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루치 공의 발자취 따라 초골리사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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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2 베이스캠프 부근에서 바라본 초골리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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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이탈리아의 아브루치 공이 이끄는 원정대가 K2 등정 시도 이후 아브루치 공은 가이드들을 대동하고 초골리사의 북동릉으로 몸소 등반하여 7,500m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악천후를 만나 정상을 바로 눈앞에 두고 퇴각했다.
6월 20일, 디엠베르거는 다음 날 헤르만 불과 초골리사 빙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텐트와 식량을 짊어지고 먼저 떠났다. 그 날 오후에 마르쿠스와 프리츠가 브로드피크의 BC로 돌아왔는데, 두 사람은 사보이아피크를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하여 7,400m 이상의 지점까지 진출한 눈치였다.
6월 21일, 디엠베르거와 헤르만 불은 초골리사의 거대한 빙폭에서 가까운 상부 발토로 빙하의 모레인(moraine·빙퇴석) 지대에 ABC(전진캠프·5,000m)를 구축했다. 22일 두 사람은 등로를 정찰했다. 그들의 등반 루트인 초골리사의 북동릉은 카베리 콜(6,360m)에서 시작하여 북동벽의 좌측 가장자리를 따라 수많은 눈처마를 왕관처럼 뒤집어쓰고, 능선상의 거대한 무명의 숄더(7,150m·그들이 리지 피크라고 명명함)를 넘어 7,010m 지점의 작은 콜로 내려섰다가, 거기서 다시 가파르지만 등반이 그다지 어렵게 보이지 않는 정상능선으로 이어진다. 최난 구간은 리지 피크 정상 위쪽 능선으로 흰 이빨처럼 늘어선 거대한 눈처마들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카베리 콜 쪽으로 등반을 시작, 빙폭의 집채만 한 빙괴들, 위태로운 수많은 빙탑들 사이를 누비며 전진했다. 헤르만 불은 불도저 같은 힘으로 허리까지 빠지는 가루눈 속에 골목길 같은 깊은 눈 도랑을 남기며 등로를 개척하여 카베리 콜로 이어지는 스노 립(snow rib)의 마루에 붙었다. 그들은 눈밭으로 등반을 계속하여 설릉상의 5,500m 지점에 위치한 암반 옆에 식량과 장비를 담은 비박색을 데포시켜 놓고 전진캠프로 하산했다. 다음 날은 기상상태가 좋지 않아 진진캠프에서 하루 휴식을 취했다.
6월 24일, 두 사람은 텐트를 걷어 짊어지고, 빙폭 밑에서 자일을 묶고 빙폭 구간을 돌파했다. 설릉으로 전진하여 이틀 전 데포시켜 두었던 식량과 장비를 회수하여 나누어 짊어지니 각자의 짐무게가 30kg을 초과했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스노 립이 이제 고래등같이 넓어졌다. 그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전진했는데, 여러 개의 거대한 크레바스를 우회했기 때문에 헤르만 불은 하산 시 안전을 고려하여 눈밭에 여러 개의 등로 표시기를 꽂았다. 그들은 드디어 넓이 800m의 카베리 콜에 도달하여 텐트를 설치했는데, 거기까지 5km 전 구간을 황소의 힘을 지닌 헤르만 불이 리드했다.
25일, 두 사람은 텐트를 다시 걷어서 짊어지고 가파른 설사면을 올라 초골리사 북동릉상의 작은 숄더 아래 최종 캠프(6,700m)를 구축했다. 26일은 폭설과 강풍 때문에 등로 답사 후 텐트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27일은 화창한 날씨였다. 두 사람이 오전 7시에 리지 피크 정상(7,150m)에 올랐을 때 그들 앞에 최난 구간이 펼쳐져 있었다. 우선 좌측은 단애이고 우측은 수많은 눈처마가 옆으로 크게 튀어나와 매달려 있는 칼날능선을 돌파해야 했다. 두 사람은 자일을 묶고 서로 확보하면서 이곳을 통과했는데, 현기증을 유발하는 좌측 절벽이 사람을 위험한 톱니 모양의 눈처마 능선쪽으로 자꾸만 밀어부쳤다.
그 다음은 벌집 형태의 수많은 커다란 바위 구멍에 가루눈이 들어찬 암벽지대가 나타났다. 바위 구멍에 빠지면 가루눈이 가슴 높이까지 차 올랐는데, 체중이 가벼운 헤르만 불도 몇 번 빠졌다. 그 다음엔 바위 표면에 얼음이 얼어붙은 위험한 구간이 나타났다. 헤르만 불이 뛰어난 등반기량을 발휘하여 그들은 이 난구간 전부를 별 탈 없이 돌파하고 오전 9시에 7,010m 지점의 V자형 작은 안부에 내려섰다.
이제 정상능선 600여m는 그냥 걸어서 오르기만 하면 될 것 같은 쉬운 루트였다. 그들은 늦어도 정오까지는 등정을 끝낼 성 싶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한 후 등반을 재개했다. 헤르만 불이 자일을 휴대하고 앞장섰다. 그들이 교대로 리드하며 빠른 걸음으로 7,200m 위쪽 지점에 도달했을 때 북동봉의 암탑이 보였다.
그 때 갑자기 짙은 회색 구름이 산아래 쪽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몹시 사나운 강풍마저 휘몰아쳐 아래쪽 리지 피크에서 점점 세찬 눈보라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정상을 향해 높이 오를수록 기상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들을 뒤덮는 회색안개 때문에 가시거리도 점점 짧아졌다. 삽시간에 초골리사 북동릉 상부에서 지옥이 연출되고 있었다.
알프스 암빙벽 루트 270개 오른 산악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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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골리사 북동릉 상부. 헤르만 불은 화살표가 표시돼 있는 지점에서 추락했다.
- 그들이 7,300m쯤 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앞서 오르던 헤르만 불이 발길을 돌리며 즉시 하산하자고 소리쳤다. 블리자드(눈보라)가 눈 위에 난 그들의 발자국을 다 지워 버리면, 가시거리가 그렇게 나쁜 상황 속에서 그들이 하산할 때 길을 잃어 눈처마를 밟고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가시거리는 거의 제로 상태였다. 그 구간을 오를 때 헤르만 불이 리드했기 때문에 하산할 때는 디엠베르거가 앞장을 서서 내려오게 되었다. 눈사태의 위험성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항상 10m에서 15m의 거리를 유지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강풍으로 인해 그들은 허리를 구부리고 하산했다. 어떤 구간에서는 그들이 오를 때 낸 발자국들이 이미 눈보라에 의해 다 지워지고 아이스 액스를 깊이 박았던 구멍 자국만 남아 있었는데, 그 수마저 점점 줄어들었다. 디엠베르거가 뒤돌아보았을 때 헤르만 불이 잘 내려오고 있었다. 디엠베르거가 7,200m 쯤 되는 지점에 내려 왔을 때,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설사면이 진동하며 그의 발 밑의 눈이 꺼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기겁을 하며 순간적인 반사작용으로 우측의 가파른 설사면 쪽으로 두 서너 발자국 껑충껑충 뛰고 난 다음 넋이 나간 채 15m쯤 내려 와서 제정신이 들었다.
그는 나중에 헤르만 불에게 자신의 민첩한 동작을 자랑삼아 말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서야 그는 헤르만 불이 무사한지 살피려고 뒤돌아보았다. 조그만 눈더미 때문에 위쪽으로 시야가 막혀 있었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 헤르만 불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초조한 심정으로 “헤르만! 무슨 일이 있어요? 헤르만~” 하고 목청껏 소리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디엠베르거는 숨을 헐떡거리며 오던 길로 되짚어 올라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헤르만 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발자국이 금방 무너져 내린 눈처마의 가장자리로 이어져 있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디엠베르거가 혼자 허둥지둥 정신 없이 하산하여 리지 피크 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기승을 부리던 악천후는 자취 없이 사라지고 기상상태가 거짓말처럼 호전되었다.
그는 북동벽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헤르만 불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비통한 심정으로 5,500m 지점까지 내려와 뜬눈으로 비박하고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브로드피크 BC로 돌아왔다. 세 사람은 즉시 초골리사 북동벽 밑에 가서 설맹에 걸린 디엠베르거를 산 밑에 남겨놓고 마르쿠스와 프리츠 두 대원이 수색활동을 전개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게 32세의 젊은 나이에 초골리사 북동릉 상부에서 영원히 사라진 위대한 산악인 헤르만 불은 생전에 알프스의 그랑 카퓨셍 동벽, 드류 서벽 등 유명한 암벽·빙벽 루트 270개를 등정했다. 그 중에 11개 루트는 초등이었다. 그는 1953년 낭가파르밧 북릉의 C5(6,900m)에서 동료와 함께 정상으로 출발했는데, 질버자텔 위쪽에서 동료가 등반을 포기했지만 그는 단독으로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C5에서 정상까지 직선거리 6km, 에베레스트의 북동릉이나 서릉보다 긴 구간을 17시간 만에 돌파한 영웅이었다.
일본팀, 사고 이듬해 최종 캠프에서 일기장 발견
브로드피크의 초등 루트인 웨스트 스퍼와 북릉 루트를 순수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 사람은 폴란드 산악인 크르치츠토프 비엘리츠키(Krzysztof Wielicki·8,000m급 14개 봉 5번째 완등자)다. 그는 1984년 22시간 만에 이 루트로 등정과 하산을 완료했다.
같은 해 이탈리아 산악인 레나토 카사로토는 브로드피크 북봉(7,550m)을 북릉으로 7일 만에 단독 등정하고 3일 만에 같은 루트로 하산했다. 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밧 8,000m 지점의 절벽에 서서 비박했듯이 레나토도 등정시에 브로드피크 북봉의 북릉 7,500m 지점의 절벽에서 서서 비박하는 고초를 겪었다.
같은 해 브로드피크 초등자 쿠르트 디엠베르거는 영국의 여성 산악인 줄리 툴리와 이탈리아 K2 북릉 등반대에 합류하여, 고소 적응 훈련 등반차 27년 만에 브로드피크를 노멀 루트로 재등했다. 그들은 하산 도중 서벽에서 눈사태에 휩쓸려 추락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같은 해 폴란드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와 보이체크 쿠르티카 두 사람은 브로드피크 북봉을 서릉으로 오르고, 중앙봉과 주봉을 트래버스한 후 노멀 루트로 하산했다. 그들은 6일 만에 순수 알파인 스타일로 ‘하늘 능선 종주’라는 이 위업을 달성했다.
1992년 5명의 산악인들로 구성된 스페인·이탈리아 합동대는 브로드피크 중앙봉(8,013m)의 북동벽, 즉 거대한 빙벽을 오르고 주봉 아래에서 침낭도 없이 비박하고 이튿날 등정에 성공했다. 1994년 멕시코 산악인 카를로스 카르솔리오(Carlos Carsolio·8,000m급 14봉 4번째 완등자)는 단독으로 난이도 V급 암벽과 경사도 70도의 빙벽을 돌파하며 브로드피크 주봉의 서벽 7,100m 지점에서 중앙봉과 주봉 사이의 안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위쪽 정상 피라미드를 직등하여 남서 스퍼 루트를 개척했다.
헤르만 불이 실종된 다음 해인 1958년 일본의 구와바라 대장이 이끄는 교토대학 산악부원들이 초골리사의 북동릉을 완등했다. 그들은 가슴까지 차오르는 심설을 러셀하며 돌파하고, 후지히라와 히라이 두 대원이 오후 늦은 시각에 북동봉상의 높이 40m 암탑에 올랐다. 그런데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때까지 초골리사의 최고봉으로 잘못 알려져 왔던 북동봉(7,654m)이 남서봉(7,665m)보다 높이가 11m 낮다는 놀라운 측량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일본대는 초골리사 북동릉상의 6,700m 지점에 위치한 전 년도 헤르만 불과 디엠베르거의 최종 캠프지에서 헤르만 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들은 당시 가셔브룸 4봉을 초등한 이탈리아 산악인 월터 보나티에게 그 일기장을 맡겼고, 그 일기장은 후에 디엠베르거를 경유하여 헤르만 불의 아내 게네를에게 전달되었다.
1975년 라트너 대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대가 남서릉을 돌파하고 초골리사의 최고봉 남서봉(7,665m)을 초등했다. 1986년 팬쇼 대장이 이끄는 영국대가 남서봉을 등정한 후 길이 1km의 수평능선을 지나 북동봉을 등정하고 북동릉으로 하산하여 초골리사를 트래버스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스페인대가 60도 경사의 빙사면에 오버행으로 매달린 빙탑들을 돌파하고, 북동봉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루트, 즉 북릉을 등반했다.
/ 글 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