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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시민강좌에서 너무 추상적이었다는 지적에 따라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5월 22일 좀 더 구체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여 강의를 추가하였습니다.
사실 고구리 역사에 대한 기록 중 고구려 사람이 쓴 기록은 이것뿐입니다. 따라서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내용인데, 안타깝지만 아직 그 대접을 충분히 받고 있지 못합니다.
심도깊게 읽어봐주시기 바라면서 강의자료를 그대로 옮깁니다.
강의 자료 내용 : 광개토태왕 비문 정해서.hwp
廣開土大王 石碑文 正解書
참고 : 遣江 金澤榮, 韓國歷代小史
素昂 趙鑛殷. 韓國文苑
이 글은 위의 두 분이 기록한 한문해독문을 가지고
해석하였고 비교해 가면서 전문을 해석하였다.
주해와 비정(批正)은 따로 정리하였음을 참고
- 석비문은 어문체다. -
正解者 金 德 重 (한문학)
2012년 5월
대한민국 서울
특종 :광개토대왕 석비문 드디어 완역
○ 제도권 학자들이 못한 숙원을 무명한 한 학자가 사고를 쳤다
토종 한학자 김덕중(金德中) 선생이 광개토대왕 석비룬들 드피어 완역하였다.
선생은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 선생으로부터 광개토대방 비문에 대한 국내보고를 보고 처음 알았고 그 후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서와·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많은 연구서를 구하여 살펴보았으나 만족할 연구서를 본 적이 없다 하였다. 그래서 직접 원문을 구하여 연구하던 중에 광복회 산하 학술단체인 <삼균학회>가 보관하고 있던 <한국문원>에 실려있는 비문을 제공받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고, <한국역대소사>와 중국에서 발행된 몇 가지 비문과 비교 연구하던 중 사학계가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많은 사실을 밝혀내었다. 한일 간 쟁점이 되는 부분도 명확하게 증명했고 3회에 걸쳐 <학술심포지움)에서 발표되었으나 국내신문에는 단 한 번도 보도되지 않았다.
일부 학계는 신뢰와 찬사를 하고 있으나 제도권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으므로 완역문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그리나 선생은 가난해서 출판비용 때문에 아직 출판을 못하고 있으며, 연구 단체나 학교 등으로부터 강연을 요청하면 현장에서 직접 강연하려고 하니, 출판비를 부담해 주실 독지가나 강연을 듣고 싶은 단체나 개인은 선생에게 직업 요청 하기 바랍니다.
다만 선생은 컴퓨터 작업을 하지 못하므로 직강(直講)만으로 들을 수 있으니
직접 신청하시면 많은 정보를 알게 될 것이다.
선생 약력 : •5세부터 현재까지 63년간 한학만 했음.(현 68세)
•출가하여 범어사 강원 및 여러 사원에서 불경 이수
•민족문화 추진 등에서 고문 이수
현재 •삼균학회(고대문 연구원) 이사
•북아시아 문장학연구소 설립
•미래산업디자인 연구소 연구원
•한국미술협회 회원(한국화 부분)
주소 : 서울 용산구 갈월동 5-1(우편번호 140-800)
전화 : 02) 752-1216
H.P : 010-9653-1216
후원금 보내실 분은 (우리은행)1OO2-141-193588
- 감사합니다 –
序
오늘 펼치는 부분적 사론(史論)은 북아시아 동쪽에서 시작한다. 비롯한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해가 지면 서쪽 하늘에 샛별(金星)이 떠서 밤 사이 동쪽까지 오면 새벽이 열린다.
하늘이 훤하게 태양이 뜨면 꼬박 밤을 새워 대지를 지켜준 샛별은 사라진다. 햇살이 대지(大地)를 깨우며 강을 건너고 숲 속으로 들어가 그늘진 땅에 기운을 불어넣고 사람과 모든 생명을 깨워 일으킨다.
개국(開國)이래로 삼한조선(三韓朝鮮)의 하늘은 샛별과 태양이 늘 이렇게 지켜주고 있었으며 그래서〈삼한조선〉이란 어원에는 <샛별과 태양 의 나라>라는 뜻이 있었다. 백두산에 해가 뜨면 햇살은 대륙 구석구석을 찾아가 살피고 서간도(西間島)땅 한 숲 속으로 들어가 덤불 속 차가운 비석 하나에서 멈추고 맴돌다 떠난다.
천 육백 년이나 사람을 멀리하고 오로지 샛별과 황폐한 대지와 태양이 지켜준 석비! 바로 <광개토대왕의 석비>였고, 단군의 민족사는 이렇게 버려진 땅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어떤 이유로 한 영웅의 족적을 까맣 잊고 살았을까? 옛 조선의 후예 고구려가 망하여 땅을 잃더니 사람은 뿔뿔이 흩어지고 비석 앞을 지나다녔어도 우리 족의 유물인자도 몰랐고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 유산인지도 몰랐다.
중국의 한 왕족 향이라 했던 봉토(封土), 아무도 출입할 수 없게 봉토. 그래서 봉천(奉天)이라 했던 땅에 <광개토대왕>의 능이 잠자고 석비가 서 있었다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의 옛 땅이라 증좌가 아닌가. 그러나 부끄럽게도 다른 라 사람이 발견하였고 일본제국이 조 된 해석문을 인쇄하여 세상에 알리므로 우리는 그때서야 알았고,우리는 입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았던 역사의 배반자가 되고 말았다.
석비가 발견된 지도120년이 지났는데 일본이 잘못 전한 비문을 다 밝혀내지 못하였다. 우리 모두 <헛똑똑이>였고 잘난 권세가의 그늘에서 눈치만 살폈고 살기 바빠서 시간이 없었노라 한지 120년 세월이었다. 비석의 존재가 우리의 유산이면 제도권에서 그 내용을 진작 밝혔어야 했고, 정부는 보호하고 관리할 후속조치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재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연구서는 날아다니고 <드라마>가 제작되고 소설이 나오니 그러므로 누구나 다 <광개토대왕>을 잘 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학자는 무엇을 믿고 <고대사 부분에 하나도 고칠 것이 없노라> 큰소리 치고 냉소를 하며, 중국은 저희 것이라 문화유산으로 등재했으니 <광개토대왕의 비석과 비문>은 과연 누구의 역사가 기록되었단 말인가?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국가 재산을 팔아먹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유물 하나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을 대상이 없다하니 여러 말을 늘어놓고 변명을 해봤자 정부와 국민은 역사의 죄인이 분명하며 우리는 역사의식도 잃어버렸고 하나의 비석조차 지키지 못한 못난 민족이 되고 말았다.
오대양 육대주를 좁다 하고 정권조차 손가락 하나로 갈아치우는 똑똑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단 2천자 안 는 비문을 풀지 못해 수모를 당하는가?
문맹자 찾기가 더 어려운 나라, 세계 10대 강국이라 자랑하는 우리나라가 비석 하나 지키지 못했고 <비석문>조차도 풀지 못하는 나라라면 <대한민국>은 헛바람만 가득한 형편없는 나라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을 권력자 꽁무니만 붙잡고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약삭빠른 모리배 같은 족속이라 욕하는 나라가 있다 하므로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민족 이라는 우리의 자랑은 새빨간 거짓말만 늘어놓은 꼴이 되었다.
나에게 자식이 있으니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있어 나라꼴이 헛바람만 가득하다 해도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인사가 그래도 곳곳에 있다 하므로 그들을 믿고, 자식을 이 땅에서 계속 살게 하려고 정말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가 있노라 하고 증명할 일을 찾아내기로 한 것이 바로 오늘 발표할 <광개토대왕 석비문>에 대한 각론이다.
序
廣開土太王 碑文은 古代朝鮮의 글이며
高句麗를 뛰어넘은 朝鮮光復史다.
부제1. <한국문원〉에 기록된 출처문(한국역대소사)에 실려있는 太王 碑文에 관계된 한 ∙중∙일 학자들에 대한 知識論
부제2. 太王의 碑文은 漢文式 관념적 구조가 아니다. 古代朝鮮의 글이며 사실적 구조다.
부제3. 광개토태왕비문 해석문
한문식 해석문
조선사문 해석문
素昂曰「本碑文 在奉天省 賴安縣 有正書局 發行〈 好太또碑文> 者 해此也. 金逾 江所著〈韓國歴代小史〉中 亦載此文 今综合二本參互更正然…┘
①
趙素昻(1886~1951?) 선생은 광개토대왕 비석문의 해독본(인쇄 한문본)을 <한국
문원 : 조소앙 편저>에 수록하면서 자료출처를 실었다.
광개토太王 비문 연구자들은 <한국문원>에 실려 있는 <趙素昻의 광개토태왕> 비 문에 대해 관심이 높지 않다.
그 출처가 되는 창강 김택영{滄江 金碟榮) 선생의〈한국 역대 소사>에 「만주사람」 이 등장하는데 바로 만주인 榮禧筱峰씨에 대한 행적에 친일직 문제가 있어서 연구성 과까지 매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판단은 숲속에 앉아 나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므로 큰 뜻에서 보면 만주 사람은 잊허신 동족이며 그 동족을 통해서 미처 모르고 있었던 부분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해 주었으며 그것이 고대 민족사의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음을 擧論하려 한다.
1881~82년(고종 18-19). 신사∙임오 年間에 우리나라는 신사 유람단을 일본으로 파견 하였고, 임오군(壬午軍亂)을 겪어 국내 사정은 소란하다.
같은 해 만주 남방 경계지역 폐허에 버려저(?) 있는 거대한 석비(石碑〉를 어루만지
는 (按)사람이 있었는데 회인(懷仁} 지역에 사는 漢族 文士 王彦莊씨다.
비석은 이미 병이 들었고 王씨는 해독을 할 수 없이서 문우(文友) 만주인 文士 長白山人 榮禧筱峰씨에게 말하였다. <소봉>씨가 탁본해 살펴보니 魏의 碑文인 둣하고 고박(古撲)하여 품위와 무게감이 있었다 하머 孫過庭과 褚遂良의 書法을 참고 여러 해 연구하였으나 石刻의 글씨체는 晉代의 篆隸가 6~7이고 楷가 2~3. 筆勢는 장쾌하였으며 해독하였지 만 소감은 없었다 한다.
1904년(고종 광무8)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있었다. 筱峰은 회인(懷仁)에 주 둔한 일본군 병참감 大原少佐에게 비문 해독문(역자주 : 본래의 글씨체를 한자로 옮 김)울 기중하였다. 大原은 해독문을 일본 박물관으로 보냈고 r소봉j 은 오래 전에 「대원」보다 먼저 이곳(懷仁)에 근무했던 佐川 少佐가 탁본문을 가지고 갔다 하였다. 佐川의 탁본문도 일본 박물관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③
1908년(융희 21 한국민들이 일본으로 유람 차 내왕이 시작되었다. 일본 박물관에서 太王의 비석문을 해독한 귀중본이라 하여 해석문과 함께 다량 인쇄해 배포하므로 여 행자들이 구입하여 보여주니 우리나라는 비로소 비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槍江 선생은 1904년 이미 만주를 방문하여 발해사와 太王碑文을 구해와 연구하 고 있었다.
여기까지 「한국역대소사」에 기록된 태왕비문 출현에 관련한 일부분의 내용이 며,한문본을 필자가 해석하였다.(참고 : 한국역대소사,중앙도서관 소장)
④
위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1) 漢族 文士 王彦莊씨는 해독하지 못하였다는 것.
2) 長白山人(만주인) 榮禧筱峰씨는 부분적으로 해독했다는 것.
3) 일본군 소좌 佐川, 탁본문을 가지고 감.
4) 일본군 소좌 병참감 大原,해독문을 가지고 감.
5) 일본 행 유람객이 박물관에서 비문을 구입해 귀국.
위의 부분을 본론에서 계속 논의 할 것이다.
본 론
①
(詞文과 漢文)
광개토태왕비문 문장은 漢字로 쓰여 있으나 중국식 한문구조가 아니다. 비석문은 조선사문(朝鮮詞文)이어서 한문식 해석으로는 完譯이 어렵다.
따라서 조선어문에서 해독되어야 완역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시사를 인지 (認知)하게 한다. <朝鮮詞文>은 조선민이 쓰는 <조선식의 글>이라는 뜻일 뿐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다. 古代 중국과 한국은 소위 漢字를 공용으로 썼고 누구의 <창안>이라 는 의미가 있지 않을 때인데 이 시대의〈글〉은 말을 문장이나 문서에 쓰임에 따라 표현되는 도구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春秋戰國時代 공자 출현으로 <글>은 詩∙書∙春秋로 나뉘어 중국은 문장문화 가 변혁이 되므로 조선민은 여전히 <옛글〉을 쓰는 입장이 되었다.〈神誌秘詞〉가 오래된 고대 조선민의 기록이라 하고 태왕의 비문에도〈詞文〉으로 기록한다 하였으 므로 <조선인의 글>이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해독해야 하는가를 碑文에서 認知하게 되었다.
사례①에서처럼 중국인 文士는 해독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한자인 줄 알고 접근했고 해독 하려 했으나 詞文을 몰랐으므로 자신 있게 해독을 하지 못한 것이다.
사례② 만주사람 筱峰씨는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만주지역에는 아직 옛조선민의 詞文을 쓰고 있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사례③, ④, 筱峰씨는 왜 日本軍에게 접근했는지 설명은 없었다. 아무 조건 없이 해 독문을 전해주고 탁본을 건네줄 이유가 없다. 거래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 길은 없다. 그의 의혹스런 행적 때문에 안타깝게도 연구성과가 매도 당한 입장이다.
다만 일본에서 발간되어 배포된 비문은 대부분 일본인 특유의 의역판뿐인 것으로 봐 서 출처가 漢文 해석본이긴 하나 朝鮮詞文은 아니었다. 詞文을 알고 있는 筱峰씨의 해 독본을 어디까지 활용했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에서 발간되어 배포된 비문은 마술 같은 해석문이 여러 군데 있다. 그것이 대표 적으로 소위 신묘년(辛卯年) 사건이다. 이 마술 같은 해석으로 동북 아시아의 역사관 을 일본 중심으로 관심을 갖게 한 점과 太王 碑文의 실체에 접근하는 연구보다 목적이 다른 데로 돌아갔다는 점에 대해 본문에서 모두 밝힐 것이다. 日本은 실체도 모르면서 비문에 「倭」가 기록되어 있다 하여 마술 같은 해석으로 대륙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 는 목적에 이용했다. 따라서 만주인이 관계했으리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②
太王의 석비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중국서책에서 뿌리를 찾으려 하고, 해석을 한다며 日文을 엿보는 것은 조선민 양심에 反한다. 그러므로 조선민족의 정서가 있는 詞文을 먼저 공부를 해야 했었다.
詞文은 그들에게 있지 않으므로 太王석비의 文脈은 영원히 짚어내지 못할 것이다. 경악할 일은 太王의 石碑에 高句麗는 존재하지 않는다. 太王은 당연히 고구려의 王이 지만 비문에 왜 고구려가 단 한 자도 없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 연구자들은 文脈을 짚지 못했다고 하겠다. 筱峰씨가 해석은 했으나 문맥을 알지 못한 것은 그 동안 단절되어 전하지 못한 조선 민족의 역사에 대한 無知였을 것이다.
※ (우리의 고대사를 연구하려는 사람은 만주어문을 알아야 함을 여기서 인지 함 : 해석자주)
滄江 선생은 개성인이다. 철저한 儒學者에 朱子學派다. 「한국역대소사」 전문(全文)을 살펴보게 되면 詞文을 쓴 흔적은 없다. 전문은 한문구조이고 太王의 비문도 漢文구조로 編輯하였다. (발해사를 알기 위해 자료를 구해왔다고 했으나 보고 서에는 나타나 있지 않음을 참고: 역자)
趙素昻 선생은 경기도 양주 출신이신데 일찍 성균관(소년급제)에 들어갔고 儒學者 다. 양주 지역에는 南下한 流民의 토속서당이 있었을 것이고 (김삿갓도 이 지역에서 활동함 : 역자주) 북부의 잡글(詞文의 별명)을 알고 있은 듯하다.
두 분의 광개토태왕비문을 분석하면 瘡江 선생의 것은 고구려의 역사관으로 편저를 했고 趙素昻 선생의 것은 고조선의 연장선에서 편저한 것으로 봐서 素昻 선생은 太王 碑文의 文脈을 정확하게 짚었다고 판단한다. (두 분의 관계는 성균관의 대 선배와 후학 의 관계인데 임정 시절 중국에서 다시 만남이 있음을 자료 출처에서 확인됨 : 역자)
소앙 선생은 滄江 선생의 「한국역대소사」 한문본에서 연구한 비문을 다시 정리하 여 「한 본 한국문원」에 수록하였으나 詞文을 알고 정리하였으므로 고대의 韓國史와 한국문학에 새로운 師表가 될 자료로 참고할 가치가 있다 판단된다.
漢文과 詞文은 漢字를 供用하는 글이지만 편의상 대부분 漢文은 관념적 글이고 詞 文은 사실적 語文이다.
한문문장은 四聲 音韻과 律을 중국인 호흡에 맞도록 짜여 있고 지켜야 하는 文章法 에 구성된다.
그러나 詞文은 별명처럼 <반쪽 글,잡글,조선글> 등으로 낮춰 부르지만 이 글은 우리 호흡에 맞는 고대의 글이며 사실적 표현에 충실한다. 선비들이 귀족이 되려는 열망으로 전문적인 漢字 중심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관심에서 밀려났을 뿐이지 실재로는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삿갓>등이 절묘하게 활용한 文客이다.
이 글은 조소앙 선생이 고대 조선민의 글임을 발견한 공(功)이 있다. 詞文은 지금까 지 몰랐던 분야로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실재 太王의 비문이 詞文인 것으로 봐서 간과할 일이 아니다.
따라서 <국가 기초기반 연구>에 관한 고대 조선민의 글을 찾아 내고 그 동안 잊혀 졌거나 모르고 있는 새로운 분야를 찾아야 할 <과제>라고 판단된다.
국가가 깊은 관심을 갖기를 바라며 학계는 지금까지 보고가 되지 않았던 분야였음을 인지하고 일반적인 관심을 요구한다.
③
광개토태왕은 잃어버린 조국을 회복하였으므로 당연히 비문의 글이 고대문으로 쓰였다. 조선민의 문장으로 남긴 까닭을 후학자들은 빠르게 납득해야 할 것이다.
漢朝∙後漢이 열망하고 魏∙蜀∙吳∙三國도 멸망하였다. 晋이 승자라 하나 大小민족들이 재기(再起)하는 기회가 도래하므로 우리 三韓朝鮮 민족은 새로운 도전자들에게 시달려야 하는 시기이다.
광개토태왕은 강대해진 도전 세력을 물리쳐야 했고 견제해야 할 상대가 많았다. 그러나 신라의 승인과 토벌군 요청으로 「官軍」이 되었고 국격(國格)이 격상되어 잃어버린 민족회복에 대한 책무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太王 재위 중에 太王이 감당해야 할 대상은 대부분 옛 고조선 땅에 들어와 있는 나라들이어서 모두 토벌대상이 된다. 太王은 정복자가 아니며 古土를 회복하려는 <光復 토벌군〉의 선봉자다. 이로써 太王在位 시기와 장수왕 중기까지 三韓朝鮮은 다시 回生되는 시기였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가 독립된 大國으로 가지 않고 조선 민족회복으로 선회한 데는 고조선 계승자였던 신라의 승인과 토벌군 요청이 결정적 요인이라 판단된다. 옛 고조 선으로 회복되면 후 삼한은 다시 조선시대가 된다. 따라서 고구려,신라, 백제, 부여 등은 <조선의 여러 나라>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된다.
④
詞文이란 무엇인가?
Sentence 보다는 Writing
고대 조선민이나 중국민은 소위 漢字는 공용문자였다. 그러므로 글은「쓴다, 기록한다」의 원시적 수단이었고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孔子는 詞文에서 詩∙書∙春秋로 격조 있게 쓰기를 요구하고 분할하여 정리하였다. 따라서 詩文은 詩文답게, 書는 논리적 문장으로, 춘추는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 없앨 것은 없애고 장려할 것은 믿을 수 있는 글을 쓰도록 刪疑疑信하라 하였다. 이로써 詞文은 제자리에 남아 조선민만 쓰게 되었고 한문은 중국문화의 중심에 서게 된다.
⑤
詞文과 漢文의 결별
광범위하게 쓰이던 詞文은 고급스런 文章으로 진화되었다. 중국은 고급스런 문장으로 바뀌어 가므로 詞文은 도태되었고 후일에 漢文이라고 결정되어버린 중국문 장은 중국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모든 훈과 문화는 중국 중심으로 경도(傾倒)되었으며, 이때부터 글을 전문으로 쓰는 직업이 생기고 그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설립되고 策文만 쓸 줄 알아도 권력과 세력을 움켜쥐는 풍조가 생겼다. (참고 : 서예 발전도 마찬가지, 글 잘 짓고, 글을 잘 써도 등용되므로 중국 문장가와 서예가에는 장군이 많다. 왕희지∙안 진경∙구양수∙策士 孔明 둥)
조선의 九族 중에는 새로운 글을 창안하여 대응한 민족도 생겨났으나 중국과 가까운 조선민족은 같은 문자권이어서 고급스런 중국식 문장을 쓰는 풍조에 급격히 경도되었 고 사대사상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니 문장가들이 귀족화되는 매력에 금방 빠져 들어갔 다. 우리 민족학자 입에서 詞文을 유치하다 할 정도로 심화됐다.
漢朝의 조정에서는 조선의 글을 반쪽 글이라 경멸했고 거래하는 문서를 집어던지며 오랑캐라 하였다. 사정이 이와 같이 변하므로 민족의 글은 무당이나 백성서민들만 쓰 는 잡문(雜文) 취급을 받는 풍조가 나라를 덮었다.
중국 策士들이 조선王을 찾아와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며 策文을 올렸으나 글들이 「정직하지 않다」하여 모두 물리친다. <天命을 거부하고 天心을 잃으면 先王과 先祖 에게 반역>이라는 입장은 조선민의 國政기본철학이다.
王은 이런 글은 전장(戰場)의 장수들이 읽고 싸움에 대처할 것이지 백성을 상대로 참 고할 글이 아니라 했고,이로써 조선의 임금들은 天心을 잃으면 朝鮮人이 아니라 하 였던 것이다.
그러나 朝鮮이 漢朝에게 멸망할 때 조선의 文化는 이미 漢文化에 다 덮혀버렸고 山河 에는 - 오늘 날의「영문」을 배워야 살아남는다는 풍조를 보면 납득이 될 것 이다 - 귀족이 되려는 열망으로 한문책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렸다고 하였다.
⑥
詞文은 얼을 지킨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중국문장과 다르다는 배경을 길게 설명하였다.
비록 비석이 땅에 묻히고 병이 들었지만 지금까지 세워져 있었다면 - 중국인이 알아차린 비문이었다면 - 아마 흔적조차 없이 진작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太王의 비문 문장이 詞文이라 이미 말하였고 고조선을 향하는 연장선상에 있음을 앞에서 말했듯이 이 詞文은 조선민족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방책일 수 있었고 오직 조선의 존재를 한자권(漢字圈)에서 지킬 수 있는 방안이었으리라 사료된다. 그 사례가 중국인 文士 王彦莊씨가 같은 漢字文인데도 뜻을 파악할 수 없었음이며 그러므로 詞文은 알기 어려웠을 것이 당연하다.
⑦
비문 발굴과 해독에 관계한 지식인들
비문 발견 초기 중국 문사들의 사정이 대부분 같은 경우였다. 다음 글에서 주의해 살펴 보면 1876 ~1882년 사이 關月山, 王志修, 李大龍, 初天富, 陳士蕓, 元丹山 등이 拓本을 맡고 王彦莊,潘祖蔭, 談國桓 등은 釋錄을 맡아 太王비문 해독작업을 했다.
1884년, 일본은 탁본문을 懷仁에 주둔한 日本軍人으로부터 입수하고
1889년,일본은 이 탁본문을 加墨補字하여 釋文과 함께 會餘錄에 刊行 발표했다.
1908년,일본 여행자로부터 비문을 구입하므로 조선민들은 太王 비문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904년 중국으로 이주한 滄江 선생은 碑文 연구를 이미 하고 있었다.
1922년, 「한국 역대 소사」를 발간(중국 현지에서)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총독부가 압류도서로 비장하고 말았다.
조선사 48호,조선사 49호(조선일보) 신채호(申采浩) 부문 釋略 발표 1955년,정인보(鄭寅普) 부분 釋略 발표
1487년, 成俔(1439-1504) 觀光錄에 「읽지 못함이 한이 된다」하였다.
⑧
위의 예문에서 다시 한 번 연구자들을 살펴보면
王彦莊씨는 釋錄者 명단에 기록되어 있으나 王씨 뒤에 있을 만주인 筱峰씨는 명단에는 없다.
여기에는 중국文士들이 筱峰의 詞文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碑文해독은 漢文식 해석본으로 나오게 된 것이라고 판단된다.(역자주 : 만주인을 배제하므로 筱峰은 文友들에게 배반을 당했다고 판단됨)
成俱 선생은 대제학에 이른 정통 유학자다. 소위 사대주의 巨頭로서 선생의 지식은 漢學만 가득 차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므로 조선민의 글을 「유치하 다」고 하는 사람의 하나였다.
申采浩∙鄭寅普 선생의 釋略文은 불과 몇 줄에 불과하다. 역시 漢文式 해석이어서 詞文的 完譯은 아니다.(역자주: 별도참조) 筱峰을 배척한 일부의 중국 문사들은 太王의 비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발표를 하거나 책을 냈으나 한국은 뒤늦게 알게 된다.
⑨
뒤돌아보면 비석이 재발견 된 때부터 120년,지금까지 연구자들은 高句麗史로만 보았다. 太王 비문이 고대 朝鮮史의 연장선에 있음을 유일하게 발견한 趙素昻 선생 외에는 비문의 文脈을 정확히 짚은 자는 아무도 없다 판단하며, 현실이 이와 같다면 太王碑文을 연구하는 學者들이 중국에서 자료와 근간을 찾고,일본 연구자들의 해독 문을 엿보는 따위는 이미 전술한 것처럼 숲 속에서 나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결과 를 가지고 계속 논의해 온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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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詞文과 宋詞에 대해
기자조선이 사라진 지 1000년 후 宋나라에서〈詞〉가 나왔다.
唐宋八大家의 詩賦를 흔히 宋詞라 한다. 宋詞는 韻律이 漢文構造에 벗어 나지 않는 다. 그러나 朝鮮詞文은 四聲도 律도 따르지 않는다. 완전 자유로운 글이다.
宋代는 중국을 金과 宋으로 나누었고 이 시기에 등장한 唐宋八大家들은 金의 영향으 로 북쪽 사람(金)들의 글에서 그 자유로움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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詞文은 天心의 글이다
詞文은 詩∙書∙春秋(역사)를 생산했고 宋詞까지 생산했으나 앞으로 더 나올 것이 宋詞 뿐일까? 詞文은 政治,思想, 宗敎 등 연구할 부문이 무궁무진하다. 詞文은 모든 글의 源泉이며 그것이 고대 중국과 조선의 共用 言語體系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만 중 국은 버렸고 우리는 품고 있었다. (역자주 : 漢學을 지도하는 訓長들은 漢文과 詞文의 관계를 확실하게 알고 지도해야 함을 시사한다.)
우리 조선의 글은 머릿속에서 지어내는 관념성을 배제한다. 表現하려는 모든 대 상에 따라 가서 도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詞文은 音韻과 律에 갇혀 허세와 감동과 멋을 부리는 관념적 행태를 완전히 거부한다. 그러므로 詞文을 정리하면
1) 詞文은 자연의 글이며 天心을 전하는 글이다. 우리 민족이 天坪을 경영하는 사 상이둣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전한다.
2) 王의 말과 약속을 하늘의 말이라 여기고 정직하게 전하고 남기는 것이 詞文의 본분 이다.
3) 백성의 말과 약속을 정직하게 전하고 남기는 것이다. 전쟁기록,물품거래 둥 있는 그대로 기록할 뿐, 여기에 기록자가 관념적 논리와 수식을 더하여 생각을 다르게 하는 거짓 발상을 詞文은 허락하지 않는다.
4) 조선민의 글은 왕이나 백성이 모두 읽을 수 있고 策文처럼 뜻을 따로 숨겨 두고 쓰는 글은 허락하지 않는다.
5) 詞文과 漢文의 구별은 사실성과 관념적 구조를 보면 판단되고 규칙이 없는 것이 詞 의 규칙이고 音韻과 律을 갖추면 漢文이다. 詞文은 배우지 않아도 쓰고 지을 수 있다.
(역자주 : 역자가 쓰고 있는 글의 형태가 詞文처럼 나열해 쓰고 있으며 논리를 피하고 있음을 참고)
朝貢과 辛卯年사건
三 上
王以碑麗不貢 整旅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 部落六七百
한문식 해독 : 비려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군사를 정돈하고 인솔하여 토벌하러 떠나니 부산을 지나 부산에 이르러 염수 위에서 三部落을 파하고 六七百 영을 빼 았았다,
참고: 申采浩,鄭寅普 等 국내외 학자 다수 위와 같음.
조선 사문 해독 : 왕은 비려가 조공을 하지 않아 군사로 정리하였다.
왕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러 가는데 富山을 넘어가 負山의 鹽水上流에 이르러 비려왕(其上)과 部落六七百을 破하였다.
참고①: 滄江과 趙素昂은 한문으로 위와같이 釋讀함.
참고② : 지명(碑麗 ∙ 俾麗 ∙ 負山 ∙ 관山) 等은 歷史家들이 決定할 부문이므로 여기서는 再論하지 않을 것임.
解讀文에 대한 說明
위의 한문식 해석은 申采浩,鄭寅普 둥 국내학자와 북한학자 중국 및 일본학 자들은 일본에서 발간된 연구서에 해석문이 모두 비슷하다.
上
그러나 특이한 것은 <신채호> 선생은 <其>를 설명 없이 생략하고 해석하였다. 太王 이 군사를 직접 이끌고 山行으로 기습을 하러갈 때 <세 부락> (三部落)을 치려고 가지 않았다.
<其>는 비려를 칭하는 대명사다. 은 王이다. 비려의 王을 쳐서 항복을 받아내거 나 없애지 않으면 토벌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過富山>올 대부분 <부산을 지나>라고 해석하는데 역시 漢字의 관념으로 따라간 것이다. <사문>으로는 山行이므로 <넘다>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문장의 끝에 <사냥을 즐기며 왔다고> 대부분 쓰고 있으나 이미 <獲牛馬羣羊不可 稱數> 하였듯이 먹을 소와 羊이 넘쳤는데 또다시 <사냥질 하며 즐기고 왔다>는 것은 해석자들이 太王에 대한 인격을 격하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문사들이 太王을 格下 폄 훼함이다.
이 부분에 대해 瘡江과 素昂은 석독문에서 바로 잡았다.
〈任那加羅〉와〈從拔城〉은 존재하지 않는다.
太王於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官兵方至 倭 賊退 由新羅 躡蹤追來至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安羅人戌兵
한문식 해독 : 太王 재위 10년은 경자년이다. 왕이 명하기를 步兵과 騎兵五萬을 보내어 신라를 구하라 하였다. 男居城을 따라 신라성에 이르니 倭가 가득하였고 관병이 도착하니 倭賊들이 물러갔다. 신라로 하여금 뒤를 쫓아가니 任那加 羅 從拔城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안라인…
일본식의 해독 : 太王 재위10년 경자년에 王이 명령하기를 步兵과 騎兵五萬을 보내어 신라를 구하라 하였다. 남거성을 쫓아 신라성에 이르니 倭가 가득하였고 官兵이 도착하니 倭賊들이 물러갔다. 신라로 하여금 추격하게 하였고 任 那加羅 從拔城에서 항복하였다. 안라인 술병들은 ...
조선사문 해독 : 太王 10년은 庚子年,太王께서 직접 命하기를 步兵과 騎兵 五萬을 보낼 것이니(遣)가서(往) 신라를 구(救)하라 하였다.
男居城 끝(從)에서 신라성까지(至) 倭가 가득하였고,그 속으로 官兵이 바 야흐로 (이제 막,한참) 이르렀더니 倭와 賊이 도망을 치므로 신라가 뒤 를 쫓아 샅샅이 찾아 잡아오니(攝縱追來) 任那에서 加羅까지(至) 마침내(從) 城을 모두 빼앗았다(拔). 城에는 바로 安羅人과 戌兵들이 돌아와 복종하였다.
위에 보았듯이 중국학자들은 너무 성의가 부족하고 일본 학자들은 任那加羅와 從拔城의 존재를 창안해 내어 대륙 침략의 연고권을 만들어 관심을 갖게 하였다. 엉터리 해석으로 대륙침략의 정당성을 만들어 내려 한 日本學者들의 노고가 가엽다.
太王은 신라의 사신으로부터「倭人滿其國境破城池以奴客 爲民歸또請命 遣新羅 使還國」왜인들은 국경에 가득하고 노객(百殘兵)들은 城과 저수지를 파괴(破)하니 같은 권속(조선민)을 위하신다면(爲民) 王께서 와줄 것을 (사신은)목숨을 걸고 청하 므로 (신라의 사신을 보내고) 돌아왔다」.
이렇게 간절하고 목숨을 던지는 각오로 간청하였는데 사신의 충성심과 동포애(同 胞愛)롤 느꼈고 사신으로부터 신라왕의 신임장과「官兵」으로 격상한「요청서」를 받았을 것으로 추단(推斷)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러한「밀서」를 받지 않고 太王 스스로 「官兵」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확인한 것처럼「從男居城 至新羅城」은 남거성에서 신라성 사이 에 있는 여러 城들은 생략했고 끝에서 시작하여 신라성까지의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至任那 加羅」또한「任那에서 加羅까지」사이의 여러 城들이 있음을 인지할 수 있 다. 그러므로 확인되어야 할 것은 남거성에서 신라성까지 긴 거리에 <임나와 가라>가 그 사이에 있는지, <임나와 가라> 사이에 <남거성과 신라성>이 있는 것인지 관단이 쉽지 않다.
또,남거성에서 신라성까지 토벌할 때 倭人과 賊이 달아난 곳이 任那加羅라면 「至 任那加羅」는 해석에는 <임나가라 까지〉이며『마침내 城을 모두 빼앗음」으로 평정이 완료되었다 할 때 任那加羅는 存在하는 地名일 수 있다.
그러나 滄江 先生의 해독문에는 任那加羅는 없고 <古龍加羅〉가 있다. (참고: 한국역대소사)
따라서 <至任那加羅>를 <任那와 加羅>라고 할 수 있으나 任那加羅라고 할 때는 문장의 특성상 긴 지명은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任那加羅>가 실재한 곳이면 任那만으로도 任那加羅인 줄 알기 때문이다. <신묘> <정묘〉하면 신묘년, 정묘년이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이 지명 문제는 史家들이 결정할 문제이다. 다만 문맥(文脈)을 볼 때「任那加 羅」가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 이유가 실재 지명일 때 任那만으로도 任那加羅를 알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확실하게 인지해야 할 부분은 <從拔城〉인데 존재하는 城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至任那加羅 從拔城>은 <…까지 마침내 성을 모두 빼앗았다>를 일본학자의 해석대 로 <任那加羅 從拔城에 이르렀다>고 함은 漢文式 해석으로도 맞지 않는다.
아무래도 任那加羅의 존재를 존치시키려는 발상(發想)일 것이다, 日本이 任那加 羅에 然然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從拔城은 지명이 아니고 <서술문〉이다. 從은 〈마 침내〉의 부사 다. 종내,드디어, 기어이 이고,拔은 빼앗다의 타동사로서 강제로 뺏 는 것이며 地名詞라 해도 이렇게 망(亡)할 城의 이름을 왜 지었겠는가? 그리고 <城卽 歸服 安羅人戌兵>은 「城으로 돌아온 安羅人과 戌兵들이 복종하였다」라는 것인데 마치 倭가 從拔城까지 도망쳐 와서 이곳에서 항복했다고 해석한 것은 文脈을 제대로 알지 못한 無知함이다.
「광캐토대왕」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많으나 시원하게 잘 해석한 연구서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나는 60년 간 한문 서책을 가까이 하였으나「대왕」의 비석 문을 만나고 나서 나의 공부가 초보를 넘지 못함을 느꼈다. 문장이 웅장하고 깨끗하여 손에서 놓을 수가 없는 힘이 있었고, 누구나 쉽게 읽을 법한 글로 씌어진 것 같은데 읽을수록 깊은 문장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았을 때 경악하고 말았다. 「비문」은 단순한 대왕의 전승 공적비 기록을 넘어 국가의 이상을 기록한「프로젝트」였음을 알았고 송구스럽고 감히 내가 감당할 글이 아님을 알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문장이라 서 여러 번 덮었다가 펴고 다시 펴 보기를 거듭하다가 어느 새「화두(話頭)」가 되어 버린 것이 바로「신묘년(辛卯年)사건」과 「임나가라(任那加羅)」, 그리고「국강상 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剛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그리고「伽挪」가 일찍 사라 진 이유는 무엇일까? 백제와 고구려가 왜 번번히 부딪칠까? 왜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등이 꼬리를 물고 나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부분이었다,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글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숨은 뜻이 눈에 들어왔다. 광개토대왕의 모습이 보이 는 듯하고 이 어른이 가야,부여, 백제,신라를 얼마나 사랑 했는지 알았고 부득이 「가야(伽挪)」롤 버릴 결심을 왜 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군소 국가 「가야」는 자력으로 버틸 수 없어 강국으로부터 늘 침략을 당하고 매수당하므로 후일에 있을 더 큰 화근을 차단하기 위해 가장 빈곤했던 신라에게 빼앗아 주고 힘을 실어 큰 나라를 만 들어서 백잔과 왜의 세력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한 핏줄 동족속민(屬民)인 고구려,신라, 백제,부여가「잃어버린 옛 고조 선」 시대처럼 평화롭게 살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고,「고조선」이 갖추지 못했던 국 방력(國防力)을 더하여 조국을 단단한 반석 위(國剛上)에 올려 평화롭고 살기 편한(平 安) 큰 나라(廣開土境)를 대왕께서 실현해(好太王) 놓으려 했음을 알게 되었다.
대왕이 평생 안타까워 했던 일은「백제」가「왜」를 비호하는 세력으로 항상 자신 을 괴롭게 하므로 동족의 배반감을 안타까워 하였다. 백제의 태자를 인질로 데려다 키 운 일이 차마 없애지는 못하고 깨닫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대왕이 넓은 북방을 회복하고 군소국가를 정리하여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을 기틀 을 만들어 고구려,신라,백제, 부여, 사국(四國)을 영원히 존재할 국가로 있게 할 국 기를 그렸음에도 형제국가들이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함을 알았다.
「아! 그랬었구나….」 - 중국과 일본 측이 비문의 비밀을 먼저 알고 뜻을 훼손하고 감추려 했던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광개토대왕 「石文」의 깊은 뜻을 그들은 알고 왜 우리만 모르는가? 해석자(解釋者) 김덕중은 삼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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