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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심
마가복음 16:12-14(마 28:16-17, 막 16:12-140; 눅 24:13-45; 요 20:24-29)
마가복음 16장 12-14절/ 12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6장 12-14절과 함께 요한복음 19장 24-29절의 말씀을 함께 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4-29절/ 24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
요한복음 20장 24-29절을 예배 설교의 본문으로 정했습니다만, 열 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 부분이 기록된 마 28:16-20, 막 16:12-18, 눅 24:13-49, 요 20장 19-23절을 함께 놓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으나 말씀하시던 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자신의 모습을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이며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실한 증거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행 1:3).
예수께서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인 횟수는 모두 열 한 번에 걸쳐서 되어졌습니다. (1) 첫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마 28:9-10, 막 16:9-11, 요 20:11-18). (2) 두 번째는 갈릴리에서 온 몇 몇의 여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눅 24:1-12). (3) 세 번째는 베드로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눅 24:24, 고전 15:5). (4) 네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막 16:12-13, 눅 24:13-32). (5) 다섯 번째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만나 주신 그날 저녁 도마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셔서 자신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막 16:14, 눅 24:36-49, 요 20:19-25). (6) 여섯 번째는 여드레 후에 열 한 제자들이 다시 모인 자리에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때는 도마도 있었습니다(요 20:26-29). (7) 일곱 번째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제자 몇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요21:1-14). (8) 여덞 번째는 갈릴리 산에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지상명령을 주시며 그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을 일깨워주셨습니다(마 28:16-20, 막 16:15-18). (9) 아홉 번째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내 보이셨습니다(고전 15:6-7). (10) 열 번째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활동을 할 야고보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고전 15:7). (11) 열 한 번째는 승천하시기 전 베다니 근처의 산에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막 16:19-20, 눅 24:50-52, 행 1:6-11).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한 제자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두 열 한 차례에 걸쳐 자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행적과 관련하여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 한 제자들, 곧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면서 보인 믿음입니다. 열 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뵈었으나 처음에 그들이 보인 반응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있는 산에서 열 한 제자들에게 네 번째 나타나 그들과 함께 하시며 앞으로 그들이 할 일에 대한 사명을 말씀해 주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장사되신 무덤을 찾아왔다가 빈 무덤을 보고 그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에 두 제자는 예수님이 장사되신 무덤이 빈 무덤임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두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이때 요한은 무덤 안의 광경을 보고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20:8).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있게 된 빈무덤을 보게 될 때까지도 예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야 하실 것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상태를 확인한 정도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동안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예수님의 무덤으로 왔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기쁨에 넘쳐 한달음에 슬픔에 잠겨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막 16:9-11). 이런 불신앙은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 주었을 때도(눅 24:9-11), 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막 16:12-13, 눅 24:13-35).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듣고서는 터무니없는 헛된 소문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일은 꿈 같은 이야기로만 들려졌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그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전하는 말을 믿지 아니함이러라”(막 16:14)에서 보는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섯 번째로 자신의 모습을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실 때 그들이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이 전하는 말을 믿지 않는 불신앙에 대해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불신앙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 제자들 중 몇 사람, 곧 시몬 베드로, 쌍둥이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는 디베랴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고기를 낚게 하시고 같이 식사하시며 자신이 살아 계심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벌써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요 21:1-14).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을 때의 제자들 중 일부는 믿음의 상태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산인 갈릴리에 있는 한 산에서 예수님을 뵙고 경배할 때까지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6-17)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지가 여덟 번째이며 열 한 제자들 앞에는 네 번째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 중 일부는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여섯 번째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을 때는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면서까지 믿음을 갖게 해 주셨고, 일곱 번째는 제자들과 같이 식사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여전히 의심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면서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서도 의심하는 것이 타락한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듣고 본 대로 깨닫고 믿음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엡 2:8). 열 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여덟 번째 자신의 살아 계심을 보이시며 지상명령을 주신 때부터 비로소 부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부터는 그들이 믿지 않았다든지, 의심하는 자가 있다는 기록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허지만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참 뜻을 이해하는 데는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장 6-8절의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고서는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시고 또한 부활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셔서 온 세상의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속의 공효를 입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불러모으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시기까지 성령의 기다리는 기도 중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께서 강림하셨으며 제자들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과연 믿음이 없는 자들인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열 한 제자들(이는 열 한 제자 모두가 한결같이 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요한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빈 무덤 안에 예수님이 수의로 입으신 고운 베옷이 입혀져 있던 상태 그대로 놓여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쌋던 수건은 잘 개켜져 그 옆에 놓여져 있는 광경을 보고는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실 때 크게 기뻐하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한 성경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데서 제자들의 상태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한동안 믿음이 없는 자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을 믿고 좇는 것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베드로의 대답에서 잘 나타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에 있었던 디베랴 바다 건너편 한 들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인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시고(요 5:19-47), 그후에 디베랴 바다 건너편 빈들 곧 한적한 곳에서 자신을 좇는 많은 사람들의 저녁 끼니를 위해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 생명의 떡에 대해 가르치셨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많이 떠나갔습니다(요 6:1-66). 그것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을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보편적인 생각,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은 단순히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임을 보았습니다. 여기의 ‘그 선지자’는 신명기 18장 15절, 19절에 나오는 선지자를 일컫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동족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한 사람을 선지자로 불러 세워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하게 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 선지자의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그의 말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책임을 묻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선지자, 곧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 선지자라고 하면서 이제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름으로써 큰 세력을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그런 세력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유대인들은 로마를 자기들의 땅에서 쫓아내고 그들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쟁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 1장 6절에서 예수님의 승천 시점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한 질문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사고(思考)에 오랫동안 깊게 박혀 있는 메시야관은 이 세상에 이스라엘 국가를 온전한 상태로 세우실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주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님의 메시야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자신이 세상에 온 참된 뜻, 곧 진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자기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본의(本意)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종국은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분리시키시는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와 비진리에 속한 자를 가려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떠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열 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이는 “주님,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뿐이신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우리가 주님을 떠나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신앙고백하였습니다.
이런 예에서 보는 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대로 살면 영생을 얻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였을 때도(마 14:33),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고백할 때도(마 16:16) 거듭 표명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존재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도 있었고, 또한 선구자 세례 요한의 가르침도 있었던 데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어 함께 동거 동행하면서 그분의 메시야이심을 보며 확증을 얻는 가운데서 갖게 하는 것에 의하여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는 믿음이 없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음을 가졌습니다만,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죽음과 부활을 겪으시는 것을 통해서 구속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만 죄 값을 치러 모든 사람을 죄와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며, 또한 부활하셔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신다는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네 차례에 걸쳐 예고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 말씀하신 의도를 깨닫지를 못하여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그 믿음의 온전함에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도무지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사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십자가에 달려서 되어질 것임을 죽음의 예고에서 알려 주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게 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그리고 여러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이 십자가에 달려서 되어질 것임을 말씀하시며 왜 그렇게 죽음을 당하시는지 그 이유를 밝혀 주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야 내가 그인 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상태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고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예고하실 때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 17:23)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을 이해를 못한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그 사실만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의 진의를 알고자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 부활을 믿지 못했으며, 거듭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도마의 의심
제자들 중에 ‘도마’란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은 다섯 번째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모여 있는 집의 문을 닫아 걸어 잠그고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평안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며 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관련하여 표징적으로 성령을 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열 한 제자 중에 도마란 제자는 마침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는 그날 도마에게 자신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도마는 직접 자기 눈으로 예수님의 손에서 못 자국을 보고 거기에 손가락을 넣어 보며 또 예수님이 창으로 찔리신 곳인 옆구리에 자기 손을 넣어 확인해 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도마의 의심, 그의 의심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유난히 믿음 없는 자의 모습인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져보고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까? 이는 그가 주로 믿고 따른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자신 앞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면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한 성경의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한 성경의 말씀을 깨달은 믿음에 아직 있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신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자신 앞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과연 자신의 주이신 예수 그분이 맞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난의 상처를 직접 손으로 만져 봄으로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그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쁜 소식이지만 자신 눈 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서 그는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져 보고 해서 실제 확인해 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져 확인함으로 실제 증명이 되었을 경우에만 믿겠다고 하는 것은 누가 탓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서 들어서 믿든, 자기 눈으로 보고 믿는, 정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인가를 일일이 확인해보고서 믿든지 간에 그 믿음은 어디로부터 가진 것이어야 하는가 하면 ‘성경대로’에 따른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신 그대로 하나님이 그 하신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이니 이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기에 예수님의 부활이 그대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빈 무덤을 보았으니 믿는다거나,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믿는다거나, 내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믿음은 믿음이 없다고 하시며 그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막 16:14, 참조. 눅 24:25). 예수님께서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나타내시며 강조하실 때는 그 믿음에 이르면 되었습니다. 그 수준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천국 복음의 진리를 확연하게 가르치실 때는 한층 그 믿음의 수준에 올라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구속의 성격을 가르치시고, 또한 그 모습을 나타내실 때는 그 믿음을 지닌 장성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때는 그보다 더 한층 자란 믿음의 상태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 믿음은 교회로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한 이유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또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경 말씀(시 16:10), 곧 모세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며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어야 했습니다(눅 24:25-27).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신앙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관해 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에 믿음을 갖고서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서도, 또한 그 예수님을 뵙고서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은 것은 곧 그분의 부활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인간의 이지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볼 때는 ‘허탄한 듯’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부활이란 세상 마지막 때에 있을 일인데, 예수님의 부활도 그 범주 안에서 봄으로써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허탄한 듯이 보였습니다.
둘째, 더구나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자연인의 죽음 차원에서 생각했지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부활을 가져오시기 위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신 예수께서 장사 지내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에서 이것을 여느 사람이나 겪는 죽음의 관점에서 볼 뿐이었지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이 갖는 구속의 의미와 그 공효를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자이신줄을 믿었으나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는 시점에 있으면서까지도 여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일을 하셨을 때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서 속죄양으로 죽으신다는 진리를 모세의 율법을 좇아 제사 의식을 행하는 것을 통해서 배우고 있으면서도 그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의 메시야 예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구속의 의미와 그 공효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서 갖는 믿음은 그것에 뒤따르는 부활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셋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생을 가져다 주시는 메시야로 믿고 섬겨왔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서는 실망을 가져다주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야관은 자기들 위에 왕으로 영원히 군림하면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점은 제자들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겪으실 일을 말씀하실 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로서는 이제 곧 예수님께서 큰 권능을 행사하실 것으로 여기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로 알고 섬겨온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자 크게 실망하고 시름에 잠겼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그 소식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에 두고 성경 그대로 이루어진 것에서 생각하지 않은 그들로서는 허탄한 듯이 여겨져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지 못한 도마는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믿음을 주심
예수께서는 자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친히 나타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미련하고 완악한 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서는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서 자신에 대하여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말씀해 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 말씀들을 깨닫게 하여 믿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못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확인해 보고 믿겠다고 한 도마에게는 친히 자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면서 의심을 풀고 믿는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제자들의 믿음의 상태에 따라 성경 말씀을 풀어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며, 실증으로 확인시켜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고, 거듭 자기들의 눈으로 보면서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서 보는 대로 성경 말씀의 깨달음에 대해 감동하심에 사로잡혀 있는 말음의 상태가 뚜렷한 것에서 볼 수 있으며,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여인들이나 제자들이 기쁨으로 경배를 드리는 처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영적이고 깊어집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가 예수께 가진 믿음이 깊이 뿌리 내려 견고한 것으로 표현합니다(골 2:6-7).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는 무엇 때문에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말씀을 주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피 흘리시는 희생을 하여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가 아니며,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한 자입니다. 죽음이 더 이상 우리에게서 왕노릇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왕노릇합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의로움과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 경험하며 누리며 사는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이 평강이 우리의 삶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과 갖는 관계성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무슨 거리낌이 있겠으며, 장애가 있겠습니까? 죄의 세력은 분명히 우리에게 시험거리로 다가옵니다. 갖은 유혹과 또는 대적으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은 결코 우리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으며 죽음의 심판에 이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주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전혀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을 세상은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히 11:38). 거기에서 믿음이 지닌 위대한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그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그가 지닌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자랑스러운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배 생활을 잘하는 내 모습입니까? 하루에도 상당한 시간을 내어서 무릎 끓고 기도하는 그런 모습입니까? 남달리 정이 많고 사랑이 많아서 남을 잘 돕고 교회의 봉사 활동을 잘 하는 그런 모습입니까? 참으로 우리가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내 모습이 아니라, 복음의 위대한 생명력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랑스러워 한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믿음 생활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과의 돈독한 관계성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성경 말씀에서 보고 있다면 믿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가르침과 감화력에 복종하며 갖는 겸손과 온유함으로 말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이다”하고 외칠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이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서 단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어서는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내 희열과 만족으로 믿음 생활하는 것이고 내 의로 열심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는 믿음 생활이란 것은 성경 말씀을 깨닫고서 예수님의 구속의 공효와 부활의 생명을 입는 믿음에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 앞에 참으로 당당한 것입니다. 결코 죄의 세력에 꺾여 굴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된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갖은 위협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해 나간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는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죄악된 이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에 생명을 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