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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풍경, 탐방 스크랩 하남,문화의 향기를 찾아서 / SM 새마을 금고
운영 추천 0 조회 123 12.03.25 23:33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하남의 향기를 찾아서.pdf

 

 

 

밀양(하남)의 자랑거리

하남, 문화의 향기를 찾아서

                                                                                                   이두애(수필가)

 

 

하남읍 남전리(南田里) 역사 흔적을 찾아서

밀양에서 수산 방향으로 25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 ‘은산’이라는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남전리길을 따라 달리면 남전본담,송마,아래음달,효자문,윗음달,길밑각단,보담 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연부락 마을이 있다. 남전7길에서 1길이 이어지며 성만길이 나온다. 남전 저수지가 하얗게 얼어붙어 겨울 풍경을 더해준다. 마을 이름도 하나같이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특별히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을 소개한다.

 

 

 

 

- 남전리지석묘군(南田里支石墓群) -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1035-1)에 “칠성바위”라 불리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돌멘(Dolmen) 또는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시대는 도시화·문명화의 생활이 시작되고 역사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문화양상을 띠고 있다. 이곳 일대에 지석묘 30여기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선사시대의 매장문화 양상을 구명 해주는 기념물로 1979년 12월29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었다. 남전리는 북으로는 해발 630m의 덕대산 기슭이 감싸고, 남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주거환경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남전리의 고인돌은 바둑판식인데, 작은 받침돌이 있는 것과 받침돌이 없는 두 가지 형태가 섞여 있다. 일부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풍년을 기원하거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든 알구멍<성혈(性穴)>이 새겨져 있는 것도 있다. 돌방 안에서 돌칼2점과 붉은간토기2점, 돌화살촉1점이 발굴되었다. 유물들은 동아대박물관과 밀양시립박물관에 1점씩 전시되어 있다. 돌칼과 붉은간토기의 특징으로 보아 남전리지석묘의 축조연대는 기원전 5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효자 지평 이신지려(孝子 地坪 李申之閭) -

하남읍 남전리 산1번지에는 효자문마을이 있다. 효자이신지려(閭)는 계은(溪隱) 이신(李申)의 효행(孝行)을 표창하기 위해서 조선 태종(1401-1418)년에 왕명으로 세운 것이다. 지려(閭)는 충신·효자·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것이다. 이신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개성(開城)에서 남하(南下)하여 밀양 조음에 정착한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의 장남이다. 일찍이 부모님께 효도를 다했는데, 부친상을 당해서는 시묘(侍墓)하는 동안에 상복을 벗지 않고 죽으로 연명하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고 한다. 태종 때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효행 정려(孝行 旌閭)가 세워졌으며 이곳 마을 이름도 효자동(孝子洞)으로 일컫게 되었다. 효자이신지려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1호이며, 1999년 8월6일에 지정되었다.

 

 

하남읍 왕적지 역사 흔적을 찾아서

하남읍 파서리(巴西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파서, 내동, 은산 등이 합쳐져 파서리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지금은 파서, 내동, 은산 등 3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리 동명은 파서리이다. 동쪽으로는 구박천을 사이에 두고 상남면 세천리, 서쪽으로는 대사리, 남으로 백산리, 북쪽으로는 상남면 조음리와 각각 경계를 이룬다. 은산(隱山)은 파서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은산이라고 부른 것은 덕대산(德大山)에서 동쪽으로 효자문(孝子門)까지 내려온 산세는 마치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온 형상이다. 파서리 뒷산의 지세는 서쪽에 있는 뱀이 동쪽으로 가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쥐가 앞에 있는 뱀을 보고 놀라서 높이 솟아있는 은산(隱山)의 뒷산 아래쪽에 숨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지금은 윗은산과 아래은산으로 나누어 졌다.

옛날 이 마을에 파수막(把守幕)을 두고 파수를 보았다고 하여 파수막 또는 파수라고 했다. 이것이 변해서 파서라고 하였다고 한다. 밀주지(密州誌)에는 "세운라파가야명명(世云羅破伽耶命名)"이라 하여 파서막은 신라가 가야를 치기 위해 군막(軍幕)을 설치했는데, 나중에 가야제국(伽耶諸國)이 항복함에 따라 군막(軍幕)을 파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또 바깥마라고 한 것은 파서리의 바깥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어정(御井)-

하남읍 수산리 산록에 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가우며 맛이 달았다 한다. 신라시대 왕이 국농소 연꽃놀이를 오면 반드시 이 샘물을 먹고 사용하였다 한다. 이 겨울에도 한 방울씩 흐르고 있었다.

 

 

 

 

- 파서막(破西幕) -

신라가 서쪽(낙동강 넘어 가야제국)을 치기 위해서 설치한 야전군사령부 역할을 한 곳 이다. 즉, 군막의 역할을 한 곳이 지금의 밀양시 하남읍 파서리에 있었던 "파서막(破西幕)"이다. 신라 진흥왕12년에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어 대가야(지금의 고령)을 침노 할 때 진흥왕이 머물렀던 곳으로 전한다.

 

 

- 정남정(定南亭)-

파서리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 정확한 지점은 알 수가 없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신라법흥왕이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항복한 것을 기념하여 정자를 지어 정남정(定南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 유적도 이궁대(離宮臺), 파서막(破西幕), 어정(御井), 세누정(洗陋亭), 풍류현(風流峴) 등과 함께 신라왕(新羅王)이 이궁(離宮)하면서 남겼던 것으로 전한다. 일설에는 대사동에서 파서리로 넘어 오는 풍류현(風流峴)에 있었다고 전한다.

 

 

- 풍류현(風流峴)-

하남읍 양동리에 있다. 신라의 임금이 흙을 쌓아 단(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땅을 맑게 하여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지이다.

 

 

- 세누정(洗陋亭)-

하남읍 수산리에 있었다. 신라 지증왕4년에 국호를 신라로 정하여 반포하고, 이듬해에 상제 즉 장사지내는 제도를 고쳤다. 임금이나 남편이 죽으면 그의 신하와 아내 및 자식들을 산체로 함께 매장하든 나쁜 인습을 씻었으므로 정자를 세우고 세누정이라 하였다 전한다.

 

하남읍의 역대 왕적지의 발자취는 왕이 순수(巡狩),정벌(征伐),예약(禮藥),봉선(封禪)을 한 곳이다. 지금에는 정확한 지점은 찾기 힘들지만 주변의 흔적으로 가늠하며 설화가 전한다.

 

하남읍은 유적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지방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대서방 진출의 전략기지였다. 그래서 신라왕이 이궁하면서 남긴 설화가 곳곳에 지명으로 남아있다.

낙동강의 붉은 노을이 하남들판을 덮어주는 모습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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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3.25 23:35

    첫댓글 다희
    좋아좋아
    팔공산온천 이선기
    강물
    龍雲(칠득이)
    연보라
    만광<나>

    운영님 감동입니더~
    언제 어느 새 이 글을 .............ㅎㅎㅎ

  • 12.03.26 04:34

    정말 귀한 자료입니다....

  • 작성자 12.03.27 17:3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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