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일본 성씨와 서양,
우리나라 성씨 유래 ㅡ
세계에서 성씨가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한국 성씨는 대략 300여개,
중국 성씨는 3000개 정도인데 일본 성씨는 17만개가
넘는다.
그 이유는 일본인 창씨유래(創氏由來)가 애 아버지 확인이 어려워 태어난 장소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여자는 기모노에 팬티를 입지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랜 전쟁으로 남자들이 너무나 많이
전장에서 죽어 인구가 너무
줄어들어 나라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단 시간에 인구를
늘이기 위해 왕명을 내렸다.
모든 여자들은 외출할 때
등에 담요 같은 걸 항상 매고 아랫도리 속옷은 절대 입지
말고 다니다가, 어디에서건
남자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언제든지 애기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 여인들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의 유래이며,
오늘날에도 기모노를 입을
땐 팬티를 입지 않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그 덕분에 운이 좋아 전장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아무 여자하고도 하고싶은 마음만
있으면 어디서든 깃발을 꽂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들이 수두룩하게
태어났는데, 이름을 지을 때
애 아버지 확인이 어려워
애를 만든 장소를 성씨로
삼아 작명하였다.
그것이 족보가 되어 일본인들의 성(姓)씨가 되었다 한다.
그 예를 알아보자.
1. 木下(기노시타) - 나무 밑에서
2. 山本(야마모토) - 산 속에서
3. 竹田(다케다) - 대나무 밭에서 작업을 한 아이.
4. 大竹(오타케) - 큰 대나무 밑에서
5. 太田(오타) -콩밭에서
6. 村井(무라이) - 시골 동네 우물가에서
7. 山野(야마노) - 산인지 들판인지 아리송한데다, 2명하고 연달아 해서
8. 川邊(가와베) - 거시기 끝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개천이 보여서
9. 森永(모리나가) - 숲속에서 오래 만난 남자의 애
10.麥田 (무기타) 보리밭에서
11.池尻(이케지리) - 도랑옆에서.
12.市場(이치바) - 시장(공방)에서.
13.田中(다나까) - 밭 가운데서. 특히 '밭전(田) 자가 많은 것은 논에서는 그것을 할 수 없어 주로 밭에서 했기 때문
14.內海(우츠미) - 가까운 바닷가에서
15. 奧寺(오쿠테라) - 절에서
16.角屋(카도야) - 코너에 있는 집에서.
17.柏木(카시와키) - 측백나무 아래서
18.桐本(키리모토) - 오동나무 아래서.
19.小島(코지마) - 작은 섬에서.
20.小林(코바야시)- 작은 숲에서.
21.笹森(사사모리) - 조릿대(작은 대나무의 일종) 숲에서.
22.高柳(타카야기) - 버드나무 아래서.
23.皆川(미나가와) - 개천가에서.
24.水上(미나카미) - 물 위 배에서, 시냇물에서 멱감다가, 온천에서.
일본 성씨유래를 보니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욕이 다양하지 않다. '빠가야로(바보같은 자식)'가 거의 유일하다.
이 성씨 유래를 보니 그 이유가 이해된다. 만약
우리나라처럼 욕이 다양하게 발전했다면 이 성씨유래
가지고 얼마나 많은 험한
욕들을 창조해 냈을까?
서양 성씨 유래도 재미있다. 서양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직업이나 지역 그리고 종교적 영향으로 지어진 것이 많다. 그러다 보니 서양성씨도 일본 못지 않게 다양하다.
스미스 : 대장장이
존슨 : 기독교
윌리엄스 : 기사 시대의 헬멧
밀러 : 곡물공장 직원
테일러 : 재단사
부시 : 정원사
베이커 : 빵집
우리나라는 성씨가 많지 않다. 그것도 대부분 중국 성씨를 본 땄다.
그 이유는 뭘까?
조선초만 해도 성씨있는
양반은 10%뿐 안 되었다.
조선중기 양반계급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부터 평민들도 각 씨족 별로 구전 해온던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토착민들은 지역별 연결에
따라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이거나 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 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들의
도움으로 성 하나만은
가지게 되었다.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다시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일제가 주었다.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이,박 등등"이였다.
그래서 유명한 성이 더욱
흔해지게 된 것이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이들에게 신청하는 대로 유명성씨의
호적을 준것은 조선의 양반
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나온것
이다.
노비를 양민화 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
일례로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고 한다.
사실, 지금 자기가 알고있는
성씨는 원래 성씨가 아닐 수
있다.
100년전에는 전혀 다른 성씨 피를 이어 받았을 수도 있다.
또 성이 전혀 다른 외가 쪽 피도 무시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