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1962박정희2020독노농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과 변동과정에서 독립노농당 아나키즘 연구(2020)
<박정희(朴貞熙, 1962-), 정치국제학과 한국정치 전공, 중앙대, 2020, 02, 장훈. P.484,>
- 박정희(朴貞熙, 1962-),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한국정치 전공,
- 장훈(張勳, 1962-) 중앙대교수, 국제정치 전공, 지도교수.
*
우리 현대사에서 다양체라는 용어를 쓸 수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 실증적 사실들을 이야기하기에는 접근 통로가 거의 없었다. 논자 박정희는 오랜 연구과정에서 주도권이 아닌 탈주도권(anarchiste)의 이야기가 아제도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소수자로서 다양체가 자기 발현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랜 연구를 통해 소통하고 상호침투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바꾸어 보자자는 것이리라. 들뢰즈 표현으로 소수자(minorité)이지만, 어린백성, 사대부중, 인민대중의 자발성이 자치, 자주, 자유를 향해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그리고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논자에게 감사! (55WMC)
*
철학에서 달리 사유하기가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거의 15년 정도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달리 탐구하기가 있구나 하고 느낀 것은 역사학계가 푸꼬의 고고학적 방식을 받아들이지 30여년 되었다고 여기고, 문학은 2000년이 들어서면서 들뢰즈를 읽는 이들이 영향을 받는 것 같지만 부분으로서 경향으로 등장하지는 않은 것 같다. 가타리의 공산주의와 약간 달리 들뢰즈가 진솔한 아나키스트에 가까운데, - 프랑스에서는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사이에 친화성이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품으로 안티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 등보다 소수자 문학으로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아직은 들뢰즈의 심(深)층에 대한 이해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소은 박홍규의 플라톤에 관한 학설이 공론의 장에 아직 나오지 못하는 것과 닮았다. 플라톤주의가 아니라 플라톤의 진의를 파악하는 방식이 곧 심층에서 표면 위로 나올 것이다. 여기 우리나라의 아나키즘 운동에 대한 정리가 나온 것도 2020년 인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물론 이호룡의 학위논문(2000)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자료들에 대한 상호검증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주의를 각성시키는데, 소은은 한평생을 바친 것을 생각하면, 20여년의 과정의 노력이 앞으로 역사와 사상을 보는 시각을 열릴 것이리라. 박정희(1962-)의 논문이 역사와 철학, 또한 문학에서도 활력을 가져다주리라 믿는다. 그런데 누군가 영화계도 있다고 한다. 이준익(1959-) 감독의 아나키스트인 “박열(2017)”의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
서구 사상과 철학에서 이상하게도 앵글로색슨의 사고가 우리나라에 120여년을 지배하고 있다. 뭐, 서양 사상을 알고 우리에게 적용하자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대로 알고 우리와 접합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도 오랜 전통의 사유가 있어왔고 그리고 지금도 깊이 그리고 표면에도 흐르고 있다. 120년 상황에서 국한하여 이야기 하더라고 1894년 동학항쟁과 농민전쟁의 사상이 무엇이며 천도교로 변화를 겪는 과정도 생각해야 하며, 서울의 3.1운동보다 먼저 만주로 올라간 독립운동가들의 사유와 행동 방향등에 대해 진솔하게 공부할 때가 되었다. 만주에서 대종교가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면서 아나키즘과 접합점을 찾는 경우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역사 속에서, 우리의 자연과 터전 속에서 일어나는 창발과 경향이 외세에 의해 침잠되었던 이유도 탐구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경험적 자료와 더불어 의식적 자료들의 총체를 다룬다고 한다.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개별 학문들은 자기의 범위와 한계가 있다고들 한다. 이런 한계와 범위를 다루는 것은 개별 과학들,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등의 한계일 것이다. 개별과학들에서 인문학의 경우 경우에 사회학, 정치학, 정치경제학, 법률학, 문화학등은 자기 범주의 한계를 규정하기보다 현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사실들에 대한 서술과 설명을 하려고 할 것이다. 자연과학들이 범위와 한계 속에서 법칙이든 질서이든 어떤 체계와 질서를 정하고자 하면서, 어느 시대에나 공통으로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로 공시태로 다룬다. 이에 비해 인문과학들은 시대마다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 연구자의 자의적 판단일 수 있기에, 시대간의 과정과 방향 그리고 시대의 조류와 경향의 변화와 변전을 다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이 자기 완결성을 주장하는데 비해, 인문과학은 열려있다는 점에서 변화의 과정에 따른 동기와 이유들에 대해 다시 묻기도 하고, 새로이 구성하거나 구축하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철학은 한편으로 자연과학의 범위와 한계 설정에 원리와 법칙을 제공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과학을 다루는 방식을 철학이 원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철학이 수학과 논리학을 바탕으로 사고 양식을 전개해 왔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철학은 물리학을 바탕으로 사유와 운동이라는 차원을 새로운 수학, 즉 대수학을 동원하여 설명해 보려고 했고, 근대 또는 현대의 철학은 열역학과 전자기학의 도래로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었으며,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진화론은 사유 문에서 돌쩌귀를 뺀 상태라고 한다. 20세기 중반에 규소의 시대와 DNA의 시대는 무한 개념의 무한 확장과 더불어 문밖을 나서면 무한정한 길이 있다는 것을 예고하였다.
철학이 역사에 대해 발언한 것은 아마도 헤겔에서부터 라고 한다. 역사과 자유의 실현과정이라고 보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럼에도 철학은 언제나 인간에게 자유가 실행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왔으나, 헤겔에게서 사유의 실현과정과 역사의 실현과정을 같은 궤도에 놓고서 점점 인민조차도 자유를 실행할 수 있는 시대로 규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헤겔은 수학의 다른 도구인 대수학을 통한 미적분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1831년까지는 열역학과 전자기학은 도래하지 않았다. 사유의 방향을 새롭게 형성하려는 노력은 제반 과학의 발달과 같이 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맑스식으로 물질적 구조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하지 않더라도, 증기기관과 모터의 발달은 인간이 일에 매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세기를 지나면서 또한 21세기에 개인들이 사유할 수 있는 터전의 확장과 더불어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랜 관습과 전례의 상식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철학과 역사는 자유문제에 관한한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는, 과거의의 회귀 또는 전설처럼, 저 세상에서 온 영혼이 현 세상에서 신체에 매인 영혼으로 부자유하다는 것을 극복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사고를 외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오랜 과정의 변화를 구현하면서 현존을 이어간다. 오랜 과정의 연속성이 현존하는 인간의 불연속성과 대치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일으킨다. 철학은 이런 난제에 대해 크게 보아 두 가지 방식이 현존한다고 한다. 상층론과 심층론이다. 오랜 전승에 따른 상식은 여전히 상층론에 기대고 있다. 역사에서도 오래과정의 변화를 인정하지만, 상식처럼 역사가 반복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변화가 반복한다는 의미는 순환하여 동일방식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이 여전히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든 철학에서든, 과거의 변전이 현재에도 동일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 철학에서 시간의 불가역성을 이야기 한다. 역사에서도 되돌이킬 수 있는 순환성은 없다. 말하자면 동일반복은 없다. 단지 동일반복이란 수학적 공간에서 원의 순환에서 같은 점에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이런 순환성, 동일반복성이 그럴듯한 이야기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 이런 사고는 인류의 사유가 덜 발달하여, 상식을 기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또는 설득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시간적 사유는 불가역적인 것을 인정하는 데 비해, 공간적 사고는 순환하며, 또한 순환적이고 동일적인 사고의 완전성과 절대성에 대한, 미신같은 또는 신화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철학이 시간을 진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하는 철학은 현대의 산물이다. 시간은 환원불가능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로 되돌이킬 수 없다. 우주의 모든 역사도 불가역성이다. 지구의 45억년 역사 중에 어느 시기로 다시 되돌아갈 길 없고, 35억년 생명체의 역사에서 어느 생명체도 과거의 어느 시점의 생명체로 돌아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연연기란, 불가역성의 배열과 질서이기에 되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숙명을 의미한다. 이런 인연연기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현존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완화하거나 축소하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욕망) 있다. 미래 예측불가능성을, 인간이 가능한 능력으로 실재성으로 바꾸어 현실화시킬 수 있다고 여기면서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에서 인가는 숙명의 필연성과 달리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제에서 이제로 과정에 대한 재인식이, 이제에서 아제로 가능적 사태들에 대해 도식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능태이며, 확률적이다. 이런 가능태의 확률적 빈도 중의 하나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것이 운명의 개척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역사에서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 같지만, 별종의 노력으로 가능성의 첨점을 현실의 두터운 각질에서 균열을 내어 내밀었다는 것이다. 이런 첨점의 활동은 내밀다가 눌려서 지하로 흐르고 있지만, 그 첨점의 분출은 역사의 고비마다 있어왔다. 사람들이 역사의 과정으로서 역사적 사건들을 읽으면서 앞의 사실과 뒤의 사실이 연결되어 인과관계가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들과 사건들은 분출과 창발이 불연속적으로 죽 있어왔다는 것도 읽을 수 있다. 이 분출과 창발을 예전에서 소요니 반란이니 하면서 기존의 경향에 선함과 신성함과 정의임을 강조해 왔지만, 기나긴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왜곡과 우화로 점철되어 있는지도 20세기 후반에서야 학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어제에서 이제로, 이제에서 아제로, 과정들의 연속적이고 항구적 도식이 있을 수 있을까? 환원불가능성과 불가역성을 깨닫는 이들은 과정들이 연속적이라기보다 비연속적 단위들을 계속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적으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사건들의 연속성을 믿고 싶어하는 이들은 역사를 재구성하여 연관들 사이에 필연성 또는 합리성이 있다고 믿고, 그 믿는 이성이 완전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계속적 과정을 각각이 자기 이익과 자기 계열에서 재구성하고 있을 것인데, 이런 경우에는 과정의 실재 상태들을 총체적으로 다루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료에 대한 총체적 학문이듯이, 인문학으로 역사도 문학도 총체적 자료에 대한 다양한 책들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 책은 문학자들이 이야기 하듯이, 서술이 미완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열려져 있어서 무엇이 그려질지, 어떻게 그려질지는 그 노력하는 자들의 이야기들일 것이다. 철학도 역사도, 문학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하게 서술되고 전개될 수 있듯이, 역사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는 이야기도, 같잖은 이야기, 달리 말하기, 달리 생각하기가 펼쳐지고 있다.
상식에서 완전성을 믿듯이 양식에서는 완전성을 이원화하여 사유의 양면성을 내보였으나, 오랜 관습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다시 상식의 틀 위에 안주하였다. 고등양식의 시대가 도래하여, 사유의 양면성을 넘어서 다원화의 가치치기의 여러 길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사유가 열린 문밖으로 나가면서 펼쳐지는 다양한 세분화의 길을 제시하면서, 인간은 아니, 생명도, 우주도 다양체이다. 부분을 절단하여 각 학문이 자기 완결성이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자기 학문을 해석하는 방식일 뿐이다.
다시 총체적 자료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소요, 반란, 혼란, 무질서 등을 나열하는 사고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필요가 있다. 우선 프랑스 대혁명에서 자꼬방들이 사유의 배경에는 스토아와 루소가 있다. 똑같은 개념, 빠시옹(passion)이 그 이전 시대에는 수동과 수난이었지만, 자발성의 이해에서 정열이라는 능동적 활동으로 바뀐다. 왜 이 시대에 와서야 가능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민의 활동이 요즘에 와서 최종심급이라 불린다. 인민의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은 공화정의 덕목이다. 누가 이를 비난하였는가?
세 부류가 있다. 상층론자들은 상층이 존재이고 심층은 비존재로 무화시켰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비존재를 존재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했다. 이런 철학적 관점은 회의주의를 낳았고, 회의주의 극복이 철학사라고 앵글로 색슨을 가르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완전자로서 신이 있고 신은 선한데 심층의 저항은 악하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소위말해서 허무주의의 극복을 주장하는 부류들이 있다. 다른 한편 과학의 발달로 완전한 지식과 이성이 먼저 있고, 물질의 세계를 조정, 조작한다. 자신들은 진리이고 저항하는 것들은 비진리이다. 법칙에 어긋나는 이들을 감옥으로 또는 정신병원으로라는 사고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이런 세 부류의 광기가 19세기에 국가주의를 20세기 자본이라는 제국에 암묵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
서양의 근대화에서 저항과 항거에 대해 현실적으로 활동은 프랑스 혁명이후의 평등을 주장했던 바뵈프로부터 블랑, 블랑키로 이어지는 지하세력을 주장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혁명에서 신부로 혁명에 가담했던 루(Jacques Roux)와 같은 이들이 왕권의 권력과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작업에서 아나키스트라는 칭호를 사후에 얻었듯이, 루소 이래로 앞 시대의 용어든 개념이든 달리 생각하는 사상가들이 19세기에 등장한다. 재산의 축적이 도둑질이라고 했던 프루동이 있다. 저항, 항거, 항쟁, 혁명을 인민의 덕목이다. 동양에서는 당연히 음과양, 공과색 건과곤, 용과호의 교대로서 생각했기에 인민에게 비존재, 허무, 악덕으로 몰지 않았고, 유가의 성격상, 인민의 지지를 받지 않는 정권을 교체, 왕조교체를 이야기하면서, 인민이 하늘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양에서는 변역과 혁명에서 평천하를 이야기 한다. 서양은 상층론이 2천5백년을 지배하면서, 인민을 비하시켰고, 그 비하시킨 사상적 사고가 앵글로 색슨의 절대개념과 최종 판단을 통해 우리나라에 퍼져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고의 형식과 틀에서가 아니라 심층에서 솟아나는 방향의 사유의 길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심층에서 상층으로 방향을 간략하게 보면, 아나키스트 | 공산주의 || 사회주의의 이중성, 좌파 사회주의 사민주의 || 상품 자본주의 | 자본제국주의 등이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아나키스트 연구는 터전과 시기(카이로스)를 달리하기에, 동학군이 일본군에게 패배한 이래로 앵글로 색슨의 사고가 들어오기 시작하여 120년의 사고 틀의 내용을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내면에서 연속성이다. 그 연속성은 인간이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불연속성는 사회의 표면에서 힘있는 자, 이긴 자, 역사를 서술한 자의 것으로 여기는데 이는 개별학문의 부분처럼 한계와 범위가 정해져 있다. 반성적 사고 한계와 범위를 부수어서 확장과 창안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불가역성, 어느 인간도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다시 돌아온 예가 없다. 나아가 생명체도 동일하게 다시 돌아온 예는 없다. 역사도 마찬가지도 동일하게 돌아오지 않는다. 상층론자의 사고가 착가에 그치지 않고 공상 또는 망상에 빠져서 인민을 호도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본다. 실재성은 여전히 심층에서 흐르고 표면으로 기존의 각질에 균열을 내고 용출선을 솟아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같잖은 이야기, 달리 사유하기,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 ~ ~ ! 11자를 음송한다. (55RNA)
*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논의 상으로 아나키즘은 인간 본성의 실현과 세계 평화를 지향하며, 다수의 민중이지만 소수자로서 세분화 계열로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터전을 생각하면 아나키스트는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을 추동하는 토대이다.
일본 제국에 저항은 당시의 당면과제일 것이고 적의 암살과 적의 본진 폭파는 저항을 넘어서 봉기의 수준이였다. 아나키스트가 당면과제로 민족해방과 연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주의(공화파)와 연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나키스트의 본래적 숙명을 생각하면, 제국주의에 대해 저항, 봉기, 봉기 항쟁을 함께 할 수 있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와 연대와 연합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연대와 연합을 떠나서 민족주의와 계속적인 성향과 경향을 유지한다면, 아나키스트의 본래적 모습인 세계시민주의자(le humaintaire, cosmopolitan)들과도 그리고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들과 거리를 두거나 척을 진다는 것은 불합리에 빠질 것이다. - 프랑스 혁명사상가들은 인본주의자(le humaniste)와 상품자유주의자(le liberal, liberaliste)라는 용어를 경멸적으로 쓴다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
권력, 권위, 권한(지식)에 타협하는 것은 그 틀에 복속하거나 포로가 될 위험이 있다. 시대의 당면과제를 넘어서 우리 남북이 나가야 할 방향과 세계사의 경향에 조금더 폭넓은 시각과 새로운 세상 건설이라는 사명을 고려한다면, 아나키스트는 좌파와 협려과 연대를 떠날 수 없다. 아나키스트의 토대에는 프랑스혁명에 연관이 있는데, 혁명가들은 형상형이상학에 전복을 꾀하면서 스토아 사상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 스토아 사상은, 불교의 대승불교처럼 무소유로서도 화엄세상을 이룰 수 있듯이, 인류의 평등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행동하는 사상이다. 인식이 먼저가 아니라 행동이 먼저라는 의미에서 혁명의 불꽃으로 세계를 밝히려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55SLI)
***
제1장 서론 1.
제1절 문제제기와 연구의 목적 1
제2절 연구범위와 논문의 구성 19.
제2장 이론적 논의와 연구방법 41
제1절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기존 연구 검토 43
제2절 아나키즘 정파 독립노농당의 기존 연구 검토 49
제3절 연구방법: 역사제도주의 접근과 연구 분석틀 53
제3장 임시정부 연립정파의 변천과 이념성향 77
제1절 한국독립당과 보수민족주의 78
제2절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ㆍ독립노농당과 아나키즘 85
제3절 조선민족혁명당ㆍ인민공화당과 급진민족주의 89
제4절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민족공산주의 94
제5절 신한민주당ㆍ신진당과 보수민족주의 97
제4장 한국 아나키즘과 독립노농당의 정당정치: 자율정부주의 104
제1절 아나키즘의 재조명과 창조적 변용 105
제2절 한국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129
제3절 독립노농당과 아나키즘 정당정치 143
제4절 독립노농당의 국가건설 구상 164
제5절 독립노농당의 자율정부주의 평가와 의미 178
제5장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과 헌법 특성 변화:
아나키즘 정파의 중재ㆍ조정 역할과 연립정부 성립180
제1절 한국 민주공화정의 기원과 임시정부 183
제2절 민주공화정의 생성ㆍ수립 시기: 제정ㆍ1차 개헌 187
제3절 민주공화정의 지속ㆍ분열 시기: 제2ㆍ3차 개헌 202
제4절 민주공화정의 진화ㆍ연대 시기: 제4ㆍ5차 개헌 215
제5절 연립정부 구성: 아나키즘 정파의 중재ㆍ조정 역할 233
제6절 연립정부 운영: 아나키즘 정파의 중재ㆍ조정안 입법 발의 246
제7절 아나키즘 정파의 1944년 헌법 대표 발의와 임시정부 옹호 265
제8절 1944년ㆍ1948년ㆍ1987년 헌법의 연계와 법통성 268
제9절 분석결과: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 과정과 아나키즘의 역할 272
제6장 해방정국 민주공화정의 변동과 국가 건설 연대 특성 변화:
아나키즘 정파의 노선투쟁 및 연대ㆍ견제 역할과 연립정부 와해280
제1절 민주공화정의 존속ㆍ자주시기 - 신탁통치 결정과 자주투쟁구도:
반탁ㆍ자주투쟁과 미군정 압력 요인 - 정파연립 갈등 283
제2절 민주공화정의 변형ㆍ균열시기 - 미소공위 전개와 권력투쟁구도:
우파통합 추진 우경화 요인-정파연립 균열 311
제3절 민주공화정의 표류ㆍ와해 시기 - 유엔의 총선결정과 이념투쟁구도:
평양회담 참석 좌편향 요인 – 정파연립 와해 386
제4절 분석결과: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변동과정과 아나키즘의 역할 418
제7장 결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정과 독립노농당 아나키즘의 역사적ㆍ헌정사적 의의 428
참고문헌 445
국문초록 476
Abstract 479.
***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과 변동과정에서 독립노농당 아나키즘 연구(2020)
제1장 서론 1.
제1절 문제제기와 연구의 목적 1.
초기 외교독립론의 지배적 우위에서 출발했던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하여 무장투쟁론을 반영하였다. 또한 1942년 10월 아나카즘 세력의 참여를 마지막으로 민족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진영이 자주독립과 국가건설 방략을 두고 경합하는 이념 정당의 정파연립 체제를 구축하였다. 즉 중경 임시정부시기에는 각 이념을 대표하는 연립정부(coalition, government)를 성립시켜 항일연합전선을 완성했다. (1)
모스크바 삼상회의 합의 문안은 ‘신탁통치’ 실시와 ‘임시한국민주정부(Provisional Korea Democratic Government)’ 수립이라는 상충되는 논리를 단순 병렬시켰다. 이러한 내용을 우익진영 및 아나키즘 진영에서는 신탁통치 부분에 치중하여 이해했고, 좌익 진영에서는 임시한국민주정부 수립에 초점을 두어 해석했다. (2-3)
더구나 임시한국민주정부 수립에 대해 미국과 소련이 합의할 가능성도 높지 않았다. 중국 대륙에 국공 내전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북부는 공산세력의 후방병참기지 내재 배후로서 사활이 걸린 전략의 요충지였다. (5)
해방정국의 국가건설 노선투쟁에서도 아나키즘 진영의 활동은 적극적이었다. ..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아나키즘 진영이, 국가건설을 위한 자주화 노선을 전개하며 일관되게 투쟁하였다. (7)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 민주공화정 30년사에 대한 전 과정을 역사제도주의(historical institutionalism) 접근으로 해석할 때, 보다 체계적인 분석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임시정부는 근대적 인민국가의 정치체제로서 제도적 기원과 그 진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역사제도주의 접근에 더하여 이 연구의 핵심 기제인 임시정부의 내부 갈등과 모순에 의한 제도 변화를 규명해 내기 위해, 스트렉(Wolfgang Streeck, 1946-)과 씰렌(Kathleen Thelen, 1956-)이 개발한 존속변형(gradual transformation) 모형을 활용한다. (13)
제2절 연구범위와 논문의 구성 19.
본 연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아나키즘 정파 독립노농당과, 그 전신인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이하, 조선무총)에 관한 연구이다. (19)
본 연구는 독립운동 시기부터 해방정국 제헌의회 성립 시까지의 정치과정으 시계열로 구성한다. (21)
본 연구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될 것이다. 제1장은 문제제기, 연구목적, 연구 범위와 방법 .. 제2장은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기존 연구 경향과 한계를 검토하고 .. 제3장에서는 임시정부 내 연립정파의 변천과정과 이념 성향에 대해 고찰한다. / 제4장에서는 먼저 아나키즘의 세계사적 이론의 흐름과 기원을 정리하고 아나키즘의 출현 조건과 배경, 쇠퇴의 이유 등을 검토한다. (24)
제5장은 우선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독립운동 전개 과정과 여섯 차례 헌법 변화를 생성시기(제정, 1차개헌), 지속시기(제2,3차 개헌), 진화시기(제4,5차 개헌)로 나누어 군주정대신 민주공화정이 수립된 의미를 파악한다. (25)
6장에서는 해방정국 국가건설 연대투쟁의 노선 전개에서는, 임시정부의 자주투쟁, 권력투쟁, 이념투쟁의 정당경쟁구도 내 갈등과 균열 및 대립과정을 살필 것이다. (25-26)
1.2.3 연구 분석자료 26
양소전(楊昭全), 關內地區朝鮮人反日獨立運動資料彙編(1919-1945年)(上下冊)은 신채호가 간행한 “천고”의 내용과 임시정부가 당파연합에 성공한 1944년 4월 24일의 36차 의회 선언을 수록했다. (31)
쉬뜨코프 일기(1946-1948)(2004 발간) 소련 군정의 핵심인물이 기록한 일기이다. 북한 정권의 수립에서 소군정의 역할과 남한 좌익 세력과의 관계를 파악하였다. (33)
유림이 1947년 11월 29일 「유관순을 위한 제문」을 지어 독립노농당 차원에서 추도하였다. 이를 통해 원산지역 아나키즘운동과 유림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원산 아나키즘 노동운동의 중심인물인 유우석(柳遇錫)은 해방 후 독립노농당 상무부장으로 활동했는데 그가 유관순의 친오빠였다. (34-35)
이강훈(李康勳, 1903-2003)의 민족해방운동과 나(1994)(제삼기획)에서는 독립운동 세려긔 통합운동 과정을 살폈다. 유자명(柳子明, 1894-1985)의 [나의 회억(1984)], 유자명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 1999)을 통해, 아나키즘 정파와 좌파 세력의 연대활동을 파악했다. 최갑용(崔甲龍, 1904-1998)의 어느 혁명가의 일생(1995)에, 해방정국 북한 지역 아나키스트들의 월남을 권유하는 유림에 관한 서술이 있다. 소련 군정과 공산 정권에 대한 그의 상황인식과 정세판단을 확인했다. (37)
이규창(李圭昌, 1913-2005)의 운명의 여진(보련각, 1992)은 중국 내 아나키즘 진영의 투쟁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서 심각하게 발생했던 분란의 원인을 거론한 기록이다. 아나키스트로서 역사의식과 책임감에 의한 증언이다. 정화암(鄭華岩, 1896-1981)은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자유문고, 1982)에서 아나키스트의 현실 참여와 정당 결성의도를 피력하였다. 이정규(李丁奎, 1897-1984), 우관문존(삼화인쇄, 1974)를 통해 해방직후 아나키즘 단체의 조직과정을 설명했다. (37)
다음으로 정치지도자 ... 김구(金九, 1876-1949)의 백범일지(1948, 3판), .. 조경한(趙擎韓, 1900-1993)의 백강 회고록(白岡回顧錄, 1979)(1985, 3판) ... 장건상(張建相, 1882-1974) 등의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민음사, 1988) ..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심산유고(탐구당, 1973), .. 이은숙(李恩淑, 이명李榮求, 1889-1979)의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서간도 시종기(인물연구소, 1981), ...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의 우등불(삼육출판사, 1978 중판), .. 김자동(金滋東, 1928-)의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푸른역사 2018), .. 김준엽(金俊燁, 1920-2011)의 장정(5권, 나남, 1988), ... 장준하(張俊河, 1918-1975)의 돌베게(1970), .. 송남헌(宋南憲, 1914-2001)의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 한 길,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하여(2000, 한울), ... 김준연(金俊淵, 1895-1971)의 독립노선, 1947, .. 님웨일즈, 김산(金山, 1905-1938)의 아리랑(1937년 구술, 1941출판), .. 유원식(柳原植, 1914-1987)의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인물연구소, 1987). (37-39)
제2장 이론적 논의와 연구방법 41
본연구의 이론적 논의는 세 가지 상이한 검토를 필요로 하다. .. 첫째,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과 변동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기존 논으들을 검토한다. ../ 둘째 아나키즘 이념 논리를 자율정부주의로 재정의하고 이를 현실에 구현하려 했던 독립노농당을 역사학적으로 고찰한 선생연구의 검토이다. .. / 바쿠닌, 푸르동, 크로포트킨 등 전통적인 아나키스들은 국가를 억압의 대상으로 인식하여 정치운동보다 사회운동을 선호하였다. ... (41) /셋째는 본 연구의 분석 방법론의 역사제도주의의 이론의 검토이다. (42)
역사제도주의 이론의 진화를 보여준 스트렉과 씰렌(Streeck & Thelen, 2005)은 내부 원인에 의한 제도 변화를 모형화하고 있다. (43)
제1절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기존 연구 검토43
이 연구가 출발점으로 삼는 민주공화정은 마키아벨리 이래로 다양한 사상가들이 발전시켜온 개념에 따른다. 민주정과 공화정이 결합된 혼합정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인민 중심의 혼합정을 공화국의 바람직한 권력체계로 판단했다. .. 그가 구상한 것은 각 계급 계층의 조화로운 권력분점 아래, 민주주의의 극단인 중우화를 방지하면서 인민이 중심인 국가의 수림이었다. (43)
우리 헌법에는 헌법제정권력도 바꿀 수 없는 세 가지 기본 원리가 있다. .. 첫째 ‘민주주의 원리’ .. 둘째 ‘법치국가 원리’ ... 셋째 ‘사회(복지)국가 원리’ .. (44-45)
제2절 아나키즘 정파 독립노농당의 기존 연구 검토 49
아나키스트들이 합법 공간에서 세계 최초로 정당정치를 목표로 두고 결성한 독립노농당은, 아나키즘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숙고의 결정이었다. (49)
1929년 11월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유림이 1942년 10월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이하 조선무총)으로 개칭하였다. 이 조직이 1946년 7월 독립노농당으로 확대개편된 것이다. (49)
연구자들로서 김희곤(2001), 김성국(2001, 2005), 이호룡(2003, 2005) 그 외에 유림의 외아들인 유원식(1971)과 언론인 김재명(1986)이 유림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시술하여 약전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글을 남겼다. (50-51)
김영천(2005, 2006, 2007, 2008, 2010, 2011, 2012, 2014, 2017)에 의해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독립노농당에 대한 연구가 질과 양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51)
박정희(2015) (52)
제3절 연구방법: 역사제도주의 접근과 연구 분석틀53
본 연구는 역사제도주의(historical institutionalism) 분석방법론이 여타 이론과 다른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검토한다. (53)
형태주의, 다원주의, 합리적 선택이론을 비판하는 역사제도주의는 구조와 행위의 중간측면인 중범위이론(midrange theory)의 영역에 있으며, 행위와 구조의 매개적 역할로써 상호작용을 검토한다. (54)
이러한 역사제도주의는 신제도주의(new instiutionalism)의 한 분파로서, 합리적 선택 제도주의, 사회과학적 제도주의 등과 함께 존재한다(Hall & Tayler. 1996).(55)
또한 제도의 지속성에 대해서는 경로의존성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강조한다(Hall & Tayler 1996; Ikenberry 1988). (55)
이러한 역사제도주의가 이해하는 제도의 형성, 유지, 변화의 핵심특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 선호 형성의 문제로서 선호 행위가 외생적(exogenous)인 것이 아니라, 제도 맥락 속에서 내생적(endogeneity)으로 형성된다고 본다(Krasner 1988). (55-56)
둘째, 권력 불균형의 문제로서 권력 배분의 불공정성에 관심을 갖는다.
셋째, 경로 의존성의 문제로서 한번 확립된 제도는 역사적 발전 경로에 따라 지속됨을 강조하고 아울러 의도치 않은 결과를 중시한다(Hall & Tayler. 1996; Krasner 1988).
넷째, 외부 충격에 의한 급격한 제도 변화로서 제도 기원의 문제이다. (56)
다섯째, 행위와 구조 맥락의 상호작용이다. (57)
여섯째, 제도의 분석에서 이념을 통합적으로 함께 파악하는 측면이다(Hall & Tayler. 1996). (57)
제3장 임시정부 연립정파의 변천과 이념성향 77
중경에서 환국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후신으로 비상정치회의와 비상국민회의, 국민의화, 대한 국민회로 개편을 거듭하였다. 수차례 개편을 거치는 동안 임시 의정원 참여 연립 5개 정당은 2개 정당으로만 축소되었다. (77)
제1절 한국독립당과 보수민족주의78
한국독립당은 이동녕, 이시영, 김구, 조완구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1930년 상해 임시정부 판공처에서 조직하였다. ... 결국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 역할을 인정하지 않은 한국 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민족주의 계열 정당이 1940년 5월 9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78)
<표 5> 통합 한국독립단 창당 구성원(79)
중요인물들: 김구, 송병조, 김봉준, 홍진,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이청천, 유동열 조소앙, 조시원, 안훈, 엄항섭, 차리석, 김학규, 이복원, 양묵, 이동녕, 공진원, 김의환. (79)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1947년 1월1일 현재 91만 7천 3백명에 달했다. 일정정도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84)
제2절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ㆍ독립노농당과 아나키즘85
중경에서 환국한 유림은 자신이 이끌던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을 중심으로 1946년 7월 7일 아나키즘 정당인 독립노농당을 창당했다. (85) [1961년 5.16쿠데타로 강제 해산되었다.]
미군정에서 1946년 5월 29일 독립노농당의 당원 수를 1십만명으로 파악했고, 7월 30일에는 50만 7천명이며, 창당 5개월 뒤인 1947년 1월 1일 에는 79만 9천명의 당원 수가 확보된 것으로 기술하였다. (86)
일제 치하 최초이자 최후의 아나키스트 전국 조직이었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31년 7월 원산지역 노동운동 재건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전모가 드러났다. 결국 유림을 비롯한 주모자들이 모두 검거되었다. 류림은 1937년 10월 만기 출소한 뒤, 만주로 탈출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87)
1946년 10월 소요사태에서 보여준 독립노농당의 신속한 조사와 체계적인 활동, 대안 제시는 유림과 아나키즘 진영의 국가 건설 방략 중 일부였다. (89)
제3절 조선민족혁명당ㆍ인민공화당과 급진민족주의89
다음은 1944년 3월 15일 현재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심인물들이다.
<표 6> 조선민족혁명당 주요 구성원
주석: 김규식. 총서기: 김약산(김원봉). 상무위원: 김인철, 손두환, 신영삼, 성현원(성주식). 집행위원: 김철남, 이인홍, 윤징우, 신기언, 윤기섭, 왕통, 조빈, 장건상, 김상덕, 주세민, 이해명, 김붕준, 강창시. (91)
조선민족혁명당의 이념적 지형은 항일운동시기와 해방정국에서 중도좌익의 급진민족주의로 규정된다. .. 인민공화당으로 개편한 해방정국에서 좌익의 연대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하여, 민족주의 좌파로서 당의 정체성이 파악된다. (94)
제4절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민족공산주의94
1935년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이 김성숙에 의해 조직되었다.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앞서 민족혁명을 중시한 그의 노선에 따라,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이 조직은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되었다. (94)
조선민족해방동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립 5개 정파의 일원으로서 공산주의 정당으로 알려졌으나, 환국 뒤의 활동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에 미치지 못했다. 조선민족혁명당처럼 이 당도 국내 정치기반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97)
제5절 신한민주당ㆍ신진당과 보수민족주의97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돌립당과 제1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탈당하여,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을 모체로 1945년 2월 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광복군 참모총장 유동열(柳東說), 국무위원 김붕준(金朋濬), 의정원 의장 홍진(洪震) 등이 주석단이었다. (97-98)
제4장 한국 아나키즘과 독립노농당의 정당정치: 자율정부주의 104
일제 시기 한국의 아니키스트들은 일본, 중국, 국내 등 각 지역에서 아나키즘 이상사회 구현을 위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소비에트 체제의 정착으로 공산주의의 현실 구현 가능성이 확인되자,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점차 공산주의로 전향하였다. (104)
제1절 아나키즘의 재조명과 창조적 변용 105
고드윈(Godwin, 1756-1836), 오웬(Owen, 1771-1858), 생시몽(Saint-Simon, 1760-1825), 푸리에(Fourier, 1772-1837) 등 서구의 고전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바쿠닌(Bakunin, 1814-1876), 프루동(Proudhon, 1809-1865), 크로포트킨(Kropotkin, 1842-1921) 등은 아나키즘의 영역으로 계승시켰다. 그러나 이들을 비롯한 적지 않은 아나키스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의 주도권은 맑시즘에 있었다. (106)
아나키즘(anarchism)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ἀν(an, 無)와 ἀρχός(지배자, 통치자)에서 유래했다.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이라는 뜻이다. (107)
- [철학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ἄναρχος (형) without head or chief – 아르코스(ἀρχός) (명사) 지도자, 통치자, 왕자, 왕이다. 그런데 어원은 아르케(ἀρχή)는 1. 기원, 시작, 근원 2. 권위, 주권, 권력의 뜻이다. 아르케는 -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Στην αρχή ήταν ο Λόγος 또는 Eν αρχή ην ο Λόγος)에서처럼 시작 기원도 있다. - 형이상학적으로 또는 형이심학적으로 논쟁거리이다. 상층을 단순히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아르케는 자연의 자기 생성일 수 있다. 즉 인간본성도 자연에서 자기 생성으로 자율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라면, 아나키즘은 신이나 이데아가 아르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아나키즘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최고 권력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합의와 연합에 의해 구성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그래야 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왕권과 교권을 제거하면 인민의 일반의지 솟아난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 그러나 이 두 권력을 제거하고 나니 인식의 권력(지성이든 이성이든) 다시 상층을 구성하거나 구축하려는 절대관념이 등장한다. 이런 인식에서 절대자의 등장을 벩송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
아나키즘은 일반적으로 절대 자유를 추구한 개인적 아나키즘과,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사회변혁 운동으로 체제 구조를 바꾸려는 사회적 아나키즘으로 구분된다. 전자의 경우에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 터커(Tucker, 1854–1939), 소로우(Thoreau, 1817–1862)가 있고, 후자에는 고드윈,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이 대표적 인물이다. (108)
이제 구체적으로 아나키즘 개념의 정의를 위해, ... 첫째 행위자 수준의 역사적 담론차원, 둘째 사회적 수준의 정치ㆍ사회운동적 차원, 셋째 정치적 수준의 정당차원 등이다. (109)
1) 행위자 수준: 역사적 담론
고드윈은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의 반론으로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일반 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탐구(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 and its Influence on General Virtue and Happiness 1793를 쓰고, 혁명의 이념을 찬미하였다. (110)
2) 사회적 수준: 정치ㆍ사회 운동
사회적 수준의ㆍ정치 사회운동 차원에서, 아나키즘은 강제 권력을 반대하는 사회변혁의 이념으로 규정된다. 변혁운동 방법론으로서는 아나코 코뮤니즘, 아나코생디칼리즘 등으로 전개된다. (111)
린다우어로 등으로 대표되는 아나코생디칼리슴은 ... (111)
[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 1870-1918). 유태계 독일인으로 20세기 초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삶을 살았던 뛰어난 문예비평가, 사상가, 평화운동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로 분류한다]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 1853-1932) / 마흐노(Nestor Ivanovitch Makhno, 1888-1934) (112)
3) 정치적 수준: 정당정치
1936년 11월 스페인 인민전선정부에 4명의 아나키스트가 입각한 경우도, 아나키즘 정당정치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113)
4) 아나키즘의 기원
아나키즘은 정치권력의 억압만이 아니라,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 착취 구조를 비판하고 정의로운 평등을 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해방을 추구했다. 프랑스 대혁명(1789), 바쿠닌과 맑스가 대립했던 제1인터네셔널(1864), 자유, 평등, 연대로 상징되는 파리꼬뮨(1871), 러시아 혁명시기 마흐노의 농민운동(1917-1918), 스페인 내전(1936)... (115)
고드윈(Godwin, 1756-1836), 오웬(Owen, 1771-1858), 생시몽(Saint-Simon, 1760-1825), 푸리에(Fourier, 1772-1837) .. [프랑스 혁명에서 자꼬방파, 평등주의자 바베프 등, 그리고 바베프를 잇는 혁명가들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파리꼬뮨을 볼셰비키 독재에 대응된 자율, 자치의 실천 모델로 보고 있다.
<표8>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등장 배경과 이념 성향 비교
[바쿠닌과 맑스의 비교인데, 여러 비교 중에서 특징적인 것, 변혁운동의 계급에서 농민중심(바) 대 노동자 중심(맑스), 파리코뮨 실패 원인에서 민중 자율성지속 및 고조 실패(바쿠) 대 혁명을 지도할 전위당 부재,]
출처: 폴 슈마커(Paul Schumaker, 1946-)의 철학적 가정과 정치적 원리, 발췌 재구성. (123)
일본 아나키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행덕추수, 1871-1911), 오스기 사카에(大杉 栄, 대삼영, 1885-1923)
중국 아나키즘: 우즈후이/오치휘(吳稚暉, 1865-1953), 리스쩡/이석증(李石曾, 1881-1973) / 중국 아나키즘 잡지 천의보(天義報)를 중심으로 류스페이(劉師培, 유사배, 1884-1919) 장지(張繼, 장계, ?-?) (124-125)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1921년 11월 일본의 도쿄에서 흑도회를 결성하였다. .. 우선 민족해방운동의 관점이었으며, 식민지 모순이라는 절대적 상황이 전제되었기에, 민족중의와 친연성이 있었다. (125)
1929년 11월에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 개최준비와 그 과정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 그 조직의 명칭이 변경된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을 거쳐 해방후 동 연맹이 확대 개편된 독립노동당으로 이어진다. (126)
[1921년에서 1929년까지 작은 조직들이 여러 방식으로 결성되었다. 이 무정부주의자들은 일본의 정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이었을 것이다. ]
제2절 한국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129
1910년대 중국과 일본을 통해 소개된 아나키즘의 조직화는 1920년4월 11일 서울에서 최초의 노동조합으로 파악되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부터였다.고순흠(高順欽, 1893-1977), 김약수(金若水, 1890-1964), 장덕수(張德秀, 1894-1941), 차금봉(車今奉, 1898-1929) 등이 활동했고 기관지 공제(共濟)를 발행했다. (129)
1921년 11월 29일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박열(朴烈, 1902-1974), 김약수, 조봉암(曺奉岩, 1899-1959), 서상일(徐相日, 1887-1962) 등에 의해 최초의 재일본 한구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도회가 창립되었다. 기관지 흑도를 토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아나키즘 직접행동론을 전개했지만, 이 단체에는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도 참여했다. .. 풍뢰회 ... 흑우회 ... 북성회 ... (129)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 신채호(申采浩, 1880-1936)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글은 유자명(柳子明, 1894-1985)의 소개에 의해 김원봉이 주도하는 의열단의 선언문으로 쓰였다. (130)
1923년 1월 서울에서 흑로회가 결성되었는데, 국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아나키스트 단체이다. .. 흑로회는 이윤희(李允熙, 미상1901?-1950), 이강하(李康夏, 1901-1942), 김중한(金重漢, 1902-미상) 등이 중심인물이다. (131)
1925년 9월 29일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하종진(河鍾璡), 서학이(徐學伊), 서동성(徐東星), 정명준(鄭命俊) 등이 아나키즘 신사회 건설을 위해 진우연맹을 조직했다. (131) -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하종진(河鍾璡), 서학이(徐學伊), 서동성(徐東星), 정명준(鄭命俊)]
진우동맹은 1926년 7월경 일제에 검거되어 조직의 전모가 밝혀지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132)
1927년 12월 22일 평양에서 관서지방 아나키스트들의 연합체로서 설립된 관거동우회가 ... 얼마지나지 않아 관서흑우회로 개칭햇다. 최갑용(崔甲龍), 이홍근(李弘根), 이주성(李周聖), 승도경(承道京), 김희붕(金熙鵬), 한명호(韓明鎬), 이효묵(李孝黙), 최복선(崔福善) 등이 창립회원... 1929년 5월 21일 평양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133) - [최갑용(崔甲龍), 이홍근(李弘根), 이주성(李周聖), 승도경(承道京), 김희붕(金熙鵬), 한명호(韓明鎬), 이효묵(李孝黙), 최복선(崔福善)]
재만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1929년 7월 북만주 해림에서 조직되었는데, 김종진(金宗鎭), 이을규(李乙奎), 이달(李達), 이강훈(李康勳), 김야운(金野雲), 엄형순(嚴亨淳), 이준근(李俊根) 등이 연맹원이었다. (135) - [김종진(金宗鎭), 이을규(李乙奎), 이달(李達), 이강훈(李康勳), 김야운(金野雲), 엄형순(嚴亨淳), 이준근(李俊根)]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30년 1월 24일 김좌진, 1931년 7월 김야운과 이준근, 8월 26일 김종진이 각각 암살당하고, 1930년 9월에 이을규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김좌진의 피살 이후 아나키스트들과 대종교인 사이에 잠복해 있던 갈등이 불거져, 1931년 여름 한족 총연합회가 해체되었다. (136)
1939년 9월 22일 민족유일대당 건설의 명분에 따라 좌우익 연합전선이 전국연합진전협회로 결성되었다. 이 때 참여 정당은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단이었다. 그런데 곧 조선민족혁명당이 탈퇴하여 좌우익 연합전선의 의미는 약화 .. (137)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10월 중경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하여 조직되었다. 대장 나월환(羅月煥), 부대장 김동수(金東洙), 정치조장 이하유(李何有, 李鍾鳳) 군사조장 박기성, 선전조장 이해평이었다. (139)
그런데 나월환과 이하유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며 1942년 3월 1일 이하유의 입장에 섰던 박동운(朴東雲)에 의해 나월환이 피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4월 22일 광복군이 개편되어 기존의 광복군 제1지대, 제2지대, 제5지대가 광복군 제2지대로 편성되었다. (140)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유림(柳林)은 의정원에서 대정부 질문을 통해, 더 이상의 사건 확대를 막고 혁명 인재들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자고 했다. (140)
유림과 조선무총이 환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9일, 이을규와 이정규 형제를 비롯한 국내 아나키스트 67명이 종로 2가 장안빌딩에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조직했다. (142)
동 연맹은 1945년 12월 20일과 21일 서울 연무관에서 89개 지방 대표 186명이 자유사회건설자연맹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142) ... 이는 유림과 조선무총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진영이 개편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결의였다. (143)
제3절 독립노농당과 아나키즘 정당정치 143
1946년 2월 21일과 22일 부산 금강사에서 열린 경남북아나키스트대회는, 아나키스스트들의 정세 인식을 공론화하는 대회였다. .. 유림은 축사를 하였고, 우한용(禹漢龍)과 박영환(朴永煥)이 공동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44)
1946년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경남 안의에서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이하 안의대회)를 개최하였다. (145)
이 대회는 유림, 신재모(申宰模), 이을규(李乙奎)를 공동의장으로 선임하였다. 이 대회 결의에 의해, 1946년 7월 7일 창당된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은 유림이 당수인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 이을규는 부위원장에, 신재모는 감찰위원장에 .. (146)
창당 후 한 달로 지나지 않은 7월 30일 현재 50만 7천명, 5개월 뒤인 1947년 1월1일 현재 78만 9천명의 급격한 당세 확장이 있었다. .. 독립노농당는 제헌의회를 전후한 시점에서도 백만 당원을 자부했다. (148)
김성수의 한국민주당 당원 수는 1946년 말 현재 23만명, 1947년 말 현재 86만 5천 7백 6명이다.... 정상적인 당원 증가가 아니고 지주와 자본가가 중심인 한국민주당이기에 가능한, 가성 다원의 대거 서류 입당이었다. 실질적으로 막걸리 당원이나 머슴 당원이라는 내용이다. (148)
김구(金九)의 한국독립당은 1947년 1월 1일 현재 91만 7천 3백명이다. (148-149) [독립노농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극우 세력인 한국민주당에 비해 이렇게 많았는데도..]
<표11> 해방정국 주요 정당별 정치노선과 성향분석 (154)
극우파| 우파 | 우파 | 중도우파 || 중도파 || 중도좌파| 좌파 | 극좌파 | 극좌파
이승만 | 조만식 | 김구 | 김규식 || 류림 || 여운형 | 백남운 | 박헌영 | 김일성
[도표의 마지막 항에 이념지향으로서 분류되어 있다. - 아마도 토지개혁과 부일청산을 중심으로 보면 이렇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55RMH)]
<당강(黨綱)> [독립노농당]
-. 본당은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투쟁함.
-. 본당은 농민, 노동자, 일반근로대중의 최대 복리를 위하여 투쟁함.
-. 본당은 일체 독재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국내외 세력과 평등 호조의 원칙에 의하여 합작함. (155)
제4절 독립노농당의 국가건설 구상 164
해방정국의 아나키스트들은 경남북무정부주의대회에서, 현 단계가 민족주의적 민주혁명 단계임을 천명했다. (164) - [민족주의를 넣게 되면 인본주의(humaniste)로 흐르게 될 것이다. - 어려울지라도, 변역과 혁명의 길은 인도주의(humanitaire)로 가야할 것이다. 그래야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고 안고 갈 수 있다. 교육이 중요하다. 철학교육이 꼭 필요하다.]
4. 1) 안의 중학교
이진언(李眕彦, 1905-1964)의 설립
4. 2) 안의 고등학교
하기락(河岐洛, 1912-1997) 재단 이사장
4. 3) 청구대학교
초대 학원장은 대구시보사 독립운동국장 최해청(崔海淸)이었다. (174)
교수섭외는 하기락,학사 행정관리는 이시우(李時雨)였다.(175)
제5절 독립노농당의 자율정부주의 평가와 의미 178
제5장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과 헌법 특성 변화:
아나키즘 정파의 중재ㆍ조정 역할과 연립정부 성립180
낡은 체제 모순이 누적된 왕조는 결국 무너졌고 한반도는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 의식과 정치적 각성은 3.1운동으로 분출되었으며,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그리고 실질 통치는 아니었으나 상해 임시정부, 국내 한성정부, 노령 대한국민의희정부 통합하여 헌법에 의해 민주공화정의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 (180)
1987년 제정된 현행 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주의 법통 계승을 명시하였고, 아울러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했다. (180)
그러나 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되었고, 3.1운동이라는 역사의 중대분기점(critical junctures)에서, 자주독립과 근대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 요구를 반영해 민주공화제의 헌법을 제정했다. (181)
제1절 한국 민주공화정의 기원과 임시정부 183
한국 민주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과 달리 미군정 시기에 이식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근대 개항기 이후부터 내적 발전 과정에 있었고, 3.1운동에 의해 국민주권의 요구로 발현되었다. (183)
이 과정에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신민회 등 근대적 시민운동이 발아하여 군주정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민권사상을 전개하였다. (184)
제2절 민주공화정의 생성ㆍ수립 시기: 제정ㆍ1차 개헌 187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전후 상황 처리를 위해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188) [파리 장서사건 혹은 유림 독립선언, 제1차 유림단사건은 1919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인사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내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3·1 운동 이후 유림의 인사들은 유림이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대신하여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였다.]
제3절 민주공화정의 지속ㆍ분열 시기: 제2ㆍ3차 개헌 202
이 절에서는 임시정부 지속ㆍ분열 시기의 제2ㆍ3차 개헌 과정을 분석한다. 구체적인 시기는 1925년과 1927년의 개헌과 1939년 전후까지의 독립운동 세력간의 분열, 그리고 유일대당을 구성하려는 통합 노력, 이로 인한 임시정주 해체 위기 등과 이에 따를 헌법 특성 변화를 분석한다. (202)
1917년 소비에트혁명은 제국주의에 침탈당한 피압박 민족해방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듬해인 1919년 1월 파리평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또한, 패전국 치하의 식민지에만 해당하는 한계가 있었으나, 식민지의 정치적 자각과 투쟁에 배경이 되었다.하지만 무엇보다도 1924년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으로 전개된 반제국주의 반군벌 연합전선의 의미가 컸다. (210)
그 결과 1929년 3월 하순 유림과 기조진이 영안현 해림에서 사상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212)
제4절 민주공화정의 진화ㆍ연대 시기: 제4ㆍ5차 개헌 215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과 태평양 전쟁[1941년 12월 7일]의 발발 등 구조적 환경 변화 차원에서 종전 가능성이 예상되었다. (215)
1942년 5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편제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좌익 세력의 연대 기구였던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의 군사조직이었다.제2지대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출신들이 주력이고 광복군의 핵심전력이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대장 나월환(羅月煥), 군사조장 박기성(朴基成), 정치조장 이하유(李何有) 등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했고, 중국군 제34집단군과 연계되어 있었다. (218)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1925년 4월 17일 제1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한 다음, 1928년 7월 5일 제4차 공산당 조직이 검거되기까지 끊임없이 당건설을 시도했다. 그러나 1928년 8월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승인이 취소되었으며, 그해 12월 코민테른 12월 테제에 의해 재조직을 요구받았다. (223)
임시정부의 내분이 깊어지지 [1943년] 9월을 맞아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은 거중 조정에 나섰다. 류림은 사퇴한 임시정부 용인들을 강북현 다공성산 앞의 안경다원에 초대하고 다공성에 올라 일치항일을 강조했다. (224-225)
혼란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조정과 중재 역할을 담임한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류림은, 대한민국임시헌장 수개초안 작성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제5차 개헌에 담긴 정파연합의 의미를 살려, [1945년] 4월 24일 각 정당의 영수들이 입각한 거국일치 내각이 성립되었다. (227)
<표 1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거국일치 내각 구성원
[주석 한국독립단 김구 부주석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 ..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8명, 조선민족혁명당 4명,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류림(1명), 조선민족해방동맹 김성숙(1명)이다. [16명 중에서 8명이 한독당이다..] (228)
<표 19> 거국일치 내각 성립 당시 제36차 의화 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30명, 조선민족혁명당 14명, 조선민족해방동맹 3명,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류림(1명), 조선혁명자연맹 1명,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 1명이다. 한독당 30명 대 20명이다. - 다른 해외 활동과 국내 활동에는 자리를 비워 두었는가? 공산당 계열들은 지하활동 중인가? ]
제5절 연립정부 구성: 아나키즘 정파의 중재ㆍ조정 역할 233
1923년 1월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존폐문제를 두고, 창조파, 개조파, 유지파 등으로 나뉘었다. 결국 독립운동 세력은 정타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유일 대상운동이 전개됨으로서 임시정부를 대체하려는 움직임에 의해 그 위상이 흔들리기도 했다. (235)
1942년 10월 34차 임시의정원의 개원을 통해 임시정부 민족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의 이념 정당들이 참여한 연합의회를 구성하였다. (237)
1943년 10월 야당의 정부 탄핵사태에서 조선무총과 유림은 국무위원 증원을 대안으로 중재하였다. ... 한국독립당[여당]과 조선민족혁명당[야당]을 중재하였다. (241(
1944년 1월 3일 의정원 회의에서 다시 파란이 일었다. 임기 만료된 국무위원 직의 선거에서 무기명 투표를 하자는 동의안이 제출되자, 한국 독립당 내의 일부가 이에 호응하였다. (242)
1944년 4월 22일 개정 공포된 임시정부 최종 헌법에 따라 여야의 막후 협상을 주도했던 우림과 조경한(趙擎韓, 1900-1993)도 국무위원에 인선되기에 이르렀다. (243)
제6절 연립정부 운영: 아나키즘 정파의 중재ㆍ조정안 입법 발의 246
1944년 4월 22일 제5차 개헌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이 공포되었다. / 이 임시헌장으로 인하여 각 정파의 영수급 인물들이 국무위원으로 선임됨으로써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정차가 모두 참여한 거국 일치 내각이 구성되었다. (253)
1941년 11월 15일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에 광복군에 대한 9개항의 준승(準繩)을 요구했다. 1941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중국군사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의용대 병력의 상당수가 연안의 공산당 근거지로 이동하다.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비상조치였다. (254) [온건론자들인 한독당은 중국국민당에 연결하자, 강경론자인 혁명당은 자주로서 독립운동하자는 것인데,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쫒기는 시기. 즉 대장정(1934년 10월 - 1935년 10월) 이후에 마오의 연안정부가 성립되었던 시기이며, 제2차 국공합작 시기이다. 국공합작: 1937년 - 1945년 사이에 있었던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사이의 연합 전선을 뜻한다. ]
1943년 10월 조선무정부주의총연맹의 유림은 재정 통일안을 발의했다. 각 정파마다 중국 정부로부터 별도로 지원받던 재정을, 임시정부로 일원화하여 각 정파에 배분하자는 내용이었다. (257)
1942년 10월 조선민족 혁명당은 인도 주둔 영국군에게 2명의 한인 병력을 파견해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고무되어 1943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과 인도주둔 영국군 대표 맥켄지가,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 파견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1943년 8월 9일 조선혁명당 1차 공작대가 파견되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258)
임시정부 각 정파와 교민들이 1943년 5월 10일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조선무총의 유림도 대표로 참가하여 주석단의 일원으로 연설했다. 이 대회는 우리의 완전독립을 주장하며 선언문을 발표했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각 동맹국 원수들에게 보내는 전문(電文)도 발송했다. (260)
일제 패망 상황인 1945년 8월 13일과 23일 임시정부 야당들은, 의정원 직권 정지와 국무위원 총사퇴 요구안을 제출하여 사실상 임시정부 해산을 요구했다. 연합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에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대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61)
이후 임시정부는 국가건설 방략을 준비하여 당면정책 14개 조항을 제정하였다. 유림 조소앙, 조경한 등이 당면정책기초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최종 집필 완성 책임은 유림과 조경한이 담당했다. (263)
제7절 아나키즘 정파의 1944년 헌법 대표 발의와 임시정부 옹호 265.
유림이 임시정부의 해산을 반대한 이유는, 그가 제38차 의회 개원식에서 역설한 발언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1945년 4월 11일 제38차 임시의정원 개원식에서 기념사 겸 축사를 했다. (266)
1945년 8월 10일 국무회의에서 당면정책 기초 위원을 선정했다. 최종적으로 유림과 조경한이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 항을 집필하여 의정원에 제출했다. (267)
제8절 1944년ㆍ1948년ㆍ1987년 헌법의 연계와 법통성 268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제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헌법제정 권력이 국민에게 있음을 명시하였다. (26)
1987년 현행 헌법에 와서야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당성이 헌법체계 안에서만이라도 인정 받았다. (271)
제9절 분석결과: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 과정과 아나키즘의 역할 272
제6장 해방정국 민주공화정의 변동과 국가 건설 연대 특성 변화:
아나키즘 정파의 노선투쟁 및 연대ㆍ견제 역할과 연립정부 와해280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은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기도하며, 사회주의 불록화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현지 사회주의 세력을 후원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소련 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소비에트화의 강제였다. 한반도 북부에서의 소비에트 체제 확립은 소련의 국가이익과 부합하며 중국대륙의 내전 상화과 무관할 수 없었다. / 이에 반해 미국은 자본주의 질서개편에 주안점을 두고, 자유무역과 이를 담보할 국제 금융질서의 패권확립을 도모하였다. 국제부흥개발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을 비롯한 전후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이 될 국제기구들은, 결국 미국 주도 세계자본의 수직계열화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소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교하지 않았다. 이는 소련이 추구하는 전통적 남진 정책과 동아시아 사회주의 패권이라는 구도의 사활적 이해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얻을 정치 군사적 경제적 이해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정책은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방지하고 소련의 팽창정책을 견제하는 방어적 성격이었다. (280)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조선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지시했고,이어서 9월 21 토지와 공업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 (280)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으로 촉발된 반탁ㆍ자주 투쟁의 성공으로 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주류의 독단으로 우파 영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좌ㆍ우ㆍ아나키즘 진영으로 균형을 이루었던 정파연립의 갈들을 초래했고, 급기야 좌파의 이탈로 이어졌다. (281-282)
제1절민주공화정의 존속ㆍ자주시기 - 신탁통치 결정과 자주투쟁구도:
반탁ㆍ자주투쟁과 미군정 압력 요인 - 정파연립 갈등 283
1943년 11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개최된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Roosevelt, 1882-1945), 처칠(Churchill, 1874-1965), 스탈린(Stalin, 1878-1953) 등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들이 한국의 독립과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했다. 루즈벨트는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 22일-26일]에 이어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종전이 임박한 1945년 1월 30일뿌터 2월 11일까지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에 의해 얄타회담이 개최되었다. (285)
1945년 7월 6일부터 8월 1일까지 미영소 수뇌들이 포츠담회담을 진행하던 중인 7월 16일 미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고, 8월 6일 일본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 (286)
19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의 외상들이 모인 런던 외상회에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부딪혔다. (286)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 영국 ·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Byrnes, Bevin, Molotov)이다. (286-287)
1945년 12년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관한 보도 ... 미국과 소련의 주장이 뒤바뀐 오보였다. 탁치 정국에서 좌익과 중간파는 임시한국민주정부 수립에 초점을 두었고, 우익과 아나키즘은 진영은 신탁통치에 주안점을 두었다. (287) [이 오보는 지금도 수수께끼라고 하는데 동아일보가 터뜨렸다고 한다.]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과, 이를 설명한 12월 25일자 소련군 총정치국장 슈킨 대장의 보고서는 이를 드러낸다. 소련의 국가이익을 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관철시키라는 내용이었다.(288)
이에 따라 1946년 1월 4일 김구는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자고 했다. 그러나 좌익 진영에서는 조선인민당이 조선공산당, 국민당, 한국민주당은 등 4당 대표가 모여 간담회를 제안했는데, 이는 임시정부의 주도권에 대한 대응의도 였다. .. 4당 회동은 1월 7일, 공동성명은 1월 8일자로 발표했다. (292)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1946] 1월 10일 오후 1시 경교동 임시정부 요인 숙소에서, 기자단과 회견하며 9일 회의의 경과를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서울 시내 청량리 바깥 모처에서 임시정부의 조소앙(1887-1958), 조완구(1881-1954), 장건상(1882-1974), 김성숙(1898-1969) 등과 한국민주당의 장덕수(1894-1941), 서상일(1887-1962), 국민당의 안재홍(1891-1965), 명제세(1885-1964), 신한민족당 이규갑(1888-1970), 조선인민당의 김오성(1908-1953?), 이여성(1901-1956?이후), 김재영(金在榮, ?-?), 조선공산당의 박헌영(1900-1955), 홍남표(1888-1950), 이주하(1905-1950), 조두원(1903-1953)이 참척하였고,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발언권 없이 이강국(1906-1957?), 정진태(鄭鎭泰, ?-?) 등이 방청하였다. (295)
5당 회담의 결렬 원인은 신탁통치 반대를 통해 정국 주도권을 확보한 임시정부에, 좌익 계열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를 내세워 찬탁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1월 14일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은 기자단과 회견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ㅅ댜; (297) [신탁통치에 반대로부터 나중에 한국민주당이 여론 주도권을 형성하는 쪽으로 급히 흘러간다...]]
[1946년] 1월 22일 비상정치회의 주비회의는 이승만이 회장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합류를 결정했는데 교섭위원에 김붕준(1888-1950), 서상일(1887-1962), 이종현(1902-1959)을 선정하고 회의 명칭도 비상국민회의 주비회로 개칭하였다. 아울러 이승만과 김구를 주비회 영수로 추대했다. 1월 23일에는 오전 10시부터 개회하여 12조로 구성된 조직조례 심의를 마치고, 제1조와 9조에 단체 대표와 지방의 저명한 민중지도자를 선출할 심사위원을 결정했다. 심사위원은 김붕준(신한민주당), 김돈(1887-1950 만주 조선혁명당), 권태석(1894-1948, 신한민족당), 이종현(북조선민주당), 서상일(한국민주당), 남상철(1891-1978, 천주교), 김관식(1887-1948, 기독교) 등 7인이었다. 아울러 국민회의 개최 소집 준비위원에 안재홍, 이재억(李載億, ?-?, 儒道會대표), 권태석, 남상철, 장덕수 등 5인이 선정되었다. (301)
비상정치회의 주비회가 비상국민회의 주비회로 바뀐 것은 이승만의 임시정부 흡수의도가 상당부분 관철된 것이다. 이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정이었다. (302-303)
비상정치회의 주비회 제2일인 1월 21일 회의 도중 퇴장한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유림(柳林)은, 1월 24일 비상정치회의 탈퇴가능성을 성명했다. 그는 1월 28일 오후 1시 임시정부 숙소에서 다시 기자단과 회견을 갖고 탈퇴설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306)
제2절민주공화정의 변형ㆍ균열시기 - 미소공위 전개와 권력투쟁구도:
우파통합 추진 우경화 요인-정파연립 균열 311
비상정치회의 주비회가 비상국민회의 주비회로 변경되면서 진보 진영이탈이라는 파란이 일었다. 1946년 2월 1일 오전 10시 시내 천주교회 대강당에서 90여 단체 대표자들과 각도 5명씩 지방대표, 저명 민중지도자 등 201명 초청에 167명 참석하여 비상국민회의가 개막되었다. .. 미상국민회의 대의원 중에 저명한 민중 지도자로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권동진, 오세창, 김창숙, 조만식, 홍명희 등 8인이었다.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는 유림, 조소앙, 조경한, 최동오, 조성환, 장건상, 이시영, 조완구, 김원봉, 홍진, 엄항섭, 유동열, 김상덕, 문덕홍 등 14명이 명단에 실렸다. (312)
결국 1946년 2월 13일 오후 3시 과도정부수립을 위한 정무기관으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명이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를 통해 발표되었다. / 비상국민회의 조직대강 제9조에 따라 2월 13일 오후 1시 상임위원회를 먼저 조직하는 형식을 취했다. 장소는 한미호텔 내 회의실이었고, 상임위원 13명은 비상국민회의 의장 홍진, 부의장 최동오, 정무위원장 안재홍, 외교위원장 조소앙, 산업경제위원장 김성수, 국방위원장 유동열, 법체위원장 김병로, 교통위원장 백관수, 문교위원장 김관식, 예산위원장 이운, 노농위원장 유림, 후생위원장 미정, 선전정보위원장 엄항섭, 청원징계위원장 조경한 등이다. (315)
그런데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과 민주의원 28인 ... (317)
조선무정부주의자 총연맹이 확대개편된 독립노농당의 유림은 1948년 4월 11일, 12일 비상국민회의를 계승한 대한국민회의(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때 그가 주석 이승만과 이청천, 김성수 등의 국무위원을 제명함으로써, 임시정부와 민주의원의 관계는 비로서 정리되었다. (318)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과 민주의원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 주류의 일방적인 정책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미군정, 이승만, 한국민주당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주도권 확립이었다. 반탁 열기를 통한 정국 주도에 반비례해서 미군정과 갈등이 증폭되자, 이를 해소하려는 김구의 입장이 상황을 불리하게 전개시켰다. (318)
탁치 문제에 관한 미국의 의도와 달리,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대중의 반탁 열기에 편승하는 정치적 기민함을 보였고, 이로써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임시정부의 신탁통치 반대투쟁은 대중 감성에 호소하여 일시적으로 정국을 이끌 수 있었으나, 그 성과는 이승만과 한민당으로 귀속되었다. (321) [미국은 (자국정치를 해 보았으니) 이승만을 하부로 둘 구상을 했었겠지.]
마샬(Marshall, 1880–1959)은 1946년 1월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모색했다. 이러한 마샬의 계획은 한반도에서도 좌우합작으로 소련과의 합의에 대한 기대와, 극우 극좌 세력 배제를 통한 미국 입장의 관철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무성 극동국의 랭던과 타이어에 의해 좌우합작이 구상되었고, 하지의 정치고문인 버치 중위가 이를 추진하였다. 1946년 5월 25일 신당동 그의 자택에서 김규식(1881-1950), 원세훈(1887-1959), 여운형(1886-1947), 황진남(1897-1970, 버치(Leonard Bertsch, ?-?) 중위, 아펜젤러(Appenzeller, 亞扁薛羅2世, 1889-1953) 등이 회합을 가졌다. 그 결과 7월 10일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324)
좌우합작에 대해 독립노농당은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는데, 선전부장 양일동(1912-1980)이 독립노농당의 당론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326)
미군정은 1946년 8월 24일부로 제정된, 군정법령 제118호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을 10월 12일 발표했다. (328)
1946년 10월 중순부터 입법의원 45명의 민선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좌익세력은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 / 관선의원은 1946년 12월 6일 최종 결정되었고, 12월 7일 관선의원 45명에 대한 선임서와 성명을 발표했다. .. 그런데 관선의원 중에 사회노동당의 여운형, 장건상, 문학동맹의 홍명희, 한국독립단의 조완구, 엄항섭 등 5인은 의원 등록을 거부했다. (330)
1947년 1월 14일 한국독립단의 주류 김구와 비주류 조소앙 및 독립노농당의 유림이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를 방문했다. 미소공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묻고 반탁운동의 전개를 예고 한 것이다. (359)
독립 노농당에서는 임시정부 법통 옹호를 주장하는 임정추친회와 연대하며, 1947년 6월 16일 전국혁명자대표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 위원장 유림과 박열, 김석황, 자예학 등 3인의 부윈장 외에 황학수, 김승학, 연병호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365)
1947년 3월 30일 노농청년연맹을 창립하였다. .. / 안의 중학교와 안의 고등학교 및 청구 대학의 설립, 아나키즘 시사종합지 신성의 발간은 유림을 비롯한 아나키즘 진영이 절감한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물이었다. (368)
아나키즘 진영인 독립노농당은 1947년 7월 임시정부 주도의 남북협상안을 제안했다. (371)
각정당협의회는 17개 정당으로까지 확대되었으나, 중심인물은 조소앙, 유림, 김규식, 김붕준, 장건상, 원세훈, 홍명희 등의 7요인이었다. 이들은 [1947]11월 15일 회합을 갖고 각정당협의회 진로에 대해 의견을 통일하였다. (373-374)
독립노농당은 1947년 10월 21일과 22일 중앙집해위원회를 개최하며 시국에 대한 결의를 통해 이를 피판했다. (379)
제3절민주공화정의 표류ㆍ와해 시기 - 유엔의 총선결정과 이념투쟁구도:
평양회담 참석 좌편향 요인 – 정파연립 와해 386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내린 한반도에 관한 결의는, 신탁통치 대신 남북 총선거에 의해 독립이었으며, 이를 위해 유엔한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1948년 1월 22일 소련은 유엔한국위원단의 북조선 입북을 거부했다. (390)
남한 정국이 유엔한국위원단과의 협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을 때, 1948년 2월 10일 북조선임시헌법 제정위원회에서 제정한, 북조선인민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이 김택영 서기장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 / 한편 남한 좌익연대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는, 3월1일 북한에서 발표한 헌법 초안을 지지한다고 결정했다. (391)
1948년 4월 3일 오후 3시 서울의 역경원에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統一獨立運動者協議會)가 결성되었다. 박윤진의 사회와 유림의 개회사가 있은 뒤 임시의장 선거에서 유림이 당선되었다. 엄항섭의 경과보고, 김구와 김규식의 축사, 박윤진의 선언과 강령낭독에 이어 유림, 조소앙, 홍명희를 간사를 선임했고, 그 중에 유림이 회의 소집 책임자인 대표 간사로 피선되었다. 창립대회에서 아래의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의 강령과 선언이 발표되었다. (394-395)
이 기구[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에는 독립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아나키즘 진영의 13개 단체도 망라되었다. 유림의 정국 구상에 의해 대회가 준비되었고, 홍명희가 소요자금의 일부를 부담했으나 대부분의 비용은 유림에 의해 조달되었다. (397)
통일정부 수립 원칙에서 아나키즘의 유림과 민족주의의 김구는 노선을 달리했다. 유림과 독립노농당은 반외세 자주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자주ㆍ민주ㆍ통일이 일체임을 강조했다. 반면 김구와 한국독립당은 친일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민주당과의 우파 통합을 시도하던 보수 민족주의에서, 소비에트ㆍ공산 세력인 북조선노동당과 평양회담을 하면서 민족지상주의로 나아갔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평양회담 참가파들이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1948년 4월 22일 유림과 독립노농당의 성명이 언론에 발표되었다. (403)
유림은 1947년 봄 이북 지역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월남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 혁명 시기부터 일제와의 투쟁시기까지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 독재를 강력하게 거부했고, 이의 연장선에서 이미 진행된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비판하엿다. (408)
유림 아나키즘 논리인 정파 합동연이(政派 合同聯異) ... 정부 공대균담(政府 共戴均擔) .. 자신의 아나키즘으로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을 설명한 것이다. (409)
독립노농당은 1948년 5월 5일과 6일 제2차 전당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5월 10일 실시될 남한의 제헌의회 선거에 대한 공식 노선을 발표했다. .. 아울러 남한 단독선거 반대 당론에도 불구하고 출마하는 30여명 전원을 제명했다. 제명된 뒤 당선된 인물은 정준(김포), 신방현(공주), 연병호(괴산), 최석홍(영주), 장홍염(무안), 육홍균(선산) 외 8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이을규와 박열 등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한 부위원장 두명도 제명되었다. (410-411)
제헌의회가 치러진 뒤 선거 불참 진영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의 주도권을 두고 유림진영과 김구ㆍ김규식 진영이 갈등 양상을 보였다. (413)
결국 조소앙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입법기관 참여를 통해 삼균주의를 실현하고자 1948년 12월 1일 사회당을 창당했다. (415)
제4절 분석결과: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변동과정과 아나키즘의 역할 418
결국 임시정부와 독립노농당은 국가건설 전개에서, 대중동원을 꾀하고자 정당체제를 확대하고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연대기구 결성으로 대응했지만, 임시정부 주도 국가건설을 추동하지 못하고 분단체제가 성립되었다. (422)
스트렉(Wolfgang Streeck, 1946-)과 씰렌(Kathleen Thelen, 1956-)의 제도 변화 모형 (425)
또한 1944년 최종 헌법과 1948년 제헌 헌법은 헌정체제의 연계성이 확인되어, 민주공화정 헌정 체제는 부분적으로 생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은 1987년 개정된 헌법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명기함으로써 생존ㆍ복귀 모형을 보여주었다. / 한편 정당체제는 존속ㆍ변형ㆍ표류 시기의 모든 과정에서 민주공화정 정당체제 특성으로서 자주투쟁구도 -> 권력투쟁구도 -> 이념투쟁구도를 보이며, 한국돌립당은 우경화와 좌편향의 질적 전환된 존속변형 모형을 보였다. 이에 아나키즘 정파인 독립노동당은, 중경 임시정부에서 구성한 좌ㆍ우ㆍ아나키즘 연립정부를 지키지 위해 견제ㆍ저항하는 구도들 보여주었다. (426) ㅇ
제7장 결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정과 독립노농당 아나키즘의 역사적ㆍ헌정사적 의의 428
1919년부터 1948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은 독립운동과 국가 건설 노선 전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위기와 도전, 제도 변화를 경험한 역사이다. 또한 독립운동 세력 간 연대와 분열ㆍ통합의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정부수립 방법론으로 자율정부주의 체제를 선언한 해방정국 유림과 아나키스트들은, 자주적인 인민대중이 자율 공동체의 정부를 조직하는 아나키즘 이상세계를 구상하였다. 통일이 독립의 완성이라는 해방정국 아나키스트의 신념에 따른다면, 임시정부와 아나키즘 진영이 목표로 했던 자주독립 국가의 완성은 통일 한반도의 미래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444)
* 참고문헌 445-475
* 국문초록 476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근대국가와 인민주권을 위하여 군주정 대신 민주공화제를 선언했다. 주권의 소재 이념과 실천 이념으로서 민주공화주의를 구현하려는 정치체제였다. (476)
해방정국 아나키스트들은 전국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의 만장일치 결의로써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을 확대 개편하여 독립노동당을 창당했다. 당수인 유림을 중심으로 독립노농당은 아나키즘 세력을 총 규합해, 노동자와 농민 등 생산계급에 기반하는 자율정부주의 구현에 나섰다. 아나키즘 진영이 대중기반의 세력 확대에 성과를 거둔 것은, 반외세ㆍ자주화, 토지개혁, 친일파[부일파] 청산 등 시대 요구의 반영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주ㆍ민주ㆍ통일의 원칙 아래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였으나, 냉전체제의 현실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 (477-478)
(26:03, 55WMA)
* 지도교수와 발표자.
1962 장훈(張勳, 1962-) 중앙대교수, 국제정치 전공, <[미기재], 1992, 미국 Northwestern University, Kenneth Janda.>
1962 박정희(朴貞熙, 1962-),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한국정치 전공,
# 독립운동과 연관 인물들##
1876 김구(金九, 1876-1949)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인. 백범일지(1947, 국사원)(1948, 3판),
1877 홍진(洪震, 1877-1946) 본명은 홍면희(洪冕憙), 충청도 영동, 본관은 풍산. 호(號)는 만오(晩悟), 대한제국의 관료,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의 독립운동가.
1879 김창숙(金昌淑, 1879-1962), 경북 성주(星州), 본관은 의성(義城). 일제 독립운동가, 정치가, 시인 겸 교육자. 심산유고(탐구당, 1973)
1879 유동열/류동열(柳東說, 1879-1950) 평북 박천군. 본관은 문화, 호는 춘교(春郊), 대한제국의 군인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1880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민족주의 사학자.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 《조선사론(朝鮮史論)》,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1881 조완구(趙琬九, 1881-1954)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하였으며 광복후 한국독립당의 국내 초대 재정부장을 거쳐 1949년 한국독립당의 총재를 역임하고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1882 장건상(張建相, 1882-1974) 경상도 칠곡, 정치가,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다. 장건상외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민음사, 1988)
1885 신재모(申宰模, 1885-1958), 경북 칠곡, 아나키스트, 1925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등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
1885 명제세(明濟世. 1885-1964)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간부, 초대 심계원장 등을 지냈으며, 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병사하였다
1886 여운형(呂運亨, 1886-1947) 몽양(夢陽)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 근로인민당(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1887 서상일(徐相日, 1887-1962) 대구 출신,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동암(東菴).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윤병호(尹炳浩)·남형우(南亨祐)·박중화(朴重華)·배천택(裵天澤)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1945년 광복 후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립, 1961년 사회대중당이 분열되자 재야 혁신세력을 정비, 결집하여 통일대중당(統一大衆黨)을 발기하였으나 5·16으로 무산되었다.
1887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겸 교육자. 해방전야까지 이승만과 교류하였다. 해방정국에서 사회당 쪽으로.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1887 김돈(金墩, 1887-1950) 1925년 김좌진 장군 등과 함께 신민부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심판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에는 중국 국민당과 연계하여 동북혁명군을 조직하는데 기여했으며 직접 전투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항일운동.
1887 김관식(金觀植, 金本觀植, 1887-1948) 일제강점기의 신학자, 대학교수, 목회자,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규식의 친척이었다.
1887 원세훈(元世勳, 1887-1959)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1888 김붕준(金朋濬, 1888-1950) 평남 용강, 호는 당헌(棠軒).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정치인
1888 이규갑(李奎甲, 1888-1970)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1888 홍남표(洪南杓, 1888-1950)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1889 이은숙(李恩淑, 이명李榮求, 1889-1979) 본적 충남 공주,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1908년 우당 이회영과 결혼, 1966년 자서전적 회상기인 ‘서간도 시종기’를 집필.
[1889 김좌진/김상현(金佐鎭, 1889-1930) 일제 강점기의 군인.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본관은 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 [공산주의 선동에 방해되는 이유로 1930년 1월 24일 김일성(金一星, 본명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朴尙實, 일명: 尙範, 金信俊)에게 피살되었다. 김일성은 사건 직후 이붕해(李鵬海, 1899-1950)에게 살해되었으며, 박기봉(朴奇峰)에 의하면 만주공산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적기(赤旗)」지(誌) 1930년 3월호에 암살 교사범 김일성(金一星·김봉환)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 설이 분분하다.]
1889 김두봉(金枓奉, 1889-1960) 경남 기장,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백연(白淵)·백련(帛連)이며, 별명은 태항산의 호랑이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한글학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주시경의 제자로서 《조선말본》과 《깁더 조선말본》. 《말모이》의 공저자. 대종교, 아나키스트.
1890 김약수(金若水, 1890-1964), 부산 동래 출생. 별명: 두전(枓全) 또는 두희(枓熙) 일제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1891 안재홍(安在鴻, 1891-1965)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역사가, 언어학자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건국준비위원회 부 위원장과 남조선과도정부의 민정장관이자 정부 수반이었다.
1891 남상철(南相喆, 1891-1978)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가톨릭 계열 인물이다. 일제 말 부일.
1893 고순흠(高順欽, 1893-1977),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巖),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아나키스트‧서예가.
1894 유자명(柳子明, 1894-1985)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남과 북에서 유일하게 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개명 前 이름은 유흥식(柳興湜)이고 본관은 문화이며 호는 우근(友槿)이고 개명한 이름 유자명(柳子明)은 원래 별명이었다. 나의 회억(1984) 유자명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 1999)
1894 장덕수(張德秀, 1894-1941), 황해도 재령.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부사장, 조선임보전국단 이사 등을 역임한 언론인. 부일반민족행위자, 한독당 소속인에게 암살.
1894 권태석(權泰錫, 1894-1948) 일제강점기 조선민흥회, 조선공산당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1895 김준연(金俊淵, 1895-1971), 전남 영암, 일제 언론인, 독일에서 법학공부, 독립운동가. 조선공산당의 한 분파인 엠엘파의 중요 인사였다. 독립노선, 1947
1896 정화암(鄭華岩, 1896-1981),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전북 김제 출신,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자유문고, 1982)
1897 이정규(李丁奎, 1897-1984) 아나키스트, 필명은 우관(又觀). 그는 중국 아나키스트와의 협력 외에도 필명이 루 쉰(Lu Xun)인 저우 슈렌(Zhou Shuren, 1881-1936), 조부 주오렌(Zhovu Zuoren), 판 벤량(Pan Benliang, 1897-1945) 같은 다른 급진파와도 교류했다. 해방후 성균관대학에서 교육. 1958년 청주대학 총장과 1963년 성균관대학 총장을 역임. 우관문존(1974, 국민문화연구소).
1897 황진남(黃鎭南, 1897-1970) 함경도 함흥 태생,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도산 안창호를 수행하여 통역관 겸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
1898 단주(旦洲) 유림(류림, 柳林, 1898-1961) 본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단주(旦洲)이다. 경상북도 안동군 임북면 계곡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화영(柳華永)
1898 김원봉(金元鳳, 1898-1958) 밀양,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 의열단장이자 난창에서 중국 공산당에 관여한 군인. 경남 밀양에 의열 기념관이 있다.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6월 인민공화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1898 김성숙(金星淑, 1898-1969) 독립운동가, 불교승려 겸 정치가. / 한.위키: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후 유림과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898 차금봉(車今奉, 1898-1929) 서울,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 1928년 신간회 경서지회 창립.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때 체포된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하였다.
1899 조봉암(曺奉岩, 1899-1959) 경기도 강화군, 본관 창녕(昌寧). 호는 죽산(竹山). 1921년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가입,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지도자 양성기관인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을 이수.
1899 유우석(柳愚錫, 1899-1968), 유관순의 오빠, 1920년대 원산 아나키즘 노동운동, 해방 후 독립노농당 상무부장
1900 박헌영(朴憲永, 1900-1955)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노동운동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1900 이범석(李範奭, 1900-1972) 독립운동가, 군인. 1920 청산리 대첩, 부인 김마리아(金瑪利亞, 1903-1970)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1900 조경한(趙擎韓, 1900-1993), 전남 순천, 임정 의정원, 백강회고록(白岡回顧錄: 국외편) 초판(1979년) ,
1901 이강하(李康夏, 1901-1942) 충남 대전군 기성면, 일제강점기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이다. 흑로회의 설립에 개입하였다. 서울 천도교 강당 강연회의 무정부주의 선전으로 일제 경찰의 습격을 받았고 대전감옥에서 옥사한다.
1901? 이윤희(李允熙, 미상1901?-1950) 일제 강점기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활동한 아나키즘 계통의 재일 조선인 이론가 겸 노동 운동가. 1945년 8·15 이후 귀국하여 대전에서 독립노동당(獨立勞動黨) 지구당 위원장.
1901 이여성(李如星, 1901-1956?이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화가, 정치가, 언론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명건(李明建)이다. 1948년 남북협상 이후 혼자 북한에 남았다. 이후 〈조선미술사개요〉(1955)·〈조선건축미술의 연구〉(1956) 등을 펴냈다.
1902 김중한(金重漢, 1902-미상) 스스로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임을 밝히고, 1923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동경(東京)에 머물면서 의사(義士) 박열(朴烈)의 도움을 받아 비밀단체인 불령사(不逞社)에 가담했다.
1902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흥(高興),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에 이어, 천안 아우내(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지휘. 일본형사들에게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인해 순국했다.
1902 박열(朴烈, 1902-1974) 경북 문경, 1919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3.1운동 가담. (本)朴準植 朴爀. 아나키스트, 黑濤會 조직자.
1902 이종현(李宗鉉, 1902-1959) 평안남도 덕천시, 3.1운동으로 3년 복역,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행정 공무원이었다.
1903 이강훈(李康勳, 1903-2003)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아나키스트. 본관은 전주, 호는 청뢰(靑雷)이다. 1933년 3월 남화한인청년연맹[무정부주의 단체]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백정기와 함께 중국을 방문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1933년 11월 나가사키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민족해방운동과 나(1994)(제삼기획),
1903 조일명(趙一明, 1903-1953) 일제강점기 친일 공산주의 운동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일명(一明)은 아호(雅號)이며 본명 조두원(趙斗元). 북한 내각의 문화선전성 부상까지 지냈으나, 이강국, 이원조, 박승원 등과 함께 오랫동안 박헌영의 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해 왔다는 혐의로 1953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4 최갑용(崔甲龍, 1904-1998), 부산출생, 황해도에서 자람, 아나키스트. 1929년 8월 8일 관서흑우회는 임시 총회를 통해 11월 10일과 11일 이틀간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를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1972년 최갑용은 서울 진관사에서 정화암(鄭華岩)·이을규(李乙奎) 등과 함께 한국자주인연맹을 결성하였고 대표간사로 선임되었다. 어느 혁명가의 일생(1995)
1905 이주하(李舟河, 1905-1950)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남조선로동당의 간부였다.
1905 장지락/김산(金山, 1905-1938), 사회주의 혁명가, 항일독립투사, 아나키스트, 국제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이며, 본명은 장지학(張志鶴) 또는 장지락(張志樂). 45년 후에 공식 명예회복.
1905 최해청(崔海淸, 1905-1977) 한국의 교육자. 호는 야청(也靑). 청구대학의 설립자.
1905 이진언(李眕彦, 1905-1964) 시인, 1946년 안의중학교를 설립하였고, 전국아나키스트대회 개최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노농당 창당을 주도.
1906 리강국(李康國, 1906-1957?) 일제강점기의 노동사회운동가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 겸 정치인이다. 아호는 이촌(耳村).
1908 김오성(金午星, 1908-1953?) 일제강점기 한국의 공산주의 이론가, 문학평론가이다. 본명은 김형준(金亨俊).
1912 하기락(河岐洛, 1912-1997) 경상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 출생. 유림이 조직한 독립노동당에 가담하여 기관지 『독립 노동 신문』을 편집하였다. 1952년 안의고등학교를 설립.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1981]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신명, 1993).
1912 양일동(梁一東, 1912-1980) 현곡(玄谷) 정치인.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 1973년 민주 통일당을 창당, 대표 최고위원과 총재를 지냈다.
1912 나월환(羅月煥, 1912-1942), 전남 나주, 호는 송죽(松竹).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 1942년 3월 1일 변절자 박동운(朴東雲), 이하유(李何有), 김동수(金東洙), 이해평(李海平), 이도순(李道淳), 고여순(高如淳), 김송죽(金松竹), 김용주(金龍珠) 등 8인에 의해 피살되었다. 중국전간사단(中國戰幹四團)은 박동운 사형, 이하유·김동수 무기징역, 이해평·이도순·고여순 징역 15년형, 김송죽·김용주 징역 2년형을 선고하였다.
1912 왕통(王通, 1912) 함북, 의열단 가입, 일제강점기 중국 상해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한국광복군 지대장,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김탁.
1913 이규창(李圭昌, 1913-2005) 일제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아버지는 이회영이고 초명은 이규호(李圭虎)이다. 이항복의 11대 후손이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운명의 여진(보련각, 1992)
1914 송남헌(宋南憲, 1914-2001) 독립운동가, 교육인, 통일운동가, 1946년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고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 한 길,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하여(2000, 한울)
1914 유원식(柳原植, 1914-1987), 만주군 장교, 아버지 류림과 단절.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정변을 주도, 혁명위원회 재경위원장.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인물연구소, 1987).
1918 장준하(張俊河, 1918-1975) 평안북도 의군주, 독립운동가. 일제 학도병에서 탈출. 돌베게(1970)
1920 김준엽(金俊燁, 1920-2011), 독립운동가, 교육자. 고려대 총장. 장정(5권, 나남, 1988),
1927 이문창(李文昌, 1927-) 충북 진천, 호 수민(樹民), 해방 후 한국 사회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의 산증인, 1945년 자유사회건설자연맹 산하의 흑백회에 참여하며 사회운동을 시작하였다. 해방공간의 아나키스트(2008)(이학사) ,
1928 김자동(金滋東, 1928-), 상하이 임정청사 인근 아이런리, 독립운동가인 부친 김의한과 모친 정정화 여사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 외국인 ****
1469 마키아벨리(Nicolas Machiavel, Niccolò di Bernardo dei Machiavelli, 1469-1527) 르네상스시기에 이탈리아 플로랑스의 인문주의자. 군주론(Il Principe, 1513)(출판, 1532)
1729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영국의 정치인이자 정치철학자, 연설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
1748 시예스(Emmanuel-Joseph Sieyès ou l'abbé Sieyès, 1748-1836) 프랑스 교회인물, 정치가. 프랑스 혁명에서, 집정정부(Consulat) 초기에 임시집정관, 나중에 상원의원. 제국에서 꽁트의 작위를 받는다. 특권층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privilèges, 1788),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 Tiers-État? 1789)
1756 고드윈(William Godwin, 1756-1836) 영국의 철학자, 정치이론가, 소설가. 아나키즘과 공리주의의 선구자. 정치적 정의에 관한 탐구(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 and its Influence on General Virtue and Happiness 1793 (Enquête sur la justice politique et son influence sur la vertu et le bonheur en général)
1760 생시몽(Saint-Simon, Claude Henri de Rouvroy, 1760-1825) 프랑스의 사상가·경제학자.
1771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58) 영국의 사회개혁가, 사상가, 감리교 신자, 사회주의자. 자신의 사상을 일컬어 최초로 '사회주의(social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772 샤를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급진자코뱅의 사상을 이어받은 그는 급진적 사화주의의 이념과 초기 프랑스 유물론에 근거한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 팔랑스테르(Phalanstère) 공동체 계획을 수립.
1806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본명: Johann Caspar Schmidt, 1806-1856) 독일의 철학자,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유일자와 그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845)
1809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프랑스의 상호주의 철학자, 언론인.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한다. 1858년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 1862년 소유의 이론,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1814 바쿠닌(Michael Bakunin, 1814-1876) 러시아 출신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철학자. 맑스는 '바쿠닌의《국가 주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개요'에서 다른 계급이 존재하는 한, '노동자계급은 강제적 모든 수단들, 즉 통치의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반복했다.
1817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 자연주의자, 수필가, 시인, 철학자. Walden (1854)
1842 크로폿킨(Peter Kropotkin, 1842-1921)은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운동가, 철학자였다. 보로딘(Бороди́н)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 혁명가의 회상(Memoirs of a Revolutionist, 1899)
1853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 1853-1932) 이탈리아 지성인, 작가 아나키스트 혁명가. 귀족가문에 의사인데, 1871년 파리꼬뮨에 동조하고, 제1인터네셔날에 참여.
1854 터커(Benjamin Ricketson Tucker, 1854–1939) 미국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상호주의자. 격주간지 Liberty(1881–1908)발행.
1870 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 1870-1918). 유태계 독일인으로 20세기 초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삶을 살았던 뛰어난 문예비평가, 사상가, 평화운동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로 분류한다.
1874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1965) 영국의 총리(1940-1945, 1951-1955) 정치가.
1878 스탈린(Stalin, 1878-1953)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ㆍ언론인이다
1879 트로츠키(1879-1940) 러시아 정치가, 소비에트에서 스탈린에게 밀려나 망명의 길을 걷다.
1880 마샬(George Catlett Marshall, 1880–1959) 미국 군인 장교, 정치가, 루스벨트와 트루먼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 담당관.
1882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미국 32번째 대통령(1933-1945). 트루먼이 대통령 승계.
1888 마크노(Nestor Ivanovitch Makhno, 1888-1934) 인성자유주의 공산주의자. 우크라니나 코사크족 출신, 정강주의자(plateformisme: Plate-forme organisationnelle de l’union générale des anarchistes) 다섯(Archinov, Nestor Makhno, Ida Mett, Valesvsky et Linsky) 중의 한사람.
1889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亞扁薛羅2世, 1889-1953) - 父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188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미국 감리교(북감리회) 선교사이다.
192? 버치(Leonard Bertsch, ?-?) 하버드 법대 출신, 미군정(1945-1948) 중위 근무
2004 쉬뜨코프 일기(1946-1948)(2004 발간) 소련 군정의 핵심인물이 기록한 일기이다. 북한 정권의 수립에서 소군정의 역할과 남한 좌익 세력과의 관계를 파악하였다.
**연구자
1923 추헌수(秋憲樹, 1923-), 연세대 정외과 교수, “임정의정원 각 당파 명단”(1944년 3월 15일), 자료 한국독립운동 제1권, 서울:연세대학교 출판부, 1971.
1931 이정식(李庭植, 1931-2021) 평안남도, 1956년 UCLA를 졸업, 1961년 동대학 버클레이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졸업하고 콜로라도 대학교, 다트머스 대학교를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정치학 교수, 현재는 명예교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대한민국의 기원(2006)
1931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한국의 정치학자, 미국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교수.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1967(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 1985, 화다)
1938 한용원(韓鎔源, 1938-), <[미기재], 1983, 고려대>
1942 신복룡(申福龍, 1942-) 건국대 교수 <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건국대, 1977, 조일문.> 한국정치사상사(2011, 지식산업사)
1947 김성국(金成國, 1947-) 서울대 학석사, 미국에서 박사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형성 <..., 1982, Indiana University at Bloomington> “유자명과 한국 아나키즘의 형성”(2003) “허유 하기락의 아나키즘 소고”(1998)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형성”(2004?)
1948 심지연(沈之淵 1948-), 서울대 학석, 서강대 박사. 경남대교수, <조선신민당 연구, 서강대, 1998, 장달중.> 한국현대정당론, 1984(창비),
1954 김희곤(金喜坤, 1954-), “단주 유림의 독립운동과 사상. (1992)” 안동문화연구회.『안동문화연구』 6: 111-123.
1954 한시준(1954-) 단국대 사학과 교수, <韓國光復軍 연구, 1993, 인하대, 미기재>
1954 오장환(吳장煥, 1954-). 건국대 학석사, 프랑스 박사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연구: 그 기원에서 1931년까지, 1987, 파리7대학 Pierre Brocheux.>.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김영천(金永千, ?-?) 단주(旦洲) 유림(柳林)의 아나키즘과 독립운동(2008) 류림에 관한 논문 다수. - 단주류림선생기념사업회 회장
1956 이호룡(李浩龍, 1956-) 서울대 학사, 계명대 석사, 서울대 박사.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2000, 서울대, 한영우.> “柳林의 아나키스트 사상과 활동(2005)”, 한국아나키즘 운동편(2015),
1956 이동언(李東彦, 1956-), 건국대 석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김성숙의 생애와 독립운동(2011)」(대각사상),
[양영석(?-?),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노선과 활동”(1990),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4집, 405,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박성수(1931-)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蚩尤天皇(치우천황)과 민족사관(2001)」]
1958 박환(朴桓, 1958-) 수원대 교수, <서북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연구, 1990, 서강대, 이광린.> “중일전쟁이후 중국지역 한인무정부주의 계열의 향배, 1997”(한국민족운동사연구). 식민지시대 한인아니키즘 운동사(2005)(신인)
1961 강원택(康元澤, 1961-) 서울대 정치외교학 교수(퇴임) <Support for Third Parties under Plurality rule electoral systems: A Public Choice Analysis of Britain, Canada, New Zealand. 1997, 영국 University of London, Patrick Dunleavy.>
1962 박정희(朴貞熙, 1962-)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형성과 변동과정에서 독립노농당 아나키즘 연구, 2020, 중앙대, 정치대학, 장훈.>
1962 이철순(李哲淳, 1962-) 부산대교수 <미기재, 서울대, 2000> 남북한 정부수립 과정 비교: 1945-1948(2010)
1963 전상숙(田上俶, 1963-), 이화여대 학석박. 광운대 연구교수. <식민지시대 국내 좌파 지식인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1997, 진덕규.> 한국인의 근대 국가관, ‘민주공화국’ 재고: 식민지시기 국가의 이중성과 민족문제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2017(선인)
1965 조세현(曺世鉉, 1965-), 서강대 학석사. 부경대 사학과 교수, <淸末民初無政府派的文化思想, 1999, 북경대, 공서탁.>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2001)(책세상),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 교류와 연대: 적자생존에서 상호부조로, 2010(창비)[아나키스트 도서관에 파일]
1966 유진숙(柳珍淑, 1966-) 배재대 교수, <러시아 정당의 외교정책형성. 정당형성요소로서의 이념적 분화, 독일, Univ. Bremen, 2004.>
1966 서희경(徐希慶, 1966-)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大韓民國 建國期의 政府形態와 政府運營에 관한 論爭 연구: 制憲國會의 特別會期(1948.5.31.-12.19)를 중심으로, 2001, 서울대, 김홍우.>
1966 김명섭(金明燮, 1966-)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재일한인아나키즘운동 연구, 2001, 단국대 한시준>, “조소앙의 아나키즘 수용과 반제 아시아 연대활동” 東洋學 第84輯(2021年 7月)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院.
1988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1988-), 모스크바 태생, 서울대 박사학위, 고려대 강사. 김일성 이전의 북한: 1945년 8월 9일 소련군 참전부터 10월 14일 평양연설까지(2018), 김일성 전기(2022),
* 다른 참고자들**
1904 게랭(Daniel Guérin, 1904-1988) 프랑스 혁명작가, 반식민주의 운동가, 동성애해방운동가, 인성자유공산주의자. 예술피평가. 아나키즘: 학설로부터 행동으로(L'Anarchisme: de la doctrine à l'action, 1965)(김홍옥역, 2015), Pour un marxisme libertaire, 1969, Pour le communisme libertaire, 2003
1919 스칼라피노(Robert Anthony Scalapino, 1919–2011, Chinese name: 施樂伯 시락백), 미국 정치과학자, 동아시아 전공. Communism in Korea, 1972(with Chong-Sik Lee,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한홍구역, 2018, 돌베게) - 이정식(李庭植, Chong-Sik Lee, 1931–2021) 한국-미국인, 정치학자.
1924 워드(Colin Ward, 1924–2010) 영국 아나키스트, 작가. 사회역사학 개척자. Anarch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2004)(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 김정아, 돌베게, 2004) ]
1926 프레포지에(Jean Préposiet, 1926-2009) 프랑스 철학사가 작가. 스피노자 전문가. Histoire de l'anarchisme, 1993(아나키즘의 역사, 이소희 이지선 김지은역, 2003)
1931 에브리치(Paul Avrich, 1931-2006) 미국 역사가, 교수. Anarchist Portraits, 1988(하승우, 갈무리, 1990)
1938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 영국 사회학자. 70년대 이후 발표한 구조화 이론과 전체론적 관점(theory of structuration and his holistic view of modern societies)으로 알려졌다 The Constitution of Society. Outline of the Theory of Structuration, 1984), 제3의 길(The Third Way: 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 1998)(한상진, 2001)
1942 크래스너(Stephen David Krasner 1942-) 미국 외교관, 스텐퍼드 대학교수. "Approaches to the State: Alternative Conception and Historical Dynamics", Comparative Politics, vol. 16 (January 1984), 223-246. “The New Institutionalism in Political Science and Sociology“ Comparative Politics”(1995), vol. 27(2): 231-243.
1943 액셀로드(Robert Axelrod, 1943-) 미국 정치과학 교수, 미시간 대학. Conflict of interest: a theory of divergent goals with applications to politics, 1970)
1946 스트렉(Wolfgang Streeck, 1946-), 독일 경제적 사회학자. 막스 플랑크 연구소 소장 역임. with Kathleen Ann Thelen: Beyond continuity: institutional change in advanced political economies. 2005(Oxford University Press).
1946 폴 슈마커(Paul Schumaker, 1946-) From Ideologies to Public Philosophies, 2008(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다원적 공공정치를 위한 철학, 조효제, 후마니타스), From Ideologies to Public Philosophies And the Political Theory Reader, 2010
1952 비롤리(Maurozio Viroli, 1952-)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정치 사상사. 볼로냐 대학과 플로렌스 대학 연구소에서 학위. 마키아벨리와 루소 전문가. La théorie de la société bien ordonnée chez Jean-Jacques Rousseau, 1988(이탈리아어로, Jean-Jacques Rousseau e la teoria della società bene ordinata, Bologna, Il Mulino, 1993), Repubblicanesimo, 1999(공화주의, 김경희, 김동규역, 인간사랑, 2006)
1956 씰렌(Kathleen Thelen, 1956-) 여성 미국 정치학자. 비교 정치학자. How Institutions Evolve: The Political Economy of Skills in Germany, Britai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2004)(신원철, 모티브북, 2011)
1960 로빈슨(James Alan Robinson, 1960-) 영국 경제학자, 정치학자.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 (2012)
1967 아제모글루(Kamer Daron Acemoğlu, [daˈɾon aˈdʒemoːɫu]; 1967-) 터키출신 미국 경제학자. 메서츄세츠 공대(MIT) 교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 (2012)(최완규, 시공사, 2012)
*
1871 고토쿠 슈스이(幸徳こうとく 秋水しゅうすい: 행덕추수 1871-1911) 메이지 시대의 언론인, 사상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다. 본명은 고토쿠 덴지로(幸徳こうとく 傳次郎でんじろう). 고토쿠 대역사건(일왕암살음모사건)으로 처형된 12인 중 한 명이다
1885 오스기 사카에(大杉 栄, 대삼영, 1885-1923) 일본 대표적인 노동운동가. 1910년대 일본의 개인주의와 아나키즘 大杉榮(1923) ꠓ生の闘争ꠗ 近代名著文庫刊行会. 大杉榮(1969) ꠓ日本の名著46. 大衫榮ꠗ 中央公論社.
시마다 교코(기田恭子, ?-?), “巴金과 한국아나키스트들”, 광복50주년 기념 한국자유사회운동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한국아나키즘운동의 궤적과 21세기 전망(1995, 국민문화연구소)
모리가와 노부아끼(森川展昭 ?-?) 「조선독립동맹의 성립과 활동에 관하여」, 항전별곡: 조선독립동맹자료, 서울 거름, 1986[이정식, 한홍구 엮음].
(“관내지구 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회편” 하책. 료녕민족출판사. 1987년 9월 출판, 제1336페지)
*
1865 우즈후이/오치휘(吳稚暉, 1865-1953), 중국아나키스트 우징헝(Wu Jingheng) 주음부호(장빙린의 노고에 기반)와 표준화된 국어 발음을 만든 1912~13년 독음통일회의 의장인 중국의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였다. 서태후를 "말라빠진 노파", "매춘부"로 비판하였다고 영국으로 망명, 그리고 1903년 프랑스로 1905년 아나키스트로 선언. 그는 파리에서 리스쩡[이시기에 장런지에, 독일 유학자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년)]을 알았다. 2013년 쑨원의 2차혁명 실패로 프랑스로 망명(리스정도 함께)
[1871 쉬첸(徐謙, 서겸, George Hsu, 1871-1940) 중국의 정치인, 법학자. 현대 중국의 재판 제도에 중대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국민당 소속이었고 크리스트교인이다. 字季龙,教名乔治, 入翰林. // en.Wiki: George Hsu, 許秋煌, 허추황, 1952-, 타이완 정치가. 문화부장관, 영어명칭은 같아도 다른 인물이다.]]
1877 장런지에(Zhang Renjie, 장징장, 張靜江(장정강, Chang Jen-chieh) 1877-1950) 중화민국의 정치인, 금융 기업가. 그는 1900년대 초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일했으며, 그곳에서 평생 친구인 Li Shizeng(리스쩡)과 Wu Zhihui(우즈후이)의 영향으로 초기 중국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습니다. he(張靜江), Li(李石曾), Wu(吳稚暉) and the educator Cai Yuanpei(蔡元培) were known as the fiercely anti-Communist Four Elders of the Chinese Nationalist Party. [중국 아나키스트들은 관료출신으로 반청이면서 반공산주의로서 국민당에 속했다. 이 영향이 우리나라에 없었을까?] ,
1881 리스쩡/이석증(李石曾, 1881-1973) 본명 이욱영(李煜瀛) , 호 확무(擴武), 자 석증(石曾), 중국 생물학자, 아나키스트. 학력 소르본 대학교 파스퇴르 연구소(1902-1905: 콩에 관한) 연구. 1922년, 베이징에서 리다자오[(李大釗. 1889-1927),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등과 함께 비종교대동맹을 창설하여, 과학주의적 반종교주의를 주장하며 반기독교운동에 앞장섰고 이 때문에 국민당 내부에서 드물게 기독교 신자였던 쉬첸((徐謙, 서겸, 1871-1940)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신채호의 천고(天鼓) 발행에 재정지원하였다. 입달학원을 개설하였는데 유자명이 1930년부터 5년간 강의를 맡았다.
1882 장지(張繼, 1882-1947) 아나키즘 잡지 천의보(天義報)(일본동경서 발간, 何殷震. 约1884-约1920)과 劉師培, 1884-1919)에 의해)를 중심으로 활동.
[張繼, 1882-1947), 原名溥,字溥泉, 《民报》编辑兼发行人。1908年1月,因參與日本無政府主義组织金曜会活動, 신해혁명에 가담하고 국공합작을 했으나 1946년이후 국민당의 편에 섰다.]
1884 류스페이(刘师培, 유사배, 1884-1919) 중국 청나라 말 중화민국 초 활동한 혁명가, 유학자, 교육자, 정치인. 자는 신숙(申叔), 호는 좌암(左盦).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및 아나키스트로 알려져 있다.
[1904 바진(巴金, 파금 1904-2005) 본명: 리야오탕(李尧棠, 이요당)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설가, 저술가, 아나키스트이다. 자는 페이간(芾甘, 비감)이다. 루쉰, 라오서 등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필명 '바진'은 러시아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巴枯寧(파고녕), 바쿠닝)과 표트르 크로폿킨(克鲁泡特金(극로포특김), 커루파오터진)에서 유래하였다. - [단주는 巴金 세대들과 소통했다. 아마도 앞 세대 4장로(따거, 대형)들을 류림은 잘 몰랐을 것이다.]
양소전(楊昭全, ?-?), 연변대 교수. 關內地區朝鮮人反日獨立運動資料彙編 (1919-1945年)(上下冊) (중문간체, 1987 초판영인본), 양소전 외, 관내지구조선인반일독립운동자료휘편, 遼寧民族出版社(요녕민족출판사), 1987년 07월 21일
*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 프랑스의 작가, 정치가.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 1933): 1927년 3월-4월까지 중국 상하이를 배경.
'기요'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낭만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핍박받는 중국 인민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혁명의 대열에 뛰어든다. 상하이 폭동을 주도한 그는 결국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받는다. 육체의 고통 앞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회의하던 '기요'는 결국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
'첸'은 가장 과격한 테러리스트다. '기요'가 대중들과의 연대를 통해 혁명을 완수하려고 했다면 '첸'은 적과 동지의 양분법으로 시대에 저항한 고독한 인물이다. 그는 장제스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결국 거사 현장에서 죽음을 맞는다.
'카토프'는 러시아 출신 직업 혁명가로서 의학도이기도 하다. 체포된 '카토프'와 그의 동지들은 차례차례 증기기관차의 시뻘건 불길 속에 던져질 운명에 처한다. '카토프'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청산가리를 공포에 질려있는 동료에게 주고 자신은 산 채로 불길 속에 던져짐으로써, 잔혹하게 불에 타 죽는 운명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구원을 동료에게 양보한다.
***
한인연합전선 추진의 시기별 특성
1919-1923 생성ㆍ수립시기
1919년 4월 11일 헌법제정
1919년 9월 11일 헌법 제1차 개헌
1923-1940 지속ㆍ분열 시기
1923년 1월부터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존폐문제를 두고, 창조파, 개조파, 유지파 등으로 나뉘었다. 결국 독립운동 세력은 정타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유일 대상운동이 전개됨으로서 임시정부를 대체하려는 움직임이에 의해 그 위상이 흔들리기도 했다. (235)
1925년 4월 7일 헌법 2차 개헌
1927년 4월 11일 헌법 3차 개헌
1927년 제3차 개헌에서는 행정부가 의정원의 철저한 감독을 받는 것 외에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민족대당(民族大黨)이 결성될 경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 권력은 민족유일당에 속한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대장정 : 1934년 10월 - 1935년 10월]
1940-1945 진화ㆍ연대 시기.
1940년 10월 9일 제4차 개헌은 주석(主席)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의 형태로 복귀하였다. 수반을 그대로 주석이라고 호칭하였지만, 주석은 대외적으로 국가원수였으므로 대통령중심제의 일면도 가미된 것이다. 주석은 의정원에서 선출하게 하고 권한도 증대시켰다. 그리고 의정원의 상임위원회를 폐지하여 행정부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하였다.
1942년 10월 34차 임시의정원의 개원을 통해 임시정부 민족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의 이념 정당들이 참여한 연합의회를 구성하였다. (237) [한국독립당 30명, 조선민족혁명당 1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2명, 조선혁명자연맹 1명,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1명(유림)]
1943년 10월 조선무정부주의총연맹의 유림은 재정 통일안을 발의했다. 각 정파마다 중국 정부로부터 별도로 지원받던 재정을, 임시정부로 일원화하여 각 정파에 배분하자는 내용이었다. (257)
1944년 4월 22일 5차 개헌은 [아나키스트의 중재로] 임시정부의 6차례 헌법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형태이다. (238) 1944 제5차 개헌에 따른 관제는 국무위원회와 행정각부가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 민족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3대 이념정당 구도를 갖추고, 항일연합전선의 연립정부가 되었다. (274) 총강에는 인민주권과 민주공화정이었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미국은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는데,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8월 9일 나가사키시에 나머지 한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1945년 9월 7일 맥아더[미군정] 포고령,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1945년 9월 16일 창당한 한국민주당은 민족주의자, 전향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등 진보적 인물들도 참여했지만, 대체적을 부일협력자, 산업자본가, 지주 등 일체 치에서 기득권을 유지했던 인문들이 다수였다. (333)
1945년 10월 23일 조선호텔에서 개최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이었다. 그는 1945년 10월 16일 귀국했다.
1945년 11월 23일 오후 김구 등 임정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김구는 죽첨정(경교장) 숙사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과 회견한 다음 기자회견을 하였다. / 1945년 12월 1일 조소앙, 홍진 등 임정 환국 제2진이 군산비행장에 도착 후 서울에 도착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 영국 ·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이다.(Byrnes, Bevin, Molotov)
1946년 5월 8일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1946년 6월 3일에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은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1946 미군정은 1946년 8월 24일부로 제정된, 군정법령 제118호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을 10월 12일 발표했다.
1947년 1월 14일 한국독립단의 주류 김구와 비주류 조소앙 및 독립노농당의 유림이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를 방문했다. 미소공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묻고 반탁운동의 전개를 예고 한 것이다.
1947년 3월 1일 국민의회[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명칭 변경] 전국 대표자 대회에서 임시정부 확대 강화책이 건의되었다. 3월 3일 개최된 긴급 대의원대회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이승만, 부주석 김구를 추대하고 – 중경시기부터 국무위원인 조소앙, 조완구, 조경한, 조성환, 박찬익, 이시영, 유림, 황학수 등을 유임 – 차이석, 김붕준, 김성숙, 김원봉, 성주식, 장건상 등 6인의 결원을 박열, 이을규, 이청천, 김창숙, 조만식, 오세창 등 6인을 국무위원으로 보선하였다. (342)(363-364)
1947년 7월 10일 이승만 중심의 한국민족대표자대회가 발족하자,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 의정원의 계승인 국민의회와 이 조직의 통합을 시도했다. 김구 계열의 통합시도는 1947년 12월 2일 장덕수의 암살로 파국을 맞기까지 지속되었다. (383)
1947년 9월 17깅 마샬 국무부장관은 유엔총최에 참석해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을 언급했다. .. 11월 4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는 한국 임시정부 수립 후 90일이내 미ㆍ소 양군 철수를 규정한 미국의 제안을 승인했다.
1947년 11월 14일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이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어 유엔한국위원단이 설치되었다.
1948년 4월 22일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평양회담 참가파들이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5월 4일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기자회견에서 남북 군정 반대와 미소 양국 즉시 철퇴를 주장했다. (404) .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 총강에 국민주권, 민주 공화정이있다.
(38:23, 55WMA)
**참조* 한.위키
大韓民國臨時憲章宣佈文
神人一致로 中外協應하야 漢城에 起義한지 三十有日에 平和的 獨立을 三百餘州에 光復하고 國民의 信任으로 完全히 다시 組織한 臨時政府는 恒久完全한 自主獨立의 福利로 我子孫黎民에 世傳키 爲하여 臨時議政院의 決議로 臨時憲章을 宣布하노라。
大韓民國臨時憲章
第一條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制로 함。
第二條 大韓民國은 臨時政府가 臨時議政院의 決議에 依하야 此를 統治함。
第三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男女 貴賤 及 貧富의 階級이 無하고 一切 平等임。
第四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信敎 言論 著作 出版 結社 集會 信書 住所 移轉 身體 及 所有의 自由를 享有함。
第五條 大韓民國의 人民으로 公民 資格이 有한 者는 選擧權 及 被選擧權이 有함。
第六條 大韓民國의 人民은 敎育 納稅 及 兵役의 義務가 有함。
第七條 大韓民國은 神의 意思에 依하여 建國한 精神을 世界에 發揮하며 進하야 人類의 文化 及 平和에 貢獻하기 위하야 國際聯盟에 加入함。
第八條 大韓民國은 舊皇室을 優待함。
第九條 生命刑 身體刑 及 公娼制를 全廢함。
第十條 臨時政府는 國土恢復後 滿一個年內에 國會를 召集함。
大韓民國元年四月日
臨時議政院 議長 李東寧
臨時政府 國務總理 李承晩
內務總長 安昌浩
外務總長 金奎植
法務總長 李始榮
財務總長 崔在亨
軍務總長 李東輝
交通總長 文昌範
宣誓文
尊敬하고 敬愛하는 我二千萬 同胞 國民이여, 民國 元年 三月一日 我 大韓民族이 獨立宣言함으로부터 男과 女와 老와 少와 모든 階級과 모든 宗派를 勿論하고 一致코 團結하야 東洋의 獨逸인 日本의 非人道的 暴行下에 極히 公明하게 極히 忍辱하게 我 民族의 獨立과 自由를 渴望하는 思와 正義와 人道를 愛好하는 國民性을 表現한지라 今에 世界의 同情이 翕然히 我 集中하였도다. 此時를 當하야 本政府一全國民의 委任을 受하야 組織되었나니 本政府一全國民으로 더불어 專心코 戮力하야 臨時憲法과 國際道德의 命하는바를 遵守하야 國土 光復과 邦基確固의 大使命을 課하기를 玆에 宣言하노라. 國民 同胞이여 奮起할지어다. 우리의 流하는 一適의 血이 子孫萬代의 自由와 福樂의 價이요 神의 國의 建設의 貴한 基礎이니라. 우리의 人道一마침내 日本의 野蠻을 敎化할지요 우리의 正義一마침내 日本의 暴力을 勝할지니 同胞여 起하야 最後의 一人까지 鬪爭할지어다.
政綱
民族平等 國家平等 及 人類平等의 大義를 宣傳함. 外國人의 生命財産을 保護함. 一切 政治犯人을 特赦함. 外國에 對한 權利義務는 民國政府와 締結하는 條約에 一依함. 絶對獨立을 誓圖함. 臨時政府의 法令을 違越하는 者는 適으로 認함.
大韓民國元年四月日
大韓民國臨時政府
*
대한민국 임시 헌장(大韓民國 臨時 憲章)은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첫 헌법이다.
"신인일치로 중외 협응하여 한성에서 기의한 지 30유여 일(有餘日)에 평화적 독립을 300여 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 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 자손 여민(黎民)에게 세전(世傳)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
제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
제10조 임시 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 임시의정원 임시 정부 명단.
1860 최재형(崔在亨, 1860-1920), 조선의 항일 독립운동가, 러시아 제국의 군인. 일명 최재형(崔在衡)·최도헌(崔都憲)이며,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다. 최재형은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된다.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참여한다.
1868 이시영(李始榮, 1868-1953)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 → 개신교(감리교)
1869 이동녕(李東寧, 1869-1940)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언론인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연안,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암산(巖山).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 대종교.
1870 문창범(文昌範, 1870-1938)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함북 경원 출신, 1919년 2월 1일 만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자 39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부 총장에 피선되었다.
1873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대한제국의 군인, 정치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1875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한민국의 개화파·독립운동가·언론인·정치인·교육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주석.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기독교.
1878 안창호(安昌浩, 1878-1938)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기독교.
1881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대한제국의 종교인·교육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정치가·학자·시인·사회운동가·교육자, 대한민국의 정치가·종교인이다.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