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퇴직연금 [6] : 영국 Pension Act 1995
“다른 나라 국민들은 형편이 훨씬 좋다. 몇몇 유럽국가와는 달리 영국에는 좋은 연금보장 시스템이 없다.” 영국 스코틀랜드 애버딘에 있는 한 섬유제조업체 중역의 말에는 영국의 연금시스템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공적연금과 함께 연금체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연금은 최근 4~5년 사이에 ‘부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고, 연금 급여수준 하락으로 인한 노령빈곤에 대한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로 대변되던 영국의 사회보장제도가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영국정부는 기업연금의 부실에 대비한 사전 규제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연금체계개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1. 노후는 개인이 준비한다
영국 연금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은 사적연금이 공적연금의 일정 부분을 대체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노후는 정부가 보장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깨지고 대시 노후준비의 책임을 사회 구성원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은 지난 1986년 소위 ‘영국병’으로 불리던 저효율×고비용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하면서 연금부문에 대한 수술에 나섰습니다. 당시 대처 정부는 기존 공적연금 급여를 축소하는 한편, 공적연금의 역할을 상당부분 민간으로 이전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기업연금이 일정 수준 이상인 경우 공적연금의 갹출분 일부를 면제해주는 ‘적용제외(Contract Out)’ 대상을 대폭 확대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가 부담해야 할 공적연금 지출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습니다. 실제 지난 2000년 영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적연금 지출은 4.5%에 그쳤습니다. 반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각각 9.8%, 11.5%, 12.6%, 7.5%에 달했습니다. 독립기관인 연금위원회(Pension Commission)에 따르면 영국정부는 GDP 대비 공적연금지출을 2013년에는 6.2%, 2043년에는 6.9%로 올린다는 계획입니다.
‘적용제외’ 조항은 영국 연금시스템에서 기업연금을 포함한 사적연금의 발달을 가져왔습니다. 영국 정부는 공적연금 대시 개인연금이나 기업연금을 선택할 경우 6년간 국가로부터 피고용자 소득의 2%에 해당하는 기여금을 추가로 지원하는 등의 ‘당근’을 쥐어주며 사적연금의 활성화를 도모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사적연금 가입자는 해마다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지난 2000년 기준으로 전체 근로자 2,720만명(봉급생활자 2,410만명, 자영업자 310만명) 가운데 사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는 1,540만명으로 총 피고용인의 56.5%에 달했습니다. 이 중 1,010만명(37.2%)은 기업연금에 가입했으며, 530만명(19.3%)은 개인연금에 들었습니다.
2. 확정급부형에서 확정기여형으로
영국의 기업연금은 크게 확정급부형(Salary-Related Schemes)과 확정기여형(Money Purchase Schemes) 등이 혼용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확정급부형을 취하고 있습니다. 영국 연금체계에서 ‘왕관 속의 보석’으로 불릴 만큼 퇴직 후 높은 수준의 퇴직연금을 보장했던 확정급부형은 기업의 부담가중 등의 이유로 감소추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확정급부형의 비율은 16~20%인 데 반해 확정기여형은 7~11%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도 지난 95년 연금법(Pension Act 1995)을 통해 확정급부형에서 확정기여형 전환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95년에 개정된 연금법은 최소연금을 적용소득에 재직연수당 1/80을 곱한 금액으로 함으로써 최소 연금요건을 강화, 확정기여형 전환을 꾀했습니다. 연금위원회는 지난 95년 이래로 사적연금 부문에서 확정급부형 연금가입자는 6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NES(New Earnings Survey)에 따르면 2004년 말 기준으로 민영기업의 근로자 중 약 26%가 여전히 확정급부형에 가입해 있지만, 신규 가입자 중에서는 14%만이 확정급부형에 가입해 지난 5년 전의 19%에 비해 신규가입비율이 5% 포인트 줄어들었습니다.
이와 함께 지난 2001년 도입된 관리연금제도(Stakeholder Pension Scheme)도 실질적으로 기업연금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기업연금과 개인연금을 혼합한 관리연금제도는 개인 계정은 유지하되 마케팅이나 징수는 집단적으로 이뤄지도록 해 징수 및 관리비가 절감되는 기업연금의 장점에다 노동이동성의 증가 등 변화하는 노동시장에 맞도록 유연성을 갖추는 개인연금의 장점을 혼합했습니다.
3. 기업연금의 부실화
그러나 영국의 기업연금도 부실화의 늪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시장조사기관인 데이터모니터(Datamonitor)에 따르면 관리연금은 불확실한 자산시장으로 인해 지난 2002년 이래 해마다 복리로 5.8% 감소했습니다. 클라크 톰슨 세퍼드 인베스터스(Clark Thomson Shepherd Investors)이 고든 윌슨(Gordon Wilson)은 “지난 몇 년 동안 자산시장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의존으로 인해 많은 기업연금이 손실을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함께 확정기여형의 경우 고용주의 기여가 최소한도에 그치면서 연금펀드가 적정 수준에 못 미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에 따라 2004년에 연금법을 개정해 기업연금의 부실에 대한 제반 규정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4. 영국 연금정책 총괄 존 애시크로프트(John Ashcroft) 기업연금감독청(OPRA, Occupational Pensions Regulatory Authority) 이사와의 인터뷰
- 기업연금감독청의 역할은 무엇인가.
ü 기업연금감독청은 직장연금과 개인연금보험 가입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 정부 주도하에 각 연금펀드에서 자금을 모집해 부도난 연금펀드를 지원하는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하는 연금보장펀드(Pension Protection Fund) 자금지원을 최소화하기 위한 위험관리에도 힘쓰고 있다. 이와 함께 그린 페이퍼(Green Paper)를 발간해 연금가입자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에 기업연금감독청에 신고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홍보하고 있다. 기업연금감독청의 주된 규제 대상은 연금신탁(Trustee)으로 직접 나서서 감독하기 보다는 감독에 대한 요청이 있을 경우 관찰하고, 규정위반을 감시한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정보수집을 통한 사전 문제해결에 중점을 두고 있다.
- 영국에서는 ‘적용제외’ 조항과 95년 개정된 연금법을 통해 확정기여형 연금으로 유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 95년 개정된 연금법의 주요 내용과 영국 기업연금제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ü 95년에 개정된 연금법은 ‘신탁’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또 최소연금요건을 강화했으며 펀드의 자산배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담겨 있다. ‘신탁’은 영국에만 있는 특이한 구조로 연금운용회사와 독립적으로 운용된다. 신탁은 일종의 제3의 연금관리회사로 연금운용은 운용회사가 담당하지만 이에 대한 합리성, 안정성 등은 ‘신탁’이 감독한다. 확정기여형의 경우 회사와 개인의 부담 비율에 대한 규정은 없다. 다만 5인 이상 고용주에 대해서는 연금제도를 피고용인에게 주선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또 연금펀드가 투자하는 상품에 대한 별도의 규제는 없으며, 보유상품의 리스크에 따라 최소펀드규모가 달라진다.
- 기업연금 도입을 둘러싸고 한국에서는 많은 홍역을 치렀다. 한국에서 초기 기업연금제도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ü 노후를 국가가 보장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노후는 개인이 준비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각 연금체계 간에 경쟁을 유도해 연금수익률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세금유인책을 통해 가입을 유도하고 연금제도 시행이 부진한 기업에 대해서는 이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