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위(崔士威)는 목종(穆宗)을 섬겼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현종 초에는 통군사(統軍使)가 되었고, 강조(康兆) 등과 함께 거란(契丹)을 막았다.
최사위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귀주(龜州) 북쪽의 육돈도(恧頓道)·탕정도(湯井道)·서성도(曙星道) 세 방면으로 진군하였는데, 거란과 싸우다가 패배하였다. 〈현종〉 2년(1011)에는 참지정사(叅知政事)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전임되었다. 후에 장연우(張延祐)·황보유의(皇甫兪義)와 함께 건의하여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없애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를 두게 하였으며, 또 12주 절도사(節道使)를 없애고 5도호(都護)·75도 안무사(安撫使)를 두게 하였다.
얼마 후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옮겼고, 추충좌리동덕공신(推忠佐理同德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청하현개국남(淸河縣開國男) 식읍(食邑) 300호를 받았다. 얼마 후 검교태사 수문하시중(檢校太師 守門下侍中)에 오르고 작위는 백(伯)으로 승진하였으며 식읍은 700호로 하였는데, 다시 광국공신(匡國功臣)의 칭호를 더 받았다. 판이부사(判吏部事)로서 시정의 잘잘못을 따지는 소를 올리자 왕은 유사(有司)에 명령하기를, 헤아려 확실하면 시행하게 하였다. 〈최사위가〉 또 아뢰기를, “여러 주·현 장리(長吏)들의 호칭이 복잡하니, 지금부터 군·현 이상의 향리는 호장(戶長)이라 하고, 향(鄕)·부곡(部曲)·진(津)·정(亭)·역(驛)의 향리는 다만 장(長)이라 칭하소서.”라고 하였고, 〈왕이〉 따랐다.
대관(臺官)에서 논핵하기를, “최사위는 좌복야(左僕射) 박충숙(朴忠淑)과 함께, 구정(毬庭)의 예도 모임에서, 술에 취해 춤을 추며 불경스러운 행동을 하였으니, 그를 벌할 것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지만,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최사위를〉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올리고, 그의 부친 최융예(崔融乂)를 수사공 상주국 한남군개국남(守司空 上柱國 漢南郡開國男) 식읍 300호로 추증하였으며, 모친 유씨(庾氏)는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봉하였다.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이라 스스로 칭하자, 형부상서(刑部尙書) 곽원(郭元)이 그 틈을 타서 압록강 동쪽 기슭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최사위가 서눌(徐訥) 등과 함께 상서(上書)하여 옳지 못하다고 하였지만, 곽원이 고집을 부려 공격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대연림이 임명한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이 동북 여진(女眞)을 이끌고 거란과 서로 싸우다가, 사신을 보내어 원군을 간청하였다. 왕이 여러 재상[輔臣]들과 상의했는데, 최사위가 평장사(平章事) 채충순(蔡忠順)과 함께 〈왕에게〉 말하기를,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어찌 능히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성과 해자를 수축하고 봉수(烽燧)를 신중히 하며, 그 변화를 살펴보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의견을 따랐다.
〈현종〉 21년(1030)에 최사위가 나이를 이유로 사직[老退]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에 한 번씩만 조회에 참석하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내사령(內史令)으로 올려주고 나서 곧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명령하여 5일에 한 번씩 조정에 출근하여 내사성(內史省)에서 사무를 보게 하였다. 그가 죽으니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시호를 정숙(貞肅)이라 하였다. 문종(文宗) 6년(1052)에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검교태사 내사령(檢校太師 內史令) 최사위는 선왕의 조정에 있으면서 깨끗한 절개와 곧은 도(道)로써 여러 차례 도움을 주어 어려운 상황을 널리 타개했으며, 종묘사직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함으로써 중흥을 이룩하였으니 묘정에 배향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 생질(甥姪)들로서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8품의 관직을 주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