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컴퓨터, 인터넷 등 최첨단 통신 기기의 소통 문제를 통해 현대인의 정체성의 위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명예』 출간되었다. 독일 전후 문학사에서 유례없는 성공작으로 평가받았던 『세계를 재다』 출간 이후, 독일 문학을 이끌어 갈 차세대 기대주로 주목받은 켈만이 어떤 후속작을 내놓을지는 평단의 큰 관심거리였다. 이런 관심 속에서 발표한 이 작품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실험적인 구성을 시도한 소설로, 다니엘 켈만은 소설 『명예』로 세계적인 문학을 이룩했다(《벨트보헤》)는 평을 받았다.
마치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이야기들로 완벽하게 구조를 이루는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은 현실과 허구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며, 사소한 우연들이 빚어낸 인생의 큰 변화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지금 보고 싶은 사람에게 당장 전화하세요.
인생은 아주 빨리 지나가고, 잊히고, 사라지니까요! 그러라고 휴대전화가 있는 겁니다.
‘호모 모빌리쿠스’라는 신조어가 있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마지막 발전 단계로 ‘호모 사피엔스’를 언급했지만, 몇 년 전 한 언어학자가 휴대전화 없이 살 수 없는 현대 인간상을 일컬어 만들어 낸 말이다. 현대인에게 휴대전화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켈만의 첫 이야기인 「목소리」에서는 휴대전화기를 구입한 에블링은 계속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자, 낯선 신분으로 게임을 시작한다. 한편 유명 배우 랄프에게는 어느 날인가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가로채기라도 한 것처럼.(「탈출구」)
이 두 가지 에피소드의 궁금증은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 편에서 풀린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이용해서 두 연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중생활을 영위하던 통신사 중년 팀장이 신규 휴대전화 개통 고객에게 기존 번호를 발급하고 마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마리아 루빈스타인이 낯선 동양에서 충전기를 챙기지 않은 채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다. 휴대전화의 불통이 유럽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불통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휴대전화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컴퓨터, 인터넷 등 통신 기술과 함께 맞물려 있다. 인터넷을 통해 블로그 속에서만 살던 한 인터넷 중독자는 급기야 현실과 소설 속 가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착란 상태에 빠져, 좋아하는 소설 주인공 라라 가스파드를 만나기 위해 소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토론에 글 올리기」)
이처럼 켈만의 소설 속 인물들은 휴대전화와 인터넷 덕분에 시간과 공간적 제약 없이 타인이나 사회와 소통함으로써 무수한 평형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게 되면서 혼란을 겪는다. 명예를 누리는 것도 명예를 잃어버리는 일도 통신 기술 때문에 일어날 수 있고, 통신 기술을 통해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소설 속 상황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평형 세계 속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방향을 잃어 가는 현대인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이에 관련해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현실과 평행 현실, 픽션과 메타픽션을 멋지게 표현한 작품으로, 가볍지만 심오하고, 슬프지만 웃기고, 구성이 뛰어나고 문체가 유려한 지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현실에서는 모든 게 뒤섞이지. 책에서만 말끔하게 분리되는 거야.”
이 책은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다니엘 켈만의 『명예』를 열어 보니 그 속에 다시 레오 리히터의 소설들이 자리 잡은 형상이다. 다니엘 켈만이 영화배우 랄프, 에블링, 레오 리히터와 그의 연인 엘리자베스를 만들었고, 레오 리히터는 다시 소설 속 주인공들인 로잘리에와 라라 가스파드를 만들어 냈다. 이들 주인공들은 어떤 이야기에서 주연을 맡았다가 다른 이야기에서는 조연이나 실루엣으로만 처리되고, 몇 쪽 넘어가면 현실이 가상으로, 가상의 세계는 현실로 판명나기도 한다.
그런데 일부 이야기와 등장인물은 이런 레벨의 논리적인 경계를 침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 편에서는 노부인 로잘리에가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길에 자신을 창작해 낸 레오와 언쟁을 벌임으로써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또 레오는 엘리자베스를 모델로 라라 가스파드라는 소설 캐릭터를 만들어 낸 뒤, 후에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라라 가스파드와 맞닥뜨리게 한다.(두 편의 「위험 속에서」) 「토론에 글 올리기」에서는 몰비츠가 라라 가스파드를 몹시 좋아한 나머지 직접 만나기 위해 레오의 소설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또 어디까지가 소설 속 소설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이렇게 아홉 개의 에피소드들은 퍼즐 조각처럼 서로 맞춰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이어지며 연결된다. 그러면서 끝과 시작은 모호하게 흐려지고 경계를 나눌 수 없게 된다. “마치 텍스트라는 몸뚱이를 얽어매는 신경이 ‘아홉 이야기’ 위로 뻗어 있는 것 같다. 각각의 연결을 해독하는 것이 『명예』를 읽는 가장 큰 즐거움”(《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이다. 다니엘 켈만은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허구는 평면적이지 않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굳이 이를 의식하지 않고 읽어도 좋지만 전체적인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훨씬 더 재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나날이 발전하는 통신 세상에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현실과 문학적 허구 사이의 경계만큼이나 모호한 것인지도 모른다. 켈만은 이를 『명예』 속에서 잘 구현해 내어 허구는 현실보다 더 진짜같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을 극대화시키고 다니엘 켈만이라는 작가를 주목하게 만드는 요소다.
책속으로
줄거리
「목소리」
컴퓨터 관련 기술자 에블링이 휴대전화기를 구입하는데, 통신사의 실수로 기존에 누군가 쓰고 있는 번호를 부여받는다. 에블링은 다른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를 계속 받으며 그가 아님을 주장하며 한참 혼란을 겪지만,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 역을 하게 된다.
「위험 속에서」
걱정거리가 유별나게 많은 작가 레오 리히터는 여자 친구인 엘리자베스와 라틴아메리카로 강독 세미나를 하러 떠난다. 비행기 출발이 지연되는 것도 불만이고, 세미나를 들은 레오의 독자들이 소설 구상은 어디에서 하는지, 글은 언제 쓰는지 등 똑같은 질문을 해대는 것도 고역이다.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일하는 엘리자베스는 연신 그를 달래며, 피곤해한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레오가 창작해 낸 ‘라라 가스파드’의 모델이 되는 게 끔찍하다.
「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
노부인 로잘리에는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스스로 생을 정리하기 위해 스위스의 안락사 센터로 떠나는 길에 그녀가 자신을 창조해 낸 작가 레오와 언쟁을 벌인다. 제발 줄거리를 바꿔 자신을 좀 더 살게 해 달라고 설득한다.
「탈출구」
유명 배우 랄프 탄너에게 어느 날인가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가로채기하라도 한 것처럼. 그는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자신을 꼭 빼닮은 닮은꼴 배우가 있는 걸 알고 놀라고, 마치 그 사람인 양 닮은꼴 배우 경연대회에 나가서 자기 자신의 닮은꼴 역을 연기하고, 다른 이름으로 다른 곳에 집도 구하고, 새 여자를 만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덧 실제 일상에서의 자신의 자리는 다른 사람이 대신 차지하고 있는 걸 깨닫는다.
「동양」
원래는 레오 리히터가 초대받은 중앙아시아 단체 여행에 레오를 대신해서 작가 마리아 루빈스타인이 참석한다. 열악한 그곳에서 며칠을 지낸 후 공항으로 가는 마지막 날, 마리아는 일행과 떨어지게 된다. 단지 마리아가 충전기를 챙기는 걸 잊어서, 낯선 동양에서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갔다는 이유 하나로 어느 누구와도 연락을 할 수 없는 난감하고 어이없는 상황에 처한다.
「수녀원장에게 답장하다」
미구엘 아우리스토스 블랑코스는 삶의 의미, 평정, 신정론 등과 관련한 명상서나 양궁에 관한 실용서 등을 쓴 저자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자살 충동을 느끼고, 권총을 꺼낸다. 그리고 매일 오는 우편물을 체크하던 중, 어느 수녀원장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살을 감행하기 직전에, 신정론(神正論)과 관해 수녀원장에게 답장을 쓴다.
「토론에 글 올리기」
인터넷에 중독된 몰비츠는 상사의 명령으로 어느 회의에서 발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회의를 위해 한 호텔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곳은 인터넷이 불통이다. 블로거 활동을 하지 못하면서 몰비츠는 점차 불안해지고 흥분하게 되고, 이곳 호텔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 주인공인 라라 가스파드를 창작해 낸 작가 레오 리히터를 우연히 만난다.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
이동통신사의 부서 팀장이 아내 한나와 애인 루치아를 사이에 두고 이중생활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이중생활이 의외로 인터넷과 휴대전화만 있으면 완벽하게 할 수 있음에 감탄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자신의 관리소홀로 휴대전화번호를 이중으로 발급하게 된다. 무능한 몰비츠를 회의에 대신 보낸 것도 복잡한 사생활 때문이었다.
「위험 속에서」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일하는 엘리자베스의 일을 늘 궁금해하던 레오가, 그녀와 동행한다. 연이어 폭음 소리가 들리는 현장에서 레오는 연신 자신의 체험을 메모한다. 그런데 구급 의약품들을 정리하던 중 엘리자베스는 레오의 소설 속 인물 라라 가스파드와 맞딱뜨린다. 순간,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늘 두려워했던 바로 그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챈다. 지금 자신은 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레오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로 존재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