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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로마 제국 (Roman Empire)-공화정과 제정시대, 크리스트교 발생과 전파
임광자 추천 0 조회 483 08.05.14 09: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로마제국(Roman Empire: 羅馬帝國)             이 길상

가. 공화정시대공화정 말기의 영역

로마제국은편의상 왕정시대( BC 753? -BC 510), 공화정시대(BC 510-BC 27), 제정시대(BC 27-476)로 크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로마의 역사라고 하면 단연 공화정시대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이 기간중에 로마의 제도와 법, 영토의 확장 등을 통해서 제국 건설의 기초가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탕으로제정시대는 방대한 영토의 관리, 기독교의 전파와 박해 수용 등이 내용의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어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게 (476) 동 로마(비잔틴)제국은 오스만투르크(1453)에게망하게 되는데 우리가 로마의 멸망이라고 하면 서 로마제국의 멸망(476)을의미합니다.

그리스화된동 로마제국은 그 후에도 1000년간 이나 더 존속하지만 로마적인 요소가사라지고 동방화되었기 때문에 이시기의 로마를 수도의 이름을 붙인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1) 왕정시대

전설적인로마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트로이전쟁으로 Troy가 함락될 때 영웅 아에네아스는부친과 아들을 배에 태워 서쪽으로 가다가 풍랑으로 카르다고에 정박,다시 이탈리아로 들어가 라티움에 도시를 세웠고, 그 16대에 이르러아물리우스(Amulius)는 그 형 누미토르(Numitor)를 왕위에서 쫓아내고왕이 된 후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Rhea silvia)를 불과 화로의신 베스타(Vesta)의 무녀(巫女)로 만들어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게만들었습니다.

그러나실비아가 숲에서 군신 마르스(Mars)에게 겁탈 당하여 쌍둥이 를 낳았는데이를 불길하게 여긴 아물리우스는 상자에 두 아이를 상자에 넣어 티베르강(Tiber)에 띄워 보냈고.... 늑대 젖, 양치기 목부 등에 의한 양육등으로 성장한 두 아이는 아물리우스를 살해하여 복수(復讐)하고 할아버지누미토르를 복위 시켰다가, 형 로물루스(Romulus)가 동생 레무스(Remus)를살해, 카피툴리누스(Capitolinus) 언덕을 피난처 로 삼고 부랑자, 군도,범법자 등을 받아들여 인구를 늘리고, 사비니(Sabini)人 처녀들을 납치하여이들과 결혼시키고, 처녀들을 빼앗긴 사비니 인들은 그들의 왕 타티우스(Tatius)의 지휘로 로마에 쳐들어오고, 납치된 처녀들이 오히려 왕을설득하여 로물루스와 화해케 하여 공동으로 다스리다가 사비니 인의왕이 죽고 나서 로물루스가 단독으로 다스렸다는 등등이 중요 내용입니다.

물론 이것은전설이고 신화에 불과 하다고 할 수 있지만 유추를 통해 서 민족의 성향이나통치의 이념을 파악하는데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환인과환웅, 천부인, 신시, 운사 우사, 홍익인간, 웅녀 등으로 이어지는 단군신화와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살인, 약탈,군신, 겁탈, 늑대, 목부, 도둑떼, 복수, 처녀납치 등의 용어에서 어떤느낌을 받습니까? 또한 신화라고 해도 그 내용의 일부는 사실과 연결되어신비로 포장된 것이 많기 때문에 포장을 벗기고 사료(史料)로 분석하면대강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살펴보면, 인도 유럽 계의 고대 이탈리아인 에 속하는 라틴인과 산악족이 였던 사비누스인이 연합하여 BC 8세기 무렵 티베르 강 하류의 라티움(Latium)땅에서 로물루스가 도시국가 로마를 건국하였다(BC 753 즉위)는 결론을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 시기를 기원전 6세기경으로추정하고 있습니다.

로마의왕정은 로물루스이래 7대의 왕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하는데 5대에서7대에 이르는 세명의 왕은 에트루리아식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에트루리아인(Etruscan)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초기의 로마가왕정을 채택했고, 그 말기에는 에트루리 아인이 지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에트루리아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들은 오늘날 로마의 북방인움브리아(Umbria)와 토스카나(Toscana) 일대에 살았다고 보고 있으며,그들의 지하 묘실에 남긴 소박한 벽화에는 생전의 일상생활 즉 사냥,연회, 성교장면, 귀신이 사는 지옥 등의 그림과 문자로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이그리스문자라면 쉽게 해독이 되지만 아직도 해독을 못한 것으로 보아인도-유럽 어가 아닌 것은 확실하며, 다만 이들이 기원전 1천년에서8백년 사이 소 아시아로부터 이주한 후 이 일대에 살고 있다가 기원전6세기경에 크게 번성하여 로마를 지배했거나 상당한 영향을 입혔다고보고 있습니다. 후일 로마사회에서 검노(劍奴) 들의 칼 싸움이나, 제물로바친 짐승의 내장으로 점을 치는 관습 등은 이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라고합니다.

(2) 귀족중심의 공화정

이 시기의왕은 군사, 정치, 제사의 여러 권능을 집중시켜 절대적이며 무제한적인강력한 임페리움(命令權)을 가졌으나, 사실은 귀 족의 권한이 강해서동방에서와 같은 왕권은 발달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시민은 파 트리키(patricius:貴族)와플레브스(plebs:平民)로 나누어지고  파트리키의 여러 씨족은 많은클리엔테스(Clientage:被保護民)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시민권이없는 거류외국인과 노예들이 대부 분으로서 귀족세력의 배경이 되었고,플레브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상당한 재산을 가진 자영농민과그 외 소수의 상공업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파트리키와플레브스를 구별하는 기준과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파트리키가 가축과토지, 노예를 상대적으로 많이 소유한 특정한 가계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것은 분명하며, 혈연적인 구조로 이어지면서 그들만의 신분계층을 이루어 고착화 시켰고, 그들 이외의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좋은 직위에있더라도 파트리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人의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누스는 파트리키를 무시하고 폭정을일삼다가 이들로부터 " 오만한 왕"이라는 악명을 얻고 추방당하였으며,왕을 추방한 파트르키는 왕정을 폐지하고 그들에 의한 공화정을 시작하였습니다(510년경BC)

이들 귀족들은임기 1년의 집정관(執政官:Consul) 2명, 임기 6개월의 딕타토르(獨裁官:Dictator)1명을 그들 중에서 선출하여 행정과 전투지휘의 책임을 맡기고, 왕정시대부터 있었던 원로원(元老院:Senatus)을 최고의 권력기구로 개편하고그들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평민과의 통혼을 금하는 등 폐쇄적인 정책으로권력을 독점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아테네에서는 클리스테네스가 도편추방법을만들어 참주를 몰아내고 민 주 정치가 시작되었는데 로마의 원로원은부분적인 개혁은 있었으나 로마가 망할 때까지 존속하여 귀족으로서의지위를 유지하고 많은 공과를 남기게 됩니다.

(3) 평민권의신장

로마의왕정에서 밀려난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리스의 중장보병술을 도입하여귀족들로 구성된 로마의 기병(騎兵)을 능히 제압하고 자주 로마를 침공하였고,이에 로마에서도 중장보병제가 도입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러나개별 전투가 아닌 집단전투에서는 구성원 모두가 강렬한 공동체의식과조직적인 훈련 없이는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투의 중심이기사에서 중장보병으로 바뀌어 많은 병사가 필요하였고, 병사의 무구(武具)는개인의 부담이었기 때문에 이 를 감당할 수 있는 집단은 플레브스 즉자영농민들뿐이 였습니다. 따라서 귀족도 이들을 보호하고 타협하지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 첫 타협은평민들이 생활의 어려움으로 빚을 지고 고통 받는 자가 많았는데 이러한빚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로마시의 동 북방 3마일 지점에 있는 성산(聖山)에모여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지도자의 신체를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을결의하고 평민회를 구성하는 등 그들만의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선언하였는데이 를 성산 사건이라고 합니다(494 BC)

이들이떠난 로마를 귀족들만으로 지키고 살수는 없기 때문에 이에 귀족은 평민회(平民會:Comitiatributa)의 구성을 묵인하고 그 대표자로 호민관(護民官:Tribuni plebis)을승인하게 되었습니다. 호민관은 집정관을 비롯한 관리들의 행 정상의행위나 원로원의 의결 등에 거부권과 선거 방해 등을 행사할 수 있는권한이 있었고, 이로써 로마는 귀족의 통치기구와 평민의 견제기구가제도화되어 국가 속에 작은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로마의 역사가 형태상의 변화는 있었지만 그 본질은 소수의 귀족에 의해서운영되었다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중장보병 전술의 도입으로 국방의주체가 이들 소수 귀족에서 중소 농민 지주 층으로 바뀜에 따라서 권력의이동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귀족들은 평민들을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나누어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정하여 분화시켰는데 이를 켄트리아(병원회:兵員會)라고합니다.

귀족들은필요에 따라 이들 각 등급과 동맹하여 다시 정권을 유지하고 연장할수 있었고, 따라서 이들과 타협하고 양보해서 다시 만들어 낸 것이 로마최초의성문법인 12표법(Leges duodecim tbbulbrum)으로서 법 조문이 간결하고소박한 문체를 사용하여 평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고, 12장의동판(銅版)에 새겼다고 전해 지고 있습니다(450 BC) 이 법으로 상층의평민 권이 신장되고 귀족의 권한이 다소 축소되었으며, 귀족에 의한법률지식의 독점이 깨어 져 일단 귀족과 평민에게 균등하게 법이 공개되었다는데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서 얻은 영토를 행정구역인트리부스로 편입하고 가난한 농민을 위 시해서 로마시민을 이주시켜살게 하였습니다.

로마의행정구역인 트리부스(區:tribus)는 왕정시대에 3개의 트리부 스로 출발하여,정복으로 영토를 넓혀 성벽 안에 4개의 트리부스, 성벽밖에 17트리부스,다시 25트리부스가 되고(396 BC) 공화정 말기에는 이탈리아 내에 35트리부스를두었습니다. 각 트리부스는 대략 10개의  클리어로 다시 나누었는데,이 체제는 초기 로마시 대부터 정치와 군사의 기본 골격을 이루었고,트리부스내의 클리어 회의 형태로 민회와 투표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 후 중장보병제가보급되자 재산의 다과를 기준으로 하여 종군권 (從軍權)과 참정권을계급화한 재산정치적인 병원회(兵員會:Centuriata :켄투리아 회)가 만들어져민회의 중요한 기능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시민은재 산에 따라 기사와 보병으로 나누고, 기사는 18개의 켄투리아로, 보병은다시 재산의 등급에 따라 1급은 80개의 켄투리아, 2,3,4급은 각각 20개의켄투리아, 5급은 30개의 켄투리아로 편성하고 그밖에 공병과 악기병등을 합쳐서 모두 193개의 켄투리아를 두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현안이생기면 모든 시민은 자기가 소속된 켄투리아에서 투표를 하는데 투표결과의처리는 켄투리아별로 1인 1표의 다수결(多數決)을 적용하여 켄투리아전 체의 의견을 정하고, 전체 켄투리아가 모여 최종적으로 결정할 때는켄투리아내의 투표 숫자와는 관계없이 1켄투리아 1표가 적용된다고 합니다.

기사와1급의 켄투리아 숫자가 과반수(92)를 넘게 되어(98) 이들에 의해서 모든것은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또한 투표는 원로원 등에서 내놓은 법안에대한 찬 반을 묻는 것이 대부분이고, 상층에서부터 차례로 하였는데기사와 1급에서 결정이 나면 그 다음은 투표를 하나 마나 였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이미국에까지 전해 졌는지 현재 미국의 대통령을 뽑는 방식, 즉 시민권을가진 시민은 소속된 주에서 마음에 맞는 후보에게 투표하고 주 단위로이를 집계하여 1표라도 이기는 쪽은 상하의원 수만큼의 선거인 단을확보하나 비록 1표 차이로 져도 진 쪽은 하나도 확보하지 못함으로서선거인 단의 수가 많은 몇 개 주 선거 결과 가 판명되면 나머지는 볼필요도 없는 것과 흡사합니다.

12표법의제정 때부터 말썽이 많았던 귀족과 평민간의 통혼문제가 BC 445년에는호민관 카누레이우스의 제안에 따라 허용되고, 이에 따라 평민 가운데유력한 자는 로마의 파트리키 명문과 혼인관계를 맺어 차차 자신의 지위를높여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갑자기 나타난 켈트인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어려움을 당하고(386 BC)이런 와중에서 가난한 사람의 고통은 더욱 심해져서 다시 만들어 진것이 리 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367 BC)의 제정입니다.이 법에 따라플레브스(평민)가 파트리키(귀족)와 동등하게 콘술(집정관)에 취임할수 있게 되어 플레브스의 정권참여가 확정되었으며, 이어서 BC 356년에독재관이, BC 351에 호구조사관이, BC 337년에는 법무관이 플레브스에게개방되었습니다

이러한일련의 신분투쟁은 호르텐시우스법(Hortensia, Lex BC 287)의 制定으로종지부를 찍는데,  평민 출신의 독재관 호르텐시우스(Quintus Hortensius)가 제안하여 성립시킨 이 법으로 평민회가 국가의 정식 민회(民會)의하나로서 인정되고, 평민회의 의결도 원로원의 동의 없이 그대로 모든로마 시민을 구속하는 국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중이 주체였던 그리스와는다르게, 이후 로마 지배층을 에키테스(騎士)라고 불리는 부유한 신분층이 등장하여 유력한 귀족과 손을 잡고 그들 내에 서 정권을 주거니받거니 하는 양상이 되었는데 그 원인과 결과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고급관직은명예직으로서 봉급이 없는 데다 많은 출비(出費)가 요구되었으므로 적어도에키테스로 꼽힐 만큼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관도(官途)에 들어 설 수가없었고, 집정관을 비롯한 중요 관직은 민회에서 선거를 하였으나 재임중 관원이 추천한 사람에 대한 찬 반을 묻는 것이 고작이 였기 때문에보통 사람은 입후보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명목상 차별을 두지 않았을뿐 하층민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 제도적으로 접근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에키테스 가운데서도 정치가나 장군이 되는 것은 특정 가문으로 한정되었으며,그들은 사실상 거의 세습적으로 官途에 오르고, 어느 정도 이상의 높은관직을 지낸 뒤 원로원의 종신의원이 되었고, 콘술(집정관)과 딕타도르(독재관)라는국가 최고의 관직은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한정된 노빌리타스(Nobiles: 유명인)라고 불리는 소수의 가문에 독점되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로마의 공화제는 노빌리타스를 정점으로 하는 원로원의 권위에 이끌려민회를 결정기관으로 하고, 정무관직(政務官職)을 집행기관으로 하는부 유한 계층의 지배였다고 할 수 있지요. 더구나 당시 정치적 쟁점은주로 선거전과 입 법의 두 가지 형태로 행하여 져, 그 어느 것도 민회의투표에 의하였으므로 정치가들은 유권자인 일반시민의 지지를 구하여그들과 사적인 은급관계(恩給關係)를 맺게 되었고, 이러한 은급관계로이루어지는 피호호자(被保護者)를 새로운 의미에서 클리엔테스라 불렀다고합니다.

그 뒤 로마정치사는 여러 당파 사이의 세력투쟁으로 충만 되지 만, 이들 여러 당파의통솔자는 노빌리타스 중에서도 다수의 군소 정치가를 수하에 두고 광대한클리엔테스를 거느리는 실력자였으며, 이들은 국가의 "제1인자들"로 불렀습니다.

(3) 이탈리아의통일로마 중장보병의 모의도

이른바중소 자영농민이 주축을 이룬 중장보병은 대외 적으로 악명 높은 로마의군대였지만 그들 사회에서는 번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미 왕정시대부터인접국 가를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고, 공화정 시대에도 꾸준히 정복을계속해서 BC 4세기 후 반에는 라티움 일대를 통일하였고,

다시 BC3세기 전반에는 이탈리아 중, 남부 산악지대의 삼니움족을 항복시키고,이어서 그리스계의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와 동맹한 남 이탈리아의타렌툼과 싸워, 고전 끝에 피로스를 이탈리아에서 퇴각시키고 타렘툼을점령하여 BC 3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세력하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 때 까지만해도 로마는 정복지에 대하여 자치를 허용하고, 다만 군사와 외교권만을행사하여,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로마를 맹주로 하는 군사동맹체를 만들었는데,이 동맹군은 로마시민이 정규 군단을 편성되고 동맹국은 보조군이 되어로마 정규 군단의 지휘에 따르게 하였습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넘어 해외로 진출하였을 때에도 처음에는 그러한 형태의 군제가 유지되었습니다.

(4) 로마의지중해 해상권 장악

정복자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여세를 몰아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으로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셈어계의 페니키아인 들이세운강력한 해양국가 카르타고가 있어서 지금 까지 싸운 어느 적보다도 강했기때문에 로마로서는 도박에 가까운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로마가피로스와 전쟁할 때까지만 해도 동맹관계를 맺어 우호적이 였으나 지중해를둘러 싼 해상권의 다툼은 결국 두 나라를 운명적으로 가르게 되었습니다.

시칠리아섬을 지배하고 있던 카르타고는 서부 지중해 최대의 상업 민족으로서그들의 선단은 주석을 찾아서 브리타니아(영국)에도 갔고, 상아와 황금을찾아서 아프리카 서해안에도 수시로 내왕하였으며, 자국의 농토에서는다량의 밀을 생산하여 식량의 자급을 이루는 안정된 강국이었습니다.

정치면에서도로마와 같이 귀족 중심의 공화정을 펴고 있었으나 민정과 군정이 엄격히구분되어 장군은 종신제 에 가까웠고 로마에는 없는 우수한 해군을 보유하고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비해서 로마는 군의 통수권을 가진 집정관이나독재관의 임기가 1년 혹은 6개월이 였으므로 아마추어에 불과했고 중장보병의육군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객관적인비교에서 로마는 카르타고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로마는 승리하고 카르타고는 멸망하였습니다. 이 전쟁을 로마사람들은포에니(페니키아의 로마식 명칭)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은 120여년간에 걸쳐 3차로 나 누어지는데 1차 포에니 전쟁(264 ~ 241 BC)의원인은 시칠리아의 멧사나에서 이탈리아의 용병대가 카르타고와 동맹을맺고 있는 시라쿠사의 왕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데서시작합니다.

구원의요청을 받은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군대 파견을 주저하고 있을 때 민회에서 구원군 파견을 결의하여 시칠리아에로마 군이 들어가게 되었고(264 BC)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시라쿠사왕이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로마에 항복함으로서 여기를 거점으로 하여 남부시칠리아를 어렵게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로마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가 카르타고 에맞설 수 있는 함대를 건설하고(260 BC)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여 카르타고함대 를 무찌르고 카르타고에 상륙하였으나(259 BC) 스파르타인 용병대에패하여 돌아왔고, 그 후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사병(私兵)에게 로마군이 전멸의 위기에 빠지자 로마는 해군력을 정비하여 이를 토벌하였는데전쟁의 확대를 두려워한 카르타고가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로마는 많은배상금과 함께 시칠리아를 차지하였습니다.

처음으로해외에 영토를 얻은 로마는 본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점령 지로 생각해서트리부스를 신설하여 로마시민을 이주시키는 것과는 달리, 총독 (quaestor)을보내어 10분의 1 비율로 조세를 부과하고 징세와 치안의 필요에서 관리와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 후 다른 점령지에 대해서도 이런 형태를 취하고이를 "프로빈키아" 즉 속주(屬州:Provincia)라 불렀습니다.이 때부터 동 지중해의 헬레니즘 왕국과 도시들을 점령하고 많은 속주를건설하였습니다.

2차 포에니전쟁(218 ~201)은 한니발 전쟁이라 할 만큼 카르타고가 로마에 벌린복수전이였습니다. 알프스를 넘고, 코끼리 부대, 칸네전투, 스키피오대 아프리카누스 등등 고대 세계의 최대 전쟁 이였던 이 전쟁은 한니발과함께 너무나 많이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다만로마에게 패배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를 비롯해서 해외 식민지일체를 로마에게 넘겼고 함대도 20 척만 남기고 넘겼으며, 이 후 50년간매년 2백 탤런트의 배상금을 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카르타고의 저력은 참으로 놀라 와서 50년간 갚기로 한 배상 금을 10년만에지불하고 다시 번영을 시작하자 로마는 이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중,카르타고가 그들을 괴롭히는 누미디아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자 이를핑계로 카르타고를 침공하여 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149~ 146) 카르타고는 울면서 로마에게 사정했지만 로마는 카르타고를 점령하여철저히 파괴하고 시가지는 17일 간이나 불 타는 연기로 가득했으며 50만인구 중 살아남았던 5만 명은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 버림으로서 카르타고는역사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로마는마케도니아, 시리아, 아나톨리아 동맹 등과 싸워 이 방 면에서도 우위를확립하였고, 점령지마다 Provincia(屬州)라는 형태로 해외에 광대한영토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호수화하기 시작하여 로마를축으로 하는 국제사 회를 이룩해 나갔습니다. 로마에서는 노빌리타스의지배가 확립됨과 더불어 과두정치(寡頭政治)의 사고방식이 뿌리를 내리는등 또 다른 사회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합니다.

(5) 공화정의위기

도시국가로마가 세계적인 제국으로 날개를 펼 침에 따라 정치적 경제적 이익못지 않게 그 반작용 또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전 쟁 포로의 형태로밀려들어오는 수많은 노예는 부유한 지배계급에게는 대토지소유의 기회가되어 대농장(L atifundium)을 만들었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일자리와 농토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정복지로부터 흘러 들어오는값싼 곡 물은 로마군대의 중핵이었던 중소 농민을 몰락시켰습니다.

중소 농민층이 몰락한다는 것은 지금 까지 로마가 정복의 핵심이었던 중장보병의군사력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에 의존한 로마가 그 군사력을포기했을 때 지금 까지 누렸던 영화도 포기해야 된다는 이치를 모르는과두정치가 (寡頭政治家)들은 위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위엄 있는한가(閑暇)만이 세상을 다스 릴 수 있다"하여 진정한 위기를 통찰하지못하고 자기와 자기 당파의 이익과 명예만을 탐 하였습니다. 이리하여표면적으로는 화려한 로마의 발전도 시민간의 빈부차(貧富差)를 심화시키고대내적으로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방관만할 수 없었던 명문 출신의 그라쿠스 형제는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를희생시켜 빈민에게 토지를 주어 중소농민을 재생시키고자 꾀하였으나실패에 그치고 횡사하였는데 이를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라고 합니다(133~ 123 BC) 그들의 개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호민관이 였던 그들은 수세기에 걸쳐 공동화(空洞 化)하였던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 제도와 민회에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반역을 시도할 수 있었던것입니다.

이때부터정치가의 활동 유형으로서, 정치적 결정은 원로원의 권위로 이루어져야한다고 믿는 자는 "벌족파"(equites :최량의 일족)라 하 였고,민회의 결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는 "평민파"(PubliCani:포풀라레스)라고 불렀는데 술라나 키케로 등은 전자에, 마리우스나카이사르 등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라쿠스 형제가 활약한 10여 년 뒤,마리우스가 나타나 로마의 국방 위기문제를 들고 나섰는데, 그 해결방안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지원병으로서 채용한다는 마지막 단 안을 내렸습니다(BC107)

프롤레타리아가무엇입니까? 토지를 잃고 몰락한 무산(無産)층으로 서 무산 층은 중장보병이갖추어야 하는 무구도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로마의 군제에는 포함시키지않았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자영농민 출신으로서 이들에 의해서 로마가세계적인 국가로 발전하였지만 그 결과는 이들의 파멸을 가져와 새로운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들을 군대에 흡수해서 부족한중장보병의 병력도 보충하고,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함으로서 실업문제등심각한 현안에 돌파구를 찾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결과는 그들이 장군에게 예속되는 사병(私兵)으로 전락되어 로마사회에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즉 장군은 병사를 그 세력하에 보호함과아울러, 재산이 없는 그들이 퇴역 후 노후 생활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부동산 분여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병사는 무력으로써장군을 지원하는 외에 민회에서 투표권 행사를 통하여 장군(정치가)의정치행동의 큰 지지집단(支持集團)이 되는 신의관계가 형성되어 사병화되었습니다.이후 로마 내정에는 사병을 거느린 장군 들, 즉 이 법을 만들었던 마리우스,그의 정적이 였던 술라, 술라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등이 이들에 속하며 이들간에 1차 투쟁이 마리우스와 술라간 에, 2차투쟁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에 전개됩니다.

그러나광대한 영역에 걸친 로마의 방대하고 어려운 군사적 과제를 수행하는데에는 마리우스의 병제개혁만으로는 부족하여, 마침내 시민권이 없는속주의 현지인을 보조 군이라는 이름으로 군제에 포함시켜 로마의 정규군의지휘에 따르도록 했습니다. 외인부대라고 불리던 이들 역시 개인관계로로마의 장군과 결탁하게 되었고, 로마의 장군으로서도 명장의 권위를소중히 하면서 평소부터 원주민 전사 계급의 지도자 층인 왕후귀족에대한 보호자 지위를 확립하고자 힘썼습니다. 이들 원주민을 새로운 클리엔테스(Clientage:피보호자)라고불렀습니다.

이 무렵부터로마의 제1인자들은 원주민 전사 계급의 리더로서 귀족 층과 결탁함으로써그들의 군사력을 로마의 국방조직 속에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되어, 로마의 주도권에 의해 지중해 세계의 전사계급을 통합하려는 색채가짙어 갔습니다. 동방 여러 도시의 제1인자들도 그와 같은 구실을 하였으나도시화되지 않았던 넓은 지역의 왕후귀족들도 클리엔테스로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이들은 로마의 제1인자에 대해서는 피보호자라 하지만 현지에서는 이들도여러 가지 형태로 종사(從士)를 거느리고 있었고, 로마의 유력자들은이 왕후귀족들을 자기의 클리엔테스로 끌어들임으로써 중층적(重層的)클리엔테스 관계를 맺어 넓게는 원주민 전사층(戰士層)을 장악하였던것입니다. 즉 "원로원 의원- 속주의 제1인자들-속주의 일반인"이라는 3단계의 상하 결합을 기본적인 축으로 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장악하여 갔고, 뒤에 로마 세계의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이들 제1인자들은도시 귀족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더구나원로원의 의원들은 저마다 이와 같이 지중해 세계를 좌우하는 클리엔테스를가지는 한편, 그 자신들 사이에도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맺어, 유력한의원 밑에 군소 의원이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로원 안에서우월한 지위를 가진 자는 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지중해 세계를 마음대로조종할 수가 있게 되었지요. 다시 말하면 보스정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6) 제정성립의 필요 충분 조건들

도시국가시대의직접민주정치의 전통을 물려받아 전 시민의 참가를 전제로 한 민회가로마 최고의 결정기관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광대한 영토 국가로 팽창한로마의 현실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 첫 번째 시련은 로마의 남부동맹시에서시민권 요구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로마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코자 하였으나실패하고 결국 동맹시 전체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어 분열을 막았습니다(90 ~ 89 BC)

그 무렵소아시의 북 동방에서는 폰토스왕국이 흑해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다시 서쪽으로 나아가 에페소스에 진입해서 로마인과 그 일당을 한 명도남기지 않고 죽였는데 그 숫자가 8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에 로마에서는술라가 집정 관이 되어(88 BC) 이를 토벌하기 위해서 캄파니아의 작은도시 노라를 향해 떠났습니다. 평소 술라에 반감을 갖고 있던 마리우스일파는 이 기회를 이용, 민회를 열어 술라의 집정관 지위를 박탈하고새로이 로마의 시민권을 얻은 동맹시의 시민들에게 35개의 트 리부스에분산시킨다는 법을 통과 시켰습니다.

이 소식을들은 술라는 노라의 공략을 중지하고 군대를 로마로 진군 시켜 쉽사리수도를 점령하여 마리우스 일파를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새로이 선출된집정관으로부터 충성을 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서약 받은 후 다시 노라를향해 떠났습니다(87 BC). 그러나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있는데, 로마의 장군이 로마를 점령한 사상유례없은 일이 벌어졌다는것이지요. 이 후 마리우스와 술라의 정치적 투쟁으로 무고한 수많은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술라의 밑에서 그를 도왔던 무명의 폼페이우스가두각을 나타내고 정치적 수완이 능란한 크랏수스(Marcus Licinius CrassusDives 115-53 BC)는 이런 기회에 재능(?)을 발휘하여 거부(巨富)가 되어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외에도검노(Gladiator) 스파르타쿠스의 반란(72 BC)과 지중해에 서의 해적의횡포 등으로  국내 외가 소란해 지자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가까스로진압했지만 문제는 해적의 소탕이 였습니다. 이에 로마는 해적을 소탕하기위해서 새로이 법을 제정하고 그 사령관으로 폼페이우스를 선정하였습니다.그는 막강한 권력을 위임받아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불과 3개월 여 만에해적을 거의 소탕하고 소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여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속주로 만들었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로마의 패권이 유다 에 까지 미쳤다고합니다(63 BC)

많은 전공을세우고 로마에 개선한 폼페이우스는 그의 군대를 해산하고 자기 군대에게지급할 토지를 요구했으나 원로원과 민회 모두 거부하였는데 이 때 카이사르(Caesar,Gaius Julius 100~44 BC)의 지원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이 때부터 두사람은 때로는 협력자로서 때로는 정적으로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그리고 당시 로마의 실력자 세 사람이 권력을 나누기로 약속했는데(60BC) 이것을 제1회 삼두정치 (Triumvirates)라고 합니다. 집정관의 임기를마친 카이사르는 약속대로 갈리아 총독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 8년간의갈리아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58 BC)

기원전55년 3두 정치로 집정관을 뽑지 못했던 것을 원로원은 크랏수스와 폼페이우스를집정관에 선출하였습니다. 크랏수스는 약속대로 시리아로 떠나 전공을세우기 위해 파르티아와 싸우다가 전사(54 BC)하였고, 폼페이우스는여러 가지 구실을 앞세워 임지인 에스파냐에는 대리를 보내고 로마에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 가 로마에서는 극도로 치안이 불안해지고살인과 약탈이 극에 달하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 한 사람을 집정관에임명하는 전례가 없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원로원과 폼페 이우스가손을 잡고 국정을 좌우했습니다.

기원전49년 1월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통치하는 갈리아를 반환하라는 결의문을채택케 하여, 원로원으로 하여금 카이사르에게 소환령을 내리게 했습니다.로마는 계엄령을 발표하여 일체의 권한을 폼페이우스에게 일임하였고,소환령을 받은 카이사르는 군대를 인솔하여 속주와 로마의 접경인 루비콘강에이르렀습니다.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군대를 해산하고 단독으로 로마에가야 하는데...

그러나혼자 로마에 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고, 군대를 대리고 들어가는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일이고... 잠을 못 자고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이"주사위는 던져 졌다"고하여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반대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발칸반도로 도망 갔다가 추격을 피해 다시 이집트로 건너 갔으나,카이사르의 보복을 두려워했던 이집트 인들에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48.10BC) 그 때 그의 나이 59세, 이래서 1차 삼두정치는 막을 내렸습니다.구비 전승된 이야기 가운데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에서 진을 치고, 소환명령 마지막 시한의 밤을 보내면서, 그도 머리가 복잡하여 잠을 이루지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밖이 소란해서 눈을 떠보니,안개 자욱한 새벽에 어떤 목 동이 양떼를 몰기 위해 불었던 피리소리를진군 나팔로 오인한 그의 군대가 출동을 서두르자 주사위는 던져 졌다는말을 남기고 로마로 진군했다고 합니다.

그것이사실이겠습니까? 불법을 호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는아닐까요? 또한 가지 폼페이우스의 두 번째 처는 카이사르의 딸이었으나이 때는 죽고 없었습니다. 물론 정략적인 결혼이 였으나 두 사람은 매우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로마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많은 사람들은 바뀔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폼페이우스가죽은 다음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이집트 인들의 열렬한환영을 받았고, 그리고 운명의 여인 크레오파트라와 만나게 되었습니다.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과 영화 등의 소재가 되어 널리 알려져 있음으로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소아시아에서반란이 일어났고, 소아시아에 출병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원로원에 보낸"왔다, 보았다, 이겼다 "(Veni,vide,vici)라는 보고서도 이때의이야기입니다. 카이사르와 크레오파트라 사이에 난 아 들을 카이사리온(Caesarian)이라고불렀다는 군 요.

폼페이우스를제거한 카이사르에게 도전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실질적인로마의 제 1인자가 된 그는 司祭長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들의도움을 받아, 자신이 당한 불이익을 생각해서 율리우스력을 만들고(4년단위로 만들어진 당시의 달력은 날짜의 차이가 심해 관직의 임기나 납세의기한에 영향을 주었다고 함) 빈민을 구제하는 등 문물을 정비하여 민심을얻고, 드디어 황제의 야심을 가지고 그것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기원전44년 2월 15일 다산과 풍요를 비는 축제가 벌어지자 이에 참석했던 카이사르에게그 부하 안토니우스가 사전의 각 본대로 월계관으로 만든 왕관을 올리자동원된 박수부대만이 박수를 칠 뿐 다른 사람들은 냉엄했습니다 이에카이사르가 왕관을 안토니우스에게 반환하자 환호성을 지르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번, 그러나 안토니우스에게월계관을 돌려줄 때만 박수 갈채가 나오자 카이사르는 월계관을 받지않는 것으로 끝을 냈지만 이 심상치 않는 그의 행동은 공화주의자들을자극하였고, 그럼에도 그의 황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대하다가한 달 후 공화파에 의해서 암살 당하였습니다.

기원전44년 3월 15일, 폼페이우스가 세운 석조 극장의 부속 건물에서 원로원희의가 소집되었는데 여기에서 속주에서 카이사르를 왕으로 부르도록결의하고 이를 봉정하는 의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측근들과 아내의만류를 뿌리 치고 좀 늦게 도착하여 지정된 자리에 앉자 한 사람의 탄원자가앞으로 나와 그의 옷 깃을 잡는 것을 신호로 그의 몸에는 삽시간에 22군데나칼에 찔렸습니다. 그 암살 단 가운데는 그의 옛 애인의 아들이자 애인과밀애한 시기와 태어난 시기로 봐서 자기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양자 부루투스가보이자 "내 아들아 너도"(Et tu, Brute...)라는 말을 마지막으로폼페이우스 동상 아래 쓰러졌다고 합니다.

카이사르가죽고 나서 그의 유산 상속인으로 지정된 것은 카이사르의 질녀가 낳은옥타비아누스로서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 였습니다. 그는 공화정 말기를정리한 최후의 승자가 되어 제2차 3두정치(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레피두스)시대의 최대의  정적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여 2차3두 정치를 끝내고 로마 및 지중해 세계의 "제1인자들"의으뜸 가는 자로서 "제1인자(元首)"의 정치를 펼치는데, 여기서부터를제정시대라고 부릅니다.  안토니우스와 크레오파트라에 관한 이야기역시 너무나 유명하기에 그만 두겠습니다.

나. 제정시대(27 BC - 476 AD)

(1) 로마의평화(Pax Romana: 27 BC-180 AD)

최후의개선장군 (Imprerator) 옥타비아누스는 BC 29년에 원로원의 제1인자가되었고, 그의 양부 카이사르가 제왕의 꿈을 버리지 못한 것이 화근이되어 암살되었다고 생각하였음으로, BC 27년 공화제 재건을 제창하여특별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공화제국가를 회복시켰습니다. 이에 대하여원로원은 그에게 Augustus라는 존칭을 주었고, 사실상의 그의 권한과권능은 제왕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1인자로서의위치를 확보한 그는 기원전 22년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던 민중을 자비로구휼하였고, 수도 로마시의 대중이나 노병들에게 자기 비용으로 식량을배급해 주었는데 그 수혜 대상이 30만에 이르렀다고 하며, 민중이 즐기는검노 의 투기를 그의 명의로 3회 그의 아들과 손자의 명의로 5회를 했는데동원된 검노 들의 숫자가 1만 명을 넘었고, 같은 명의로 아프리카 맹수들을상대로 하는 투기를 경기장, 광장, 원형투기장 등에서 민중들에게 26회나구경시켜 주었는데 회생된 맹수는 3천 5백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정복과 내전으로 지친 로마시민에게 안정과 질서를 회복 시켜주고 시가지를정비하는 등 획기적인 그의 통치에 감사한 로마 시민들은 도시국가 이념과는상반되는 개인숭배와 함께 새로운 평화세대의 구세주로서 그를 숭앙하였고,그는 풍속과 개인생활에도 관심을 보여 원로원 의원이 되려면, 재산과출생, 전관 경력 등의 한계를 정하고 주홍색 회장을 댄 웃옷을 입고,붉은 가죽구두를 신을 수 있고... 기사 신분은 반 지를 낄 수 있고,.....등등을 제도화했으며, 특별히 혼인 법을 제정하고 풍기를 단속하였는데로마의 풍속은 1부 1처제로서 대체로 이 원칙은 지켜졌으나 이혼과 재혼을밥먹듯 했고 유부남녀 간의 풍기도 대단히 문란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도세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로 합방도 하기 전에 이혼했고두 번째 결혼한 처는 세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로서 그의 유일한혈육 율리아를 낳았지만 질투가 심하고 행동이 방정하지 못해서 이혼하고세 번째 처, 리비아는 전 남편의 아이를 임신  중에 결혼하여,결혼 후 2개월만에 전 남편의 두 번째 아들을 낳아, 데리고 온 아들티베리우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는 두 아들의 의붓아버지가 되어 이들을길렀다고 합니다.

그리나이 세 번째 부인과 50년간 같이 살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혈육이 없었고그의 후계는 의붓아들 티베리우스가 잇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풍기단속에대한 많은 이야기 가운데 그의 유일한 혈육인 율리아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율리아가14살에 결혼한 첫 남편은 17세의 마르켈루스였는데 불행 히도 1년 만에죽었고, 둘째 남편은 아그립파였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41세 였다고합니다. 이 두 사람사이에 5명의 자녀가 태어나 외견상 화목하였으나아그립파의 바쁜 업무는 젊은 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더구나결혼 후 5년후에는 변경에 파견되는 일이 많아서 율리아는 다른 남자와밀애를 수없이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나그 두 번째 남편도 죽고 세 번째 남편은 그의 아버지의 세 번째 처 리비아가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티베리우스였는데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있었으나 이혼하고 바람둥이 율리아와 결혼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로도스 섬으로 잠적해 버렸습니다. 이에 율리아는 밤이 되면 요사스러운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면서 중앙광장이나 민회의 연단에서 공공연하게정사를 즐겼다고 합니다.

법까지제정하여 풍기를 잡으려고 시도한 아우구스투스에게 단 하나 밖에 없는유일한 혈육에게 당한 배신감을 어떻겠습니까? 율리아를 작은 섬에 귀양보내고 포도주 등의 반입과  면회를 금지 시켰습니다(AD 2년) 그러나율리아의 딸 소율리아도 바람둥이로 소문 났고, 그 또한 귀양을 보냈으며,소위 이 시대의 라틴문학도 부정한 연애나 적나라한 애욕의 표현을 공공연히다루었습니다. 오비디우스의 연애비가, 헤로이데스, 아마토리아를 비롯해서베르질리우스 호라티우스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아니 였다고합니다.

(2) 세습황제

옥타비아누스가처음에는 율리아의 아들을 후계자로 했다가 율리아가 바람둥이로 귀양을보내면서 후계 유언장도 고치고, 캄파냐의 별장에서 세 번째 처 리비아품에 안긴 체 세상을 떠난 것은 기원 14년 8월로 그의 나이 76세 였고카이사르와 함께 신으로 모셔졌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56세의 티베리우스가계승자가 되어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아 세습왕조가시작되었습니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家)의 한 사람인 그는 반란의노이로제 때문에 재위기간 중(14∼37) 원로원과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으나,속주 통치와 제국관료(帝國官 僚)의 기구는 정비되었다고 합니다.

제3대 칼리굴라(37∼41)는광적인 성격의 인물로, 엄청난 낭비를 거듭하여 국고는 바닥이 나고시민의 재산몰수가 계속되었으며, 또 자신의 신격화를 극단 적으로 추진하다가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되고, 4대 클라우디우스 1세(41∼54)는 제국의도시화, 시민권 확대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측신제도(側臣制度)를 제도화하여일종의 궁정관료제도를 완성하고, 제국의 행정·재정조직의 정비에도힘을 기울여 황제의 권력을 굳건히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의뒤를 이은 네로(재위 54∼ 68)는 세네카 등의 보좌로 무리없이 정치를했고 문학과 예술을 좋아한 감성적인 군주였으나 권력을 둘러싼 내부음모에휘말려 모친과 처, 처남을 결과적으로 죽이게 되고, 로마시에 불이 나자민심의 이반을 두려워한 나머지 측근들의 의견을 따라 그 죄를 크리스트교인에게 씌워 많은 크리스트 교도를 살해하여 이후 크리스트 교도들로부터폭군으로 기록되어 지금 까지 이르고 있는데... 크리스트교가,

제국의동쪽 변경 팔레스티나에서 성립하여 이 시기에 제국 내의 각 지에 퍼져있었는데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순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결국 Nero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제국 각지에서 4명이 황제를 자칭하며반란이 일어났는데, 유대 반란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마지막 승리자로 황제가 되어 평화와 안정의 시대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그의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70)

(3) 크리스트교(Christianity)와로마제국

로마제국을로마측에서 보면 수많은 로마인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정체라고 할 수도있겠지만, 피 정복민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군에 짓밟힌 패잔과 굴욕,착취와 살육의 희생이 만들어 낸 악마의 전당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이들에게 당한 고통은 정복 지 어디에서나 비슷하지 만, 팔레스타인의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재기와 결속의 기회가 되었다는 차이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크리스트교가 비록 초기에는 로마에 박해를받았지만 로마라는 힘에 의해서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된 것도사실이라고 합니다.

앞서 페르시아제국에서 이야기한 바빌론의 포수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돌아간(칼럼9호)후로 이야기를 이어 보겠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신전을다시 세우고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 계율이 엄한 유대교단을 만들고이방의 여자와 결혼한 사람을 강제 이혼 시키는 등 신앙을 순수하게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이집트, 시리아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면서 메시아(Messiah : 헤브라이어"마샤"mashiah)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시리아의 지배하에 있을 때 시리아 왕 안티오크스 4세는 헬레니즘에심취하여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빼앗고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의화신이라는 자신의 형상을 비치하고 신으로 받들게 하였습니다. 이에참지 못한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이른바 막카바이오스전쟁(166~142 BC)으로 시리아를 몰아내고 막카베아家의 하스몬朝의 왕이 대사제를겸하는 독립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때에활약한 것이 율법학자들로서 그들은 율법을 중요시하지 않는 하스몬왕가의신전제사에는 관여하지 않고 율법에 따라 엄격한 종교생활을 강조하였는데그들의 손발이 된 것이 바리세인 (Pharisees)들로서 율법뿐만 아니라전승되어온 내용까지도 계율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모세의율법만을 정통으로 보고 구비전승된 어떤 내용도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인 사드카이인들이 있어서 유대사회의 상류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사해(死海)의 서쪽 연안에서 엄격한 신앙을 지키던 황야종단(荒野宗團)이있어서 하스몬왕가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바리세인과 충돌하였고, 마침해적소탕의 임무를 띄고 시리아에 와 있던 로마장군 폼페이우스에게조정을 의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이 내분에 개입하여바리세인과 손을 잡고 있던 히르카누스 2세를 대사제직을 맡게 해주었는데그 대가로 유대는 로마에 공납을 바쳐야 했습니다(63 BC)

로마의지배하에 들어간 유대는 남쪽 이두메아의 토호인 헤롯 (Herod : Herodes?-4 AD)에게 통치를 위임하였고 헤롯은 예루살렘 신전을 대규모로 개축하는등 치세의 업적을 보이려고 노력한 듯 하였으나 로마의 정정(政情)에관심을 둘 뿐 유대의 고통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목타게기다린 것은 메시아의 강림이 였습니다. 이 때 황야종단의 영향을 받은세례요한(Baptisma Johannes)이 요르단 강 하류에서 사람들에게 "천국이가까웠으니 회개하라"라고 하면서 물로서 세례를 하고 있었는데예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 신을메시아.....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어떻게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만큼 내용도매우 다양합니다. 다만 학자들의 연구를 요약하면 요셉과 마리아의 여러형제 자매 중, 맏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업인 목공일을하다가 30 세 쯤 되었을 때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를 따르는 군중에게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설교하였다고 합니다.

출생에대해서도 베드레햄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목가적인 이야기가 있으나,어찌 되었던 그가 출생한 해를 원년으로 정한 기독교의 기년(紀年)설정이지금은 세계적인 공통연호로 사용하고 있으니 그의 출생이 축복 받은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헤롯의호구조사령에 따라 고향 나자렛으로 가다가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의출생은 4년이 빨라진다고 합니다. 세계가 올해를 그의 탄생 후 2000년째가된다고 해서 새 밀레니엄시대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1996년이 예수께서태어난 후 2000년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하나의 장르로서 그 영향에 대한상관관계를 밝히고자 할 뿐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유념해 주시기바랍니다. 그의 사후 부활을 믿은 제자들에 의해서 전파되었고, 그 중에서베드로와 바울로의 역할이 두드러집니다.

초기의교단은 사도라 불리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예수의 사후 입신(入信)한그의 동생 야곱 등에 의해서 유대교와 분리되지 않은 체 신전예배나율법을 엄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스테파노라는 열렬한 신자가있어서 유대교를 맹렬히 비난하다가 타살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계기로 유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팔레스타인 밖으로 나가 로마영내에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전도하였고 이들을 크리스티안이라고 부르게되었다고 합니다.

크리스트는것은 메시아의 그리스식 명칭이고 로마에서도 그렇게 불렀으며, 제스위트교단에의해서 중국에 들어와 크 리스트의 음역으로 기독(基督)이 된 것을 우리들은한자발음대로 기독교라고 합니다. 일본은 기리스탄(切支團)이라고 한다는군 요.

그 무렵소아시아의 타르소스에 살고 있던 유대인 바울로(Paulus:영 Paul)는그의 부친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한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그리스적인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나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바리세파가 되어크리스트교의 박해에 앞장서 있다가 다마스쿠스성 밖에서 하늘로부터쏟아져 내려오는 빛을 보고 또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자 갑자기 회개하여예루살렘을 찾아가 그곳에 있던 베드로와 야곱을 만나 개종하고 전도에나섰다고 합니다. 그 후 그가 기독교에 끼친 공로는 참으로 지대해서기독교가 유대인의 종교에서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그의공적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의 피 눈물 나는 전도행적은 신약성경의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바울로에 헌신적인 전도에 의해서 크리스트교는 유대인 이 외의 다른민족에게도 전파되게 되었고, 처음에는 핍박받고 있던 노예와 하층민사회에 번졌으나 점차로 상층 사회에서도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로마는이방인의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도에별 무리가 없었으나 3대황제 칼리굴라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그리스도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으며, 5대 네로의 대대적인박해로 바울로는 로마로 잡혀오고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벗어났다가자기의 행동을 반성하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물었더니 "로마로 돌아가라"고하여 로마로 돌아와 두 사람모두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황제의 개인성향이나 혹은 로마의정치적인 사정에 의해서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개인의 집이나 카다콤베(지하묘실)등에서 예배를 보면서 신앙을 지켜 신자와 교회가 늘어나고 교구제도가틀을 잡아갔습니다.

한편 앞에서 잠깐이야기한 예루살렘의 유대교도들은 자기 들이 핍박당하는 것은 로마의지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바리세의 좌파들을 중심으로 반 로마활동을전개하였는데 70년 4월 로마의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자드디어 8월 예루살렘을 함락되고 헤롯에 의해서 건립되기 시작하여(20BC) 80수 년을 지나 62년에 완성되었던 예루살렘 신전도 이 때 불타고말았습니다.

티투스는재단에 올리는 여러 제기(祭器)를 비롯하여 전리품을 챙기고 개선하여,그의 부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이것을 제1차 유대전쟁이라고 합니다.

그 60년후속주 순행으로 그의 재위기간을 채웠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에로마의 주신 주피터신전을 세우고자 하자 유대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여이른바 제2유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유대가 우세하였으나 병력을 보강한 로마의 재 침으로 드디어 예루살렘이점령되고 주피터신전이 세워지고 유대인들은 쫓겨 나 예루살렘에 들어오지못하게 하였습니다(135) 그러나 1년에 단 한번 1차 유대전쟁에서 예루살렘이점령된 8월 29일, 하루만은 예루살렘에 들어와 타버린 신전의 벽에 대고통곡하는 것을 허용했고,.. 이래서 통곡의 벽이 생기고 이 기구한 행사는지금 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4) 5 현제(賢帝)시대(96-180)

원로원이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이른바 서양인들이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시대라고 일컬어지는 5현제시대가 펼쳐집니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 순행(屬州巡幸)에바 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등이 이들로서, 이들에게 공통점이있다면 친자식을 제치고 현명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 원로원의 승인을얻어 제위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요순시대 선양(禪 讓)의 형식과비슷하다는 것이지요.

(5) 도시의번영과 싹트는 위기

5현제시대는제국 각지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져, 로마문화가 속주의 구석구석까지스며들어 도처에 중앙에 광장을 두고, 신전·바실리카·극장·원형극장·공공목욕탕·수도를구비한 로마식 도시가 세워지고, 도시의 부유 층은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를 구성하고, 관리에 취임하여 무보수로 도시를 위하여 헌신하였고,제국정부도 도시 부유 층의 경제활동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아 제국 각지의특산품 거래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안정된 통화의 뒷받침으로 게르마니아,인도, 중국과의 교역도 성행하여 경제가 크게 번영하였습니다.

그러나5현제 마지막을 장식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위 중 북방 게르만을정복하고, 스토아 파 철학자로서 명상록(Meditations)을 저술하는 여유까지보였으나 게르만과 전투 때 그가 전사했다는 오보(誤報)를 접한 군대에서황제를 자칭하고 나선자가 있었고, 비록 간단히 수습되었으나 심약한그는 반란 공포에 사로잡혀 양자 상속을 포기하고 그의 아들 코모두스와공동으로 황제가 되어 양자 상속의 전통이 무너졌습니다. 도시의 발달은제국을 도시의 보조자로 전락 시켰고, 속주민에게 개방된 원로원은 권위를상실하고, 황제의 부속기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리고 동쪽에서는사산조 페르시아가 북쪽에서는 게르만인의 침입이 다시 빈번해 지는등 대제국 로마도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6) 세베루스왕조와군인황제시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아들 코모두스(재위 180∼192)가 전제정치를행하여, 그가 암살된 후 혼란을 수습한 것은 북 아프리카 출신의 셉티미우스세베루스(재위 193∼211)가 황제가 되어 세베루스왕 조가 시작되었습니다.그는 재정의 재정비를 위하여 통제경제를 실시했고, 그의 뒤를 이은카라칼라(재위 211∼217)는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부여(212)하여 세수(稅收)의 증가를 노렸으나 화폐가치의 하락과 인플레이션을격화시켜  경제는 더욱 흔들렸고 로마시민의 강건한 옛 기백도추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병들어가는 노 제국에 새로운 지배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 적 통합이모색되어 한 때 태양신을 국교화(國敎化)하기도 하였으나 어리석은 이야기거리만 만들었고, 세베루스왕조 최후의 황제 세베루스알렉산더(재위222∼235) 가 살해당한 뒤 약 50년 동안은 2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군인황제"시대가 되어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 졌습니다.

이런 과정에서3세기의 로마제국은 대외적 대내적으로 동란시대를 겪게 되고, 이에곁들여 사회 경제 정치이념의 모든 면에서 고전 고대적인 것과는 전혀다른 형태로 변질되어갔습니다. 도시는 쇠퇴하고 화폐경제가 몰락하는대신 농촌을 중심으로 자급자족의 농장이 등장하고 경제의 중심이 도시에서농촌으로 이행하는 변질의 시대에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중흥의 군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크리스트교박멸을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시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3세기의일이었습니다. 250년 데키우스황제는 모든 주민은 로마의 신에게 희생을바쳤다고 하는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자 유일신 여호아이외의 어떤 신도 믿을 수 없는 크리스트교들로서는 배교와 순교의 두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게 되었으며, 257년과 258년에 발레리아누스에의한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갈리에누스는교회에 대하여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7) 디오클레티아 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제국 재건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284∼305) 는 군의 통수권을 황제에 귀속시키고, 변경 수비를 강화하였으며,통치 기구를 정비, 로마를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바꾸었고, 사분통치제(四分統治制)를 채택하여 3명의 副帝를 두고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통치하였습니다.

301년에는최고가격령을 공포하였으나 인플레이션의 확대를 막지는 못하였고, 세제(稅制)를개혁하여 모든 부과는 토지 단위(iugum)와 사람 단위(caput)로 할당하였으며,속주 수를 배로 늘리고 제국 전체를 관구(管區)라고 이름 붙인 12개의속주 그룹으로 재편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를 자처하여황제에게 절을 하게 하고 복장도 오리엔트식으로 고치는 등 로마적인요소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세운 전제군주정치 체제를 한층 견고하게 한 것은 내란을 수습하고 제위에오른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로서 이미 제국 깊숙이 자리잡은기독교를 새로운 이념으로 승화시켜 황제 권을 높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늘에서십자가의 표지를 보았다고 선언하고 대립자 막센티우스를 격파한 후,로마에 입성한 다음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회담하고, 크리스트교공인의 칙령(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고(313),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열고 아타나시우스파 를 정통으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하여 교리논쟁의해결을 꾀하였으며(326),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옮겨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33)

한편으로는게르만 인을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여 국가 방위를 맡기기도 하였고,직업의 세습(世襲)과  세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상업적인 라티푼디움은이미 전에 사라지고 대신 콜로누스라고 불리던 소작인들에게 병작시킨개인 영농으로 바뀐 농촌에, 많은 소작인의 이동을 금지시켜 콜로누스(농노)들은신분상 많은 구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제국에서 자유로운 시민생활은사라지고 군사국가체제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파격적인 개혁도 일시적인 각성제의 불과할 뿐 옛 로마의 영화를 되찾기에는 역 부족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콘 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뒤 그의 아들들과 일족들의 내분은 제국을 더욱 황폐화시켰습니다.

그 후율리아누스(재위 361∼363)황제가 등장하여 시대에 역행하는 전통적제의(祭儀)와 이교(異敎)를 부활시켜 크리스트교를 공격하고, 로마의옛 제도를 회복코자 하였으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여 그의치세는 단명으로 끝나고 노 제국의 곳곳에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분열

(8) 게르만의이동과 로마제국의 멸망

율리아누스가죽은 뒤, 동방에서는 라인·다뉴브 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되고,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와 그의 동생 동제(東帝)발렌스(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알라만인(人)이 침입하여 서쪽을위협하였고, 갈리아의 바가브타에 난도 격화하였으며, 브리타니아·파노니아·북아프리카등도 어지러웠습니다.

한편 동부에서는365년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훈(Huns Huni)족에 쫓긴 서고트족이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일대를짓밟고 마침내 발렌스의 군대를 괴멸시켰습니다.

내외의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하였으나 그 군대는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는 극도에 달하였고,한때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에게 쫓겨났던 고트족이 협정에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 받았으며(382) 크리스트교를 국교로하고(392), 올림피아 경기를 비롯한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여부흥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제국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동서로 분열하였습니다.

로마는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폐하여 서 로마제국이 멸망하였고(476), 한편 동 로마제국은 1453년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습니다. 이 후 서유럽에서도로마제국의 이념과 전통이 소멸되지 않아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카롤로스: 칼)의 대관(戴冠:800)으로 로마제국의 부활을 상징적 의미로 존속케하였고, 동프랑크의 오토 1세는"신성 로마제국"을 세우는(962)등로마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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