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수지리학적으로 조명한 국회의사당
이 글은 2013년 11월 9일(토) 서경대학교 경영대학원(풍수지리경영전공)이 주최한 2013년도「서울 관공서의 풍수적 입지분석」이란 논제의 풍수지리 학술세미나에서 필자가 발표한 ≪풍수지리학적으로 조명한 국회의사당≫ 의 주제내용입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조명한 국회의사당
1. 국회의사당의 고찰
2. 현 국회의사당이 입지한 여의도(汝矣島) 고찰
3. 국회의사당에 대한 풍수지리학적 분석
4. 국회에 귀신이 산다
5. 결 론
1. 국회의사당의 고찰
1) 우리나라 국회의 변천사
우리나라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2년여 동안 미군의 군정통치가 이어지다가 1948년 5월 10일 총선에 의해 구성된 제헌국회가 개원되어 일본의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 중앙 홀에서 첫 회의가 열렸다. 그 후 2년여 동안 사용하던 총독부 의사당은 2대 국회가 개원되자마자 발발한 6. 25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남쪽으로 후퇴하는 불리한 전세(戰勢)속에 임시수도였던 대구의 문화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면서 이곳에서 1950년 7월 27일부터 8월 17일까지 임시회의를 개최한다. 그러다가 다시 1· 4후퇴로 정부가 부산으로 남하하자 국회는 1951년 1월 4일부터 부산극장을 의사당으로 사용하였고, 6월 27일부터는 경상남도청 내에 있던 무덕전으로 이전하여 1953년 8월 서울 환도 시까지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서울로 입성한 국회는 1953년 9월 27일부터 1954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날 때까지 다시 중앙청 중앙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면서 제3대 국회가 개원한 1954년 6월 9일부터 태평로에 있는 서울 시민회관 별관을 의사당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양원제가 실시된 제5대국회 때는 참의원은 서울 시청 뒤 대한공론사를 의사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의사당이 협소하고,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신축하자는 제안과 이승만 대통령 의지에 따라 1959년 제4대 국회 때, 남산(현재의 남산 시립도서관과 남산 야외음악당이 있는 자리)에다 의사당건물을 신축하자는 건립 안을 마련하면서 건축물 설계안(김수근)과 함께, 기반작업이 착수되었으나,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되는 계기를 맞는다. 1966년 2월 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가 다시 구성되어, 의사당 후보지로 사직공원, 종묘, 신문로에 있던 서울고등 학교부지, 필동의 수도방위사령부등 10여 곳이 선정되어 타당성 조사를 한다. 그러다가 1968년 4월, 제7대 국회에서 여의도 양말산 일대의 10여 만 평을 의사당건립부지로 선정하여, 2년여에 걸쳐 종합설계를 완성하고,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가졌으며, 1975년 9월 1일 현재의 여의도 의사당이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립과정 및 평가
당시 최고의 의사당 건물을 갖고 싶었던 국회는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가들이 모여 하나의 안을 만들어낸다면 최고의 건축물이 탄생 할 거라 보고 출발하였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은 불투명한 공모절차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참한 것으로 전하지만, 결국 많은 건축가(신진)들이 국회 결정에 동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현상공모를 통해 당선 안을 뽑지 않고 여러 건축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안을 만들어내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최초의 안이 나왔지만 국회와 정부의 설계 간섭은 계속되었고, 당초에는 없었던 지름 50m, 높이 20m의 돔 구조물을 옥상에 설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국회스스로가 의사당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정작 국회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건축가들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사당 건립에 참여한다는 자긍심은 대단했지만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가 어떤 모습을 담아야 국민들로부터 칭송과 사랑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국회의사당에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담을만한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결국 정치인들은 자신의 짧은 식견을 유감없이 발휘한 꼴이 되었고, 그들의 뜻을 적극 개입시켜 만든 것이 오늘의 국회의사당 모습이다.
이글은 <2013년 5월 1일, 경기대 건축대학원 안창모 교수의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 내용이다.
“民意 저버리고 정치인이 설계 간섭”
《건축 전문가 100인이 뽑은 최악의 현대건축물로, 6위와 7위가 국회의사당과 청와대다. 국회의사당(1975년)은 “국회 혹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건물이다”(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대표적인 권위주의, 국가주의 건축물로 서양고전을 차용한 조형은 미적으로 정제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이 당쟁만 일삼는 이유가 이 건축에 있다”(박길룡 국민대 건축대학 명예교수)는 평가를 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본관과 춘추관, 대통령 살림집인 관저를 새로 지은 청와대(1991년)에 대해서는 “군사정권이 세우려고 한 정통성의 왜곡된 표현”(조남호 솔토건축 대표), “콘크리트로 어설프게 흉내 낸 한국의 전통,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공간구성”(김훈 studio t.a.g 공동대표)이라는 지적이다. 》
《국회의사당과 청와대가 ‘최악의 건축’ 목록 상위권을 차지한 것은 필자에게는 다소 의외였다. 두 건물이 ‘최고의 건축’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건축’ 목록의 상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만큼 쌍벽을 이룰 건물들도 아니다.
그런 두 건물이 나란히 비슷한 순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국회의사당 신축은 우리 건축의 정체성을 담아야 하는 국가적 과제를 안고 시작되었다.
광복 후 변변한 자신의 건물을 갖지 못한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배려(?)로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가질 기회가 있었지만, 5·16으로 기회를 잃었다..........(중략)
국회와 마찬가지로 행정부도 자신의 건물 없이 오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경복궁 앞에 정부종합청사(1971년)가 지어지기는 했지만 대통령은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구 총독관저’ 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우리 손으로 지은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고, 그 결과가 현재의 청와대다. 행정부 수반이 일하는 집무실을 전통건축양식으로 짓는 것 역시 국회의사당에 우리의 고유문화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만큼이나 당연하게 요구되었다. 건축가가 자신의 디자인을 제시했지만 무시되었고, 청와대의 요구에 따라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청와대의 건설에는 건축역사학자들도 적극 개입해 업무공간으로는 처음으로 전통건축의 모습을 가진 현대 한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한옥이 최악의 건물에 선정된 것이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참여한 두 건축이 당대 최악의 건축물로 손꼽힌 이유가 무엇일까? 건축계 능력의 한계가 드러난 것일까? 아니면 건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축주와 우리 사회의 수준 탓일까? 두 건물에 대해서는 수많은 악평이 있지만 평가의 대부분은 건축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는 건축 외적인 기준에 의한 평가일 뿐 아니라 건축가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질타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이러한 평가 배경에는 우리가 겪어온 지난한 현실이 존재한다. 정권유지를 위해 건축을 도구로 사용했던 우리의 현대사가 있었다.
남북분단의 냉전체제는 역사 속 전적지 부활의 배경이었고, 전적지의 사당에 세워진 계란색 단청의 콘크리트 한옥을 정당화했으며, 남북대화는 세종문화회관을 낳았다. 모더니즘에 심취했던 건축가들은 이러한 콘크리트 한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도 않았다. 건축을 처음 접하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건축가는 의사 변호사와 함께 사회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전문가이자 자유업이다. 그리고 ‘건축은 사회의 거울’ 이며, 그 중심에 건축가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사용자를 위한 건축을 만들어야 한다고 배웠다. 이러한 가르침은 건축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이들에게 건축가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지만, 현실 속의 건축가는 전혀 달랐다. 그 결과가 국회의사당과 청와대 건축이고, 건축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전문가들이 스스로 내린 최악의 건축 순위 속에 담겨 있다. 이 두 건물은 건축가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는 말로 안창모 교수는 평가하였다.
3)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건립 및 규모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립은 공사기간 6년 동안 총공사비 135억 원이 투입되었고, 시멘트 64만 부대, 벽돌 850만 장과 연인원 1백만 명이 투입되었다.
돔은 원만한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의회정치의 본질을 상징한 것으로 건물에 안정감과 웅장미를 더한다.
총 대지면적은 33만㎡ (10만평)이고, 지하 2층, 지상 6층의 건물로(한층의 높이는 5.2∼6.5m) 지반에서 기단 면까지는 5.44m, 기단면에서 돔 상단까지는 63. 75m, 연건평은 8만 1444㎡ (2만 4680평)이다. 의사당은 국회양원제의 실시에 대비하여 두 개의 대형 회의장이 있는데, 현재의 본회의장은 민의원 본회의장으로 쓰일 수 있는 것으로 950㎡(288평)이며, 의석은 이동식으로 4백석까지 확장이 가능하고 방청석은 350석, 기자석은 80석이다. 한편, 현재의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회의실은 참의원 본회의장의 공간으로, 의석 1백석, 방청석 250석, 기자석 40석이다.
양원 본회의장은 사방 40m인 ‘로턴다홀(로턴다)’ 의 좌우 양측에 위치하여 홀의 천장 돔까지 장쾌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홀의 네 귀에는 국가의 중흥에 기여한 지도자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좌대를 가장 먼저 차지한 분이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선생으로, 동상아래에는 ‘평생을 개화와 독립투쟁으로 일관하시고,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민족지도자’ 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몇 년 전 초대 국회의장을 지낸 이승만 전 대통령과 신익희 선생의 동상도 설치되었다.
위치와 크기는 이동녕 선생은 흉상(胸像)인데 반해 두 분은 전신상(全身像)이고, 이동녕 선생은 외진 곳에 있는데, 두 분의 동상은 정면 양쪽을 차지하고 있어, 형평성과 역사성 측면으로 보면 격이 맞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홀의 대리석바닥과 각층 발코니의 난간, 그릴 등은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고상하고 우아한 고유의 문양을 현대화시켜 도안을 채택하였다.
바닥은 신라의 와당문양 중에서 길하다는 무늬를 사용하여 전국행정구역을 나타낸 도안으로서 단합을 상징하며, 석굴암 천장궁륭(활이나 무지개같이 높고 길게 굽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천장)의 모양을 응용하여 주위를 깔고 외부 선에는 조선시대의 내부 장식에
한편, 부속건물과 시설로서 의장공관은 의사당 본관 정면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로서 건물높이 7. 8m, 연건평 1,264㎡(383평)이다. 의원회관은 의사당 본관 정면의 도로 건너편 왼쪽에 건립된 아파트 5동을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각 동 모두 5층으로 연건평 6,725㎡(2,038평)이다. 기타 부속건물로 경비대 건물과 차량정비고, 온실이 있다.
참고문헌
『국회의사당건립지』 (국회사무처, 1977)
『국회선례집』 (국회사무처, 1977)
2. 현 국회의사당이 입지한 여의도(汝矣島) 고찰
1). 조선시대 문헌 등으로 고찰한 여의도의 유래
<세종실록>을 보면 “잉화도(仍火島) 【서강(西江)에 있다】에 양, 돼지, 닭, 오리, 당기러기[唐雁: 거위] 등을 길렀다” 는 내용과, <연산실록>에 “여화도(汝火島)와 율도(栗島, 밤섬) 등지의 인가를 모두 다류목(多柳木)으로 철거시키고 빙 둘러서 담을 쌓으라” 는 왕의 지시가 있었다.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 1863년(철종 14)>에 "여의도는 밤섬 서쪽에 있는데, 맑은 모랫벌이 육지에 닿아 있다. 여기에 전성서(典性署)의 외고(外庫)가 있어 양을 놓아기른다." 는 내용이 있으며, <동국여지비고>에는 “나의주(羅衣洲)는 예전에 목장이 있어 사축서(司畜署)와 전성서(典性署)의 관원을 보냈으나, 이를 폐지하였으며, 지금은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0마리 만을 놓아기른다.” 고 하였다. 한편, 이곳 국회의사당의 터인 양말산(羊馬山)을 두고 여러 근거 없는 설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는 목마장(牧馬場), 즉, 이곳에 말을 기르던 목장이 있었다는 설이다. 심지어는 영등포 구청 홈페이지와 영등포구지에도 마치 사실처럼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헌 어디에도 말을 길렀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고,
1861년경에 발행한 『대동여지도』 첩의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목판에도 산(양말산)그림 옆에 목양(牧羊)이란 글자를 표기하여 양을 기르는 곳으로 표시하였다. 둘째는 양말산 일대가 조선 궁녀들의 공동묘지, 또는 화장터였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문헌 어디에도 이러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아무리 빽이 없고, 미천한 신분의 백성이라도, 홍수가 나면 산 정상 아래까지 물이 차오르고, 양과 염소를 기르던 목축장에 설마 조상의 무덤을 조성하거나, 특정인(궁녀)들의 음택이나, 시설물(화장터)로 공(供)하도록 지시한 임금이나, 대신들은 없다고 본다. 그러한 소문은 단순히 흥미를 유발시키려는 헛소문이거나, 국회의사당을 폄하시키고자 하는 뻥 설에 불과하다고 본다.
여의도(汝矣島)란 명칭은 汝(너 여), 矣(어조사 의), 島(섬 도)가 합쳐진 지명으로 ‘너의 섬’ 이란 뜻이다. 예전부터 이곳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양말산이 그리 높지 않아 한강이 범람하면 산중턱까지 물에 잠기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양말산이 홍수에 잠기면 머리만 살짝 내미는 모습을 보고, “너나 가져라” 는 뜻으로 ‘너의 섬’ ‘나의 섬’ 으로 불렀던 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여의도(汝矣島)란 지명이 생겨난 것으로 전한다. 여의도는 오랜 옛날부터 한강상류에서 실려 온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하중도(河中島)와 같은 모래섬으로, 이곳은 일찍부터 국가의 행사나 제례 등에 사용할 양과 염소를 기르던 목축장으로 사용되었지만, 모래톱으로 인접된 밤섬은 조선시대에도 인가(人家)가 들어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이 조선실록 등에 나타난다. 이곳 여의도는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여의도계 여의도였으며, 갑오개혁 때 한성부 북서 연희방 의도계 여의도가 되었다.
2) 조선시대 이후의 여의도 변천사
① 행정구역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종래 서울 성밖 지역 8방을 8면으로 고쳤는데, 이때 여의도는 경성부 연희면 여의도라 하였다. 그 뒤 1914년 경기도고시 제 7호로 성외 지역 8면을 경기도 고양군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여의도는 모래톱으로 연접된 율도와 함께 용산면과 서강면을 합해 용강면 여율리(汝栗里)가 되었으며, 1936년 조선총독부령 제 8호에 의해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여의도정(汝矣島町)이라 하였다. 1943년 총독부령 제 163호에 의해 구제도가 실시되면서 영등포구 소속의 여의도정이 되면서 율도(栗島, 밤섬)가 마포구로 분리되었다. 해방 후, 1946년 일제 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이 되었으며, 1955년 신길1동에 속했다가 1959년 영등포 7· 8가와 함께 영등포 제 5동에 편입되었다. 1971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676호에 의거 여의도동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 여의도의 이용과 변천
주민들은 주로 여의도의 동쪽 끝까지 펼쳐진 모래밭에서 땅콩 밭을 경작하며 생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1968년 서울특별시 한강개발계획에 따라 주위에 제방도로인 윤중제를 착공하였는데, 인근의 밤섬일대를 폭파하여 채취한 골재로 반년 만에 윤중제(輪中堤)가 완성되었고, 높이는 15m, 폭 20m, 길이 7,000m의 여의도 일주도로가 되었으며, 비행장 활주로는 5·16광장(현 여의도공원)이 되었다.
그리고 여의도 복판을 가로질러 마포와 영등포를 직결하는 6차선의 마포대교가 1970년 5월 개통함으로써 신시가지 발전이 한층 가속화되었다. 윤중제는 1972년 11월 26일 서울특별시공고 제268호에 의해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으로 제정된 41개 가로명 가운데 하나인 윤중제란 명칭을 사용하다가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공고 제673호에 의해 윤중제 구간을 세분하여 마포대교와 서울교를 축으로 동쪽은 여의동로, 서쪽은 여의서로란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1981년 10월 여의도와 용산구를 잇는 4차선의 원효대교가 준공, 개통되면서 한국방송공사, 문화방송국, 동아일보사 별관, 전국경제인연합회, 순복음교회와 각종 금융관계사, 아파트 등이 밀집하였고, 대한생명63빌딩, 엘지(LG) 쌍둥이 빌딩 등 고층건물이 들어섰다.
참고자료
『박상건 섬문화연구소장 pass386@hanmail.net』
『서울시민의 목소리 서울타임스』
3. 국회의사당에 대한 풍수지리학적 분석
1) 여의도와 국회의사당을 아우르는 조종맥(祖宗脈)
일반적으로 풍수인들이 인식하는 산맥체계는 모두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땅속의 지질구조에 기초하여 일본의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가 만든 것으로, 실제 눈에 나타나는 산줄기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개념으로, 현행 교과서(지리부도)에 수록되고, 지형학계 등에서 사용하는 산맥(山脈)체계이다.
둘째는 외형상 산길과 함께, 물이 경계를 짓는 지표상의 분수계(分水界)를 위주로 한 산경(山徑)체계로, 조선조 때, 여암 신경준(1712~1782)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산경표(山經表)가 대표적이다.
셋째는 풍수인들이 응용하는 용맥(龍脈)체계로, 외형적인 산경과 함께, 지중(地中)과 지표면(地表面)을 타고 흐르는 기맥(氣脈)을 망라하여 눈으로는 구분이 쉽지 않은 천전(穿田)과 도수(渡水) 등으로 연결되는 천전도수맥(穿田渡水脈)을 포함한다.
즉, 풍수지리설에서 응용하는 용맥의 개념이란 상지법(相地法)에 의해 땅을 관찰하는 것으로, 눈으로 나타나는 산줄기를 용(龍)으로 보고, 감추어진 정기가 흘러 다니는 통로를 맥(脈)으로 인식하여 눈에 나타나는 외형적인 모습을 체(體)라 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맥(脈)을 용(用)으로 하여 명당[穴]을 찾는 방법론이다.
맥이란 사람의 몸속에서 생성된 혈류(血流)가 몸 안과 표피(表皮)를 타고 흐르듯이 땅속의 생기흐름도 지중과 지표면을 따라 흐른다고 보고, 외형적인 용의 줄기와 함께,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지중맥(地中脈)까지 인지(認知)하여 용맥의 연결여부를 확인하여 길흉여부(吉凶與否)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곳 여의도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하(南下)하다가 속리산(俗離山)어름에서 분맥(分脈)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북쪽으로 진행하여 안성의 칠현산(七賢山)에서 한남정맥을 이어준다. 이 맥은 북서진(北西進)하다가 김포의 문수산에서 도수(渡水)하여 강화도까지 이어지는 맥이다. 북서진하여 치오르는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582m)에서 한 맥을 북동쪽으로 치올려 백운산(566m)과 바라산(428m)을 솟구치고, 한국정신문화원이 있는 국사봉(582m)을 지나, 몸통을 서쪽으로 크게 틀어 응봉(369m)을 일으키고, 화기(火氣)가 충천(沖天)한 화성체(火星體)의 관악산(冠岳山)을 솟구쳤는데, 이 산이 이곳 여의도로 맥을 유입시키는 태조산(太祖山)에 해당한다.
관악산에서 이어지는 용은 북쪽으로 진행하여 남현동의 인현고교를 지나 남부순환로를 건너뛰고, 북서쪽으로 몸통을 틀어 동작고교와 행림초교를 지나, 총신대 뒤쪽 능선으로 이어져 상현중학교 뒤쪽으로 봉우리 하나를 솟구치는데, 이 봉(峰)이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품안으로 아우르는 동작봉(銅雀峰, 159m)이다.
이 맥은 동작봉에서 서쪽으로 행도(行度)하다가, 흑석동의 달마공원을 지나 중앙대학교 기숙사와 노량진공원으로 진행하여 노량진로를 건너뛰고, 사육신역사공원을 일으킨다. 여기서 급락(急落)한 분지맥(分枝脈)은 철길을 지나 노량진시장 동편으로 진행하여 올림픽대로를 건너, 깊게 잠맥(潛脈)하여 여의도를 일으킨다. 이 맥은 63빌딩 어름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여의도역 부근까지 진행하다가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KBS사옥에서 국회의원회관을 지나, 예전 양말산이 있던 의사당본관을 아우르고, 여기서 밤섬(栗島)으로 연결된다.
2) 국회의사당 본관 입지
예전의 양말산 자락을 깎아내고 축조된 의사당 본관은 국회 경내에서는 높게 위치하였다. 그러나 지덕(地德)을 발동시키는 후산(後山)이 전무(全無)하고, 앙와(仰瓦)가 되다보니, 태평스러운 기운은 약한 것으로 본다. 본관의 방위는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지중맥(地中脈)이 유입되는 전면을 바라보면서 소위 역세국(逆勢局)의 형세를 이루어, 소통(疏通)보다는 불통(不通), 아집(我執)이
또한 건좌(乾坐)와 관련된 팔괘의 건(乾)은 위대한 하늘과 군자의 도리로서 크게 통하여, 곧고 바르게 나가면 이롭지만, 그 바름이 지속되지 않으면 용두사미(龍頭蛇尾)로 전락하고 만다는 괘(卦)이다. 그리고 국회 출입구인 손방(巽方)대문은 건좌손문(乾坐巽門)이 되어, 가상길흉법(家相吉凶法)으로 대입하면 화해택(禍害宅)이 되어 흉택(凶宅)에 해당하는 공간배치이다.
3) 국회의사당의 사신사(四神砂)
이러한 사신사는 전통적인 벽사(辟邪)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동서남북, 혹은 전후좌우를 사방(四方)에서 감싸고 수호한다는 중국인의 사상(思想)에서 유래되었다. 특정 터나, 건축물 등을 사면(四面)에서 옹호하며, 장풍(藏風)과 함께, 생기(生氣)를 응집시켜주는 사신사는 각각의 특별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현무는 주인으로써의 역량과 지도력을 상징하고, 청룡방은 남자(장손)의 역량과 후계자의 기운, 백호는 여성과 지손(支孫)의 역량, 그리고 재산의 기운, 주작은 주인의 사회적 지위와 활동력을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
사신사의 이상적인 형태는 생기가 응집되는 혈(穴)이나, 특정 터, 건축물 등을 중심에 두고, 둥그렇게 감싸주는 모습을 최상으로 보며, 마치 오목렌즈의 둥근 부분에 주변의 물체가 모아지듯 분산된 기운을 한곳으로 집중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즉, 특정 터로 유입되는 내맥(來脈)의 기운을 내기(內氣)라 한다면 사신사는 외기(外氣)에 해당되어 특정 터나, 장소에 기(氣)를 모아주고, 시종(侍從)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좌측의 청룡방(靑龍方)에는 의원동산과 국회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고, 우측의 백호방은 의원회관이 터를 정해 국민을 위해 밤잠을 설치고 일을 해야 하는 국회의원들의 업무공간이 재물과 관련성이 많은 백호방에 위치하였다.
또한 지붕 옆면의 처마선을 보면 평면이 되지 못하고, 중앙보다 전후면 양쪽이 치올리듯 대칭을 이루는데, 미적(美的)인 잣대로 보면 아름다움을 가미하고자한 건축가의 배려로 볼 수 있지만 풍수적 측면으로 보면 중심이 휘어진 형상이 되어, 거주자들의 발전성과 진취성, 명예. 권력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흉상에 해당한다.
즉, 우리나라 궁궐 기와지붕도 처마선이 수평을 이루기보다는 휘어진 것이 많이 발견되는데, 조선시대 왕실이 피폐해진 원인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국회의 입법 및 국정 심의 활동지원과 정부, 대학, 연구기관 및 일반 국민들의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 제공하여, 사실상 국회를 보좌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장서(藏書, 창고)의 기능을 수행하는 도서관이 청룡방에 입지한 것은,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공간배치라 할 수 있다. 또한 풍수에서 용호의 세(勢)에 대하여, 좌청룡(左靑龍)은 웅자(雄姿)한 용 줄기가 용머리를 들고 꿈틀꿈틀 굽어 감도는 듯, 터를 감싸고 호위해야 하고, 우백호(右白虎)는
오히려 청룡방의 도서관이 더 중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다가서면서 대조(對照)를 이룬다. 또한 본관 입구 계단 좌우에 설치된 ‘애국애족의 군상’ 이란 조각상(彫刻像)도
즉, 음양의 개념을 일상에 비유하면, 양(陽)은 활동성을 주관하는 동(動)의 개념으로, 남성, 약진, 한낮의 밝은 태양, 밝음, 해 뜨는 동쪽, 그리고 왼쪽을 뜻하며, 음(陰)은 조용한 정(靜)의 개념으로 여성, 부드러움, 밤하늘의 달, 어두움, 해가 지는 서쪽, 그리고 오른쪽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 전통문화에서는 항상 현무(北쪽)를 기준하여 왼쪽은 양(陽), 오른쪽이 음(陰)에 해당한다. 즉, 생자(生者)의 경우, 남좌여우(男左女右)의 위치가 정석(定席)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원수와 환담할 때도 항시 왼쪽으로 좌정(坐定)하게 되며, 냉온수(冷溫水)를 사용하는 수도꼭지와 정수기도 사람을 기준하여 왼쪽은 따뜻한 물, 오른쪽은 찬물이 나오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리고 공수(拱手)라 하여 두 손을 모을 때도, 남자는 왼손이 위[上]로, 여자는 오른손이 위[上]로 오도록 모으는 것이 예법이다. 그러나 사자(死者)의 위치나, 제법(祭法) 등에서는 남우여좌(男右女左)의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 그것은 산자와 죽은 자의 음양(陰陽)의 법도가 상반(相反)되기 때문이다.
즉, 선량들이 국민들을 대신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배치는
또한 광장 중앙의 명당(마당), 분수대에 설치된 ‘평화와 번영의 상’ 이란 청동(靑銅) 조각상도 선두에 선 여성이 오른팔로 기치를 세우고, 손에 비둘기를 들고 전방을 응시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양기(陽氣)보다는 음기(陰氣)가 성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주작(朱雀)으로 공하는 국회대로 건너편의 좌우의 크고 작은 빌딩들도 정연하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들쭉날쭉 서로 키 재기를 하는 양상으로, 이곳 의사당을 향해 응기(應氣)를 한다거나, 다정하게 환포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4. 국회에 귀신이 산다
2008년 7월 30일 오전 08:30 분에 방영된 MBC-TV 생방송 ”국회에 귀신이 산다” 에 필자가 풍수전문가로 출연하여 인터뷰한 내용이다.
<언론사 기사 내용>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의원회관 안팎으로 전해지면서 국회 종사자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것이다. 국회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청문회 둘째 날인 7월 14일 새벽 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7층 한 의원실에서 철야 작업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A 비서관은 평생 잊지 못할 ‘공포감’ 을 맛봐야 했다.
18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지난 4년 간 사용한 각종 서류와 책자 등 자료를 정리 중이던 그는 새벽 1시50분쯤 의자를 뒤로 젖히고 책상 위에 다리를 걸친 채 잠시 눈을 감고 잠에 떨어졌다.
그런데, 잠이 채 들기도 전에, 그는 누군가 지나가는 느낌과 함께 “집에 들어가 잠자라” 는 소리를 듣는다. 눈을 뜨자 파티션(칸막이) 위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한 여인이 사무실 안쪽의 의원 집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소리를 들을 때는 처음에는 같은
의원회관 내 귀신 목격담은 국회가 위치한 여의도의 유래와 맞물려 더욱 흥미를 끌고 있다. 지금의 여의도 국회의사당 터는 한때 조선시대 궁녀들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여인들의 한이 많이 서려 있을 것” 이란 추측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국회의사당이 자리 잡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는 예전에 ‘양말산’ 이 위치하고 있었다.
양말산은 조선시대 궁궐 내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오직 왕 한 사람을 위해 온 정성을 쏟은
이러한 설과 함께, 18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국회사무처가 의사당 뒤편에 65톤이 넘는 거석(巨石)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이러한 음기(지세)를 누르기 위한 ‘남근석(男根石)’ 으로 알려지면서 귀신소동에 불을 지핀 꼴이 되었는데, 남근석을 설치하므로 써, 여성의 한을 달래보자는 뜻이 담겨있다고 본 것이다.
<필자가 담론(談論)한 귀신의 실체>
귀신(鬼神)이란 죽은 사람의 혼령(魂靈), 또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준다는 정령(精靈)으로 정의한다. 과학적으로는 인간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심령(心靈)의 영상(影像)으로, 비실존적(非實存的)인 존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일반대중 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을 연구하는 학자나 심령과학자들은 혼령의 실재(實在)를 부인하지 못하고, 그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추세이며,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 민간에서는 이러한 혼령과의 접촉한 실례(實例)가 부단하게 전해져 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귀신과 관계된 이야기는 우리가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고, 전혀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개연성 등으로, 개인의 정신적 결함이나, 또는 어떤 자연현상적(自然現象的)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도 있어 종교학이나, 심령과학, 무속인, 또는 풍수인 등이 동참하여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거라 본다.
이러한 귀신을 옛 선조들은 음양설(陰陽說)로 해석한바 있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 에서 「천지간에는 기(氣)로 가득 차 있고, 곧 그 기가 정령(精靈)이며, 음(陰)의 정령은 백(魄)이 되고, 양(陽)의 정령을 혼(魂)이라 하는데, 이 혼백(魂魄)이 합하여 인간의 정신과 근력을 이룬다.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양기(陽氣)가 유산(游散)되는 것인데, 이것은 곧 유혼(游魂)이 삶으로 변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 유산하는 혼 가운데는 혹은 오르는 것도 있고, 또는 내리기도 하는데, 오르는 것은 양이고, 내리는 것은 음이며, 오른 것은 신(神)이요, 내린 것은 귀(鬼)이다. 신(神)은 양지령(陽之靈)이고, 귀(鬼)는 음지령(陰之靈)이라」 하였다.
즉, 생물을 구성하는 본질은 음과 양의 두 기(氣)이며, 이 두 기의 영(靈)이 그 생물에서 떠나는 경우에 혼(魂) ·백(魄) ·정(精) ·신(神) 또는 귀신이 되고, 이들 혼백 및 귀신의 존재 기간은 장단(長短)이 있어 영구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또한 혼(魂)중에서도 승천(昇天)하는 것은 양(陽)이요, 신(神)이 되며, 내리는 것은 음(陰)이며 귀(鬼)이다. 그래서 신은 양의 영(靈)이요 귀(鬼)는 음의 영이다.
따라서 산 사람의 영혼은 생령(生靈)이기에, 귀신이 될 수 없으며, 죽은 사람의 혼령만이 귀(鬼)와 신(神)으로 나뉜다고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가 허(虛하다는 것은 몸이나 정신상태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심신이 과로, 피폐해졌거나, 병이 들었을 때 등이다. 이런 경우, 정상인이라면
그리고 국회의사당을 무겁게 짓누르는 돔의 형상과 국회 요소요소마다 음적(陰的)인 기운이 가득하고, 한강에서 부는 강한 바람이 의사당 뒤쪽 오목한 요처(凹處)를 타고 몰아치면서 본관 외부 기둥과 벽에 부딪쳐 들려오는 흉흉한 소리와 함께, 평소 보았던 의원동산에 전시된 흉물스러운 조각상이 아른거리는 현상 등이 귀신으로 착각할 소지가 다분한 것으로 담론지었다.
그러한 귀신괴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룬 국회는, 무슨 연유인지 의사당 뒤편에 세운 표지석(남근석)은 남동쪽 헌정기념관 입구로 자리를 옮겼고, 의사당 본관에서 바라보이는 동산에 전시해 놓은 흉물스러운 반신상과 조각상도 모두 헌정회 주변으로 이전시켰으며, 동산에는 사랑재란 한옥건물을 축조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5. 결론
1) 사중도에 불과한 여의도 터를 일구는 지중맥
한마디로 여의도는 모래땅인 사토(砂土)와 밤섬(폭파) 등에서 흙을 퍼다 메운 매립지(埋立地)가 되어 음택풍수에서 응용하는 지표면(地表面)을 타고 흐르는 맥은 거의 영향을 받지 못하며, 샛강에서 천전도수(穿田渡水)하는 지중맥(地中脈)과 대기에서 생성되는 양호한 양기 에너지가 순환하면서 도시가 번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간룡법에서 말하는 용(龍)이란 지표상(地表上)에 융기(隆起)하여 눈으로 보이는 산맥(山脈)만이 아니라, 천전도수맥(穿田渡水脈)으로 유입되는 평지나 평야, 또는 물길을 건너 호수나 섬 가운데에 돌기(突起)한 산이나 구릉(丘陵)에도 존재한다.
그러한 예로 이곳 여의도와 비슷한 입지를 이루면서 하중도(河中島)나 다름없던 송파구 잠실을 꼽을 수가 있다. 원래 뽕나무가 숲을 이루던
그러다가 조선시대 큰 홍수가 나면서, 자양동 앞으로 샛강(신천강)이 새로 생겨 하중도로 변한 것이다. 1971년 본격적인 강남 개발과 한강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잠실 북동쪽에 제방을 쌓아 원 한강인 송파강을 매립하고, 강북 쪽의 잠실일부를 때어 한강을 확장하면서 섬에 불과하던 잠실남쪽지역이 본래의 강북에서 강남땅으로 변해 노른자위로 부상한 것이다. 지금도 자양동 앞으로 흐르던 작은 물줄기인 신천강(새내, 새개)에서 유래된 지명을 넣어 만든 ‘신천동’ 을 송파구의 법정동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도 잠실로 유입되는 지중맥(地中脈)은 한강을 도수(渡水)하여 연결되는 한북정맥이 조종맥(祖宗脈)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 등으로, 우리 풍수인들이 용맥 등을 살필 때, 선(線)을 위주로 목력심사(目力深思)하는 음택(陰宅)과, 편(片)을 응용하는 양기(陽基)와 양택(陽宅)을 구분하여 간법(看法) 등을 하는 것이 풍수의 관건이다.
즉, 양기나 양택을 논하는 과정에서, 이곳 여의도처럼 매립지로 일군 신도시나, 대규모의 택지개발, 재개발 등으로 새로운 도시가 탄생하는 경우, 지표면으로 흐르는 용맥의 유입여부 등을 따져 길흉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은 적응성(適應性)이나 유용성(有用性)면에서 착오를 일으킬 여지가 농후하다. 그것은 새로운 도시를 일구는 과정에서 평탄작업 등으로 그 일대가 거침없이 개발되면서, 종전의 산자락을 목력(目力)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도로와 하수도, 광장, 공원, 등과 함께, 새로운 물길 등과, 지하의 굴착이나 공작물 설치 등으로 지표면으로 흐르는 맥선이 막히거나, 끊기는 경우 등도 생기며, 양기와 양택 등을 판단할 때, 도로 등을 물로 유추하는 것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눈으로 판단이 가능한 지표맥을 확인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지중맥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도 유입된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국회의사당의 문제점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사당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데로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음기(陰氣)가 기승(氣勝)하다 보니 공명(公明)보다는 사사(邪思)가, 공개(公開)보다는 비밀(秘密)이 극성하는 터로 전락하였지만, 우연인지는 몰라도 의사당 본관 처마를 지탱해주는 대열주(大列柱, 24계절을 뜻하며, 전면 8개, 후면 8개, 좌우면 각각 4개)도 음인 짝수로 배열되었고, 의사당 내부의 좌석배치(열) 또한 모두 음의 숫자인 2, 4, 6, 8로 구획(배열)되어 있다는 점이다.[단상: 4구획, 국회의원 및 국무의원석 배열: 6열, 기자석: 2구획, 방청석: 8열]
[산림경제(山林經濟)] 복거(卜居)편 《거가필용(居家必用)》 에 “앞이 높고 뒤가 낮으면 문호(門戶)가 끊기고, 장유(長幼, 위아래)가 혼미(昏迷)해 지며, 뒤가 높고 앞이 낮으면 우마(牛馬)가 번식하고, 대대로 영웅호걸(英雄豪傑)이 난다” 하여, 이곳 국회의사당처럼 후산(後山)이 전무하고, 요함(凹陷)한 물길에 등을 댄 배수임산(背水臨山)의 지형이나, 후면에 비해 전면이 더 높은 전고후저(前高後底)의 지세에서는 “외부(타 조직)와의 교류가 원만치 못하고, 위아래의 서열이 무너지며, 정세 등이 불안정해진다” 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조정동(趙廷棟)의 [양택삼요(陽宅三要)]에 의하면 <범시양택아서(凡是陽宅衙署), 유전착후관(有前窄後寬), 관재형긴구양자(棺材形緊口樣者), 구주대발횡재(俱主大發橫財), 최준청험대재주가(最准請驗大財主家), 여신발지가(與新發之家), 다유암합차형자(多有暗合此形者), 욕구생재(欲求生財), 수조차수리(須照此修理)> 라 하여 “무릇 양택과 관아(청사)는 전착후관(前窄後寬)의 관(중국식 관) 모양처럼 입구가 좁아야 주인이 크게 발복하고, 횡재(橫材)를 하는 것이다. 크게 부자가 되었거나, 새로 발복한 집을 모두 시험해보면 이러한 형국에 합치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바가 있으므로, 재물을 바란다면 모름지기 이것을 참조하여 고쳐 다스려야 한다.” 고 하였다.
즉, 이것은 양택(陽宅)과 관청(官廳)의 입지는 반드시 전면이 좁고, 후면이 넓은 사다리꼴 모양의 터가 되어야 길하다는 내용으로, 이것을 전착후관이라 하였다. 그리고 관재형(棺材形)이란 장례 때, 중국에서 사용하는 관(棺)모양처럼 앞이 좁고 뒤가 넓은 터를 강조한 말이다.
또 도형에 나오는 [전착후관도(前窄後寬圖)]에 <전착후관부귀여산(前窄後寬富貴如山), 전저후고세출영웅(前低後高世出英雄)>이라 하여 “전면이 좁고, 후면이 넓으면 부귀(富貴)가 산과 같이 쌓이고,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면 영웅호걸(英雄豪傑)이 세상에 나온다” 고 하였고, 그 옆의 [사미편초도(蛇尾鞭稍圖)]는 전착후관의 반대로 전면이 넓고, 후면이 좁은 전관후착(前寬後窄)에 대한 그림으로, <전관후착실인도주(前寬後窄失印逃走),
그리고 국회의사당 출입구와 같은 손문(巽門)에 대해 [양택집성(陽宅集成)]에서 <손방개문급극혈개창지류(巽方開門及隙穴開窓之類) 병유재해(竝有災害)>라 하여 이곳 국회의사당처럼 “손방(巽方: 東南)의 대문(大門)이 열려있거나, 창문(窓門)이 열린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으면 재앙과 손해가 따른다.” 고 하였는데, 이곳 국회의사당 출입문을 보면, 양택에서는 매우 기피하는 대문이 기둥보다 낮고, 송송 구멍이 뚫린 철제문이 되어 재앙이 염려되는 구석이다.
일반적으로 불특정 다수인이 사용하는 관청이나 공공시설의 경우, 길지(吉地)의 터에 길상(吉相)의 건물과 길방(吉方)의 출입구가 나야 많은 이들에게 좋은 기운이 유입되어, 이곳에서 근무하거나, 방문하는 사람들도 화기애애해지고, 적극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데, 이곳 국회의사당은 풍수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국민들로부터 썩 좋지 않은 눈살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본다.
3) 국회의사당의 비보(裨補)
예전부터 국회의사당의 터를 두고 풍수호사가들은 국회가 해가 지는 서울(청와대)의 서쪽에 터를 정하고 있어, 제 역할을 못할 뿐만 아니라 행정부의 견제는 고사하고, 제왕적 대통령의 눈치나 살피는 꼴로 전락하였고, 국민의 뜻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국회로 폄하하거나, 혹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터를 정한 이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터에서 동거동락(同居同樂)했던 출신들이 줄줄이 대통령궁으로 입성하였다는 사실이다. 터가 비밀스럽게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지령(地靈)일까? 아니면 인성(人性)이 일구어낸 투쟁과 공작정치의 산물인가........???
『인자수지』에서 풍수(風水)는 무전미(無全美)라 하여 “아무리 좋은 호지(好地)라도 완벽한 땅은 없다” 하였다. 특히 고층빌딩이나 건축물 등을 산으로 보고, 도로를 물로 응용하는 양기나 양택에서는 얼마든지 터에 맞는 공력(功力)을 집약(集約)시켜 조화를 끌어낼 수도 있다.
『설심부』의 [양택론(陽宅論)] 에 <토유여당벽칙벽(土有餘堂闢則闢), 산불족당배칙배(山不足當培則培)> 라 하여 “흙이 여유가 있어 파내야 한다면 열어서 제거하고, 산이 부족하여 돋워야 할 형편이라면 배토(培土)하여 보충하라” 하였다.
즉, 산이 넘치면 제거하고, 부족하면 보완하라는 뜻처럼, 풍수적으로 결함을 지닌 양기(陽基)나 양택(陽宅) 등은 주변에 건축물이나 시설물 등을 이용하거나, 가산(假山) 등을 쌓아 비보(裨補)하거나, 염승(厭勝)하여 나에게 맞는 풍수로 지향(志向)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곳 국회의사당에서 제일 큰 취약점은 의사당 본관 뒤쪽의 요함(凹陷)한 곳을 통해 거세게 불어오는 건해풍(乾亥風)을 갈무리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첫 번째 관건이라 본다.
본인의 견해로는 본관 뒤쪽 운동장과 주차장 주변에 조형물이나 건축물을 축조하거나, 가산을 쌓아 후산의 역할과 함께, 장풍이 되도록 개선하고, 의사당내 잘못 입지된 건축물이나, 시설물, 조각상들을 바로잡아 새롭게 배치하거나, 개축 등의 방법으로 보완해 나간다면 양명한 기운이 유입되면서, 얼마든지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의사당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본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김경훈, 『陽宅三要』, 서울: 자연과학, 2003,
김기빈, 『땅이름이야기』, 서울, 살림터, 1994,
미 상: 『山林經濟』,
복응천(卜應天), 『설심부』
서선계(徐善繼), 서선술(徐善述), 『풍수지리(風水地理) 인자수지(人子須知)』, 김동규(金東奎)(譯),
서울: 명문당, 2003.
요정란찬집, 『양택집성(陽宅集成』, 武陵出版社, 1999,
이경재 『서울풍수』, 서울, 서울신문사, 1993,
이 찬, 『한국의 고지도』, 서울: 범우사, 1991
장영훈, 『서울풍수』, 서울, 도서출판 담디, 2004,
趙廷棟, 『陽宅三要』, 上海: 千頃堂書局,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