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호개 할머니 / 고병균
부산초등학교 주변에 도착했다. 약속시간이 되려면 아직 1시간 이상 남아있다. 무료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자동차의 먼지를 닦아내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 자동차를 용동마을로 돌렸다.
마을 입구에 막 접어들었는데, 꼬부랑 할머니가 손을 든다.
‘그냥 지나칠까?’
순간 마음의 갈등이 생겼다. 까만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손에는 작지만 비닐봉지까지 들고 있는 할머니, 그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럴 수도 없다.
“어디로 가세요?”
“호개요.”
여기서 호개 마을까지는 3Km 가량 된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코앞이라 거기를 지나가지도 않는다.
‘안 된다고 그럴까?’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어.’
또 두 가지의 마음이 충돌했다.
‘착한 일을 하라고 기회를 주신 거야.’
이런 생각이 퍼뜩 스쳤다. 더구나 11월의 늦은 가을이라 해는 짧다. 할 수 없이 문을 열었다.
폐교된 부산동초등학교 주변을 지나고, 효자리 마을 입구다. 왼쪽 논 몇 마지기 지나면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아내의 이모님께서 사셨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금자교이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금장마을이 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효자리 산 매봉에서 금새가 날다가 이 마을에 내려앉았다고 하여 비금낙지(飛禽落地)의 풍요로운 땅이라 하고, 마을의 동북쪽에 수령이 500년을 넘는 팽나무가 있는데, 나뭇잎이 위에서부터 고르게 피면 풍년이 들고 아래부터 불규칙하게 피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 달밤에 누런 닭이 자기 그림자를 보며 놀았다는 등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등장할만한 옛이야기가 풍성한 마을이다.
금자교를 건너면 호개 마을이 바로 앞이지만 잠자리 포수처럼 걷는 할머니 걸음으로는 아직도 멀다. 다리를 지나자마자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직진하는 큰 길은 호개 삼거리를 지나 장흥읍으로 이어진 길이고, 왼쪽 좁은 길은 냇물을 따라 호개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할머니, 어디로 갈까요?”
“왼쪽으로요.”
할머니는 자기 집으로 가는 골목길 입구에서 내렸다.
“고맙습니다.”
인사말을 하고는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떼신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쓸쓸하게 보인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깔리는 저녁, 먼 길을 가는 나그네처럼 …….
‘할머니 건강하세요.’ 혼자 말로 되뇌고는 차를 돌렸다. 할머니를 맞아주는 따뜻한 가족이 있기를 바라며 돌아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는다. 채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착한 일을 한 것 때문일까?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다. 어린 시절 땀띠를 식혀주던 고향 마을의 옹달샘, 서당샘의 물을 한 바가지 떠서 온몸에 끼얹은 듯 시원하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