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수의 카자흐스탄 견문록 - (2차카작행95) 우슈또베의 설화 채록
마침내 우슈또베를 찾아갔습니다. 원동에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이 가장 먼저 떨어져 정착한 곳입니다. 함께 카작말을 공부하는 안 선생이 안내해 주겠다고 해서, 알마티 사이란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버스도 있지만 7시간을 가야 하는 데다(기차는 12시간), 승객이 다 채워져야만 출발한다고 해서, 조금 돈은 더 들지만 그렇게 간 것입니다. 합승해서 갔기 때문에, 한 사람당 1000 텡게씩 내고 딸띄꾸르간까지 간 다음, 다른 택시를 300텡게에 잡아타고 갔습니다. 딸띄꾸르간까지 280키로미터, 가는 도중에 쉬엄쉬엄 사진도 찍고 하느라 4시간쯤 걸려 딸띄꾸르간에 도착했고, 딸띄꾸르간에서 다른 택시로 갈아타 30여분을 더 달려 어둑어둑할 때 우슈또베에 도착했습니다.
안 선생의 종씨라는 고려인과 만나기로 한 제르젠스키 슈꼴레(초중등통합학교)에 들러, 기다리는 동안에, 그곳 한국어 교사의 안내로 한국어 수업하는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고려인은 물론 전교생에게 의무적으로 한국어 수업을 듣도록 하는 유일한 학교랍니다. 어찌나 열심히 가르쳤는지 금년도에 알마티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거의 싹쓸이를 했다고 합니다. 지도하는 고려인 여교사의 인상이 참 정답고 푸근했습니다. 작년까지는 코이카 단원들이 와서 봉사하여 수월했는데, 임기가 차서 돌아간 뒤, 후임이 오지 않아, 혼자 전담하느라 힘들다며, 한국에서 강사들이 와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안 선생의 종씨 안 블라디미르 씨(51년생)가 나타나 우리를 태우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두 딸과 막내아들이 모두 알마티 아구대학에 다니기 때문에 내외만 살고 있었고, 안 씨는 시청 공무원이었습니다. 저녁밥이 나왔는데 우리를 닭도 잡고 그 닭이 낳은 알도 놓여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안 씨와, 쉬운 것은 우리 말로, 어려운 말은 안 선생이 통역해서 11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려인이 70퍼센트를 차지하던 이곳이지만 분리독립 이후 원동으로 혹은 도회지로 이주해서, 현재는 10퍼센트 정도만 산다고 했습니다. 살기 어려운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 타지기스탄 고련인들이 그 빈자리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원동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인간의 귀소본능이 얼마나 무서운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나중에 확인해 보니, 한국 기업체에서 원동에 정착촌을 조성해 주는 등 지원을 하니 더욱 더 많이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분리독립 이전에는 일자리도 많고, 농사 지어 남은 것을 국가에서 사주어 살기가 좋았는데(특히 70년대 초반까지가 가장 살기 좋았다고 하는데, 아마 러시아 경제가 미국을 능가하던 때가 아닌가 함), 지금은 살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권력을 지닌 사람들, 특히 공장장을 비롯해 일부만 벼락부자가 되어 있고, 대부분은 못하다고 했습니다. 고려인들이 처음 와서 살았다는 움집(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얹어서 거주하던 집)이 보존되어 있는지 물었더니만, 제대로는 아니고 그 터만 알 수 있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고려인들만의 무덤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오전, 빵과 차이(차)와 계란찜만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한참을 더 이야기 나누다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만한 할머니 댁을 찾아갔습니다. 안 씨의 장모님인 김나자(1934년생) 할머니가 리정숙 할머니(1926년생) 댁으로 인도해서 들어가니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은 채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3남매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44세,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딸은 교사를 하는데,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12세에 이곳으로 오신 분이라, 올 때의 경험담을 해달라고 했더니, 의외의 말을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루불화를 많이 가지고 탔기 때문에, 기차가 설 때마다, 그 역에서 먹을 것을 사다 먹으면서 왔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나자, 박따냐(31년생) 할머니가 “고생했다고 해”라며 간섭합니다. 그분들은 너무 어려서 아무런 기억이 없을 나이였겠기에, 아마도 그 부모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따라 “고생스러웠다”고 표현하는 듯했고, 리정숙 할머니는, 어린이의 느낌으로,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왔기에 느낀 그대로 “고생스러운 줄 몰랐다”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같은 경험이라도 세대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우리들의 가난했던 유년시절이 그저 아름답게만 추억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리정숙 할머니도, 적어도 기차로 실려오는 동안은 “일 없었”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은 이곳이 읍내이고 집들도 많지만, 당시에는, 이곳이 허허벌판이었다고 했습니다. 물도 다르고(원동에서는 싱거웠는데 이곳은 짠 맛), 기후도 다르고(원동은 추운데 이곳은 덥고 바람이 많음) 해서, 어른도 많이 죽었지만 특히 나이어린 아이들이 숱하게 죽어, 반쯤 죽었답니다. 그래도 카작인들이 움집도 물려주기도 하고, 먹을 것도 주고 해서 겨울을 버텼다고 합니다. 카작인들이 물려준 움집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각자 땅을 파고 지붕을 얹어 살았답니다. 나라에서도 밀가루를 주고, 그후에는 목재를 주어, 집을 짓고 살았으며, 이윽고 농사도 지으면서 잘 살게 되었다 합니다.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다음, 어른들한테서 옛날이야기 들은 것 없느냐고 했더니만, 처음에는 딱 잡아뗐습니다. 부모들이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고 경황이 없어서 옛날이야기해 줄 겨를도 없고, 글도 읽지 못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있다 해도 그분들이 다 상새나서(죽어서)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20년전에 왔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 만난 우슈또베 출신 리스타스(스타니 슬라브)가 전한 우슈또베의 풍경과는 상반되는 진술이었습니다. 그 순간 당황했고 헷갈렸지만, 작전을 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분들의 기억을 자극하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이라며 네 번째로 <아기장수설화>를 구술하자, 비로소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내용은 좀 다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여 요청하자, 어머니가 아기장수의 날개를 가위로 잘라 버렸고, 그래서 아이는 머저리가 되고 집안은 망했다고, 부모가 깨지 못해서 그렇다는 논평까지 곁들여 구술했습니다. 이어서 아버지가 들려주었다는 <장수들 이야기>를 단편적이나마 들려주었고, 도깨비 이야기는 안 들었느냐니까, <이사가라고 알려준 집신령 이야기>를 온전하게 구술하였습니다. 실화 성격의 <아무개 할머니가 다리를 절게 된 사연>까지 들었는데, 돌아갈 시간도 다 되어 가는 데다, 안 씨의 부인이, 돼지막에서 돼지가 도망치려 한다며 빨리 오라는 호출전화를 하는 바람에, 아쉽지만, 2000년도에 이곳 작곡가가 창작했다는 노래(강제이주민의 과거경험과 희망을 담은 노래)를 듣고는 집을 나왔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더 찾아갈 생각입니다. 왜 그 할머니는 이야기가 없다고 잡아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거짓말에 불과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는 게 창피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안 씨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는데, 안 씨가 러시아로 뭐라뭐라 말하다가 막 웃습니다. 무슨 말인지 안 선생한테 물으니, 그 누나한테 들었던 옛날이야기라면서 구술했다고 했습니다. 가난한데 아이만 자꾸 많아지는 집안에서, 더 이상 부모가 합방하지 못하게 하자고 아들들이 의논하여, 밤마다 부모의 동태를 감시하고, 낮에도 따라다니며 감시했다는 우스개 이야기였습니다. 이 분도 전혀 옛날이야기 모른다고 하더니, 내가 리정숙 할머니 만나서 이야기판 벌이는 현장을 지켜보고는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단하게 살아오느라 오랜 시간 동안 잊었던 이야기문화가, 러시아로 번역된 형태지만, 그렇게 예기치 않게 내 귀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 누나한테 고려말로 들으며 재미있어 하던 그 이야기를, 이제 우리 말은 많이 잊어 버린 채,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능숙한 러시아어로 구술하되, 중요한 대목(대화 부분)에서는 우리말 그대로 하면서 웃음짓는 안 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내 가슴에 밀려 왔습니다. 내가 안 씨라 해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딸띄꾸르간에서 다시 알마티 가는 일행을 기다렸다가 출발했습니다. 시간이 없어, 움집터는 둘러보지 못하고, 고려인 무덤도 먼 발치에서 사진만 찍고 말았습니다. 확대해서 보니, 둥그런 봉분이 확실한 우리식 무덤입니다. 리 스타스 말로는, MBC에서 97년도에 <고려인마을>이라는 다큐를 촬영하면서 이곳의 모든 것을 담아갔다니, 귀국하면 그 테이프를 구해서 봐야겠습니다. 다시금 끝없이 펼쳐진 스탭평원,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이며 말이며 소들,말탄 채 이들을 지키는 목동들을 실컷 구경하며 돌아왔습니다. 설화 채록의 아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절감한 우슈또베 나들이였습니다. 이제는 알마티에 거주하는, 몇 안되는 80대 고려인 노인들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해야겠습니다. 정동감리교회, 시온교회, 고려장로교회에 한두분씩 계시다는 정보, 소중히 활용해야겠습니다. 아주 드물겠지만, 우슈또베 출신인 40대의 리스타스처럼,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만 있으면 더욱 희망적인 일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