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순이의 사랑은 전투적이다.
이팔청춘 십 대의 풋사랑이
어찌 이럴까 싶으리만큼
엉뚱하다 못해 심술 맞기도 하다.
짝사랑 상대인 소년을 향해
점순이가 던진 구애의 멘트는
치명적(?)이다.
"야! 느 집엔 이거 없지?"
맛있게 삶아진 감자를
무심한 듯 툭 내밀며 건네는 말.
강원도 산골마을이다 보니
감자 쯤이야 흔하게 널렸을 테지만
마름인 자기 집에 신세를 지고 사는
소작인 집안 아들이라고
감자 하나로 유세를 떠는 모양새가
소년은 영 마땅치 않았다.
기집애가 하는 꼴이 시덥지 않아
달갑지 않게 일어서는 소년.
그런 일이 있고나서
매양 죽어나는 건 닭이었다.
감자를 거절 당한 복수의 칼날이
닭에게 향한 것인데
소년의 집에서 키우는 닭이
허구한 날 점순이의 손에 잡혀
쥐어뜯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걸핏하면 힘센 닭과 싸움을 붙이니
죽는 소리로 꼬꼬댁거리는 통에
소년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성을 향한 야릇한 관심이 싹트는
사춘기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라면
맑은 수채화 같은 풍경이어야 하지 않나?
예를 들어 황순원의 <소나기>가
아주 교과서적인 예를 보여준다.
가을 소풍을 나간 들녘에서
소녀는 보라색 꽃을 가리키며
소년에게 묻는다.
"얘, 저 꽃은 이름이 뭐니?"
도시에서 온 소녀답게
시골의 야생화는 소녀에게
생소한 것이다.
소를 몰고 다니는 시골 소년이라면
그러하듯 걸어다니는 식물도감인
소년은 꽃 이름은 물론 척척박사요,
능숙한 솜씨로 한 송이 꺾어
소녀에게 살포시 안겨준다.
꽃을 받아 든 소녀의 수줍은 미소.
그 미소는 순진한 소년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한 장의 사진으로 깊이 아로새겨졌다.
뭐 이런 달달하고 청아한
느낌으로 와줘야 하는 건데...
점순이의 접근 방식은
애초에 그런 로맨스와는 결이 달랐고
차라리 스릴러 공포 쪽에 가까웠다.
특히나 소년의 닭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욱 살벌하다.
애매하게..
죄도 없이...
밤낮 폭력을 당하며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강제로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옆집 사는 점순이에 의해서 말이다.
한 마디로 희생양이 필요한
사랑의 전쟁이라고나 할까?
그런 날이 반복됐고
어느 날, 나무를 하고 내려오던 길에
노오랗게 핀 동백꽃(생강나무꽃) 아래에
앉아있는 점순이를 보게 된다.
'저것이 또 필경 뭔 일을 꾸미는 게지.'
짐작하던 차에 들려오는
처절한 푸드덕 소리.
아니나 달라?
기세 좋게 양양거리는 점순네 수탉과
피투성이로 반죽음이 된 자기 닭이 보였다.
상황이 이 지경이건만 점순이는
내 알 바 없다는 듯 태연하기만 하다.
분노가 폭발한 소년은
더 볼 것 없이 쥐고 있던 막대기로
냅다 점순네 닭을 후려쳤다.
그 바람에 점순네 닭은 속절없이
축 늘어져 죽어버렸고
소년은 새하얗게 질려버린다.
안 그래도 매사에 조심하며
점순네 눈치를 보며 살고 있던 처지에
이 일로 땅을 빼앗길 수도 있고,
집을 내주고 마을을 떠나는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돌아가자
소년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그만 왕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점순이의 반응이 의외였다.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는 것이다.
이담부터 안 그래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그러나 따져볼 입장은 아니었다.
소년은 눈물을 훔치며
순한 양처럼 대답한다.
"그래!"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맘
거절하지 말라는 거겠지.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러면서 어디에 떠밀린 건지
점순은 소년은 어깨를 치며
앞으로 엎어졌고 그 바람에
이제 막 흐드러지게 피어난
노오란 생강나무 수풀 속에
둘은 퍽하고 부둥켜 안고 쓰러졌다.
알싸하고 향긋하게 스미는
생강나무 꽃향기.
잠시 후, 점순이를 찾느라
역정을 내는 점순 엄마 소리에
겁이 난 점순이가 기어서 가고
소년은 엉금엉금 바위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간다.
이렇게 사랑은 시작됐다.
순박하고 성실한 산골 소년과
투박하고 과격한 점순이와의
풋사랑 내지는 첫사랑 말이다.
점순이가 내민 봄감자 한 알이
이를테면 오늘날의 썸톡인 셈인데
우직한 소년이 거절을 하면서
읽씹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여심을 몰라준 댓가는
기어이 닭을 한 마리 잡고서야
겨우 해피엔딩으로 결말이 난 것 같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토속적이고 해학적인 문체가
산골 마을의 소년과 소녀가
어떻게 사랑에 눈을 떠가는지
야생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림 출처:구글 이미지
카페 게시글
용띠들동행
사랑의 서막-김유정의 동백꽃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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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4 14:5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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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꽃피는 봄에 가봐야겠네요~
잘 읽었씀다 .
감사합니다.
편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