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장에서는 아들과 천사를 비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천사라면 대단하거든요.
그 이유는 지금까지는 천사들이 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줬습니다. 사실 율법도 천사가 전해 준 말씀입니다.
항상 선지자보다 천사가 더 위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천사들이 대단히
우월하게 보였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성경이 다 기록된 다음에 태어났기 때문에
천사들의 역할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천사들이 절대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해 줬으니까요. 그런데 히브리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위대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는 하지만 누가 천사를 보고 아들이라고 한 적 있느냐 하시므로 그분만이
이는 내 아들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자로 보냄을 받은
분이지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모든 구원을 총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계시지만 천사는 지금도
부리는 영으로 있지 않느냐 그러니 이 말씀을 받아서 흘러 떠내려 보내면 안 된다 하십니다.
천사들이 전해준 율법도 어기면 상당한 보응이 있는데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직접 보내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겁니다.
사실은 아들의 음성이 아니면 결코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사가 전해 준 율법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했느냐?
그분이 바로 거룩하신 자이고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다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혈과 육으로 우리 인간처럼 오신 겁니다. 우리가 볼 때 그 당시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제사장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성전에서
말씀을 증거 하느냐 누구한테 임명장을 받았느냐? 네가 어느 지파의 자손이냐?
이 말은 너 어느 신학교 나왔느냐 어디서 안수 받았느냐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네가 도대체 뭔데 진리라 하며 생명이라 하며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며 네가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느냐 참 무엄하구나 신성모독이구나 내가 너의
출생기록대장을 나사렛에 가서 떼 올까 네가 바로 나사렛 출신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혈과 육으로 오셨느냐?
혈과 육으로 오신 이유는 혈과 육은 사망과 음부입니다. 혈과 육을 가진 자는
사망과 음부를 가진 겁니다. 사망과 음부가 한 짝인 것은 사망은 죽음 상태 그대로이며
음부는 사망을 담는 주머니입니다. 나중에는 음부까지 불 못에 던져집니다(계20:14)
이와 같이 우리의 혈과 육은 사망과 음부입니다. 이는 우리 몸 안에 있는 겁니다.
주님이 혈과 육을 입고 오신 목적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 안에
있던 우리를 다 건져내서 사탄의 손아귀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혈과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이나 어려움이나 시험을 전혀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래서 히3장에 와서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하십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 안 하는 이유가 뭐냐면 오늘이라는 날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강퍅(완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까지는 따라
나왔지만 가나안의 안식을 못 누린 것은 기적이나 표적을 쫓아다니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들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이 은혜를 얻기 위하여 믿음의 화합(결부)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히4장에 와서는 믿음의 화합(결부)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처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됩니다.
견고히 잡는 것이 바로 믿음의 화합인데 왜 믿음의 화합을 이루지 못하느냐
이런 경우입니다. 요한복음도 듣고 로마서도 듣고 히브리서도 다 듣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천 번을 읽고 백번을 필사하고 이런 저런 설교를 들었는데도 왜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느냐 그것은 자신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지 않고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머리와 입만 믿고 손과 발이 따로 노는 중풍병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지 않기 때문이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에 의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찔려 쪼개지고 그 앞에 감찰이 되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감찰이 된 다음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는 방법은 히5장7절 말씀처럼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실 것인데 사람들이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을 잘 모르는데 문제가 큽니다. 아론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도 알고,
총회 인준을 받아서 안수 받은 목사는 잘 아는데 멜기세덱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모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을
모시고 세미나를 할 때마다 맨 처음 질문이 이 중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분이 있으면 나와서 그 길을 설명해 주세요 합니다.
아직 명확하게 설명하는 분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신앙의 초보로서 젖만 먹으니까 그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완전한데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하게 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주 내리는 비를 받아서 땅이 밭가는 자들에게
채소를 내면 복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서를 듣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구원이 가까움을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왜 구원이 가까움을 알고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맹세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에 대해서 맹세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서 이 구원을 이루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의 닻은 하늘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완전한데 나아가는 길을 파악하고 그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히1장에서 6장까지의 개요입니다. 우리들이 순간순간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히브리서하면 항상 히브리서 전체가 하나의 편지임을 알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편지 한 줄 읽고 그 편지 내용을 다 알았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따라서 강해설교로는 히브리서 내용을 통으로 알기는 꽤 어려운 일일 겁니다.
히6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맹세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의 맹세가 배어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의 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맹세가 그 속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했다는 뜻도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됐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생명을 이 성경 속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듯 성경 속에 영을 후하고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통하여 아들의 영과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면 하나님의 생명을 내가 가졌으므로 하나님이 특별한 소유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생명과 자기 이름을 아끼는 분입니다. 에스겔36장 22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다든가 이방신을 섬겨서 이방 나라에 잡혔다든가 해서
그 이름을 더럽힐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을 위함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준 내 이름을 위해서 그들을 건져 내 이름이 거룩한 줄 알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맹세하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고후4장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담는 질그릇입니다.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은 이 껍데기가
아닙니다. 귀한 걸 담으면 귀하게 됩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담는 그 내용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것이지 그릇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능력이 껍데기인 육신에
있음이 아니라 그 속에 계시는 알맹이인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리고 발에 다 붓습니다. 이 향유는 마리아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소유의 전부가 향유입니다. 목숨과 같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가장 귀한 소유라도 감히 주님의 발 밖에 적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여자를 보라’
그리고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와 같은 역사가 있을 것이다’ 하십니다.(막14:9)
다시 말하면 이 복음이 가는 곳곳마다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님 발아래 놓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고 자기에게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의 발을
닦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사건이
생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를 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가 이와 같은 은혜를 통하여 히브리서 7장까지 따라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은 엄청난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할렐루야! 잘 삭은 묵은 김치같이 맛갈나는 아멘이십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