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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맞고 그 후유증으로 죽은 남편
증언자 : 김용님(남)/김귀순(처)
생년월일 : 1937. 7. 7(당시 나이 43세)
직 업 : 짐꾼(현재 사망)
조사일시 : 88. 9
개 요
리어카로 화물짐을 실어다주는 일을 하던 김용님 씨는 5월 19일 공수부대에게 구타당한 후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주사를 잘못 맞아 사망했다.
가진 건 없었지만 행복한 가정
22세 때 결혼을 했는데 부모도 없고, 배움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 시부모를 모시고 구례 산중에서 땅 한 뙈기 없는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러다가 1972년에 남편이 먼저 광주로 나와 호남정기화물 짐배달꾼으로 취직을 하였다. 부모 사랑 없이 자랐던 나는 자식들만이라도 불행하게 안 할 생각으로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4년에 광주로 나왔다. 광주역 근처에 방을 얻어 살았는데 남편의 월급이 너무 적어 형편이 말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막내를 업고 튀밥을 이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더운 여름에도 그렇게 다니다 보니 어린 것의 온몸에 땀띠가 돋아서 더 이상 그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그 뒤 과일을 이고 다니며 대인시장에서 과일장사도 해보았으나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인슈퍼(현재 한미쇼핑) 내에 있는 스낵코너에 취직하게 되었다.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여 악착같이 일하였다. 우리 부부는 가진 건 없었지만 서로 의지하며 재미있게 살았다. 그러다가 5·18을 만난 것이다. 그때 우리는 대인시장 근처에 살고 있었다.
남편의 부상
5월 18일 오후 5-6시쯤, 돌멩이를 몇 개씩 든 학생 2명이 내가 일하던 대인슈퍼 스낵코너로 뛰어 들어왔다. 그 학생들의 차림은 심난했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그 학생들이 서로 싸우다가 들어온 줄 알고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 중 한 학생이 들고 왔던 돌멩이들을 스낵코너 안에 숨겨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다.
"돌을 숨겨줄 수는 있어. 근데 서로 싸우지들 말어! 사이 좋게 지내야지, 그렇게 싸움질하면 못쓰는 거여! 알것제!"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학생들은 계속 바깥쪽을 바라보며 서로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때 밖에서는 이미 공수부대와 학생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에 보니 시꺼먼 군인들이 슈퍼마켓 앞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며 뭐라고 방송을 하고 다녔다. 그러자 그 학생들이 숨겨주라고 부탁했던 돌멩이들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저놈들을 다 죽여버려야 돼!"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광주에 그렇게까지 큰 난리가 일어났는지 몰랐던 고로, "어쩌끄나 잉!" 하면서 그 학생들이 패싸움질하러 가는 줄만 알고 걱정을 했다.
그 이튿날이 돼서야 큰 데모가 일어났는 줄 알았다. 그날(19일)은 대인슈퍼마켓이 문을 열지 않아서 집에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일을 하러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이런 난리통에 무슨 일을 하겠냐면서 못 나가게 말렸다. 그래도 남편은 일을 하든 안 하든 둘러보고만 온다면서 나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 사랑을 못 받고 자랐던 나는 혹시라도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 때 나간 남편은 오후가 되도록 전화도 오지 않았다. 행여나 남편이 돌아오는가 보려고 자주 밖에 나가 보았다.
대인슈퍼마켓 앞 사거리 길목에는 탱크같이 생긴 차가 많이 서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지나가던 버스들이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멈추곤 했다. 한 버스 안에서는 콜라병이랑 장난감 칼 같은 것들을 군인들을 향해 던지며 뭐라고들 소리치곤 했다. 그러는 중에 학생처럼 보이는 한 젊은이가 신호등을 건너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공수부대 한 명이 그 젊은이에게 뭐라고 악을 썼다. 자기네들을 쳐다보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 젊은이를 시커먼 몽둥이 같은 것으로 쳐버렸다. 그것이 총인지 몽둥이인지는 조금 먼 발치에서 보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젊은이가 땅에 푹 쓰러졌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몇 명의 군인이 달려들어 다시 발로 밟아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징그럽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부터는 더욱 남편이 걱정되어 안절부절 못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늦게야 들어왔다. 그때 보니까 허리에 손을 받치고 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어디 다쳤소!" 하고 물어보았다. 남편이 별일 없다고 해서 나는 별일없이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2-3일이 지나서 나 모르게 붕대로 허리를 감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그제야 지난번에 나갔다가 다치고 온 줄을 알게 되었다.
"왜 그러요? 저 번에 나갔다가 다쳤는감만! 어서 말을 해보쑈이!" 하면서 무슨 일인가 다그쳤다. 그제야, "개새끼들이 나를 이래 놨당께!" 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5월 19일 일을 보러 나갔다가 대인시장 옆, 대인슈퍼마켓 앞을 오는데, 학생들이 차양이랑, 돌, 드럼통 등을 길 가운데 포개놓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학생들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하더란 것이었다. 그때 남편은 대인시장으로 통하는 골목에 서 있었다. 도망치는 학생들의 뒤를 보니까 시꺼먼 군인들이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학생들을 쫓아오더라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학생들이 곧 잡혀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학생들이 잡히지 않도록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달려오더니 느닷없이 남편을 내리쳐 버렸다. 그때 허리를 다쳐서 금방 낫겠지 했는데 점점 통증이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한쪽으로 내동댕이쳐져 버렸는데 군인들이 한 중학생을, "저리 비켜!" 하면서 밀어버리니까 픽 쓰러지더니 죽어버렸다. 그러자 대인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하던 아줌마들이 고기 찍는 갈고리를 들고, "저놈 죽여라." 하면서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공수부대가 오히려 쫓겨갔다고 했다.
"나는 살아서라도 왔응께 다행이여. 그래도 그렇게 잔인무도한 놈들이 고기장사 아줌마들은 무서워하드만 잉."
병명도 없이 죽어가는 남편
그제야(20일 정도)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대인시장 건너편 김OO병원으로 갔더니, "아무 이상 없소." 하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의사는 나와보지도 않았다. 내가 사정을 하느라 말을 많이 하자 남편이 나를 쿡쿡 찌르며 공수부대에게 맞아서 다쳤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혹시 병원에서 신고해서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꺼림칙해 얼른 그 병원을 나와버렸다. 곧바로 대인시장 주변에 있는 작은 병원들을 4군데나 찾아갔으나 의사들은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번번이 진찰을 해 주지 않았다.
중앙국민학교 후문 근처에 있던 김OO 병원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진찰을 받기 위해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병원문 앞에서는 공수부대가 총을 겨누고 있어서 바깥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오도가도 못 하고 불안한 가슴을 누르며 앉아 있는데, 그러한 와중에 학생 2명이 병원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더러 좀 숨겨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뭐가 뭔지는 잘 몰랐으나 도망쳐 온 학생들이 불쌍해서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 모퉁이로 돌아가보니까 쓰레기를 담아둔 고무통이 몇 개 있었다. 나는 고무통에 들어 있던 쓰레기를 쏟아버리고는 학생들더러 그 속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위에 박스 등을 쌓아서 쓰레기통인 것처럼 해두었다. 한참 지나서 집에 가려고 밖의 동정을 살펴보니 아직도 병원 주변에 군인들이 있었다. 병원측 사람들에게 집에 가게 문 좀 열어주라고 하자 한참 만에야 문을 열 채비를 했다. 그래서 나갈 채비를 하는데 군인들이 병원 셔터에다 총을 쏴버렸다. 우리는 꼼짝없이 병원에 갇혀버린 것이다. 밤이 늦어서야 병원 후문으로 해서 몰래 빠져나와 집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 뒤로 병원을 다니면서 본 광경인데, 대인슈퍼마켓 근처 높은 건물 2층에서 한 젊은 사람이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밖을 지켜보고 있던 공수부대 한 사람이 총을 집어들면서, "야 이 개새끼야! 안 내려와." 했다. 젊은 사람이 들어가버리니까 군인 두 명이 건물 안으로 쫓아갔다. 곧이어 그 젊은 사람의 머리를 잡아 끌고 와서는 길바닥에 내질러버리는 것이었다. 몸서리가 쳐지는 광경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꼼짝 않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병원에 다니자던 나에게, "집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라도 더 살 텐디 병원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나 죽이것네." 하며 병원 가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병원에는 안 다니고 양약만 사다가 며칠 먹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약을 구할 수가 없어서 붕대만 감고 있었다.
집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5월 26일에 데모가 크게 일어나고, 군인들이 광주사람을 다 쓸어버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래서 그전에 병원에라도 한번 가봐야겠다 싶어서 5월 25일경에 전남대병원에 갔다. 그러나 종합진찰은 커녕 접수도 하지 못했다. 병원에는 약이 떨어져버렸다는 소리도 들렸다.
사방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병원에 즐비해 있는 참담한 환자들을 보고는 나한테, "오메! 저 새끼들(학생) 좀 보소. 어쩌면 저럴 수가 있당가. 나는 환자도 아니네, 환자도 아니여! 가세 가!" 했다. 환자들 중 한 명이 심하게 괴로워하며 악을 쓰고 있었다.
"저 사람들 좀 보게. 팔이 없고 손이 없네. 저놈들 먼저 약을 써야제! 나는 환자 축에도 못 끼것네!"
남편이 서두르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있으면서 붕대를 감고는 '곧 좋아지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병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남편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6월 11일경에 조선대병원으로 갔다. 남편을 입원시켜 놓고는 반찬도 좀 만들고 빨래도 할 겸해서 집에 와서 잤다.
그 이튿날(6월 12일) 아침 11시경에 병원으로 다시 갔다. 그런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성격으로 보면 내가 오는지를 보기 위해 창 밖으로 내다볼 텐데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득 전날밤에 꿈자리가 사납고 해서 어쩐지 마음이 불안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애써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화장실에라도 가셨겠지' 하고 생각했다.
급하게 병실로 갔더니 남편이 정신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인제 오냐'는 말을, "오메! 그세 온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혀가 굳었는지 잘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나는 놀라 물었 다.
"아니 왜 이러요?"
"나는 이제 죽것네, 저놈들이 나를 죽이네."
남편은 병원 사람들을 욕하는 것이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아저씨들에게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물어보니 새벽까지 괜찮았는데 주사를 맞고 그런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진정을 시켜놨는데 오후쯤 되어서 속이 답답하다면서 토하고 난리를 쳤다. 당황해 간호원을 불렀더니 간호원이 나더러 남편이 그 밤을 못 넘길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허리가 아프니 엑스레이를 다시 한 번 찍자고만 했다. 그전까지의 상태로 봐서 '설마 죽으랴' 싶었던 것이다. 설마설마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남편 몸에서 진땀이 흘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흘렸던 것과 같은 진땀이었다. '우리 할머니 돌아가실 때도 저런 진땀을 흘렸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4시쯤 되어서는 산소호흡기를 코에 대었다. 그 후에도 정신이 말짱한 남편이 갑갑했던지 산소호흡기 등을 치워버리라고 했다. 그 뒤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화장실을 가는데 남편을 덮은 홑이불이 자기 발에 닿았다. 그러자 남편이 홑이불에 먼지가 묻었다고 하면서 진땀을 줄줄 흘리면서까지 그것을 터는 것이었다. 남편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링겔주사를 놓으려 해도 바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산소호흡기가 씌워졌다. 겁이 덜컥 났다. 부모 정도 못 받고 컸는데, 나를 제일로 사랑해 주던 남편마저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남편이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5층에서 떨어져버리려고 하고 있는데, 흰 가운을 입은 병원 사람이 나를 잡고 말렸다.
"아줌마가 먼저 죽으면 어쩔려고 그러세요. 아저씨가 죽을 때까지 기어이 지켜 보셔야죠. 저러다가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사람도 많이 있어요." 하며 나를 설득하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의사들이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며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거나 맨날 주사만 놓더니 결국 남편이 6월 14일 새벽 5시경에 먼나라 사람이 되어버렸다.
피해의식 때문에 신고도 못 하고
당시 우리 큰아들인 재중이는 전일실업고등학교(현 서강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20일쯤에 선생님이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렸다며 일찍 집에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길을 가다가 누가 불러도 대꾸도 하지 말고 무조건 도망가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다가 어느 큰 네거리에 들어섰는데 뒤에서 어떤 군인이 불렀다. 무심코 자전거를 멈추고 학생증을 보여준 다음 돌아서 오려는데 뒤에서 다른 군인이 또 불렀다. 그 순간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재빨리 자전거를 몰고 도망을 쳤는데 최루탄이 날아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자전거가 그대로 전봇대에 부딪혀서 안경도 깨져버렸다. 그때 누가 달려들더니 아들의 옆구리를 차버리더라고 했다. 그런데도 살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도망쳐서 집에 왔다고 한다. 그 뒤 아들은 자전거를 타고 구례 큰집으로 피신해 버렸다. 그때가 바로 우리 부부가 처음 병원을 다니던 20일경이었다. 문화동 교도소 근처에서는 사람만 보면 총을 쏴버린다는 소문이 있어서 나는 아들을 구례로 보내놓고 무척 속을 태우기도 했다.
남편이 죽자 그전에 구례에서 돌아와 있던 큰아들이 시골로 연락을 해 친척들이 올라왔다. 그래서 14일 당일 출상으로 구례 선산에다 매장했다. 나는 아저씨가 죽은 이유는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 놔서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허리 좀 다쳤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죽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아저씨의 시체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병원측에서는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화장을 하려고 병원차 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나는 시골에 선산이 있는데 왜 화장을 하냐고 말렸다. 영안실로 옮겨와 시체를 보니 더욱 주사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체의 온몸에 박콩만한 수포가 툭툭 불거져 있었고, 그 수포 안에는 시커멓도록 퍼런 멍물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영안실 기록에는 결핵이 사망 원인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서 사망 원인을 확실히 알고 싶어 사망진단서를 떼보았다. 거기에는 골암(뇌암)이라고 적혀 있었다. 엑스레이 결과 허리가 내려앉았다는 것도 있었다. 고기도 얼거리가 있는 법인데, 남편은 허리가 납작 깨진 것처럼 내려앉았다고 했고 그 이전에 뇌암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사망 원인을 꼭 밝혀보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죽은 사람 몸에 칼을 댈까봐 두려워 그냥두었다. 광주로 이사해 올 때 시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왔던고로 사실 광주 와서 남편 죽었다는 소리도 듣기 싫었던 것이다. 남편 장례식을 마친 뒤부터는 식당(스낵코너)에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넋을 놓고 있다가 음식을 곧잘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은 마음을 안정한 뒤에 자기 가게를 내든지 포장마차를 하든지 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 뒤 구역 뒤에서 4년 동안 포장마차를 하면서 애들 학교도 보내고 살림도 꾸려 나갔다. 그런데 연탄가스를 한 달에 세 번이나 마셔 눈도 잘 안 보이는 등 힘이 들어 포장마차를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무등경기장 앞에 있는 성신식당에 약 3년간 다니다가 그것도 힘이 들어 그만두었다. 조금 쉬다가 생선장사, 참기름장사 등을 해보았지만 그것도 잘 안 되었다.
지금은 아모레화장품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5·18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신고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그러나 사망 사실을 밝히면 또다시 피해를 입을까봐 신고를 하지 않고 쉬쉬하고 있었다. 1988년도에 또 신고를 하라고 해서 보상은 그만두고라도 죽은 정확한 이유라도 알기 위해 신고할 준비를 하였다. 내가 신고하겠다고 하자 큰아들 재중이는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신고를 하지 말자고 했다.
"신고를 해서 역적으로 몰리면 어떻게 할라요. 지금은 이렇게 잘 해준다고 하지만 법이 바뀌면 어쩔지 모르니까 신고하지 맙시다. 우리 평범하게 삽시다. 법이 바뀌면 우리까지 복잡하게 되어 취직도 어려울지 모르니, 신고하려면 우리를 호적에서 빼버리고 하씨오!" 했다.
"아빠가 왜 역적이다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역적이냐? 학생들 못 잡히게 막아선 것뿐인디!"
내가 이렇게 우겨서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조사.정리 김옥실)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