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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西南方의 智慧菩薩
爾時에 智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1) 勸請
我聞最勝敎하고 卽生智慧光하야
普照十方界하야 悉見一切佛이로다
그때 지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는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곧 지혜의 빛을 내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모든 부처님을 다 보았네
*
서남방(西南方)의 지혜보살(智慧菩薩): 서남방 지혜보살의 찬탄
*
이시(爾時)에
지혜보살(智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권청(勸請): 자신을 이끌어 대중에게 권하다
*
아문최승교(我聞最勝敎)하고 : 내가 최승의 가르침을 듣고.
여기 나왔다. 화엄경은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다. 이것을 듣고
즉생지혜광(卽生智慧光)하야: 곧 지혜의 빛을 내서
보조시방계(普照十方界)하야 : 시방 세계를 환히 비춰 보니
실견일체불(悉見一切佛)이로다:일체불을 다 보는도다. 처처에 부처님 아닌 곳이 없고 사사에 불공 아닌 것이 없더라. 행주좌와 온갖 행위가 불사 아닌 것이 없다. 산천초목이 다 불성이고 그대로 법신인 비로자나불이다.
(2) 人執
此中無少物이요 但有假名字니
若計有我人이면 則爲入險道로다
이 가운데 작은 물건도 없고
단지 거짓이름만 있으니
만약 나와 남이 있다고 생각하면
곧 험한 길에 떨어지리라
*
인집(人執) :인집을 말하다
*
차중무소물(此中無少物)이요: 이 가운데는 조그마한 사물도 없고
단유가명자(但有假名字)니: 다만 거짓 명자만 있을 뿐이다. 산천초목이니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일체 명자가 거짓 명자다. 임시방편으로 이름 붙여놓은 것이다.
어린 아이를 막 낳으면 명이 길라고 개똥이라고 이름을 짓는데 어른이 되어 사회인이 됐는데도 ‘개똥아’ 라고 부를 수는 없다. 거짓 명자다.
약계유아인(若計有我人)이면: 만약에 아상 인상, 나다 너다 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계교를 할 것 같으면
즉위입험도(則爲入險道)로다: 곧 험한 길로 들어선다. 너다 나다 하는 것이 있다면 벌써 거기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천 가지 만 가지 온갖 상이 일어나서 인아상을 다투게 되고, 많다 적다 하는 것도 찾고 온갖 것이 다 생겨서 세상사의 가시덩쿨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3) 法執
諸取着凡夫가 計身爲實有하나니
如來非所取라 彼終不得見이로다
此人無慧眼하야 不能得見佛일새
於無量劫中에 流轉生死海로다
有諍說生死요 無諍卽涅槃이니
生死及涅槃을 二俱不可得이로다
若逐假名字하야 取着此二法하면
此人不如實이라 不知聖妙道로다
若生如是想호대 此佛此最勝이라하면
顚倒非實義라 不能見正覺이로다
모든 집착하는 범부들이
몸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니
여래는 취할 바가 아니라
저들은 마침내 볼 수 없으리
이 사람은 지혜의 눈이 없어
능히 부처님을 보지 못할새
한량없는 겁 가운데
생사의 바다에 유전(流轉)하리라
다툼이 있어 생사(生死)라 말하고
다툼이 없으면 곧 열반이라
생사와 열반을
두 가지 다 얻지 못하네
만약 거짓이름을 따라서
이 두 가지 법에 집착하면
이 사람은 실답지 못하여
성인의 묘한 도리 알지 못하리
만약 이러한 생각을 내어
이 부처님이 가장 수승하다 하면
전도되어 참 뜻이 아니라
능히 정각을 보지 못하리라
*
법집(法執):법집을 말하다
위에는 인집이고 여기는 법집이다.
*
제취착범부(諸取着凡夫)가 : 무엇이든 취해서 집착하는 범부들이
계신위실유(計身爲實有)하나니: 몸이 실로 있음을 계교하나니. ‘컵이 본래 깨져있다’‘우리 육신이 본래 내가 없는 몸이다’ 이렇게 알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있다’고 알아서 어디 탈이 나도 안 되고 무너져도 안되고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당해도 안되는 존재라고 집착하고 계산하고 있나니
여래비소취(如來非所取)라 : 여래께서는 취할 바가 없음이라.
피종불득견(彼終不得見)이로다:그는 마침내 그러한 것을 보지 못하도다.
금강경에서는 ‘사상(四相)이 있으면 집착하라’‘그런데 본래 무아상이고 무인상이며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다. 본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꿰뚫어 보면 없다. 우리 중생들은 어리석어서 없는데도 허망하게 환영을 가지고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참 속터지는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너무 애석한 일이다. 실재하지 않는 환영을 가지고 있다고 고집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거의가 그렇다.
*
차인무혜안(此人無慧眼)하야: 이 사람은 혜안이 없어서
불능득견불(不能得見佛)일새: 능히 깨달음의 경지를 보지 못할새. 불(佛)을 그렇게 해석하는 게 좋겠다. 능히 깨달음의 경지 깨어있는 눈이 되지 못한다.
어무량겁중(於無量劫中)에 :
유전생사해(流轉生死海)로다: 생사의 바다에 유전함이로다.
*
유쟁설생사(有諍說生死)요 :쟁이 있으면 생사를 말하게 된다. 쟁(諍)이란 다툼, 갈등, 너 나, 있다 없다고 하는 상대적인 관계를 말한다. 갈등이 있으면 생사를 이야기 하게 되고
무쟁즉열반(無諍卽涅槃)이니: 너니 나니 그런 갈등이 없으면 그대로 열반이다. 그래서 법성게에서는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다, 생사와 열반이 서로 함께 하고 있다, 하나다’라고 하였다. 공화국이라는 말도 있는데 공화는 한덩어리 라는 말이다.
생사급열반(生死及涅槃)을 : 생사의 열반을
이구불가득(二俱不可得)이로다: 둘 다 가히 얻을 수 없더라. 따로 따로 존재해야 얻을 수 있는데 한덩어리기 때문에 따로 얻을 수가 없다.
우리 중생은 따로 따로 있는 것으로 밖에 못 보는 것이니 거기에 갈등하고 다툼이 있는 것이다.
*
약축가명자(若逐假名字)하야 : 만약에 거짓 명자를 좇아와서
취착차이법(取着此二法)하면: 이 두 가지 법을 취착할 것 같으면. 생사와 열반 이 두 가지를 취해서 집착할 것 같으면
차인불여실(此人不如實)이라 : 이런 사람은 진실치 못하다. 그 견해가 실답지가 못해서 금세 무너져 버린다. 있다 없다 생사와 열반을 따로 따로 떼놓고 보는 그 소견이 며칠이나 가겠는가.
부지성묘도(不知聖妙道)로다 : 성스럽고 미묘한 도리를 알지 못하는 도다.
화엄경은 바로 이 성스럽고 미묘한 도리인 성묘도를 일깨워 주는 가르침이다.
*
약생여시상(若生如是想)호대: 만약 이와 같은 생각을 내되
차불차최승(此佛此最勝)이라하면: 이것은 부처님이고 이것은 또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전도비실의(顚倒非實義)라 :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헛것을 보는 것이며 환영을 보는 것이다. 실다운 뜻이 못된다.
불능견정각(不能見正覺)이로다 : 바른 깨달음을 능히 보지 못한다. 제대로 아는 것이 못된다.
(4) 開悟
能知此實體의 寂滅眞如相하면
則見正覺尊이 超出語言道로다
言語說諸法이면 不能顯實相이요
平等乃能見이니 如法佛亦然이로다
正覺過去世와 未來及現在하사
永斷分別根이실새 是故說名佛이로다
능히 이 실체의
적멸한 진여의 모습을 알면
곧 정각존(正覺尊)이
말[語言]의 길에서 벗어났음을 보리라
말로서 모든 법을 말하면
능히 참 모습 나타낼 수 없고
평등한 데서라야 능히 보나니
법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다네
과거세상 미래세상
현재 세상을 바로 깨달아
분별하는 뿌리를 영원히 끊을 새
그런 고로 이름을 부처라 하네
*
개오(開悟): 열어서 깨달음을 말하다
*
능지차실체(能知此實體)의 : 능히 이 실체의
적멸진여상(寂滅眞如相)하면: 적멸진여상을 알게 될 것 같으면. 적멸진여상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곧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것이다.
즉견정각존(則見正覺尊)이 :정각존은 부처님이다. 그야말로 바르게 깨달은 분, 그 사람은
초출어언도(超出語言道)로다: 언어의 길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소견과 똑같아 지는 것이다.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것이 곧 적멸한 모습을 아는 것이다. 적멸한 모습이 진여상이다. 실체, 적멸, 진여상이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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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설제법(言語說諸法)이면 : 말로써 모든 법을 설하는데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불능현실상(不能顯實相)이요: 능히 실상을 드러내지 못한다. 말만 좇아가다 보면 말너머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불교에서 ‘말의 낙처도 모르고 말만 좇아간다’는 말을 참 잘한다. 사석에서 이야기 하다가도 말이 딸릴 만하면 ‘말만 좇아간다. 낙처를 알아야지’ 라고 한다. 말의 의미가 떨어지는 곳, 돌아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여기도 그 말이다. 언어로써 제법을 설할 것 같으면 실상을 드러내지 못한다.
평등내능견(平等乃能見)이니 : 평등해서 능히 볼 수 있나니
여법불역연(如法佛亦然)이로다: 불법과 같이 또한 그러함이다.
*
정각과거세(正覺過去世)와 : 과거세와 그리고
미래급현재(未來及現在)하사: 미래와 현재를 바르게 깨달아서
영단분별근(永斷分別根)이실새: 영원히 분별의 뿌리를 끊었을새
시고설명불(是故說名佛)이로다: 그런 까닭에 부처라고 이름한다. 부처라고 설명한다.
8, 西北方의 眞實慧菩薩
爾時에 眞實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1) 饒益衆生
寧受地獄苦하야 得聞諸佛名이언정
不受無量樂하야 而不聞佛名이로다
所以於往昔에 無數劫受苦하야
流轉生死中은 不聞佛名故로다
그때 진실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한량없는 즐거움 받으며
부처님 명호 아니 듣지 않으리
까닭인즉 지난 옛적에
수없는 겁 동안 고통받으며
생사 가운데 유전함은
부처님 명호 듣지 못한 까닭이네
*
서북방(西北方)의 진실혜보살(眞實慧菩薩): 서북방 진실혜보살의 찬탄
*
이시(爾時)에
진실혜보살(眞實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요익중생(饒益衆生):중생을 이롭게 하다
*
영수지옥고(寧受地獄苦)하야 : 차라리 지옥의 고통을 받아서
득문제불명(得聞諸佛名)이언정: 지옥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이름을 얻어들을지언정
불수무량낙(不受無量樂)하야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지 아니해서
이불문불명(而不聞佛名)이로다: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다. 차라리 고통 속에 있으면서 부처의 이름을 듣는 게 낫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낙을 누리는게 된다. 부처의 이름을 들어야 비로소 한량없는 낙을 받는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
소이어왕석(所以於往昔)에 : 그런 까닭에 왕석에
무수겁수고(無數劫受苦)하야: 한량없는 겁 동안 고통을 받아서
유전생사중(流轉生死中)은 : 생사중에 유전하는 것은
불문불명고(不聞佛名故)로다: 부처님의 이름을 듣지 못한 까닭이다.
결국은 부처님의 이름을 들어야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 了妄證眞
於法不顚倒하고 如實而現證하야
離諸和合相하면 是名無上覺이로다
現在非和合이며 去來亦復然하니
一切法無相이 是則佛眞體로다
若能如是觀 諸法甚深義하면
則見一切佛의 法身眞實相이로다
법에 전도되지 아니하고
여실히 나툰 대로 증득하여
모든 화합한 모양 여의면
이 이름이 위없는 깨달음이네
현재는 화합한 것이 아니며
과거 미래 또한 다시 그러하니
온갖 법이 모양이 없으면
이것이 곧 부처의 참된 체성이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한다면
모든 부처님
법신의 진실한 모양 보게 되리라
*
요망증진(了妄證眞):망을 깨닫고 진실을 증득하다
*
어법불전도(於法不顚倒)하고 : 법에 대해서 전도치 아니하고
여실이현증(如實而現證)하야: 여실하게 환하게 증득해서
이제화합상(離諸和合相)하면 : 모든 화합상을 떠날 것 같으면
시명무상각(是名無上覺)이로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높은 깨달음이다.
*
현재비화합(現在非和合)이며: 현재 화합도 아니며
과거역부연(去來亦復然)하니: 과거와 미래도 또한 다시 그러하니
일체법무상(一切法無相)이 : 일체법이 형상없는 것이
시즉불진체(是則佛眞體)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부처님의 몸이다.
*
약능여시관(若能如是觀) : 이와 같이
제법심심의(諸法甚深義)하면: 제법의 깊고 깊은 도리를 관찰하게 된다면
즉견일체불(則見一切佛)의
법신진실상(法身眞實相)이로다: 법신 진실상을 곧 보게 되는도다.
(3) 正見名佛
於實見眞實하고 非實見不實하야
如是究竟解일새 是故名爲佛이로다
진실에는 진실함을 보고
진실이 아닌 데는 진실 아님을 보나니
이와 같이 끝까지 이해할새
그런 고로 이름이 부처라네
*
정견불명(正見名佛): 깨달음으로 비춰보다
바로 봐야 부처라고 이름한다.
*
어실관견진실(於實見眞實)하고 : 사실에 있어서 그 사실의 진실을 보고
비실견부실(非實見不實)하야: 진실이 아닌 데 있어서는 진실이 아닌 것을 본다.
여시구경해(如是究竟解)일새 : 이와 같이 궁극의 끝까지 이해할새
시고명위불(是故名爲佛)이로다: 이러한 까닭에 이름이 부처더라.
(4) 非覺名覺
佛法不可覺이라 了此名覺法이니
諸佛如是修일새 一法不可得이로다
知以一故衆이며 知以衆故一이니
諸法無所依하야 但從和合起로다
無能作所作이라 唯從業想生이니
云何知如是오 異此無有故로다
一切法無住라 定處不可得이니
諸佛住於此하사 究竟不動搖로다
부처님 법은 깨달을 수 없는지라
이것을 아는 것이 법을 깨달음이니
모든 부처님 이와 같이 닦았을 새
한 법도 얻을 수 없네
하나로써 여럿을 알고
여럿으로써 하나를 아나니
모든 법이 의지한 데 없어
단지 화합을 좇아 일어나네
짓는 이도 지을 것도 없고
오직 업의 생각을 좇아 생김이니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이것이 아니고는 없는 까닭일 새
온갖 법이 머무는 데 없어
정해진 곳이 없으니
모든 부처님이 여기 머물러
끝까지 동요치 않네
*
비각명각(非覺名覺):불법은 깨달음이 아니나 깨달음이라고 한다
*
불법불가각(佛法不可覺)이라 :불법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달을 수 없으니
요차명각법(了此名覺法)이니: 이러한 것을 요달하면 이름이 각법이다. 깨닫는 법이다.
제불여시수(諸佛如是修)일새 : 모든 부처님은 이와 같이 닦았을새
일법불가득(一法不可得)이로다: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더라.
*
지이일고중(知以一故衆)이며 : 하나를 아는 까닭으로 많은 것이고
지이중고일(知以衆故一)이니: 많은 것을 아는 까닭으로 하나다.
제법무소의(諸法無所依)하야: 모든 법은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단종화합기(但從和合起)로다: 다만 화합으로부터 일어난다. 하나와 많은 것이 어디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
무능작소작(無能作所作)이라: 능작과 소작도 없다.
유종업상생(唯從業想生)이니: 오직 우리 업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능작 소작은 주관과 객관이다.
내 마음이 저 산천을 만들었는가, 산천이 있어서 내 마음이 그것을 이해하는가. 흔히 일체유심조라고 해서 불교를 처음 공부하면 저 산천초목도 내 마음이 만들었다고 한다.
능히 짓는 것은 능작이고 지어질 바는 소작이다. 능작과 소작은 오직 업이라고 하는 생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운하지여시(云何知如是)오: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가.
이차무유고(異此無有故)로다: 저것과 이것이 있음이 없는 까닭이다. 능작 소작 이것이 다 없음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의 원리를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하고 피유고차유(彼有故此有)하다’‘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설명은 사물을 예로 들면서 설명해야 한다. 말로만 설명하면 이해가 안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있음으로 여러분이 있고, 여러분이 있음으로 내가 있다. 여러분들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여러분들이 없다. 책이 있음으로 책 뚜껑이 있고 책 뚜껑이 있음으로 책이 있다. 이런 식으로 지적하며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된다.
*
일체법무주(一切法無住)라: 일체 법은 머묾이 없음이라.
정처불가득(定處不可得)이니: 정해진 곳이 없어서 무유정법이다. 기가 막힌 구절이다.
금강경에서 최고가는 구절인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무유정법, 여래가 설한 고정된 법이 없다고 하는 것이 여기 정처불가득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제불주어차(諸佛住於此)하사 : 모든 부처님이 여기에 머물러서
구경부동요(究竟不動搖)로다: 구경에 동요함이 없더라.
9, 下方의 無上慧菩薩
爾時에 無上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1) 無上爲名
無上摩訶薩이 遠離衆生想하야
無有能過者일새 故號爲無上이로다
그때 무상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무상혜보살마하살이
중생의 생각을 멀리 여의어
그보다 능히 지날 자가 없을새
고로 이름이 위없음이라네
*
하방(下方)의 무상혜보살(無上慧菩薩): 하방 무상혜보살의 찬탄
*
이시(爾時)에
무상혜보살(無上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무상위명(無上爲名): 자기의 이름을 해석하다
무상이 이름이 된다.
*
무상마하살(無上摩訶薩)이 :가장 높은 보살마하살이.
원리중생상(遠離衆生想)하야: 중생상을 멀리 떠나서
무유능과자(無有能過者)일새: 능히 그를 지나가는 사람이 없을새
고호위무상(故號爲無上)이로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가장 높다고 해석하면 더 간단한 번역이다.
나는 늘 ‘무상(無上)’을 ‘가장 높은’이라고 해석한다. 무상은 꼭 그렇게 해석해야 제대로 해석이 된다.
(2) 諸佛所得
諸佛所得處가 無作無分別하시니
麤者無所有며 微細亦復然이로다
모든 부처님 얻은 곳
지음도 없고 분별도 없어
거친 것도 없고
미세한 것도 또한 다시 그러하네
*
제불소득(諸佛所得): 안으로 증득한 덕을 말하다
*
제불소득처(諸佛所得處)가: 모든 부처님이 얻었다고 하는 것이
무작무분별(無作無分別)하시니: 지음도 없고 분별도 없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중생과 아무런 차별도 없다.
추자무소유(麤者無所有)며 : 거친 것, 큰 것도 없고
미세역부연(微細亦復然)이로다: 미세한 것도 없다.
철저히 우리가 살펴봤지만, 도인이나 큰스님 종사들은 그냥 사람일 뿐이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남방불교에서는 아라한을 자꾸 이야기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사람일 뿐이다.
추자도 무소유고 미세한 것도 역시 그렇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아무 한 것이 없고 차별도 없으며 분별도 없다.
이와 같이 철저히 인간의 근본을 드러냄과 동시에 사람은 본래부터 알든 모르든 최고의 경지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서 보여준 가르침이 화엄경이다.
이것은 조작된 것이 없다. 아무것도 만들고 달라지고 변화시키고 조작된 것이 없다.
영가스님은 증도가에서 ‘부처를 구하는데 공을 베풀어서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구불시공조만성(求佛施功早晩成)가’ 라고 하였다. 본래 부처밖에 없는 것이다. 공을 베풀어서 닦아서 부처되는 길은 없다. 진짜 부처는 수행해서 이루어지는 부처가 아니다. 그렇게 되는 부처는 시간이 가면 무너진다. 시간 가서 무너지고 변하는 것이 무슨 부처인가.
(3) 諸佛所行
諸佛所行境이여 於中無有數라
正覺遠離數하시니 此是佛眞法이로다
모든 부처님 행하시던 경계
그 가운데는 수효도 없어
정각(正覺)은 수효를 멀리 여의시니
이것이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라네
*
제불소행(諸佛所行): 경계 비춤을 밝히다
*
제불소행경(諸佛所行境)이여 : 모든 부처님이 경계여
어중무유수(於中無有數)라: 그 가운데 수가 없다.
정각원리수(正覺遠離數)하시니 : 정각이 수를 멀리 떠났으니
차시불진법(此是佛眞法)이로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짜 법이다.
법수라고 하는 책이 있다. 온갖 숫자가 나열된 두꺼운 사전이다. 52위에는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 이런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런 것이 전부 숫자에 해당되는 법문이어서 법수사전에 나온다.
그런데 부처님의 행한 바 경계에는 그런 숫자가 없다. 중생들이 하도 어리석으니까 그런 숫자를 가설해 놓은 것이다.
정각원리수 하시니 차시불진법이다. 화엄경은 정말 할소리를 다 한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를 적나라하게 중생의 근기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놓은 것이 화엄경이다.
(4) 除相現理
如來光普照하사 滅除衆闇冥하시니
是光非有照며 亦復非無照로다
於法無所着하야 無念亦無染하시며
無住無處所하사대 不壞於法性이로다
此中無有二며 亦復無有一이니
大智善見者가 如理巧安住로다
無中無有二며 無二亦復無라
三界一切空이 是則諸佛見이로다
여래의 광명 널리 비추어
온갖 어둠 소멸하시니
이 광명은 비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다시 비춤이 없는 것도 아니네
법에 집착함이 없고
생각도 없고 물들지도 않아
머무름도 없고 처소도 없지만
법의 성품을 깨뜨리지도 않네
이 가운데는 둘도 없고
또한 다시 하나도 없으니
큰 지혜로 잘 보는 이
이치대로 공교하게 안주하네
없다는 가운데는 둘도 없고
둘이 없음도 또한 다시 없는지라
삼계의 모든 것이 공(空)이니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보심이네
*
제상현리(除相現理): 상을 보내고 이치를 나타내다
*
여래광보조(如來光普照)하사 : 여래의 광명이 널리 비추사
멸제중암명(滅除衆闇冥)하시니: 온갖 어리석음의 어둠을 다 소멸하시니
시광비유조(是光非有照)며 : 이 광명은 비춤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역부비무조(亦復非無照)로다: 또한 비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혜를 광명에 비유하고 깨달음을 또 광명에 비유하는데 할 수 없어서 이런 빛에다가 비유를 하기는 하지만 전깃불 비추듯이 이렇게 비추는 것이 아니다.
*
어법무소착(於法無所着)하야 : 법에 대해서 집착하는 바가 없어서
무념역무염(無念亦無染)하시며: 생각도 없고 물드는 바가 없으시니
무주무처소(無住無處所)하사대 : 머묾도 없고 처소도 없으사
불괴어법성(不壞於法性)이로다: 법성을 무너뜨리지 아니했더라.
법의 성품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고 한 법성게의 이치가 그 열쇠다.
법성게에 담은 이치가 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있고 깊고 소중하기 때문에 영가 천도도 법성게 하나면 다 된다. 천도재의 마지막에 소대에 나가면서 영가에게 반드시 법성게를 들려드리는 이유가 그것이다. 최고로 강력한 약을 마지막에 쓰는 것이다.
그동안은 단위가 낮고 시시한 약들을 처방해서 천도 될 사람은 벌써 천도가 되었다. 그래도 천도가 안되면 최고 강도 높은 약을 처방하는 데 그것이 법성게다. 법성게는 진리의 가르침 중에서도 엑기스 중의 엑기스다. 더 이상 덮을 것이 없다.
법성게 가지고 천도 안되는 중생은 영원히 천도가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법성게를 한 30편쯤 독송하고 영가가 분명히 천도 되었다고 믿어야 된다. 영가 천도 의식에서 앞의 온갖 의식은 바쁘면 다 못하더라도 부디 법성게 하나는 빠드리면 안된다. 법성게 하나만 30편 외워주는 것이 최고의 천도의식이 된다. 천하에 그러한 명문을 남긴 의상스님이 대단하신 분이다.
차중무유이(此中無有二)며 : 이 가운데는 둘도 없으니. 의상스님은 틀림없이 화엄경의 이런 구절을 보고 ‘법성원융무이상’하는 법성게를 만들었다. 두말할 것 없이 분명하다.
역부무유일(亦復無有一)이니: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다 둘도 없지만 하나도 없다.이렇게 해서 궁좌실제중도상이 되었다. 결국은 중도상에 앉게 된다.
대지선견자(大智善見者)가 : 큰 지혜를 가지고 바르게 잘 보는 사람이
여리교안주(如理巧安住)로다: 이치와 같이 교묘히 안주하는 도다. 교(巧)는 잘, 익숙하게, 능히 이런 뜻이다. 잘 안주하도다.
무중무유이(無中無有二)며: 없는 가운데 또 둘도 없어
무이역부무(無二亦復無)라:둘이 없다고 하는 것도 또한 없음이라.
삼계일체공(三界一切空)이 : 삼계가 일체 공한 것이
시즉제불견(是則諸佛見)이로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견해다.
그래서 절에서 마당을 쓸 때는 뒤로 가면서 마당을 쓰는 사람의 발자취마저 쓸어 버리는 것이다.
(5) 法無所住
凡夫無覺解일새 佛令住正法하야
諸法無所住케하시니 悟此見自身이로다
非身而說身하시며 非起而現起하시니
無身亦無見이 是佛無上身이로다
범부는 깨달음의 이해가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하여금 정법에 머물러
모든 법에 머무는 바가 없게 하시니
이것을 깨달으면 제 몸을 보리라
몸 아닌 데 몸을 말하고
일어난 것이 아닌데 일어남을 나타내니
몸도 없고 보는 것도 없음이
이것이 부처님의 위없는 몸이시네
*
법무소주(法無所住): 머무름이 없는 깨달음에 머무르다
법에는 머무는 바가 없다.
*
범부무각해(凡夫無覺解)일새 : 범부는 각해가 없을새
불령주정법(佛令住正法)하야: 부처님이 정법에 머물게 해서
제법무소주(諸法無所住)케하시니: 모든 법에 머무는 바가 없게 하시니
오차견자신(悟此見自身)이로다: 이것을 깨닫고 자신을 보게 한다. 서자서 아자아(書者書 我者我)가 되어서 책은 책이고 나는 나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책에서 결국은 자신을 보게 하는 것, 자기 자신을 비춰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만 팔천리가 되어도 거기에 또 일미터 일미터 가까워지는 도리가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획 돌아서서 한걸음도 떼지 않고 그 자리 중도상에 서는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걸어도 본래 그 자리고, 이르고 이르러도 역시 출발한 그 자리다’라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
비신이설신(非身而說身)하시며 : 몸이 아닌데 몸을 이야기 하고
비기이현기(非起而現起)하시니: 일어남이 아닌 데도 일어남을 나타내시니
무신역무견(無身亦無見)이: 몸도 없고 볼 것도 없는 것이
시불무상신(是佛無上身)이로다 :이것이 가장 높은 부처의 몸이다.
한구절 한구절 책장 넘기기가 아까운 대목들이다. 이런 구절은 한 시간을 설명해도 다 못할 내용들이다.
(6) 推德眞實慧菩薩
如是實慧說 諸佛妙法性하시니
若聞此法者는 當得淸淨眼이로다
이와 같이 진실혜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묘한 법의 성품 설하시니
만약 이 법을 듣는 자는
마땅히 청정한 눈을 얻으리라
*
추덕진실혜보살(推德眞實慧菩薩):공덕을 진실혜보살에게 미루다
*
여시실혜설(如是實慧說): 이와 같은 도리를 진실혜 보살이
제불묘법성(諸佛妙法性)하시니: 제불의 묘법성을 설하시니
약문차법자(若聞此法者)는 :만약에 이러한 법을 듣는 사람은
당득청정안(當得淸淨眼)이로다:마땅히 청정한 눈을 얻음이로다.
10, 上方의 堅固慧菩薩
爾時에 堅固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1) 讚佛
偉哉大光明 勇健無上士여
爲利群迷故로 而興於世間이로다
그때 견고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거룩하도다, 큰 광명이시며
용맹하신 무상사(無上士)시여
미혹한 군생 이익케 하시려고
세간에 나오셨네
*
상방(上方)의 견고혜보살(堅固慧菩薩): 상방 견고혜보살의 찬탄
*
이시(爾時)에
견고혜보살(堅固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찬불(讚佛):부처님께서 중생 위하심을 찬탄하다
*
위재대광명(偉哉大光明): 위재 위대하여라 대 광명이시며
용건무상사(勇健無上士)여: 용건하시며 무상사시며
위리군미고(爲利群迷故)로: 온갖 미혹한 중생을 유익하게 하기 위한 까닭에
이흥어세간(而興於世間)이로다: 세간에 출현했도다.
(2) 衆生受苦
佛以大悲心으로 普觀諸衆生이
見在三有中하야 輪廻受衆苦하시나니
唯除正等覺 具德尊導師하고
一切諸天人은 無能救護者로다
부처님께서 큰 자비심으로
널리 모든 중생 살피시니
삼유(三有) 가운데 윤회하며
온갖 고통 받고 있음을 보네
오직 정등각을 이루시고
덕을 갖춘 높은 도사(導師)를 제하고는
일체 모든 천상인과 사람을
능히 구호할 자 아무도 없네
*
중생수고(衆生受苦): 중생의 고통을 말하다
*
불이대비심(佛以大悲心)으로 : 부처님이 대비심으로 세간에 출현했으므로
보관제중생(普觀諸衆生)이: 모든 중생들이
견재삼유중(見在三有中)하야 : 삼계 욕계 새계 무색계에 있어서
윤회수중고(輪廻受衆苦)하시나니: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 받은 것을 보시나니
*
유제정등각(唯除正等覺): 오직 정등각 하시고
구덕존도사(具德尊導師)하고: 덕을 갖추신 높고 높으신 도사를 제하고 그분만을 제하고
일체제천인(一切諸天人)은 : 일체 모든 천인은
무능구호자(無能救護者)로다: 능히 구호할 사람이 없더라. 부처가 아니고는 궁극에 부처되게 할 수가 없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국 부처님이 깨달으신 안목을 우리가 갖춰야 비로소 우리도 불교의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궁극적 안목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
옛날에는 토지에 세를 주는데 추수를 하자 어떤 농부가 곡식 싣고 와서, 스님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고는 ‘중들은 일도 안하고 받아 먹기만 해서 죽어서 소가 된단다’하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어디서 법문은 많이 들은 일꾼이 ‘소가 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면 괜찮지’하였다.
그런 소리를 농담으로 주고 받는데 경허스님이 그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이것을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이라고 표현하는데, 혹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콧구멍 없다는 그 소리를 듣고는 그만 환하게 열려 버린 것이다.
경허스님이 그렇게 깨달았다.
농부들이 장난삼아 한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다.
꼭 부처님이 높은 법문 해야만 중생 건지는 것이 아니다.
(3) 讚僧寶
若佛菩薩等이 不出於世間이면
無有一衆生도 而能得安樂이로다
如來等正覺과 及諸賢聖衆이
出現於世間하사 能與衆生樂이로다
부처님과 보살님들
세간에 나오시지 않으셨던들
한 중생도 능히
안락을 얻을 자 없으리
여래 정등각과
모든 현인 성인들
세간에 출현하시어
중생에게 즐거움 주셨네
*
찬승보(讚僧寶):승보를 찬탄하다
*
약불보살등(若佛菩薩等)이 :만약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불출어세간(不出於世間)이면: 세간에 출현하지 아니했다면
무유일중생(無有一衆生)도 : 한 중생도
이능득안락(而能得安樂)이로다: 능히 안락을 얻는 이가 없도다.
*
여래등정각(如來等正覺)과 : 여래 등정각과
급제현성중(及諸賢聖衆)이 : 그리고 일체 현성중이. 수행하는 스님들을 일체 현성승이라고 한다.
출현어세간(出現於世間)하사 : 세간에 출현해서
능여중생락(能與衆生樂)이로다 :중생에게 낙을 주는 도다.
(4) 見聞利益
若見如來者는 爲得大善利니
聞佛名生信하면 則是世間塔이로다
我等見世尊은 爲得大利益이니
聞如是妙法하면 悉當成佛道로다
諸菩薩過去에 以佛威神力으로
得淸淨慧眼하야 了諸佛境界라
今見盧舍那하야 重增淸淨信이로다
여래를 보는 자는
크고 좋은 이익 얻나니
부처님 명호 듣고 신심 낸다면
이가 곧 세간의 탑이라네
우리가 세존을 뵈오면
큰 이익을 얻게 되나니
이러한 묘한 법을 들으면
다 마땅히 부처님 도를 이루니
모든 보살 과거 세상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청정한 지혜의 눈을 얻어
모든 부처님 경계 아셨네
이제 노사나 부처님 뵙고
청정한 믿음 더욱 더하리
*
견문이익(見聞利益): 보고 들음의 이익
*
약견여래자(若見如來者)는 : 만약 여래를 보는 사람은
위득대선리(爲得大善利)니: 큰 아주 좋은 이익을 얻게 되나니
문불명생신(聞佛名生信)하면: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믿음을 낼 것 같으면
즉시세간탑(則是世間塔)이로다: 이것은 바로 세간탑이다. 석가탑 다보탑이고 보탑이다.
저 앞에서 현수품에서 신위법장제일재(信爲法藏第一財)라고 하였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법의 창고에서 제일가는 재산이 된다는 표현이 있었다.
여기는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신심을 내면 그 사람은 세간탑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구나’하고 그 사람이 신심과 환희심에 가득히 차 있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탑이다.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존경하고 그를 에워싸고 하는 공양 올리는 탑이 된다.
탑이 되는 것이 쉽다. 신심이 출중하면 그 사람이 세상의 탑이 되어 버린다. ‘부처님의 이름을 듣고 믿음을 낼 것 같으면 즉시세간탑이다’ 근사한 표현이다.
*
아등견세존(我等見世尊)은: 우리들이 세존께서는 세존을 뵙는 것은
위득대이익(爲得大利益)이니 :큰 이익을 얻기 위함이니.
불교를 믿는 것은 뭔가 이익을 위해서 믿는 것이다. 그것도 열 배 백 배 천 배의 큰 이익을 위해서 불교를 믿는다.
문여시묘법(聞如是妙法)하면: 이와 같은 미묘한 법을 들을 것 같으면
실당성불도(悉當成佛道)로다: 다 마땅히 불도를 이룰지어다.
*
제보살과거(諸菩薩過去)에 : 모든 보살이 과거에
이불위신력(以佛威神力)으로: 불 위신력을 쓰는 까닭에
득청정혜안(得淸淨慧眼)하야 : 청정한 혜안을 얻어서
요제불경계(了諸佛境界)라: 제불경계를 요달함이라.
*
금견노사나(今見盧舍那)하야 : 지금 노사나부처님을 친견해서
중증청정신(重增淸淨信)이로다:청정한 믿음을 더욱 증장시키는 도다. 거듭거듭 증장시킨다. 진리의 가르침인 화엄경이 그대로 부처님의 법신사리고 진신사리다. 부처님의 가짜 진신사리를 갖다놓고 진신사리라고 하는데 어리석고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그런 방편이라야 통하니 할 수 없이 사리를 가져놓는다. 그런데 불상이라는 것이 전부 가짜 불상인 것처럼 사리도 역시 그렇다. 불상을 조성해 놓고 부처님이라고 하면 부처님이듯이 사리상을 만들어 놓고 사리라 하면 사리인 것이다.
그런 것도 우리가 알아야 된다.
우리 신심에 달린 것이다. 사리를 만들어서 모셔 놓고 사리라고 믿으면 그 사람에겐 사리인 것이다.
진짜 부처님 사리를 갖다 놓고도 부처님 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 사리가 아닌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주관적인 관점에 달린 것이지 대상 그 자체가 뭐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안목 있는 사람은 개밥 그릇으로 쓰는 고려 청자를 얻으려고만원짜리 개를 이만원을 주고 사는 것이다. 그 사람이 저만치 나가다가 뒤돌아와서 ‘아이 개밥그릇도 줘야지’ 하자 신이난 주인이 개밥그릇도 거저 주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개밥그릇에만 관심이 있었다. 대상은 아무 의미없다. 자기 주관적인 안목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진짜 부처든 진짜 사리든 아무 의미가 없다. 여러분들의 사찰에 있는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고 여러분들 역시 그 부처님에게 껌뻑 넘어가지 않는가.
내가 부처님이라 믿고 거기에 예배하면 진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사리도 그와 같다.
(5) 佛德無盡
佛智無邊際라 演說不可盡이니
勝慧等菩薩과 及我堅固慧가
無數億劫中에 說亦不可盡이로다
부처님의 지혜 끝이 없는지라
연설하셔도 다함이 없네
승혜 등의 보살과
나와 견고혜가
무수한 억 겁 동안에
말한다 하여도 또한 다함없으리
*
불덕무진(佛德無盡): 부처님의 덕이 다함이 없다
*
불지무변제(佛智無邊際)라 : 부처님의 지혜는 변제가 없음이라. 가이 없다.
연설불가진(演說不可盡)이니: 아무리 연설해도 다 하지 못한다.
승혜등보살(勝慧等菩薩)과: 승혜라고 하는 등의 여러 열 명의 보살과
급아견고혜(及我堅固慧)가: 그리고 나의 견고해 보살
*
무수억겁중(無數億劫中)에: 그런 이들이 무수억겁 중에
설역불가진(說亦不可盡)이로다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리 뛰어난 보살이라 하더라도 부처님 지혜를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는가,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다.
(박수소리)
하강례
매일 화엄을 설할 수 있다면
아침에 일찍 범어사 강주실에서 용학스님과 인터뷰를 끝내고 큰스님 계신 화엄전에 올라갔다.
벌써 스님들이 와계셨다. 문수경전 연구회 임원 스님들이 모이셨는데 마침 대성암에서 점심공양을 드시기로 하셨다고 했다.
*
큰스님은 용학스님을 인터뷰하고 올라왔다고 말씀드리자
“용학스님 활동상황을 전부 다 이야기 들었어?”하시고
“용학스님은 무엇보다도 범어사에서 화엄산림을 한 달에 한 번이지만 하고 계셔. 그게 아주 내한테 제일 마음에 드는 일이라.” 하셨다.
옛날에는 사찰을 세울 때 전부 설립취지가 있었는데 범어사는 의상스님이 화엄경을 가르치려고 지은 사찰이라고 하셨다.
“화엄경 안 가르치면 범어사 있으나마나라는 뜻이야.”
그동안 큰스님은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이고 ‘선(禪)’이 강세다 보니 ‘눈치가 보여서 화엄경을 못내밀고 다만 내 방 문앞에 편액만 화엄전이라고 했을 뿐’이라고 하셨다.
“용학스님이 용기있게도 화엄경 산림을 한달에 한 번씩 하는 거야. 약찬게를 외우고. 그러니까 본래 범어사 설립 취지가 이제사 살아난다, 조선이후로.”
“한 열 번 됐지? 시간에 걸릴 것 없이 마음껏 해버려. 스님은 젊으니까.” 하고 용학스님에게 말씀하셨다.
“의상스님은 교리에 맞춰서 화엄10찰이라고 했지만,사료를 뒤져보면 10찰도 훨씬 넘어. 의상스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데까지 전국의 사찰에서 화엄경을 가르치려고 했어. 그랬던 시대가 있었어.”
“공부해보면 화엄경 이상으로 가는 게 없어. 사람으로 태어나서 불법 만났는데 최고 좋은 불법을 우리가 공부해야지. 반찬이 지금 잔뜩 널려있는데 제일 맛있는 것부터 먹어야 할 것 아냐. 그래도 다 못먹는데” 하셨다.
*
날씨가 조금 숨 쉴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절대 안갈 것 같은 여름이 간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스님들이 대성암에 오르셨다. 대성암에는 각해선원의 하얀 커튼을 거두었고, 마당에는 정갈하게 망을 덮은 태양초를 말리고 있었다. 상상만 하던 대성암 공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놀라웠다.
‘손님 차림상’인데 평범한 반찬들이라서 놀라고 반찬 가짓수가 적어서 놀랐고, 모든 반찬에 똑같이 젓가락이 갈만큼 각각 반찬들이 크던 작던 고유의 깊은 맛을 가지고 있어서 놀랐다.
품위있고 자신있는 상차림이라고 ‘이것이 대성암 공양!’ 하고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공양을 마친 스님들이 감원스님의 차방으로 옮겨서 차를 드셨다.
*
“여긴 은사스님 방이고. 딱 열면 시자 살고.” 지금은 스님들이 적어지셔서 차방으로 쓰이지만 옛날 칠십 명도 넘는 스님들이 선원에서 공부를 할 때는 미닫이 문으로 연결된 작은 방까지 모두 스님들의 숙소였던 모양이다. 해인사 관음전도 그런 방이었다고 ‘이런 옛날방들이 정감있다’고 스님들이 회상하셨다.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지난 달에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던 그 차방이 다르게 보였다.
*
화엄경을 정리하는 동안, 9월 6일 통광스님이 열반하신 소식을 들었다.
*
염화실에서 통광스님을 찾아보니 2006년 4월 10일 염화실에서 큰스님이 실시간 전국방송으로 <대승찬>을 법문해주실 때, 마침 방문하신 통광스님이 큰스님의 요청으로 공부하는 염화실 회원들에게 법문을 해 주신 기록이 있었다.
‘요범사훈(了凡四訓)에다가 기도를 덧붙여서 운명을 바꾸는 5대 덕목’을 법문해 주셨고, 큰스님과 인터뷰 형식으로 ‘칠불암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화면을 보면서 '짝짝짝' 박수소리를 글자로 대신 입력하면서 행복했던 저녁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
“지난 범어사 보살계(3월 15일)에 오신 저가 존경하는 저의 사형님 통광스님께서 '일주일만 수행해도 정신에 근육이 생긴다'는 말씀을 자신도 들었다면서 평생불교 공부하고 일체 경전과 어록을 다 보았지만 처음 듣는 말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며, 신기한 발견이며, 표현이라고 하셨습니다. <주,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 ” 이것은 2008년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는 정리된 법문에 큰스님이 달아주신 꼬리글이다. 직접 <주> 까지도 쓰셔서, 모두 웃는 댓글이 이어졌었다.
*
봄마다 은사스님이신 여환스님의 부도탑 아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나란히 앉아계시던 두 분의 사진들, ‘통광스님이 전강법회를 하는 오대산에 가자’ 이러한 초청 글들, 그 때 사정이 있어서 오대산에 못갔던 것, 염화실에 모두모두 다 현재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서늘했다.
*
일주일 뒤 서울 봉은사 선교율 법회에서 큰스님께서 반야심경을 줄이면 네 글자로 ‘나는 없다’가 된다는 법문을 다시 꺼내주셨다.
“나는 없다”
화엄은 언제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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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는없고 ..
화엄은 언제나있다...
성실하심에 항상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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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법문... 추석에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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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화님 바쁜 일상 중에 수고 많으셨습니다._()()()_
정겹게 느껴지는 사진들, 바로 옆에서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혜명화님은 얼마나 행복할까... 잠시 부러워 했답니다.^^ 많이많이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_()()()_
부처님이 깨달으신 안목을 우리가 갖춰야 비로소 우리도 불교의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고
궁극적 안목을 갖게 된다..혜명화 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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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身而說身하시며 非起而現起하시니無身亦無見이 是佛無上身이로다... 몸이 아닌데 몸을 이야기 하고,일어남이 아닌 데도 일어남을 나타내시니,몸도 없고 볼 것도 없는 것이 이것이 가장 높은 부처의 몸이다..._()()()_
법성원융 무이상 ,無中無有二, 無二 亦復無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