돌림; 여러 장으로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장수
* 토리개; 씨아. 목화의 씨를 빼는 기구
* 후치; 극쟁이. 땅을 가는 데 쓰이는 농기구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서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자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 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음식은 백석시의 주요 소재이다. 특히 이 시는 단일 음식을 시의 소재로 한 작품으로, 어린시절 고향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국수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다. 국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음식문화 속에 담겨있는 전통적인 풍속과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데, 그 정서는 민족과 역사의식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
* 나려 멕이고; 내려와 주고받으며 지저귀고
* 김치가재미; 겨울철에 김치를 묻은 다음 얼지 않게 그 위에 지푸라기나 수수깡 따위로 만들어놓은 움막
* 은댕이; 언저리
* 예대가리밭; 쓰고 남은 귀퉁이 밭
* 산멍에; 산몽애. 뱀의 한 종류인 '산무애뱀'의 고어
* 분틀; 국수틀
* 집등색이; 짚등석. 짚과 등나무 줄기로 짜서 만든 자리
* 댕추가루; 당춧가루. 고춧가루
* 탄수 내음새; 식초냄새
* 아르궅; 아랫묵
오리 망아지 토끼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나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어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버린다
장날 아츰에 앞 행길로 엄지 따러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치워 나는 산山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어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 유년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오리, 망아지, 토끼를 소재로 정겹게 구성하고 있다. 동물은 음식과 함께 백석시의 중요한 소재이다. 장난감이 따로 없는 산골에서 동물은 유년 화자의 가장 큰 놀이대상이며 친구였을 것이다. 이러한 동물들을 매개로 한 아버지와의 추억은 한없이 따스하고 아름답다.
* 오리치; 오리를 잡는 도구
* 동비탈; 동쪽의 비탈
* 동말랭이; 동쪽의 등성이
* 시악; 侍惡, 악한 성미로 부리는 악
* 매지; 망아지
* 새하다; 나무하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가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 미신의 세계에 묻혀사는 토속마을의 풍경이 유년화자의 행동으로 재미있게 그려지고 있다. 이 시는 판소리의 구어체 어조를 빌려쓰고 있는데, 판소리의 구성진 가락과 민요에서 원형을 찾아볼수있는 꼬리따기요의 표현으로 역동적이며 흥겨운 리듬을 보인다. 마치 유년화자의 발걸음처럼 경쾌하다. 화자는 귀신을 피해 방안에서 시작하여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이동하여 큰 행길까지 나서지만 귀신을 피할수 없었다. 마을 전체가 귀신이 되었다는 표현에서 속신에 묻혀 지내는 생활풍속을 그리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놀이모습을 함축하기도 한다.
* 오력; 오금
* 얼혼이 나서; 얼과 혼이 나가서
* 곱새녕; 짚으로 엮은 이엉을 얹은 지붕
* 디겁을 하여; 질겁을 하여
* 화리서리; 마음 놓고 걸어가는 모습
박각시 오는 저녁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풍경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특히 마지막 두연에서는 자연과 사람이 동화되고, 지상과 하늘이 소통하는 우주적 조화의 경지까지 보인다.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짓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모닥불의 현장에서 1연은 모닥불의 재료를 2연은 모닥불을 쬐는 사람들이 쭉 나열되어있다. 재료는 모두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모여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 불을 쬐는 사람과 동물들은 지위의 고하가 없이 평등하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평등하게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시인의 생각이 들어있다고 하겠다. 1연과 2연의 모닥불현장에서 장면이 전환되어 3연에서는 할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회상이 들어오는데, 모닥불의 온기에 기대어 살아왔던 할아버지의 서럽고 슬픈 생애를 떠올리며, 모닥불의 함축적 의미를 구체적인 삶의 역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 새끼오리; 새끼줄 조각
* 개니빠디; 개의 이빨
* 재당; 향촌의 최고 어른에 대한 존칭
* 몽둥발이; 몽동발이. 몸뚱이만 남은 물건
산山비
산山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닌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켠을 본다
** 백석시 중에서 사람의 생활 냄새가 없는 순수하게 자연만을 그린 것으로 유일한 작품이다. 단 세 줄의 글로 간결하게 비 내리는 깊은 산중의 미세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깊은 禪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 자벌기; 자벌레
여승女僧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이야기가 들어있는 시이다. 화자가 여승을 만나고, 회상하여 여승이 되기까지의 기구하고 슬픈 사연을 시로 표현하였다. 압축과 비유, 운율의 서정적인 시적 감동과 서사적 감동이 함께 하고 있다.
목구木具
오대五代나 나린다는 크나큰 집 다 찌그러진 들지고방 어득시근한 구석에서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한 해에 멫번 매연지난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구석을 나와서 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지르터 맨 늙은 제관의 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교의 우에 모신 신주 앞에 환한 촛불 밑에 피나무 소담한 제상 위에 떡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 과일들을 공손하니 받들고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보고 또 애끊는 통곡과 축을 귀에하고 그리고 합문 뒤에는 흠향 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 것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줌 흙과 한점 살과 먼 녯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룩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 것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 목구는 나무그릇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제사 지낼 때 쓰는 제기를 말한다. 제기라고 하지않고 목구라는 제목을 사용함으로 제사라는 용도로 한정하지 않고 집안에 오래 내려오는 고품정도로 의미를 확장한다. 우리의 풍속 중에 가장 큰 제사풍속을 이 시에서는 제기를 통해 구현하고 있다. 1연에서는 제기가 보관되는 고방의 모습이고, 2연에는 본격적인 제사풍속을 그리고 있고, 3연에서는 시인의 뿌리찾기를 시도하며 시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제기를 통해 떠올린다. 즉 이 시는 제기를 소재로 우리 전통의 제사풍속을 그려내면서 민족의 전통의식과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 들지고방; 허름한 방
* 말쿠지; 말뚝
* 데석님; 제석帝釋. 그 가정의 남자들만의 수명을 다스리는 한편 곳간안에 있는 모든 곡식을 주관하는 신
* 매연지난; 매년 지낸
* 최방등 제사; 평북 정주지방의 전통적인 제사풍속으로 5대째부터는 차손이 제사를 지낸다
* 대멀머리; 대머리
* 교의; 신주를 모신 틀
* 반봉; 생선 종류의 통칭
* 귀에하고; 귀로 듣고
통영統營
녯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었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나는 비가 나렸다
** 이 시는 백석이 경남 끝자락의 항구도시인 통영에 대한 기행시이다. 백석은 통영이란 제목의 기행시를 세 편 발표했다. 통제사가 있었던 옛날에는 번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한 항구도시 통영, 그러나 옛스러움이 남아있는 바다냄새가 그윽한 통영의 느낌을 전해준다. 특히 천희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녯날이 가지않았다함은 옛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으로, 옛여인의 순정한 삶을 미역오리와 굴껍지로 비유하고 있다. 이 천희라는 이름은 또한 시인의 마음에 각별히 남아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 미역오리; 미역줄기
* 소라방등; 소라껍질로 만든 등잔
통영統營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곳
산山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갓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갓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明井골은 산山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것만 갓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凍柏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女人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 한데 동백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이 시는 기행시이면서도 연시이기도 하다. 통영지방을 여행하는 즐거움이 시 전반에 경쾌하게 깔려 있는데, 시인의 이러한 흥취는 통영 명정골에 산다는 난이라는 여인에 대한 생각과 만남에 대한 기대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 고당; 고장
함주시초咸州詩抄
북관北關
명태明太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新羅백성의 향수鄕愁도 맛본다
노루
장진長津땅이 지붕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등거리 막베잠방둥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점이 백이고 배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하다
고사古寺
부뚜막이 두 길이다
이 부뚜막에 놓인 사닥다리로 자박수염난 공양주는 성궁미를 지고 오른다
한말 밥을 한다는 크나큰 솥이
외면하고 가부틀고 앉어서 염주도 세일 만하다
화라지송침이 단채로 들어간다는 아궁지
이 험상궂은 아궁지도 조앙님이 무서운가보다
농마루며 바람벽은 모두들 그느슥히
흰밥과 두부와 튀각과 자반을 생각나 하고
하폄도 남즉하니 불기와 유종들이
묵묵히 팔장끼고 쭈구리고 앉었다
재 안 드는 밤은 불도 없이 캄캄한 까막나라에서
조앙님은 무서운 이야기나 하면
모두들 죽은 듯이 엎데였다 잠이 들 것이다
(귀주사 - 함경도 함주군)
선우사膳友辭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하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산곡山谷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골짜기이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울을 날려고
집이 멫집 되지 않는 골안은
모두 터앝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낟가리가 쌓여서
어니 세월에 뷔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었다
나는 자꼬 골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채 있어서
이 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나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앉어서
지난 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 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 함주시초라는 제목으로 다섯 편의 시가 묶여져 있다. 함주는 함경남도 함흥시지역으로, 함주시초는 백석이 함흥에서 교사로 있던 2년여 시간동안 씌여진 글로 보인다. 북관이란 함경남북도의 별칭으로 백석의 기행시에 통영과 함께 많이 등장하는 지역이다. 북관지역은 한반도의 변방지방으로 소외된 땅 그리고 순수한 원시성이 공존하며, 역사적으로 고구려, 여진의 지역으로 우리민족의 숨결이 어려있는 땅이다. 이러한 북관지역의 모습과 풍속에서 시인은 우리민족의 원초적 생활모습을 찾아내고자 했다.
* 끼밀고; 씹고
* 배척한; 조금 비린
* 넘석하는; ~을 한번 넘어다보다
* 성궁미; 부처에게 바치는 쌀
* 화라지; 나무의 곁가지가 길게 가로로 뻗은 것
* 송침; 솔잎의 바늘
* 하폄; 하품
* 유종; 놋그릇으로 만든 종발
* 재 안드는; 불공이 없는
* 선우; 반찬 친구
* 나조반; 잔치나 술자리에 쓰이는 책상처럼 생긴 장방형의 큰 상
* 세괏은; 세괃은. 매우 기세가 억센
* 잠풍하니;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 터앝; 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
* 산대; 산꼭대기
* 돌능와집; 돌능에집. 너와집
* 남길동; 저고리 소맷부리에 이어서 대는 남색의 천
* 도락구; 트럭의 일본어식 표현
석양夕陽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쪽재비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러졌다
** 북관지역의 어느 장터의 모습을 그린 글인데, 장터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장터를 활보하는 영감들의 모습에 촛점이 맞춰져있다. 이 시의 제목은 석양인데 이는 장터의 시간이 석양무렵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영감들의 나이가 석양무렵이란 뜻도 된다. 그런데, 여기서 석양은 소멸과 조락의 이미지가 아니라 '쇠리쇠리한 저녁해'라는 표현처럼 여전히 눈부신, 기세가 등등한 석양의 이미지를 갖는다. 그만큼 북관영감들의 이미지가 강렬했다는 뜻이다.
* 학실; 돋보기
* 쇠리쇠리한; 눈부신
고향故鄕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늬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醫員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녯적 어의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故鄕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를 아느냐 한즉
의원醫員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醫員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사람이 가장 외로울 때는 돌봐줄 사람없는 타향에서 아파 누워있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가장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화자는 북관땅에서 홀로 병을 앓다가 의원에게 진맥를 받는데, 그 의원이 고향 어른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진맥과 간결한 대화에서 서로의 마음이 교류하다 일치되면서, 화자는 타관에 혼자가 아니라, 고향에 있는 듯한 푸근함을 느끼게된다. 마음의 교류가 무척 따뜻하게 다가온다.
절망絶望
북관北關의 계집은 튼튼하다
북관北關의 계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은 있어서
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어
검정치마에 받쳐입은 것은
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
어늬 아츰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퍼러운 언덕길을
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 백석이 함흥에 있는 영생여고보에서 영어교사생활을 할 때 쓰인 글로 보인다. 튼튼하고 아름답던 제자가 졸업 후에 억센 보통의 아낙네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에서 시인은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이 절망은 시인과 선생의 절망이며, 당시 한국여성들의 절망이랄수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의 개성이 잘 들어난 사랑시이다. 보통의 사랑시가 그리움과 이별로 인한 아픔에 치중했다면, 이 시는 사랑으로 인한 즐거움이 돋보인다.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보인다고 했다. 시인은 사랑의 마음이 눈을 내렸다고 생각하고, 그리움에 술을 마시다가 환상에 젖는다. 산골 오두막에서 함께 살자는 화자의 생각에 나타샤가 화답하고, 흰 당나귀는 사랑의 축가를 부른다.
* 출출이; 뱁새
* 마가리; 오막살이
* 고조곤히; 고요히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눈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 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낯선 곳에서 홀로 기거하면서 떠오른 상념들을 표현한 글이다. 자신의 마음을 흰 바람벽에 빗대어놓고 마치 스크린에 영상이 떠오르듯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영상과 글자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는 자신의 마음에 함몰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자세로 보인다. 어머니와 사랑했던 사람의 영상을 거쳐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구절이 절창이다.
* 앞대; 평안도 이남 지방
* 이즈막하야; 이즈음에 이르러
* 귀해하고; 귀여워하고
* 울력하는 듯이; 힘으로 몰아붙이는 듯이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제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흰바람벽과 같이 객지에서 홀로 지내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다. 제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편지를 보낼때 쓰는 주소로, 이 글은 일종의 편지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최근 화자의 근황에서 시작해서 자기성찰로 접어드는데, 생각이 무르익으면서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삶의 큰 틀까지 떠올린다. 그리고 그러한 운명 속에서도 꺽이지않은 자신을 정한 갈매나무로 환기시킨다.
* 쥔을 붙이었다; 주인집에 세들었다
* 딜옹배기; 질옹배기.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아주 작은 질그릇
* 북덕불; 짚이나 풀 따위가 함부로 뒤섞여 엉클어진 뭉텅이에 피운 불
* 굴기도 하면서; 구르기도 하면서
* 나줏손; 저녁무렵
* 바우섶; 바위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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