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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106)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2022.09.23 금)
본문 : 눅 17:11-19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15장에서부터 17장 앞부분까지의 긴 가르침은
아마도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하신
이후 거의 한자리에서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부터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십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본문에는 예수님 일행의 현재 위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그런데 성도님들도 알다시피 ..........
북쪽의 갈릴리에서 남쪽의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지방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제일 가까운 길입니다
예수님은 눅 9장에서 갈릴리 지방을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의 마을을 통과해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자기 마을로 지나가는 것을
거절합니다
(눅9: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그들이 거절한 이유는 예수님의 행선지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원수지간이었기에 단지 지나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몹시 흥분하여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하고
격앙된 어조로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요단강을 건너 베레아 지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베레아 지역에서 요단강만 건너면 바로
예루살렘이 속한 유대지역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에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는 것은....
지금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가 먼저 언급).
지금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맞추어 가시는데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시간이 남으면 먼저 도착해서
쉬시면 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마을에 들려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자신을 거절했지만, 여전히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왜 사마리아 사람에게 애착을 보이셨을까요?
그 시대의 가장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사람들, 다시 말하면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신 후에도, 제자들에 의해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해져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 시대의 사마리아는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북한이 아닐까 합니다. 속히 성령님께서 문을
여셔서 북녘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다>
그 접경지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셨습니다.
<12-13절>
12절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절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눅 5장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바가 있습니다.
그 소식은 아마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급속히 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들은 일반사회와 격리되어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동네에까지 오신 것입니다.
어찌 어찌하여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멀리 서서’ 목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는 왜 그들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지,....
그 당시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레13:45-46>
45절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절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그들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정상인으로 알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자신을 비하해야 했습니다.
스스로 옷을 찢어 거지꼴을 하고,
머리를 풀고 미친 척해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그를 불쌍히 여겨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반복해 외쳐야 했습니다. 혹시 침이라도 튀겨 그에게
병균이 옮아갈 수 있으니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라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19에 걸린 사람처럼 스스로를 철저히 격리).
그리고 가족과도 떨어져 성문 밖에서 혼자,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병에 걸리는 순간 그 인생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철저히 소외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나병 환자들을 소록도에
가두어 두고, 심지어 강제로 불임 수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병에서 치유받는 것은 단순히
질병에서 낫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회(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인격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병에서 치유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고 외쳤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열 명이 함께 있는데, 아홉 명은 모두
유대인이고 한 명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데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나병이라는 비극이 그들을 한 공동체로 묶어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생기고, 높아지면 자꾸 구별하려 듭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뭉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차별하려 합니다. 어느 고급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은 초등학교에 찾아가서 ....
자신들의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만 따로 반을
편성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사실 연약한 인간들끼리 편을 나누고 싸우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면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
나병 환자 열 명의 간절한 외침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습니다.
14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은 바로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 14장의 규례에 따르면, 나병 환자가 치유되었을
경우에 제사장에게 가서 병 나음을 확인받고,
그에 따른 제물을 드리는 의식을
행해야 했습니다(의사의 진단서 같은 것).
그러고 나서야 고향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병을 먼저 고쳐주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가능 도중에 고쳐질 줄 믿고
먼저 출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지를
보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을 만나러 출발하였습니다.
모두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만큼 간절했습니다.
특히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더욱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을 때, 사실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나을 줄 믿고 간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들을
고치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적보다는 말씀이 더 우선적이어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적으로 보고 나서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이 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말씀 중심의 신앙).
그럼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도중에 그들은 자신의 몸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14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열 명 모두 자신의 몸에서 나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제사장에게 도착하기 전입니다.
<즉시 돌아와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
자 이때부터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15-16절>
15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절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열 명이 모두 고침을 받았는데, 오직 한 사람만
예수님께 즉시 돌아와 감사를 표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럼 왜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하지 않았을까요?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동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만 슬며시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여보게들, 우리 몸이 정말 깨끗해지지
않았는가! 나는 예수께 가서 이 사실을 직접
보여드리고 감사해야 되겠네. 같이 가지 않겠나?” 하고..
권면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 아홉 명의 사람은 예수님께
즉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겠습니까?
예, 우선순위에서 예수님이 밀린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여행
중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보다 제사장에게 먼저 몸을 보이고.....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는 확인과 선언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박탈당했던 모든 사회적
권리와 명예를 되찾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식구들에게로 돌아가고,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일은 나중 일로 밀린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혹시 못 만난다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모든 것보다 당장 나를 깨끗하게 해주신
그 분을 뵙고 감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증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내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나의 명예와 나의 즐거움을
되찾는 일보다 훨씬 더 귀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또한 한시라도 빨리 공식적인 치유 선언을
받고 처참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에 둔 것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때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하였습니다.
<17-18절>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열 사람이 모두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에게 감사하리라고 기대하셨습니다.
사람이 중병에 걸렸는데 그 병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고쳐주었다면 당연히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왕하5:15)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고
난 후에 나병이 치유되자, 즉시 그는 엘리사에게
돌아와서 그가 가져온 온갖 예물로 감사했습니다.
물론 엘리사는 그 예물을 받지 않았지만......
그렇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고침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심지어 동물들도 감사의 마음을 알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감사하지 않는다면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더욱 안타깝게 했던 것은 이 유일하게
돌아와 감사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방인 취급합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고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폄하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소위 선택받은 민족.....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런데 오늘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어진 진정한
축복은 19절에 있습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 감사하러 돌아온 이 사마리아 사람은
단지 육체만 고침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의 은총을 더불어 얻었습니다.
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은 놀라운 일임이 틀림없지만,......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아닙니다.
결국 죽음으로 일생을 마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병을 고친 것뿐만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맺는 말씀 - ‘감사’가 진정한 ‘믿음’>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은혜’와 ‘감사’의 정비례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그런데 ‘감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리스’입니다.
같은 어원을 가리고 있습니다. 은혜와 감사는
뿌리가 같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내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보잘것없는 은혜가 아닙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가 말한 대로
‘값싼 은혜’ 곧 싸구려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면서....
우리를 죄악과 사망 가운데서 사신 은혜이기
때문에 그 은혜는 ‘값비싼 은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생명을 주신 은혜이고
피를 흘려주신 은혜이기에 값비싼 은혜입니다.
이 값비싼 은혜를 입고도 우리는 그것을
큰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아홉 명의 나병 환자처럼
감사치 않고 무덤덤하게 지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저와 성도님들도 감사를 늦추거나(우선순위에서 밀리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이.....
늘 먼저(즉시)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와 성도님들 !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우리 주님께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