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채우고 비운다는 뜻
-새해맞이 여러 민속民俗과 속신俗信-
제야除夜를 맞는다. 서울 종각에서는 제야의 종을 33번 친다. 이는 33천天에 울려 퍼지게 고告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제석除夕, 또는 제야除夜라 하여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宮中에서 년종방포年終放砲란 대포를 쏘았다. 그러면 한해의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새해가 솟는다고 했다. 이 의식은 일 년 동안의 거래관계를 청산하고 악의 씨앗을 없애야 하며 이는 제야除夜와 새해맞이의 의식으로 오랫동안 이어온 우리의 민속이었다.
밤 12시가 지나면 새해에는 보름까지는 빛 독촉을 하지 않는 게 상례常禮이기 때문에 이날까지 연중의 거래관계를 청산해 악惡의 씨앗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은 한해를 마무리 짓는 날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한해의 출발과 새해를 준비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 세찬歲饌이나 차례를 위한 음식을 준비해야한다. 또 한 가지 행사로는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는데 이는 묵은해의 잡귀雜鬼와 액厄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신성한 속에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의 준비이고 청소한 쓰레기를 태우는데 이 의식은 잡귀를 불사른다는 속신俗信인 동시에 민속民俗이기도 해 모든 백성이 참여하고 행했다.
또한 사당을 모신 집에서는 사당에 절하고, 밤에는 곳간이나 장독대와 축사 등 집 안의 곳곳에 불을 밝혀 놓고 잡귀의 출입을 막고자하는 수세守歲의 민속도 있었는데 일부 시골의 종가집이나 기타 웬만한 농가에선 지금도 이 민속을 지키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이라 한다. 까치설날은 섣달 그믐날을 말한다. 이날 어른들에게 묵은세배를 올린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거나 그로인해 문후(問候)를 드리지 못한 행위를 용서하는 뜻이 담겨 있으며 또는 한해를 마감하고 무사히 한해를 잘 보냈다는 뜻이 담긴 예의 절을 묵은세배라 한다. 요즘은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 우리설날은 오늘이래요.‘란 동요가 TV에서 흘러나와 설날의 분위기를 돋우기도 한다. 까치설날엔 어린이의 설빔을 이날 미리 입어보고 뽐내는 날로 자리매김 되었다.
여기서 설날이라 하면 ‘설다’ ‘낯설다’는 어원이 떠오르는데 처음 가보는 곳은 낯선 곳이고,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설은 새해란 정신적 문화적 낯 설 다는 의미로 생각돼 ‘설은 날‘ 로 바뀌어 ’설날‘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예부터 까치가 울면 새 손님이 온다고 했으며, 그 의미를 새겨볼 때 설이 오기 하루 전에 까치가 울고, 다음날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뜻에서 ’까치설날‘이 됐다. 새(鳥)에 얽힌 속설이 우리들 삶에 파고든 것이라 하겠다.
설에 차례를 지내기 전에 어른들에게 세배를 올린다. 이 때 설 등 명절에 지내는 제사祭祀를 차례 또는 절사節祀라고도 한다. 전통을 이어오는 가문家門에서는 사당祠堂이 있고, 그 집안에서는 설날, 대보름날, 한식, 단오, 중양절, 동지 때 차례를 올린다. 그러나 지금은 차례라고 하면 설에 지내는 연시제年始祭와 추석에 성묘를 겸한 제사를 말한다. 원래 차례나 제사를 모시는 조상은 4대조까지이다. 이는 오랜 우리나라 전통이고 그 윗대조상은 시제로 모시게 돼 있다.
우리가 명절에 차례 올리는 차례는 어디서 시작됐고 말의 뿌리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저 막연히 차례라 말하는데 차례엔 상당한 뜻이 스며있다. 제사는 우리말로 ‘차례’ 또는 ‘차레’이다. 한자의 茶禮(차례)가 아니다. 차례란 말은 한자漢字식 음으로 읽혀 이 말이 변질된 것이다. 한자인 茶禮는 ‘다례’로 읽어야 한다.‘다茶’는 마시는 차를 말한다.
차례의 차는 ‘꽉 메우다’ ‘채우다’. 례는 ‘비우다’라는 뜻이다. 채움과 비움, 즉 채우고 비우고를 정산精算하는 예법절차다. 든 것과 난 것, 채운다는 것과 비운다는 건 일종의 거래이자 왕래다. 반년이나 1년에 한번 가족들이 모여서 하는 집안결산쯤 된다. 이 결산인 차례엔 모든 인간의 도리와 행위규범이 담겨있다 하겠다.
차례의 말 뿌리는 ‘마차례’에서 비롯된다. 우리말 원형이 남아있는 몽골이나 옛 만주에선 하늘에 올린 천제天祭를 마차례라 했다. 마지차례, 맞차례로도 발음된다. 하늘이 아닌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제사는 그냥 ‘차례’다. 몽고에선 지금도 마차례(Machare)라 하며, 만주에선 맞뜨리(Machure)라 한다. 중국인들의 제사란 발음 ‘츠러’도 차례란 발음이 한자발음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마차례와 차례를 올리지 않은 일본사람들은 대신으로 모든 차례를 한데 묶어 마차례로 받아들여 마쯔리(Machuri)라 부른다.
이와 같은 어원을 가진 차례를 보면 중국에선 차(茶-Tea)를 올리는 절차를 포함한 전래의 제례가 상례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차례에선 차를 올리는 절차가 거의 없다. 보통의 제사 때처럼 제사상차림으로 하고 술을 올리며 절하는 게 관례이다. 사실 차례는 단순히 차만 달여 올리는 그런 제사법을 옛 선조들이 일부 실천해 오기도 했다. 이는 중국 풍속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요 고유제례가 아니었다. 지금 일부에선 차례 때에 제사상을 차리고 함께 차를 올리는 습속도 일부 있기는 하다.
설, 추석 차례는 외지에 나갔던 가족, 친족들이 모이는 집안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옛날 남쪽지방에선 설, 추석을 중요한 명절로 여겨 차례를 올리는 게 관례화됐다. 반면 북쪽에선 한식차례를 성대하게 지내고 추석 차례는 유명무실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모두 설과 추석을 대단한 명절로 챙기고 차례도 지낸다. 역사가 흐르면서 제례까지 바뀌어 버렸다.
차례는 아침에 지내며, 가까운 부계친족들끼리 모여 종가에서부터 순서대로 지낸다. 지내는 방법은 봉사대상이 되는 여러분을 함께 모시고 올리지만 조부모 내외, 부모 내외, 배우자로 제상을 나눠 차려도 된다. 지방은 나란히 쓴다. 절차는 가문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하는데, 축문을 읽지 않고 술을 한 잔만 올린다는 ‘무축단헌無祝單獻’을 원칙으로 하는 게 보편적이다.
상을 차릴 때의 제수는 다른 제사 때와 거의 같지만 설엔 밥 대신 떡국을 올리고, 추석엔 햅쌀로 송편을 빚어 햇과일과 함께 올린다.
제사상을 차릴 때 지켜야 할 원칙 중 홍동백서紅東白西는 살고 있는 공간을 제상 위에 나타낸 선조들의 표현이다. 반드시 자기 고장에서 생산된 것으로 상을 차리며, 자기가 사는 땅에서 나오지 않는 건 제상에 오르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설명된다. 시간적 참회, 공간에 대한 반성이란 형태에서 동쪽은 붉은 것, 서쪽은 흰 것이란 선조들의 우주관, 세계관을 나타냄이다. 이런 습속도 중국으로부터 비롯됐는데 중국에선 붉은 것은 동쪽, 흰 것은 서쪽에서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비롯됐다고 한다. 이와 같은 습속이 후대에 올수록 조율이시棗栗梨柿니 두동미서頭東尾西니 하면서 절차가 만들어져 이는 마치 제사지낼 때의 차림 상의 권위의 도구로 변질됐다고 본다. 아무튼 어떻게 하든 자손들이 조상을 향한 지극하고 정성을 다한 음식들을 만들어 제상에 음식을 올리면 되지 않을 까 싶다. 위와 같은 관례를 따라도 좋고 습속을 지켜도 좋으며 어쨌건 정성과 조상을 향한 경건함을 유지함이 그 첫째라는 덕목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초엔 세배歲拜를 하는데 설 차례를 지내기 전에 중요한 건 세배다. 먼저 절을 해야 하는 첫 대상은 부부이고 다음은 할아버지 대와 다음으로 아버지대로 이어진다. 선조들께서도 세배 후에 차례를 올렸다. 차례 참여자들끼리 절을 하는 게 제사의 출발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차례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음력 정월 초하루를 시작으로 정초에 하는 절을 ‘새 세배’라 하고, 섣달그믐에 올리는 절을 ‘묵은세배’라 한다. 그리고 절을 할 때엔 예법이 있는데 엉덩이를 치켜드는 것은 불경이다. 엉덩이는 종아리에 붙여야 한다. 차례에서 절을 할 땐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해야 하고, 궁둥이가 땅에 닿은 머리보다 더 올라가면 안 된다. 그런 상태를 복지伏地라 했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겠다는 몸짓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겠다는 뜻도 이 절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손도 순서가 있다. 절을 하면서 두 손을 바닥에 턱 하고 내리는 것도 불경에 속함을 명심해야한다. 절을 할 때의 손은 오른손을 왼손위에 놓는 다는 것은 극히 보편적 상식이다. 그리고 손바닥은 땅에 붙이지 않으며 손가락만 땅에 붙이면 된다.
제례祭禮는 조상님들에 대한 효孝 정신의 연장인 동시에 조상승배의 일환으로 받들어 왔고 부모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것에 대한 보답이며 갚음이다. 따라서 조상을 섬기는 행위인 제례는 신앙信仰이 아니다.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일원적一元的생사관을 갖는 사상의 일종이며 제사조직은 바로 친족조직이며 제례사상은 인간들 제집단의 도덕이며 윤리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차례란 메움과 채움과 비움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잘못된 옛것은 비우고 새것을 채워 새로운 정신으로 결속한다는 것과 결산의 의미를 가진 차례, 가족이 한데모여 끈끈한 정을 나누는 명절에도 이런 상식을 음미하며 조상을 섬김도 의의 깊은 일이라 생각되기에 여기 그 차례의 시말始末을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