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근세 해전 : 체사피크만 해전 - 빈센트곶 해전 - 나일 해전 - 트라팔가르 해전
해전을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로 나누어 연재하는 중인데.... 처음 올린 “고대 3대 해전 ”인
살라미스 해전, 포에니 전쟁, 악티움 해전은 “노를 젓는 갤리선” 이 해전의 주축이었으며.....
원거리 전투는 불가능하니 뱃머리를 청동으로 단단하게 해서 이른바 “충각 작전” 으로 적의
배를 들이받고 갈고리를 던져 묶은 후 사다리를 타고 적의 배에 올라 “육박전” 을 전개 했습니다.
두 번째 올린 “중세 해전” 은 중국에서 “나침반 과 화약” 이 전해져서 “대포” 가 등장했는데
초기의 “레판토 해전은 갤리선” 에 대포를 실었지만 아직 대포의 성능이 낮은지라 육박전
도 있었던 반면에 후기인 “칼레(아르마다) 해전” 은 갤리선은 소수이고 주력은 “범선” 에
많은 대포를 장착해 “포 사격으로 승부” 를 가린 것으로 해전에 변화가 온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3번째 “근세 해전” 은 체사피크만 해전과 빈센트곶 해전, 나일 해전에 트라팔가
해전이니 칼레 해전이 좀 발전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거리를 좁혀서 “일자로 서로 마주보고
포사격” 을 하던 중세시대 초기 해전이나...... 종대로 전진하며 포를 쏘는 칼레해전 과는 달리
“전술” 이란게 등장하는데 “영국 해군이 고정관념을 깨고 새 전술” 을 선보이는게 인상적 입니다.
근세 해전이 등장한 배경으로는 유럽은 절대왕정 시기를 거쳐 국가의 전쟁수행 체계가
정비되어 간 16세기 이후 해전의 수가 크게 늘어나니 해상 항로의 보호 유지와 확대
“제해권” 이 국가의 세력 팽창과 경제 발달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조직적인 해군” 을 육성하고 서로 경쟁하게 됩니다.
합동군사대학교 김정현씨는 "해전은 국가의 흥망성쇠" 를 갈랐으니 최고성능의 무기에 효율적인 합동
작전을 수행한 나라가 승리했고 예전과 동일한 방식대로 전투한 나라는 패했으며 승리한 아테네,
로마, 영국과 미국은 해양을 지배해 패권국가가 된 반면에 패전국은 약소국가로 전락했다고 말합니다.
1) 체사피크만 해전 : 전근대 해전으로 프랑스가 승리한 결과 미국이 독립하다!
근세 해전은 대부분 넬슨등이 새 전술을 선보인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지만 첫번째 “체사피크만 해전”
은 칼레(아르마다) 해전 200년 후인 1781년 9월 5일 벌어졌는데 넬슨이 등장하기 전이고 중세시대
칼레 해전의 “관습” 이 남은 탓인지 별다른 전술 없이 맞붙은 해전으로 드물게 “프랑스가 승리” 합니다.
“체사피크만 해전”(Battle of the Chesapeake) 은 미국의 동부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연안에 걸쳐 있는 넓은 체사피크만에서 “미국 독립전쟁” 중에 대륙 독립군을 지원하는
프랑스 해군 과 독립을 막으려는 영국 해군 간에 벌어진 해전이니 프랑스의 승리로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는데...... 만약 패배했으면 미국 독립은 뒷날로 미뤄졌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제독 그라드 백작 이 지휘하는 24척의 전열함 과 영국의 제독 그레이브스 남작 이 지휘하는
전열함 19척이 체사피크만에서 서로 맞붙었는데.... 프랑스 함대는 2척이 침몰한 반면에 영국 함대는
무려 6척이나 침몰했으니 훗날 툴롱 해전과 더불어 매우 드물게 “프랑스 해군이 승리한 해전” 입니다!
영국 해군은 미국 동부 “요크타운 요새” 에 고립된 콘월리스의 영국 육군을 구원하지 못하고 해군의 패배로
끝났는데, 1588년에 스페인 무적 함대를 물리치고 제2차 세계대전 까지 357년 기간 동안에 “가장 심각한
패배” 였으니..... 요크타운에 갇힌 영국 육군은 “보급품과 증원 병력” 이 끊긴지라..... 더 싸울수가 없었습니다.
프랑스 함대 승리로 버지니아 요크타운에 주둔하던 찰스 콘월리스 장군의 부대에 증원군을 보내려던 “영국
해군의 임무는 무위” 로 돌아갔으며, 워싱턴군이 뉴욕에서 체사피크만을 통해서 군대와 보급 물자를
운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으니 이로 인해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항복” 하고 "미국은 독립" 을 이룹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라! 프랑스 는 캐나다와 이집트, 인도와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에 늘
영국에 패배 하다가 미국에서는 모처럼 이겼지만 엄청난 “전비로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자 루이 16세 는 “새로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 “3부회” 를 소집했다가 이때 생긴
국민회의 를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다 “대혁명”이 발생해 망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립니다.
명나라가 국력이 쇠퇴하면서 부정부패에 몽고족 보바이의난 전쟁중 발생한 조선의 “임진왜란” 에 황제국
체면 때문에 “7년간 연인원 20만 대병” 을 파견해 재정이 파탄나 세금폭징으로 농민반란 이 거세지고
여진족 통제에 소홀해 망했으니 조선에 파병하지 않고 압록강에 대군을 주둔만 시킨채 여진족을 통제
하며 세금 폭징을 피했으면 7~80만에 불과한 여진족에게 망하지는 않고 좀 더 나라가 유지됐을 것입니다.
2) 영국 저비스 제독의 적 전열 차단과 넬슨의 과감한 포격전인 빈센트곶 해전
영국 해군은 아르마다해전 이후 “군함을 기술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없으나 1781년 체사피크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에 패한 이후에는 전보다 훨씬 “효과적인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으니 먼저 “항만을 봉쇄”한 다음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1794년 부터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지는 1805년 사이에 모두 “여섯차례 큰 승리” 를 거둡니다.
첫째, 영국 해군은 알기 쉬운“신호체계”를 도입하여 지휘관의 통제하에 “일사불란하게 해상 전술을 펼칠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고 둘째, 영국 해군에는 “뛰어난 지휘관” 들이 많았는데 1794년 6월 1일
영국군은 대서양에서 항해하던 프랑스 해군을 발견하고는 즉각 공격함으로써 최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영국 함대는 처음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확보한후 “사선진 대형”으로 프랑스함대를 덮쳐
“적 함대 전열을 절단”하고는 바람을 안고 접근전을 벌였으니 적이 바람을 타고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데, 해전술 발전에 하나의 획을 그었으니 그때까지 일반적인 해전술
은 칼레 해전 처럼 “마주 보고 ” 서서 각 선박이 “차례로 질서있게 포를 쏘는” 것이었습니다.
칼레 해전은 서로 “신사적(?) 으로 포격” 을 하다 보니 어느 쪽도 뚜렷한 큰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니 이때 지휘관들은 적을 격파하기 보다는 “엄격한 정렬을 유지”하는데 골몰
했기 때문인데, 1781년 이후 영국군의 신전술은 1797년 “세인트 빈센트 곶” 해역에서
영국 제독 “존 저비스 경과 넬슨 제독”이 스페인 함대를 무찌를 때 다시 그 위력을 입증 합니다.
스페인 함대는 카르타헤나에서 출항해 카디즈로 향하고 있었고 프랑스 함대는 브레스트
에서 출항해 스페인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카디즈로 향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이에
저비스 제독은 양국 함대의 합류를 차단하기 위해 함대를 카디즈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영국은 전열함 15척을 포함 22척이고 스페인은 전열함 27척을 비롯 39척이었습니다.
지브롤터 인근 빈센트곶 해전에서 넬슨은 접근전에서 용맹한 행동으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저비스는 적 전열을 절단” 한 다음 “합쳐지기 전 뱃머리를 돌려” 다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영국 전열 뒤쪽에 위치한 넬슨은 영국군 선두가 “시간내에
뱃머리를 돌릴수 없음” 을 깨닫고는 그의 캡틴함은 신속하게 “적 전열로 뛰어” 들었습니다.
넬슨이 적 함대 선두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에 돌격하는 돌출행동을 하자 134문을 탑재한 적함의
화력에 밀려 대파되니 엑설런트가 구해주자 넬슨은 다시 80문을 탑재한 적함 산 니콜라스
에 도선해 배를 나포했지만 112문을 탑재한 적 함 산 호세가 접근하는데 이 과정에서
산 니콜라스와 산 호세의 밧줄이 엉켜버리자 곧장 넬슨은 산 호세에 올라타서 항복을 받습니다.
넬슨은 전투 중에 “순간을 포착하고 명령없이 대열을 이탈해 독자적”으로 취한 행동
이라 실패했으면 “문책을 당할 행동” 이었으니, 자신의 배 캡틴에 74문의 대포를
장착한 넬슨은 무려 “적선 7척과 교전” 했으며.... 그동안 영국 함대가 되돌아와
합류함으로써 영국군은 대승을 거두니 그 결과 영국은“대서양과 지중해를 장악”합니다.
3) 기습전에 적전열 차단으로 넬슨의 주가가 발휘된 나일해전- 이집트를 차지하다!
스페인과 빈센트곶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새로운 전술인 “저비스제독의 적 함대 전열
절단” 작전과 “넬슨의 과감한 적진 돌격” 과 집중포격으로 대서양과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했는데...... 바로 다음해인 1798년 “나일 해전”이 벌어지니, 넬슨은 나폴레옹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건너가자 뒤를 추격했지만 풍랑 때문에 따라 잡지는 못합니다.
열흘후 넬슨 함대가 이집트에 나타났으나 이미 “석양” 무렵이라..... 프랑스 함대는 “안전”
하다고 판단하고 “닻”을 내리자.... 어두워질 때를 기다렸다가 넬슨은 프랑스 함대
뒤쪽으로 접근하여 예전에 없던 새로운 전술인 “기습 공격”을 가했으니 프랑스 함대는
혼란에 빠졌고 13척 군함중 2척만이 탈출했으니 “이집트는 영국의 손” 에 떨어지게 됩니다.
육전에서 무적인 나폴레옹 은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를 노렸으니
과학자, 교육가, 기술 공학자와 측량가도 포함됐다는 점에서 문화적인 면도 있었으며
동행한 지식인들은 적해와 홍해 사이의 운하를 둘로 나눌 수 있는 가능성를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넬슨의 14척 영국 함대 가 8월 1일 도착했을때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만에 닻을 내리고 있었으며
8미터가 채 안되는 모래톱 근처 얕은 물위에 떠 있었으니... 함대의 우현 측이 북동쪽과
열린 바다를 마주볼 때 모래톱의 남서부는 함대의 좌현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황 이었습니다.
15척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는 브루이 제독은 성 빈센트곶 전투등 “넬슨의 전술을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해서 제독은 영국 전함이 “프랑스 함대 대열을 둘로 잘라” 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닻을 내린채 전투 대형을 연결” 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브루이는 “전투가 다음 날 아침” 에 시작될 것 으로 믿었으니 당시는 그게 “상식” 이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수심이 얕으며 잘 모르는 곳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야간 공격” 을 가해올 것
이라고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 준비는 “여유만만” 이었으니.... 프랑스 함대는
밤을 틈타서 도주할 가능성도 준비했는데 넬슨 제독은 프랑스 함대가 얕은 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정박해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자신의 함대를 둘로 나누도록” 명령 합니다.
첫번째 대열은 프랑스 전열과 모래톱 사이를 통과하고 두번째 대열은 수심이 깊은 쪽에서 접근하도록 지시
했으므로 “프랑스 함대는 양쪽에서 포격”을 받게되었으니.... 영국 전함 컬로든호가 좌초되었으나 나머지
전함들은 해상에서 움직이며 프랑스 함대를 1척, 1척씩 따로 떨어뜨려 놓기 시작하니 “각개분리 전술” 이라?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프랑스 전함들이 “동료를 도우러 오는걸 불가능” 하게 했으며 넬슨은
여러척의 전함을 “한번에 한척씩 목표물로 화력을 집중” 시킴으로써 작전을 완벽하게 실행
할수 있었으니 “프랑스 기함 오리엥” 은 영국 전함 벨러로폰으로 부터 “집중 포격” 을 받고
돛대를 잃은채 표류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알렉산더와 스위프트슈어도 오리엥함을 공격합니다.
21시경 오리엥함에 불이 붙었고 전투를 중단한채 전함들은 얼마후 일어날 “폭발에 대비” 하여
오리엥으로 부터 멀리 떨어졌으니 22시경 불이 화약고에 옮겨 붙었고 프랑스 기함이 폭발
하면서 타오르는 “파편들과 선원들이 공중으로 수백미터” 가량 날아올랐으며 “천명의
승무원 중에 오직 백명” 만이 불타는 전함에서 헤엄처 나옴으로써 가까스로 목숨을 건집니다.
대열의 끝에 위치했던 두척의 프랑스 전함 제네뤽과 기욤 텔만이 겨우 탈출에 성공하고
나머지 프랑스 전함들은 8월 2일 아침에 “차례차례 각개 격파”되어 불타거나 나포
되었으니 프랑스측은 1,700명이 전사하고 3,000명이 포로로 잡힌 반면에..... 영국측은
218명이 전사하고 677명이 부상 당했으니 영국의 일방적인 대승리 였으니 “신전술” 이라?
원수는 외나무 다리 에서 만나다고.... 에드워드 베리가 지휘하는 “리앤더호” 는 넬슨의
승전소식을 급보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던 중 나일 해전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전함 “제네뤽” 과 마주쳐서 처절한 전투 끝에 “나포” 되었으며
이런 사정 때문에 “승전 소식” 이 영국에 전해지기 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해전으로 영국 해군은 프랑스혁명 전쟁기간 “절대적인 제해권” 을 확립 할수 있었으며
넬슨제독의 명성 에 공헌했는데 나일해전은 문학 을 통해서도 묘사되었으니 펠리시아
헤먼의 시 '카사비앙카' 의 첫 구절에 나오는 "불타는 갑판 위에 서 있던 소년" 은.....
전투중 폭발한 프랑스함 “오리엥” 에서 전사한 해군 장교 카사비앙카의 아들이라 하네요?
4) 나폴레옹을 좌절시키고 넬슨을 군신으로 만든 대영제국의 시작 트라팔가 해전!
1급 전열함이 다수 동원된 대규모 해전에서는 “순수 화력” 만으로도 배를 박살내는 경우도
있었으니 대표 해전은 1805년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트라팔가 해전” 으로
나폴레옹과 전쟁 중에 영국은 해전에 몰두했으니 전통적으로 해군이 더 강했기 때문
인데 반면에 프랑스 해군은 “대혁명으로 우수한 지휘관” 이 사라지자 부실한 상태 였습니다.
욱군과는 달리 해군은 쓸 만한 “해군병사를 양성하는데는 6개월”이 소요 되고
“기술 병사나 지휘관을 양성하는 데는 4년”이 걸렸기 때문인 데....
우세한 해군력을 가진 영국은 “프랑스 해안을 봉쇄” 함으로써 프랑스 무역의
숨통을 옥죄어, 프랑스 함대로 하여금 항구를 나와 “해전에 뛰어들도록 유도” 합니다.
나폴레옹에게 영국 해군은 두려운 존재 였으니 영국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도.... 해군력 열세
때문에 포기했지만 “브레스트와 툴롱” 두 프랑스 항구에 대한 해상봉쇄를 돌파하기 위한 작전을
시도하는데 1805년 툴롱 에서 프랑스 함대는 영국 해군의 “해상봉쇄를 돌파” 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자 “패배를 승리로 돌리는 사나이 넬슨” 은 프랑스군을 대양으로 끌어내 프랑스 함대를 추격해
10월 21일 “트라팔가르에서 교전” 하는데 넬슨은 이 해전에서 영국군의 전형적인 전술을
적용해 “적의 전열을 끊은” 다음 “뱃머리를 돌려 접근전” 을 벌였으니 적선 30척 가운데 18척을
나포하거나 침몰시켰는데 넬슨은 치열한 접근전을 벌이던 중 적탄을 맞고는 쓰러져 눈을 감았습니다.
넬슨은 해전사상 매우 “독창적이고 지적인 용맹한 제독” 이었으며... 탁월한 지휘관
이었으니 “범선 시대 최후의 해전”인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은 프랑스 해군
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넬슨은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지상 작전에만 한정시키도록해 결국에는 “몰락의 길” 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19세기 내내 “세계의 바다를 장악” 함으로써...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 '팍스 브리타니카' 를 건설했는데.... 산업혁명후 “철갑선” 이 출현
하고 범선이 쇠퇴하는 “근대 해전” 에서는 해병이 다른 배로 건너가 전투를 벌이는
해전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순수 함포와 전술로 전투의 승패” 가 갈리는 시대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