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이 덕 희
어릴 적 등굣길은 험난했다. 시계도 없던 시절이어서 늦잠이라도 자는 날은 세수도 못하고 집을 나설 적이 많았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먼 길이었다. 자갈길을 한참 걷다보면 눈앞에 호명천이 넓게 펼쳐졌다. 책보를 등에 메고 바지를 걷어 올린 후 징검다리를 짚고 강을 건너야했다. 다시 밭두렁을 걷고 언덕배기를 힘겹게 올라야 내가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해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지각을 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지각을 할 때마다 후문 앞에서 벌을 세웠다.
겨울학교 무렵에는 세차게 몰아치는 강바람이 섶다리를 향해 무섭게 불어댔다. 얼굴을 꽁꽁 싸매고 걸어도 볼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추위는 매서웠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이면 조그마한 몸뚱이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여름 장마 때나 가을 태풍으로 강물이 불어나면 마을 뱃사공들이 배나들 나루에서 나룻배를 저어 등하교를 도와주었다. 큰 홍수가 나면 나룻배도 다니지 못해 합강리 진보교까지 20리나 되는 길을 산과 들을 따라 학교를 갔다. 공부하다가 홍수가 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우리 마을은 일찍 집으로 보내주었다. 강을 건너야하는 때문이었다. 큰 홍수로 인해 나룻배가 강 하구까지 떠내려가는 바람에 한참 동안 타지 못하는 적도 있었다.
어떤 때는 지나친 홍수로 나룻배가 강 하구로 떠내려가 며칠 뒤에야 나룻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면 친구들과 강가에 소 풀 먹이려갔다. 풀이 무성한 강섶에 소를 풀어놓고 우리는 강물에 뛰어들었다. 발가벗고 목욕을 하고 물장구를 치고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물놀이를 하다 허기가 지면 강가 모래밭에서 감자묻이를 했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피우고 잘 달구어진 돌에 감자를 묻고 다 익으면 꺼내서 나눠먹었다. 배가 부르면 다시 강에 들어가 놀았다. 해가 뉘엿해지면 양껏 풀을 뜯어먹고 배가 빵빵해진 소를 몰고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초등학교 6학년 추석에 태풍 사라호가 찾아왔다. 마을 앞 제방 둑이 터지더니 순식간에 마을을 덮쳤다. 어머니가 당뇨합병증으로 돌아가신지 겨우 이틀이 지난 뒤였다. 성복도 지나지 않은 시신을 우선 뒷동산 밭둑에 가매장했다. 담장은 무너지고 장독은 떠내려갔다. 집은 중턱까지 침수되어 벽이 허물어졌다. 우리 가족은 임시방편이나마 친척집으로 대피했다. 5일장을 지내려던 장례는 어쩔 수 없이 7일장으로 물렸다. 두 돌 갓 지낸 쌍둥이 자매 중 하나는 큰댁 종형에게 또 하나는 외가댁으로 보내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모두 깡 가까이에 살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30여 년 전 합강을 지나는 물줄기를 모아 임하댐이 건설되었다. 동시에 태풍 걱정도 사라졌다. 댐 위로 고가교가 설치되어 나룻배도 섶다리도 옛말이 되었다. 까마득한 그때 그 시절은 사람들에겐 추억이 되었지만 나에겐 여전히 돌아보기도 싫은 기억이다. 요즘 들어 며칠에 한 번씩 강을 낀 텃밭에 가노라면 지나간 시절이 꿈만 같다. 65년이란 지난 세월이 까마득한 전설처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