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셉 잭슨[1][2](영어: Michael Joseph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은 팝의 황제[3][4][5][6]로 불리는 미국의 가수,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무용가, 배우, 그리고 자선가다.[7][8][9] 음악, 춤, 패션에 대한 그의 공헌[10][11][12]은 그의 사생활과 함께 그를 40년이 넘게 대중문화의 세계적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혁명적인 등장은 여러 방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는데, 문화계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뿌리깊은 병폐로 남아있던 인종 차별로 인한 인종 장벽을 무너뜨리며 흑인의 성공적인 사회 진출을 앞세운 선구가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중음악에서의 시각적 요소를 부각시키며 음악 산업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20세기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며, 전 세계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아티스트이다. 잭슨 가족의 8번째 자식인 마이클은 1964년 형제인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그리고 말론 잭슨과 함께 팀의 막내로 잭슨 파이브로 데뷔했다. 1971년 모타운 레코드에서 솔로 활동을 시작한 잭슨은 1980년대 초 대중음악에서 주목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의 1982년 앨범 《Thriller》의 수록곡 〈Beat It〉, 〈Billie Jean〉, 〈Thriller〉등의 뮤직 비디오는 인종적 장벽을 깨고, 매체의 예술 형식과 홍보 수단에 혁명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디오의 인기는 TV 채널 MTV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키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융한한 마이클의 앨범 사운드는 흑인=소울/알앤비, 백인=록/팝이라는 공식을 완전히 허물었다는 점에서도 찬사를 받는다. 잭슨의 1987년 음반 《Bad》는 수록곡인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Dirty Diana〉를 모두 미국 빌보드 핫 100 싱글의 정상에 올려, 최다 1위곡을 배출시킨 음반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그는 1990년대 동안,〈Black or White〉와 〈Scream〉과 같은 영상으로 혁신을 계속했고, 1993년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은 역사적인 무대로 자리매김 하였다. 투어를 도는 솔로 가수로서 명성을 쌓았으며 무대와 영상 퍼포먼스를 통해 잭슨은 로봇과 문워크와 같은 수많은 복잡한 춤 기술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그의 독특한 사운드와 스타일은 다양한 음악 장르의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이라는 기네스북 기록과 함께 잭슨의 정규 앨범 《Thriller》는 66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13] 총 31개의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으며[14][15][16][17]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동안 꾸준히 빌보드 TOP 10 안에 든 유일한 가수로 그의 솔로 경력으로는 총 13개의 빌보드 1위곡을 남겼으며 밴드 시절까지 합치면 17개의 빌보드 1위곡을 남겼다.[18] 또한 잭슨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된 몇 안되는 음악가 중 한 명이며,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13개의 상과 35세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 상을 수상했다.[19] 작사/작곡 능력을 인정받아 2002년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20] 춤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21] 또한 인종차별을 부숴 유색인들의 인권신장을 이뤘다는 공로로 상을 받았다.[22] 잭슨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간 사운드로 구성되어 엔지니어들은 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23] 잭슨의 외적 변화, 개인적 인간 관계, 행동 등 사적인 부분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민사소송을 당했고 법정 외 합의로 민사소송은 종결됐다. 형사 수사는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됐으며 잭슨에게 민사소송을 건 이반 챈들러는 2009년 11월 5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2005년에도 아동 성추행 혐의에 연루돼 재판을 받았지만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This Is It이라는 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컴백을 준비하고 있던 중 2009년 6월 25일 프로포폴과 벤조디아제핀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했다. LA 경찰은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고, 머레이는 2급 살인죄로 2011년 9월 유죄 판결을 받는다. 잭슨의 죽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추도식은 각국 방송국을 통해 생중계 되었다.[24] 사망 직후 잭슨을 기리기 위해 미국 의회에서는 정치인 출신이자 목사인 재시 잭슨의 주도하에 국회의원들의 묵념이 있었다.[25] 'Global Language Monitor'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죽음은 지난 수십년간 유명인들의 죽음 중 가장 큰 반응을 불러온 것으로 나타났고[26] 2010년에는 VH1 선정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에 잭슨의 사망이 1위에 올랐다.[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