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시절의 추억

[구연식]

31(119).신혼시절의 추억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6월 1일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1970년대 초 지방에서는 대개 신혼살림은 셋방살이가 보통이었다. 더구나 공무원 월급으로 단독주택은 꿈도 못 꾸었다. 나 역시 신혼초에는 셋방살이부터 출발했다.

그 시절엔 에피소드도 많다. 장롱 크기와 셋방 집 문의 크기를 비교해보지도 않고 계약하여 막상 이사 가던 날 주인집 마당에서 위약금을 주고 다시 이삿짐을 다른 집으로 옮겼던 일도 있었다. 벽에다 못을 박고 싶으면 아내와 하나둘셋을 동시에 외치면서 아내는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를 내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망치로 벽에다 못을 박았다.

그때는 전기계량기가 분리 설치가 안 되어 주인집이 셋방의 전등 수와 식구 수를 고려하여 일방적으로 분배 통보하는 전기요금 계산방식이었다. 전기계량기가 주인집 현관 안에 설치되어서 전기요금이 얼마나 나왔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만약 전기 검침을 확인하여 정확한 요금 분배를 요구할 때는 주인집이 언제든지 방 빼라고 하면 빼겠다는 의사 표시였기에 속이 상해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주인이 내라는대로 전기요금을 내야 했었다.

전기다리미나 전기담요 같은 전열기는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전기계량기가 주인댁 현관 출입구의 눈높이에 붙어있어서 계량기가 빨리 돌아가면 금방 셋방에서 전열기를 사용중임을 알아채고 주인집 아주머니는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 이달 전기요금은 셋방이 더 내야 한다는 암시를 했고, 설령 계량기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전열기를 사용하고 싶으면 주인댁이 모두 외출했을 때 몽땅 사용했다. 그래도 평소 적용 방식 비율로 분배할 테니까 나의 손해는 적었다. 그 무렵은 수돗물 사정도 지금처럼 콸콸 쏟아지는 것이 아니고 사정이 안 좋을 때는 수도꼭지에서 병아리 눈물처럼 찔끔찔끔 나오기 때문에 늦은 밤에 수돗물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6월 1일이 일요일과 겹치게 되어 가장 경제적인 비용을 투자하여 뜻깊은 결혼기념일을 보내기로 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가장 가까운 곳에 가서 놀다 오기로 아내와 합의하고 점심때 김밥을 둘둘 말아서 썰지도 않고 통째로 비닐에 싸고 콜라 한 병을 사서 준비한 것이 점심 보따리였다.

군산역에서 익산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다시 익산역에서 대전 가는 완행열차로 갈아타고 가다 논산역에서 내렸다. 원래 목적지는 온양을 가기로 했는데 차창밖 관광 안내표지판을 보니 논산역이 부여를 가는 길을 안내하기에 그냥 논산역에서 내렸다. 부여 가는 교통을 알아보려고 역전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다방 마담이 자리에서 잽싸게 일어서더니 ‘어서 오세요’ 그리고 아내가 어제 미장원에서 20대들의 유행 파마를 하고 와서 아직도 머리에서는 파마약 냄새가 가시지 않아 마담은 약간 코끝을 모아서 냄새를 피하는 표정이면서도 커피 팔 욕심으로 "어머, 머리 파마 잘 나왔어요. 어디서 하셨어요?" 하면서 커피 주문을 받았다. 아내와 다방에서 커피를 마셔 본 기억도 꽤 오래된 것 같다.

다방 벽에 붙어있는 관광포스터를 보면서 마담의 설명을 들으며 목적지 교통과 부여에서 관광 일정을 계획하고 논산에서 익산까지 내려갈 기차 시간 등을 확인하고 부여행 버스를 탔다. 부여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수학여행코스였다. 인근 지역사회에 살면서도 부여여행은 처음이었다. 우선 부여는 옛 백제의 도읍지며 낙화암의 슬픈 전설이 서린 곳이다.

박물관을 구경하고 부소산(扶蘇山)으로 올라가다가 늦은 봄비를 만났다, 그리 많이 오는 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우산 없이 잠시만 서 있어도 옷을 촉촉이 적실 강수량이었다. 박물관 뒷길 부소산 중턱쯤 가다가 비를 만나서 비를 피할 수단은 어른 키 정도의 소나무들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가장 잎사귀가 촘촘한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는데 좀처럼 쉽게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아예 마음 편히 쉬고 있었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시장기가 들었다. 우리는 가랑비가 뭉쳐서 큰 빗방울로 간혹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나무 아래서 썰지 않은 김밥을 빗속에서 꺼내 입속에 넣고 한 입씩 베어 먹으니 이 세상 어느 김밥보다 맛이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아마도 전쟁 중 공수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는 병사들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김밥을 먹고 콜라 한 모금씩 마시니 어느 황제 부럽지 않은 점심이었다. 이렇게 식사를 대충 마치니 비도 그쳤다.

부소산(扶蘇山)은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에 걸쳐 있는 해발 106m 고도를 가진 마을 뒷산 정도의 부여 진산이다. 평지에 돌출했으며, 동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백마강과 맞닿았다. 부소산의 산 이름은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에 처음 선보이며,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 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부소산을 ‘솔뫼’라고 보는 학설이 있다. 부소산은 평상시에는 백제 왕실에 딸린 후원 구실을 하였으며, 전쟁 때에는 사비도성의 최후를 지키는 장소가 되었다.

부소산 내에 있는 군창지, 사자루, 삼충사, 서복사지, 영일루를 구경하고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당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백화정에 오르니 바로 코앞이 낙화암이었다. 숲 아래 고란초로 유명한 고란사(皐蘭寺)도 보였다. 고란사로 내려가 절벽의 고란초를 보며 약수 한 모금을 마시고 비스듬히 보이는 낙화암 절벽을 보니 절벽에 조선 시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는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단다.

이렇게 흥망성쇠의 백제 고적답사를 마치고 논산행 버스에 오르니 버스는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이 꽉 차 있어 낮에 내린 비가 모두 젖어서인지 후덥지근한 냄새뿐이었고,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았다. 가끔 중간 정류장에서 내리고 오르는 승객 때문에 조금은 불편했다. 논산역에서 완행열차에 오르니 자리가 넉넉하여 열차 한 대를 전세 낸 기분으로 군산역까지 왔다. 아주 기분 좋게 결혼기념일을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짜장면으로 저녁을 때우니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다시 셋방의 부엌문을 열고 들어가니 큰일이 벌어졌다. 아침에 나갈 때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서 틀다 만 수도꼭지가 덜 잠겨서 온종일 수돗물이 콸콸 쏟아져서 부엌은 한강이 되어 부엌문 틈으로 물이 넘쳐 흘렸다. 물이 연탄아궁이 공기구멍까지 넘쳐 연탄불도 커졌고 연탄화덕도 망가졌다.

오늘 종일 넘친 수돗물 요금 변상을 주인집이 어떻게 계산할지도 걱정되었다. 안집 주인댁의 동태를 살펴보니 그 집 역시 아침에 일찍 외출하여 그때까지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얼른 방의 불을 끄고 주인집이 눈치 못 채게 어두운 방에서 걱정하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도 인기척을 내지 않으면서 조금 일찍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 후 시내에서 배회하다가 어두컴컴할 때 셋방에 살짝 들어가서 생활했다. 그런 생활은 수도요금이 계산되는 말일까지 지속했는데, 결국 말일쯤에 안집 아주머니가 이달에는 수도요금이 조금 많이 나와서 더 내야 한다는 양해의 말뿐 다른 이유는 없어서 우리 부부는 아무 대꾸 없이 평상시보다 많이 나온 수도요금을 건네주었다.

그 집에서 몇 년 살다가 우리는 처음으로 새집을 장만하고 내 이름으로 문패를 달았다. 그 옛날 집주인 아저씨가 별세하셨다는 기별이 와서 부부는 그 집으로 조문을 갔다. 현관문을 들어서니 제일 먼저 야속했던 전기계량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잊지 않고 조문을 와서 부의금까지 주니 고맙다는 표정이셨다. 나는 속으로 ‘아주머니 부의금 속에는 그 옛날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수도요금도 포함되었습니다.’라고 뇌까리며 상갓집을 나섰다. 주인집 아주머니 가난한 신혼 맞벌이부부를 여러 가지로 보살펴주어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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