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취업활동이다 뭐다해서 카페는 거의 눈팅 위주, 그마저도 댓글 위주로만 남기고 있었다가
한번 카페 게시판에 족적??을 남겨야 할 것 같아 카페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한번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철도사에서 승객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일어난 집단 행동으로 아게오 사건과 수도권 국전 폭동 외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승객유치 전쟁이 벌어지는 간사이 사철에서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봤는데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공연 관객 수송노선으로 잘 알려진 한큐전철 다카라즈카선의 현재로서는 믿기지 않은 과거,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일어난 승객들의 노선 제반상황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쇼나이역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과거 90년대 고양 화전동, 서울 수색/응암동에서 유년을 보내셨거나 현재 '작은 책'의 편집장을 지내고 계시는 안건모 전 동해운수 운전사가 쓴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뭔가 데자뷰를 느끼실지도...(이 의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발단이 된 다카라즈카선의 상황
한큐 다카라즈카선은 1910년 개업이래 궤도법으로 우회했던 노선들이 그렇듯 차량한계의 규격이 다소 작은 편이었고 그로 인해 차체 길이 15m 전후, 차체 폭 2.4,2.5m의 소형 차량만 입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고베선의 차량한계 확대와 그에 수반된 개량을 계기로 현재와 같은 대형 전동차의 운행이 시작되었으며 다카라즈카선의 차량한계 확대와 대형 전동차 도입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다카라즈카선의 제반 상황으로 대형 전동차의 도입은 무산되고 대신 기존의 소형 차량들만 계속 증비되었는데 사실 한큐의 다른 노선들과 달리 선형이 그리 좋지 않아 지난해 처음으로 특급이 신설되는 등 급행 이상의 속달편은 없었던데다 당시 국철과 한신전철을 포함한 3파전을 치르는 고베선과는 달리 독점 구역이기도 한 면도 있어 대책은 시급했으나 그 수준을 얼마정도로 해야 하느냐를 놓고 여러모로 고민거리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선의 인구증가로 인한 대책이 수립되면서 1951년 선로중심간격 확대와 신호설비 등의 개량이 착수되어 1952년 9월 30일부로 본격적인 대형 전동차의 운행이 실시됩니다.
하지만 독점 기업의 폐해를 보여주듯 대부분은 고베선 퇴역차에 신차라 해봐야 차폭만 넓고 전장은 기존 소형차 규격인데다 승무원실에 승객 일부를 태우고 다닐 정도로 여전히 다카라즈카선의 수송 대책은 엉터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다고 합니다. 거기에 최고속도는 여전히 기존과 같아 병주하는 우메다-쥬소 구간에서는 다카라즈카선 열차가 더 오래걸렸으며 심지어 이제 막 한큐전철로 편입된 교토선보다 더 뒤처졌을 정도로 사실상 다카라즈카선의 대책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습니다.
이러다보니 다카라즈카선은 한큐의 다른 노선과 달리 전동차 고장으로 인한 선로 트러블 일상화에 승객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지역 언론 등을 중심으로 이런 상황에 대한 익명의 불만 투서,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적은 투서들도 있었습니다.
이쯤되면 특히 90년대 고양시 덕양구와 서울시 수색/응암동에서 유년을 보내셨거나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라는 책을 읽어보셨다면 잘 아실 2002년까지 서울시내버스 가운데 냉방차가 단 1대도 없었던 동해운수 147번이 떠오르시지 않을까 싶은데 당시의 148번(원당 - 신촌, 현재의 7728번)에서 구르고 온 상태 안좋은 고물차, 그로 인한 중간 운행 타절에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승무원들의 일상화된 불친절 등 당시 동해운수 147번의 열악한 상황과 다를게 하나도 없었던 데자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여기 회원분들 가운데 교외선의 어느 역을 닉네임으로 사용하시는 분이라면 아마 지금도 기억하고 계실지도... ^^)
(2) 쇼나이 사건, 승객들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다.
1956년 2월 2일 오전 7시 40분에 핫토리 덴진 - 쇼나이 사이에서 미노발 우메다행 준급행(4량 편성) 열차가 운행 도중 대차의 용수철 관련한 부품 절단에 수반된 전동차 고장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되는 인시던트가 일어납니다.
승무원들은 그 자리에서 응급 수리하는 한편 승객들을 도보로 쇼나이역 방향으로 유도하는 한편 쇼나이역에 예비차를 회송하여 승객들을 우메다까지 대체 수송하는 즉 차량 교체운행이 결정되었는습니다. 하필 아침 러시아워였기에 이 여파로 후속열차까지 정지하여 쇼나이역은 1,000명 가까운 승객들로 넘쳐났으며 설상가상으로 승무원간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해당 노선의 차량기지에는 대체 운행을 위한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거기에 운행은 재개되었습니다만 그 여파로 정작 쇼나이역에서는 열차를 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이쯤되어 고장 열차의 승객들이 선로에 인간띠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약속대로 대체 열차를 준비하고 먼저 우리를 실어 날라라", 즉 열차 운행 중단과 후속 조치 미흡에 대한 승객들의 불만이 점차 물리적 투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 여파로 또다시 다카라즈카선의 열차 운행이 중단되는 그야말로 사태는 중대한 수위로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이쯤되어 도요나카역에서 역무원 2명을 급파하는 등 쇼나이역에 고립되어 격앙된 승객들과 대화를 시작합니다만 "회사에 정상 출근은 커녕 결근이나 안하면 다행", "고베선에 비해서 서비스가 나쁜 한큐의 대응은 전혀 없다" 등 격분한 승객들 앞에서는 사실상 역부족이었습니다.
급기야 오사카부 경찰 기동대가 출동합니다만 사건 배경과 정황상 법대로 처리하기에는 다소 무리였던데다 승객만 1천명이라 사실상 사태의 악화를 대비한 현장 대기에 그치고 기동대 소속 트럭과 버스로 승객들을 우메다로 수송하게 됩니다. 뒤늦게 한큐그룹 본사에서도 자회사인 한큐버스의 예비차로 전술한 기동대 소속 트럭, 버스와 함께 수송하는 한편 한큐그룹의 고바야시 전무도 현장에 급파되어 사태 해결을 위한 문제의 고장 열차 승객들과 대화에 나서게 됩니다.
고바야시 전무는 안전상 멈춰선 열차의 선두차 관통문 위에서 한동안은 격앙된 승객들의 욕설 등 대화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승객 사과와 다카라즈카선에 대한 대책의 언급, 고베선 800계 전동차의 대체 수송 투입으로 쇼나이역 소동은 일단락에 이릅니다.
이 여파로 우메다역은 열차운행 재개 이후에도 지연증명서를 발행하는 업무로만 하루종일 역무가 마비되었으며 급기야 소네자키 경찰서의 경찰관 30여명이 업무에 동원되고 나서야 점차 혼란은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번 상황으로 인한 감정적 응어리가 남은 승객 200명이 우메다역 사무실을 점거하는 등 평소 뿌리깊었던 한큐전철과 다카라즈카선에 대한 불만이 쇄도한 것이었기에 여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노선의 수송을 결정하는 한큐전철의 운수부장이 우메다역에 급파되어 다카라즈카선에서 일어난 일련의 상황에 대한 해명, 승객들의 하루 활동 마비로 인한 손실금 1천엔 가량을 지급하고서야 쇼나이역에서 시작된 소동은 완전한 매듭에 이릅니다.
(3) 쇼나이 사건의 여파와 후폭풍
이 사건으로 한큐 다카라즈카선은 거의 하루의 절반 가량 운행 혼란, 무엇보다 한큐전철은 이미지에서 큰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고베선에 비해서 서비스가 나쁜 한큐의 대응은 전혀 없다"로 소개된 다카라즈카선의 상황은 큰 상처로 작용했습니다.
고바야시 전무는 어느 석간신문에 인터뷰를 자청하여 "소동이 커진 것은 평소 불만이 폭발했기 때문이다"는 언급과 함께 다카라즈카선의 상황과 4량 편성부터 5량 편성으로의 증결 등 수송력 증강을 언급한 바 있으며 이 사건 직후인 1956년 3월에는 기존 차량의 갱신을 명목으로 기존 대차와 신형의 대형 차체를 조합한 1200계를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에 고베선 1010계의 다카라즈카선 버전인 1100계가 1개월 앞서 다카라즈카선에 도입되었습니다.
1957년 11월에 1200계의 중간차 1230형이 생산되어 다카라즈카선에서 5량 편성 운행이 개시되었으며 1960년대 들어 2100계나 2021계의 직접 투입, 고베선 2000계 투입에 따른 920계의 다카라즈카선 전속이 실시됩니다. 1963년 12월에는 다카라즈카선 예비 및 미노오선용을 제외한 500,550형을 제외한 소형 전동차는 전차량 이마즈, 이타미, 코요선 등의 지선으로 전출되어 고베, 교토선과 동일하게 개선되고 1969년에는 직류 1500V 승압이 개시되어 수송력 증강도 이룰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워낙 그 이전부터 최대 혼잡률 250%를 기록했기에 80년대 들어 러시아워에는 최대 10량 편성의 운용도 개시되었으며 이전까지는 비전철화 단선으로 적수가 되지 못했던 국철의 후쿠치야마선이 전철화되면서 현재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됩니다.
이 사건은 프로야구로 치면 LG 트윈스의 강제 청문회??나 2010년 기아 타이거즈의 18연패에 수반된 과격팬의 버스 난입에 그친 정도였겠지만 전술했다시피 한큐전철은 특히 홍보나 마케팅 측면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후문에 따르면 자사의 차량을 생산하는 아루나 공업기계(당시 나니와공업)의 조업 일정에서 이 여파가 고스란히 이어졌는데 고베선 위주로 신차가 들어가는 체계에 따른 조업 체제였기에 다카라즈카선 신차인 1100계는 거의 예정에도 없었던 물량이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50년대 후반까지 나니와공업 조업 일정의 절반은 다카라즈카선 신차 물량 관련 특근이 추가되었으며, 급기야 공장 근로자 한명이 과로에 수반된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후송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전술한 사건 이후의 고바야시 담화 이후에도 다카라즈카선 승객들의 뿌리 깊은 불만과 불신을 확인한 바 있었기에 전술한 고베선 1010계의 다카라즈카선 버전인 1100계 전동차 생산당시 거의 절반 가량을 반수제??로 이루어지는 철도차량 조립 특성상 근로자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1010계와 1100계별로 부품을 구분 표시한데 이어 다카라즈카선 연선 지역의 공무원 등 연선 지역 관계자가 직접 생산 현장을 입회하는 등 사실상 신뢰회복 노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참고문헌·출처
위키피디아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야;; 한큐는 마냥 지역에서 사랑받는 전철인 줄 알았는데 사각(?)지대가 있었군요;;
다카라즈카까진jr은 좀 돌아서가는 형태라 저렴한운임의 한큐의 압승이죠.특히 한큐연선이 다카라즈카 인구밀집지역을 지나기에 급행도 토요나카부턴 각역정차지요 그래서 어떤사람들은 니시노미야키타구치를 경유해서 가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네요.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