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형 이상정(오른쪽)과 동생 이상화가 중국 남경에서 만나고 있다.
1933년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가 결성되었다. 초대 회장에 박승빈이 취임했다. 1925년부터 1932년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박승빈은 1931년 조선어학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했던 한글연구자이기도 했다. 판사였던 그의 한글사랑정신이 놀랍다.
그는 같은 1931년 최남선, 오세창 등과 더불어 계명구락부를 만들어 사회계몽 활동을 펼쳤다. 두산백과는 그가 “<계명啓明>, <신청년新靑年> 등의 잡지를 발간하는 한편, 여러 편의 고전을 출판하는 등 대중계몽에 힘쓰면서 언론의 힘으로 일본과 투쟁했다. 주요 저서로 <조선어학강의요지>, <조선어학> 등이 있다.”라고 소개한다.
법률가 박승빈이 한글연구와 사회활동에 맹렬한 정열을 불태우고 조선축구협회 초대 회장까지 맡은 일은 이상정을 생각나게 만든다. 우리에게 이상정은 중국군 장군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로 기억된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 나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의 남편이라는 사실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상정은 놀라운 이색 면모도 보여준다. 그는 대구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연 화가였고, 자신의 작품을 직접 촬영해 책으로 출간한 서각 전문가이기도 했다.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에는 계성학교, 오산학교 등에서 도화(미술) 교사로 재직했고, 벽동사라는 미술연구소를 차리기도 했다.
또 이상정은 1922년 ‘개벽’을 통해 등단한 시조시인이기도 했다. 물론 대구 최초의 ‘현대’ 시조시인이었다. 1925년 그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착잡한 감회를 노래한 시조를 읽어본다. 제목은 ‘남대문역에서’이다.
이 속에 타는 불은 저 님은 모르시고
서운히 가는 뒷모습 애석히 눈에 박혀
이따금 샘솟는 눈물 걷잡을 줄 없애라
남대문역은 지금의 서울역이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길을 지금 떠나려 하고 있다. 1640년 일흔 넘은 고령에 김상헌이,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라고 노래했고, 1910년 32세 안창호가,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 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라는 ‘거국가去國歌’를 지어 부른 일을 연상하게 하는 시조이다.
1925년 당시 이상정은 29세였다. 그날 이후 이상정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독립 이후 교민 보호를 위해 상해에서 일하던 중 1947년 8월 27일 어머니 별세 소식에 부랴부랴 귀국했다가 불과 두 달 뒤인 10월 27일 51세 나이로 타계했다(뇌일혈). 그의 ‘망향가’ 일부를 다시 읽어본다.
아름다운 삼천리 정든 내 고향
예로부터 내려온 조선의 터를
속절없이 버리고 떠나왔노니
몽매에도 잊으랴 그리웁구나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 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백두 금강 태백에 슬픔을 끼고
두만 압록 양 강 물결에 눈물 뿌리며
남부여대 쫓겨온 백의동포를
북간도 눈보라야 울리지 마라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 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시베리아 가을 달 만두 벌판에
몇 번이나 고향을 꿈에 갔더뇨
항주 쑤저우의 봄날과 긴 모래사장의 비애
우리 님을 생각함이 몇 번이런가 (*)
이 글은 현진건학교가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수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