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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비자 연장 여행
그 와중에도 인야가 독일로 들어간 지 만 3개월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권(법) 상으로는 독일에서의 더 이상의 체류가 불가하다는 것인데,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 해결책은 3개월이 넘어가기 전에 EU(유럽공동연합)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독일로 들어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느 월요일, 비가 내렸고 바람도 불었고, 간간이 해도 떴지만 가을을 재촉하는 다소 을씨년스런 날씨였다.
인야는 종일 집에서 흙 작업 두 개를 하면서, 아무래도 다음 날이 좋을 것 같아... 체코 프라하 행을 결정했다. 겨우 교통비(왕복 100마르크)만 가지고 가는 여행 아닌 여행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여권에 도장만을 찍기 위한 여행이지만, 인야에게 그 대가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갔다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비가 왔기 때문에 날이 찼다.
이제는 밖에서 밤을 새웠다간 감기뿐만이 아닌 그보다 더한 병도 걸릴 것이라,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옷을 두툼하게 입었는데도 추운 것 같았다.
안나 부인의 호의로 찹쌀떡을 싸들고, 인야는 밤차를 타기 위해 버스 터미널에 나와 있었다.
'오늘 밤, 버스에서 보낼 일이 걱정이긴 해도, 이제 내일 하루는 나도 관광객이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그런데 이건 무슨 일인가.
함부르크에서 도착한 버스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타서, 베를린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워낙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인야의 삶이기도 하지만, 특히 그날 밤 같은 경우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밤 12시가 다 되어 전화를 거니, 안나 부인이 받았는데... 버스표가 없어 돌아가야 한다니까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이 걱정 말고 돌아오라는 뜻일 수도 있어서 인야는 그나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조금 늦게 잔 탓인지 잠이 푹 들어 아침 7시가 다 되어 일어났다.
부랴부랴 준비해 나와 시내버스를 탔는데,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인야는 자신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틀림없이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탄 것 같은데, 잘못 탔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버스를 바꿔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베를린이 그다지 크지 않아, 그리고 교통수단이 좋아서 이런 경우에도 그리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사실 인야는 그 전날 프라하에 가지 못했다.
시간표에 나와 있는 요일이 독일어로 되어 있었는데, 그저 건성으로 봤던 게 실수였다.
요일에 따라 버스 출발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인데, 그렇게 그날도 터미널까지 갔다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하는 수 없이 목요일 걸로 예매하고 또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라틴 도서관에 가서 슬라이드 필름을 찍고, FU 아시아 도서관에 가서 신문을 읽는 등... 시간을 때우기에 급급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날은 일진이 좋지 않았는지, 어딜 가나 사람이 없거나 못 만나고... 또 집에 돌아와서도 문이 닫혀 밖에서 한 시간여를 기다려야만 했다.
인야는 요즘 게을러졌는지 멍청해졌는지, 밤에는 종이 드로잉 작업도 못하고 앉아서 졸다가 그냥 자곤 했다.
그날도 뭐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다음 날 프라하에 가는데 돈이 없어... 마지막 남은 백 불을 환전했다.
176마르크였는데, 최후의 보루였다.
'그런데 그 최후의 보루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허망할 뿐이다. 비단 이번만이 최후의 보루를 쓰는 건 아니라서였다.
워낙 없이 사는 사람이라 툭하면 최후의 보루를 쓰면서 사는 삶인데, 아무리 최후의 보루라지만... 돈이란 그렇게 쓰고 나면 또 다른 돈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달랐다.
'더 이상 돈이 나올 구멍이 없는 상황이니......'
또 다시 인야는 동물원역 플랫폼에 앉아 있었다.
뭔가 답답하다는 뜻이었다. 요즘 한동안 뜸했었는데, 다시 이곳을 찾아와 뭔가 하소연하듯 끼적이고 있는 걸 보면.
그날만 해도 해가 떴다가 비가 왔다가 몇 차례 날씨까지 변덕을 부렸다.
부서진 교회에 가서 앉아 있다가, 괜스레 살 것도 아니면서 옷가게에 들러 이따금 맘에 드는 옷을 보면 값이 너무 비싸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다 쿠 담(Ku.Damn)에 들러 거리의 초상화가들을 살펴보기도 하다가, 결국 플랫폼 구석에 와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제 날씨가 쌀쌀해서 두꺼운 옷을 입지 않으면 양쪽이 뻥 뚫린 이 플랫폼에 있을 수도 없겠다. 지난번에 왔을 땐 출혈 중이었었지…… 아, 내 인생, 남의 집에 얹혀 사는 신세로 전락한 내 인생. 그런데 빌어먹는 신세치고는 너무나 안락한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내 인생……'
평생 가장 긴 머리를 하고, 인야는 베를린에서 9월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베를린은 이미 가을인 듯, 나무들은 푸른데 날씨는 스산한, 비 오고 춥기까지 한 8월의 막바지.
'오늘은 뭔가를 하고 싶은데…… 최소한 조그만 종이 그림 한 장이라도 그리고 싶은데……'
밤이 많이 길어졌다. 그러나 인야는 그 밤을 헛되게 보내는 것 같았다.
작품을 위한 생산적인 밤이 되어야 하는데, 11시도 되기 전에 잠을 자기 시작하는 노인이 된 생활이었다.
'내일은 어찌 되었거나 프라하에 간다. 이미 버스표를 예매해 두었기 때문에 가긴 갈 것이다. 어차피 EU에 들어온 지 만 3개월이 채워지는 날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마치 줄타기하는 사람처럼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기분이기도 하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아침, 안나 부인이 싸준 도시락(빵, 샌드위치, 과일)을 가지고 인야는 집을 나섰다.
어차피 예매해 놓은 버스표가 있어 오늘은 틀림없이 체코 행을 할 것이었다.
여유 있게 터미널에 도착한 덕분에 인야는 운전수 바로 뒷좌석에 앉아 풍경을 즐기며 여행하게 되었다.
드레스덴(Dresden)은 버스 안에서만 보았지만 매력 있는 도시였고, 체코와의 국경으로 가면서 산악지역이 나오면서 산촌들이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국경을 넘는데, 승객 중 한 청년에게 문제가 있는지 약 한 시간이나 초소에서 기다려야 하는 일도 겪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여권의 도장은 독일 쪽에선 출국을, 체코 쪽에선 입국의 두 개나 찍어주었다.
독일은 잘 사는 나라고 체코는 가난하여, 국경을 넘어서면서부터 집부터 달라 보였다.
독일 사람들은 부티가 나지만, 체코 사람들은 빈티가 역력했다.
그게 인야에겐 슬픔으로 느껴졌다.
'나도 가난한 사람이니까.'
그러면서 인야는 버스 안에서 안나 부인이 싸준 도시락을 요긴하게 먹었다.
맛도 있었지만 너무 고마웠다.
체코 프라하에 내렸는데, 인야는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여행을 많이 했던 자신도 처음인 곳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선 환전을 했다. 버스 내린 곳이 돈 지오바니(Don Giovanni) 호텔이 있어 그 안에 들어가 환전을 한 뒤, 우선 중앙역에 가기 위해 메트로를 탔다.
프라하에는 세 개의 노선이 있는데 지하철이 얼마나 깊은지 에스컬레이터가 상당히 높았다.
안내 책자에 적힌 대로 인야는 중앙역 안내에 가서 우선 호텔 예약을 했다.
그들은 비싼 곳을 추천했지만, 제일 싼 곳으로(315크로네) 예약을 하고 시내 구경을 했다.
프라하는 옛 건물이 많이 남아있어서 어딜 가나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날씨가 좋지 않은 가을이 접어드는데도 거리엔 관광객들이 붐볐다. 스페인 사람들도 많은지, 거리에서 심심찮게 스페인어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한 거리를 지나는데, 거리 가운데 좌판을 놓은 시장이 있어서 인야는 우선 바나나와 자두를 샀고... 그걸 먹으면서 걸었다.
자유로움 속의 관광객이 된 느낌이었다. 물가가 싼 것이 피부에 와 닿아 부담 없어서도 좋았다.
프라하는 그만한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관광 상품을 충분히 가진 도시 같았다. 한편으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 반면, 또 한편으론, '이런 좋은 곳에 넉넉지 않은 형편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아쉽지 않을 수 없네......' 하고도 있었다.
호스텔은 독일 돈으로 20마르크로, 가격과 예상했던 것에 비해선 상당히 좋았다. 독일에선 최소한 이 두 배를 줘야만, 그것도 유스호스텔에 묵을 수 있었는데.
큰 5층 건물이 방으로 빼곡했는데, 각 방에는 두 개의 침대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화장실과 욕실 그리고 취사실까지 있었다.
운이 좋은 건지 인야는 방을 혼자 쓰게 되었다.
물론 호화로운 호텔은 아닐지라도,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이렇게라도 안락하게 하룻밤을 묵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기왕에 여까지 온 것, 내일 밤 돌아갈 때까지 최대한 즐겨 보자. 가난하다고 기까지 죽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다음 날 하늘은 잔뜩 흐려있고 날씨는 쌀쌀했다.
잠은 잘 잔 것 같았다. 호텔 밖에서 무례한 놈들이 가끔 떠들어대기는 했지만 그래도 양호한 취침이었다.
그 날 계획을 세워보았다. 버스표 예약하고, 필름 사고, 가능하면 어머니께 전화도 드려야 하고, 그리고 관광객처럼 지인들에게 엽서도 보내고......
'나는 좋은 일도 없을 한국에 돌아간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날을 꼽고 있다. 가봐야 어디 있을 곳도 없는 처지는 여기와 크게 다를 바 없는데…… 그리고 한 달만 견디면 한국에 돌아간다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이, 마음을 약하게 하는 요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아침에 중앙역에 가서 가방에 든 옷 등을 덜어놓으려다 괜히 5크로네만 손해보고, 그냥 가방을 든 채로 돌아다녔다.
전날은 도시가 아름다워 보였으나 그날은 피곤해서인지... 그저 그렇다는 생각만 들었다.
정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할 형편도 못 되다 보니, 수퍼마켓에서 이것저것 사서 먹은 뒤, 거리의 간이 시장에서 과일을 사 가방에 넣고 다녔더니 무겁기만 했다.
돈 없는 사람은 그렇게 평생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혼자 다닌다는 것이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종일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으나,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받으셨는데, 인야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씀을 하시던데, 가슴이 아려 왔다.
'그 늙은 어머니 한 번 기쁘게 못해드리는 못난 놈……'
날이 추웠다. 두꺼운 외투를 입어도 될 만큼 기온이 뚝 떨어졌다.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더 추워진 것이었다. 야외 정류장에 앉아 있는 옆은 큰 호텔인데, 그곳에 투숙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춥지도 않겠고, 편한 곳에서 잘 먹기까지 하겠지……'
그런 부러움을 갖는 게 잘못인가.
'그나저나 뭔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대로 사그라질 수는 없다. 나도 나만의 집과 작업실을 갖고 편히 일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것은 허황된 꿈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권리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직 움직일 수 있을 때 뭔가를 해야 하고, 그걸 성취해야 한다. 이렇게 춥게 길에서 떠는 여행은 앞으로 하지 않아야 한다. 나도 한 번은 황제처럼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훗날 인야는 그 대목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저 빈말로 황제처럼 살고 싶다고 했던 건 아니었네. 젊은 시절 어느 순간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었던가 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각오와 다짐을 잊고 살아온 사람이다. 돈은 그 사람에게 붙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 나는 돈이 붙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모으지 못한 거지, 내가 그러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니다. 그렇게 나는 그와는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황제 같은 삶보다도 이런 삶이 더 좋다고. 그럼 됐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하고 춥고 지친 몸으로 인야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버스가 왔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베를린에 도착해도 한밤중이라 집까지 가려면 피곤할 텐데......'
결국 버스가 도착해 서둘러 탔고, 인야는 을씨년스런 그리고 땅거미 지는 프라하를 내다보며... 수퍼에서 사놓았던 빵과 햄을 곁들여 저녁 식사를 했다.
낮에 사가지고 다녔던 과일(복숭아, 자두)까지 먹었더니 배가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베를린에 도착할 때까지 국경검문까지 세 번을 멈췄는데, 인야는 그 사이사이에 잠을 잤다.
예정보다 거의 한 시간 늦게 베를린에 도착하여, 심야버스를 타고 집까지 한 시간여를 더 돌다가 도착했다.
이번에도 버스를 잘못 타 다시 첫 지하철을 바꿔 타기도 했다.
그렇게 새벽에 집에 도착하자 안나 부인이 초코우유 한 잔을 타주었다.
그걸 먹은 뒤 잤다.
다음 날부터 안나 부인 초상화를 하기 위해 캔버스를 사왔다.
그리고 저녁 무렵 또 세 시간쯤 잤다.
토요일, 인야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녁 무렵, 푹 자서 그런지 그날 밤은 머리가 맑았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실마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