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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체험의 시학
―김응수의 시세계
이은봉(시인, 문학평론가, 광주대 문창과 교수)
시인 김응수가 지천명의 나이를 넘겨 첫 시집을 낸다. 이름하여 『낡은 전동타자기에 대한 기억』! 1993년 계간 《시와사회》를 통해 등단했으니 무려 16년 만의 일이다. 지금은 발간되지 않은 이 시전문지의 편집인으로 참여한 적이 있는 것이 나이다. 그러니 어찌 그의 첫 시집 발간을 축하하지 않을 수 있으랴.
등단을 한지 16년 만에 내는 시집이니 만큼 이 시집에는 그 동안의 세월이 응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1993년 이래 시인 김응수가 살아온 삶의 행로가 압축되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런 정도에 그쳐 있는 것이 아니다. 유년 시절 이래 그가 겪은 다양한 체험들이 기억의 창고 속에서 불려나와 새롭게 가공되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의 시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집에 드러나 있는 이미지들은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겪은 가장 중요한 체험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이처럼 기억의 창고 속에서 불거져 나온 체험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응수의 시는 좀더 관심을 끈다. 체험이 내면화되고 육화되면서 형성되는 기억을 질료로 한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그의 시라는 뜻이다. 육화된 체험은 기억을 만들고, 기억은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시적 형상을 만들기 마련이거니와, 그의 시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기억은 시적 상상력을 깊게 하고 넓게 하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 상상력이 기억에 의해 재생되는 과거의 체험에 의해 심화되고 풍부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 기억은 상상력이 발휘되는 토대이고 기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은 문장의 특징, 곧 시제 사용의 특징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종결어미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문장의 시제이거니와, 그의 시의 경우 그것의 대부분이 과거세제나 과거완료시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그의 시가 과거의 체험을 기억의 상상력에 의해 재생시키는 방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증표라는 것이다. 이는 우선 다음의 시에 의해서도 확인이 되거니와, 물론 여기서 확인해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기억의 상상력을 통해 그가 재생해내는 과거의 체험이 아픔이나 고통, 슬픔이나 서러움 등의 정서와 깊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아픔을 숨죽인 채 너 헐떡이며 달려왔구나
좌우로 흔들리는 중심을 잡으러
비틀거리면서 어찌 견디었느냐
서러움을 견디었느냐
이 시집의 모두(冒頭)에 실려 시 「歸家」의 일부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너’로 인격화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때의 다리를 저 자신의 환유적 이미지로 파악하면 말할 것도 없이 이 시는 자기 연민에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기 연민은 저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어진 마음, 곧 사랑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의 어진 마음, 곧 사랑의 마음은 딱하게 여기는 마음, 곧 안쓰럽게 생각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저 자신을 딱하게 여기고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그렇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애기애타(愛己愛他)라고 하거니와,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 없이 타자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적어도 (시에 등장하는) 그는 저 자신이나 타자에 대해 매우 풍성한 사랑과 연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여기서 정작 주목이 되는 것은 그가 저 자신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보여주는 정서적 태도, 즉 기억의 상상력이다. 그렇다. 기억의 상상력이야말로 과거의 체험을 오늘에도 새롭고, 신선하고, 실감 있게 재생시켜 주는 그의 정신기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고통스럽고 아픈, 슬프고 서러운 과거의 체험이 비록 서정적 정서보다 수필적 서사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수필적 서사라고 했지만 그의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서사가 매번 명징하고 투명한 풍경을 바탕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적인 서사를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풍경으로 그려내기보다는 감추어져 있는 서사를 반구상적인 형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경우도 적잖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억의 창고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체험을 불러내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반추상의 형식으로 진술되는 경우가 적잖다는 것이다. 다음은 추상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완화되어 있는 가운데 기억의 상상력이 발휘되어 있는 시의 한 예이다.
병원 실습 시절
다들 첫 수술의 비릿함을 숙덕일 때
나는 먼저 타자기로 처방전을 치던 모습을 떠올렸지
아버지가 묵직한 고통을 서울로 옮겼을 때
신주처럼 분홍보자기에 싸인
전동타자기가 실려 있었지
간혹 전기 콘센트에 끼워 두드리곤 했지만
흰 테이프로 잘못된 철자를 고치듯이
하루하루 정정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
주섬주섬 꼭두새벽 이삿짐 싸던 날
전동타자기에 부딪혀 복사뼈가 부었을 때
흠가지 않았을까 둘러보며 마음 졸였지
유리병에 담긴 알약이 떨어질 때쯤, 세간 하나씩
빠져나가는 데도 타자기만은
“응수, 박사 되면 써야지”
아버지의 한마디에 되돌아왔지, 마지막
아버지마저 나갈 때 명동성당 옆 골목길 어스름,
자판 하나 빠지지 않은 전동타자기가 나는,
부러웠지
지금도 광 깊숙이 분홍보자기에 싸인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 같은,
서너 번 데우다만 콩나물국 같은
타자기를 볼 때마다 복사뼈가,
내 복사뼈가 아파온다
―「낡은 전동 타자기에 대한 기억」전문
이 시가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시와 함께 하는 기억의 상상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시에서 그의 시의 기억의 상상력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은 가족 공동체, 특히 아버지와의 체험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시를 통해 그가 보여주는 가족 공동체, 특히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매우 크고 집요해 보인다. 〈아버지와 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만 하더라도 무려 7편이나 수록되어 있는 것이 이 시집이다. 물론 이 시 「낡은 전동 타자기에 대한 기억」에는 〈아버지와 나〉라는 부제가 명시적으로 붙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연작시의 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시에는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가 깊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에 따르면 전동타자기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묵직한 고통을 서울로 옮겼을 때/신주처럼 분홍보자기에 싸인” 채 “차에 실려”온 것이다. “꼭두새벽부터 이삿짐 싸던 날/전동타자기에 부딪혀 복사뼈가 부었을 때”도 아픈 복사뼈보다는 전동타자기가 “흠가지 않았을까 둘러보며 마음 졸였”던 것이 그이다. “세간이 하나씩/빠져나가는 데도” “응수, 박사 되면 써야지/아버지의 이 한 마디에 되돌”아온 것이 전동타자기일 만큼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 이 전동 타자기이다.
이러한 체험과 함께 하고 있으니 그가 이 전동타자기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로서는 이 전통타자기를 아버지의 환유적 대체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업에 실패해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 같은” “지금도 광 깊숙이 분홍보자기에 싸여 있는” “타자기를 볼 때마다 복사뼈가” “아파”오는 것이 시인 김응수인 것이다.
전동타자기로부터 끊임없이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역할에 그가 심리적으로 적잖은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가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면 그의 삶에도 이와 관련한 강박관념이 도사려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가 다른 시에서 “사랑은 냉정할 때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사랑에 질질 끌려 다”닌 것처럼 저 역시 “사랑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코가 꿰어”, 기타 집안의 대소사에 코가 꿰어 “요 모양 요 꼴로 살아가고 있”(「나는 이런 사랑을 하련다―아버지와 나 ⋅ 여덟」)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 부과된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고통을 시시콜콜 상세하고 자세하게 그려내지는 않는다. 가족의 구성원들과 관련된 이런저런 체험에서 기억의 상상력이 불거지지만 얼마간은 감추고 눙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 그이다. 자신이 겪은 크고 작은 상처로 말미암아 시를 쓰지만 그가 그것을 미주알고주알 까발리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쓰리고 아린 마음이 도처에 묻어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투사하기보다는 그에 따른 자기 다짐을 주관적으로 진술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심미적인 성취를 담아내고 있는 다음의 시에 의해서도 두루 확인이 된다.
여기까지 왔다
뒷그림자를 밟을 여유도 없이
구두 밑창이 닳아 못이 쓰라림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땀덩이와
소금기 배인 육신을 이끌고
추적추적
바람의 길을 따라 내가 왔다
누가 막느냐
갈 길을 막으려느냐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시간의 배후에 쫓겨
옛 여인의 바랜 답신인 양
간직했던 꿈을 팽개칠 수 없어
나 이제 불망을 넘어섰다
바람아, 어디서 오느냐
어디로 가려느냐
가자
불망에서 불혹으로
희망을 버린 나이에서 유혹마저 없는 나이로
삶의 흰 깃발을 붙들고
바람의 길을 따라 헤쳐 나가자
―「바람의 길」 전문
이 시는 이제 막 30대를 넘기면서 느낀 심리를 바탕으로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가자/불망에서 불혹으로” 등의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막 “이제 불망을 넘어”선 나이에 겪은 복잡한 심리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직은 “꿈을 팽개칠 수 없”는 나이의 고통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이 이 시라는 얘기이다. 무엇보다 이 시에는 “땀덩이와/소금기 배인 육신을 이끌고/추적추적/바람의 길을 따라” 떠나는 시인의 쓰리고도 아린 마음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감성이 풍부한 나이인 만큼 그의 정서가 슬픔과 서러움을 토대로 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론 그가 자신의 정서를 이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의 현실에 겪는 체험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기억의 상상력을 통해 재생되고 있는 체험, 즉 유년시절에 겪은 체험 또한 아픔과 괴로움으로 받아들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유년시절의 체험 또한 여전히 아픔과 괴로움의 세월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때 이미 그가 “절망처럼” “희망이란 고통과 동의어라는 것을 알았”(「마지막 크리스마스―아버지와 나 ⋅ 넷」)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인 김응수는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거처를 옮겨가면서 자신의 유소년 시절을 보낸 바 있다. 그러한 그가 이 과정에 받았을 이런저런 심리적 억압은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자신의 시에서 친구의 말을 통해 그가 “어릴 적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는데/아이 둘 낳고서야/아버지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생각이 든다고”(「육교 위에서―아버지와 나 ⋅ 하나」) 진술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삶의 행로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대쪽 같아 쉽게 부러진” 그의 아버지가 “꽃 가꾸길 좋아하”(「꽃밭에서―아버지와 나 ⋅ 아홉」)는 매우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앞에서 말한 그의 삶의 행로는 의식주를 찾아 떠도는 신유목의 과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의 신유목의 과정이 파란으로 점철되는 모험이 아닐 수 없고 보면 나날의 삶에서 그가 느꼈을 고통은 충분히 추체험이 되고도 남는다. 초년의 그의 삶이 이처럼 간단없는 떠돌이로 영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히 아버지의 사업이 항산(恒産)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항산이 보장되지 못할 때 체험하게 되는 가난이 사람들에게 깊은 정신적 외상을 만든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정신적 외상이라고 했지만 가난과 함께 했던 유소년의 시절이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넉넉하게 회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시인 김응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무엇보다 너덜거리는 “궁핍의 기억”을 담고 있는 시 「낡은 외투에 관한 기억」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회색과 군청색이 교직으로 짜인/형이 입다 준 헐렁한 외투”를 통해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매우 잘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시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이러한 그리움은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가족사와 함께 해온 상실의식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때의 상실의식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에 초점이 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체험을 거듭해 되살려내는 것 자체가 부상실의식의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인용한 바 있는 〈아버지와 나〉라는 부재가 붙어 있는 연작시가 무엇보다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이들 연작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에는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딸, 아내 등 많은 가족들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삶은 이미 〈아버지와 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연작시를 통해 여러 차례 확인한 바 있다. 할머니의 삶은 그의 시 「이복년 약전」을 통해 엿볼 수 있고, 어머니의 삶은 그의 시 「어둔 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으며, 딸의 삶은 그의 시 「어둔 날 작은 내를 건너다」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밖에 아내에 대해서는 〈아내와 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연작시 8편을 통해 살펴볼 수 있거니와, 이들 시를 통해 정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가족을 바로 세우기 위한 고뇌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가(家)가 모여 국(國)을 이루는 것이 동양의 일반적인 국가관이다. 가족(家族)에 대한 애정과 국족(國族)에 대한 애정이 다르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국족을 구성하는 하위단위, 즉 민족을 구성하는 하위단위가 가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름 아닌 이러한 이유로 가족에 대한 걱정은 국족, 곧 민족에 대한 걱정을 낳기 마련이다. 민족의 실질적인 구성원은 민중이거니와, 다음의 시가 좀더 생생한 감동을 주는 것도 얼마간은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얼어붙은 보도를 미끄러지며 내려가면
연탄난로 모글모글 피어오르는 순댓국집
국물을 불며 소주를 나누어 마시면
시상만은 불길처럼 올랐다
포개지듯 드러누운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의 약국 옆
주차장에 세 들어 살던 형
셔터를 열면 세상은 그만큼 열렸다
약국아가씨를 좋아하던 형은
아픈 데도 없이 박카스를 사오고
손잡이에 놓인 돌멩이를 치우곤, 간혹 거렁뱅이가
셔터를 올려 놀라곤 했다
여주인은 순댓국 푸기에 바쁜데
주인 남자는 소주를 들이키며
금달래 이야기를 했지
낙성대 입구에 살던 조금 모자라던 처녀
이놈, 저놈이 꼬드켜 아랫도리를 벌리더니만
떼기를 너덧 차례, 오늘은
어미가 못 참겠다며 배꼽수술 해버리고 왔다고 하는구만
소주 한잔을 마시고
교차로 쪽 둔덕을 미끄러지며 기어오르면
연탄난로 모글모글 피어오르는 순댓국집
연탄재가 뿌려진 보도를 골라
허리 굽은 노인처럼 버스 정류장으로 오르면
시상만은 불길처럼 올랐다
―「봉천동 파랑새」전문
이 시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감 있는 풍경을 담고 있어 좀더 관심을 끈다. 이 시가 짐짓 생생한 감동을 주는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대체로 반추상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그의 시이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에 비해 훨씬 완벽한 구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타의 그의 시에 비해 묘사의 밀도가 훨씬 높은 것이 이 시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시가 정작 독자를 흡입하는 것은 묘사의 밀도도 밀도이지만 풍경에 담겨 있는 서민적인 삶 그 자체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 시에는 시인도 직접 참여하고 있는 봉천동의 가난한 삶이 아주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처럼 촘촘한 흥취를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이 시집에는 또 다른 여러 시도들이 담겨 있어 짐짓 주목이 된다. 낙도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의 낚시 체험이 드러나 있는, 「해족도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연작시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이런저런 경험을 담고 있는 시 「바트웬하우젠」「어둠에게 묻다」「다시 손을 씻다」등도 동일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자본주의 현실과 관련한 비판적 안목을 함유하고 있는 〈을숙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연작시도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데 별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의 이 시집과 관련해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또 하나의 모티프는 ‘개’의 이미지이다. ‘개’를 모티프로 하고 있는 시들도 돋보인다는 것인데, 「개가 살다」, 「개가 죽다」, 「눅눅한 꿈처럼 다가온 죽음」, 「개가 짖지 않는다」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들 시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내포까지 낱낱이 살피기에는 지면이나 시간 등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본고이다. 기억과 체험의 상상력을 매개로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가족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김응수 시집,『낡은 전동타자기에 대한 기억』, 고요아침, 2009. 0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