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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泉祠(매천사)
전남문화재 자료 제 37호 전남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 ▲매천 황현 자료 - 독립기념관
매천 황현은 조선초의 명재상인 황희 정승의 후예로, 1855년 12월 전라남도 광양군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과 어머니 풍천 노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매천사 뜰에 피어있는 매화 어려서부터 학문에 높은 소질을 보인 선생은 20대에 한양으로 올라가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유하며 학문적· 사상적으로 성장하였고 뛰어난 글솜씨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매천사 앞의 안내표지판 두차례에 걸친 과거 응시 끝에 34세 때인 1888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부패한 정치현실을 개탄하며 부패한 정치인을을 ‘귀신같은 나라의 정신나간 사람(鬼國狂人)’이라 질타하고 구례 만수동의 지리산 자락에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매천사 彰義門(창의문) 그후 개인적인 경험과 수집한 각종 문헌을 토대로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정치· 경제 ·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며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紀略)》,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을 남겼다.
▲一中 김충현 선생의 현판 글씨 - 彰義門(창의문)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김택영 등과 함께 중국망명을 시도하기도 한 선생은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며 〈문변삼수(聞變三首)〉를 짓고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순국한 민영환 등을 애도하며 〈오애시(五哀詩)〉를 짓는 등 기울어가는 국운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다. 한편 교육에도 관심을 보여 1908년에 근대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호양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一中 김충현 선생의 현판 글씨 - 成仁門(성인문) 成仁이란 말은 매천의 절명시에 나온다.
▲如初 김응현 선생의 현판 글씨 - 待月軒(대월헌)
▲ 待月軒(대월헌)
▲ 梅泉遺物館(매천유물관)과 그 앞에 서있는 매천사 묘정비. 사진을 뒤져보니 이걸 자세히 찍은게 없군요. 어쩌다가 이런 일이~~
▲石田 黃旭 선생의 현판 글씨 - 梅泉遺物館(매천유물관)
▲ 매천사 앞에서 답사 일행들 - 동인우리문화답사회 회원들
▲梅泉사 - 매천 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에 현판 글씨를 쓰면서 낙관을 하기가 외람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낙관이 없어 누구의 필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매천 선생의 신위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분향 재배하는 회원.
▲관리하시는 어르신께서 매천 선생의 절명시와 신위 영정 등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주십니다.
▲밖에 나와서도 설명은 계속됩니다. 절명시를 가지고 기 출판된 자료들의 오자를 일일이 지적해주셨습니다.
▲매천 황현의 친필 絶命詩(절명시) 국권이 피탈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한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을 느끼고 절명시 4수를 남긴 후 자결하였다. 선생은 기울어가는 종묘사직을 직시하며 투철한 비판정신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방대한 역사기록과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긴 구한말 재야지식인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絶命詩(절명시) 亂離滾到白頭年 (난리곤도백두년)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는데. 幾合捐生却未然 (기합연생각미연) 몇 번이고 죽어야 하나 그러하지 못하였네. 今日眞成無可奈 (금일진성무가내)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휘휘풍촉조창천) 밝고 밝은 저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妖氛晻翳帝星移 (요분엄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이 제성(帝星)을 가리며 옮겨가니 九闕沉沉晝漏遲 (구궐침침주루지)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물시계도 더디다. 詔勅從今無復有 (조칙종금무복유) 조칙은 이제부터 다시는 내리지 않아 琳琅一紙淚千絲 (임랑일지루천사) 임랑 종이 위에 주룩주룩 눈물을 흘린다.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조수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는데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우리 강산 이미 허물어졌구나. 秋鐙揜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기 어렵다. 曾無支厦半椽功 (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큰집 지탱할 서까래 반토막의 공도 없으나 只是成仁不是忠 (지시성인불시충) 단지 인(仁)을 이룰 뿐, 충(忠)은 아니로다. 止竟僅能追尹殺 (지경근능추윤살) 겨우 윤곡(尹穀)을 따를 수 있음에 그칠 뿐, 當時愧不躡陳東 (당시괴불섭진동) 때가 당하여 진동(陣東)을 따르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 尹穀 : 중국 송나라 진사로, 몽골 침입 때 가족이 모두 죽음. ⊙ 陳東 : 중국 송나라 선비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 ◈어르신게서 기존 출판물에 오자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에 위의 친필 절명시를 그대로 옮겨 번역하였습니다.
▲답사 도중에 담은 동백꽃입니다.
2006년 3월 26일 淨山/金柄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