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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서재필 기념재단 회장 정환순 박사
서재필 기념재단이 있는 필라델피아는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지금으로 부터 92년 전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는 조국에서 들려온 3.1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미국거주 한인들이 모여 대회장 서재필 박사를 필두로 제1차 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1951년 1월 5일)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은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의학자이며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1864년 역사가 요동치던 19세기 말에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7살 때 입양되어 양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다. 1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가족들은 몰살당하고 그는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에 도착하여 망명 생활을 하게된다. 후에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으나 그의 개화계몽 사상을 견제하던 고종에 의해 미국에 강제출국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이승만, 안창호 등과 재미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하다가 한국에서 6.25가 일어난 다음해인 1951년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87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후 서재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재단은 1975년도에 필라델피아에 설립되었다.
현재 ‘서재필 기념재단’ 회장으로 있는 정환순 박사는 미주한인사회에서 불교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복지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다. 미국의 한인사회에는 LA, 뉴욕, 워싱턴 DC, 북가주, 시카고, 필라델피아 등에 크고 작은 한인복지단체들이 수 십개가 있지만 이 단체들의 이사와 회장을 비롯한 임원은 대부분 타종교인들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많은 나라이고 세계의 많은 인종이 살고 있기 때문에 사회통합을 아주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여기에 많은 예산을 투여하고 있는데 이것을 직접 집행하지 않고 각 소수민족이 운영하는 봉사 . 복지단체에 재정지원을 하여 이 일을 하게 한다. 미국의 한인들이 운영하는 수 많은 복지단체 중에서 주정부나 시에서 재정지원을 받는 복지단체나 봉사단체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하는 불교인들은 서재필 기념재단의 정 박사, 북가주 실리콘 한미봉사회에서 수 년간 이사장으로 활동한 이임성거사,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봉사단체인 KCS 한인봉사센터의 재무이사인 필자 등이다.
정 박사는 1942년 생으로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정 박사는 졸업년도인 1966년도에 한국 국방부 군의관 훈련원으로 선발되어 미국에 입국하였다. 당시 정 박사가 다니던 연세대 의대는 정원이 63명이었는데 그들은 연희대 설립자 후손인 호레이스 언더우드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당시에 미국 밖에서 공부한 의대생들이 미국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하려면 의대생들의 Tofel격인 E.C.F.M.G를 보아야 했다. 약 반세기 전인 1966년도는 한국에서 극히 제한적인 사람만이 미국을 올 수 있었던 시기로 미국에 가는 것은 선망의 대상이던 시절이다. 이 시험을 보기 위해 정 박사는 1,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외우다 시피 공부를 하였다. 이 시험을 보는데 영어 읽는 것을 호레이스 언더우드가 했기 때문에 언더우드로부터 영어를 배우면서 그의 발음에 익숙한 연세대 출신 응시자 20명은 전원 합격하였다고 한다. 정박사가 졸업할 무렵에 전국에는 680여명이 의대를 졸업했는데 이중에서 66명이 미국에 가서 공부할 국방부 훈련원으로 지원하였다.
정 박사는 도쿄에서 Northwestern비행기를 이용하여 알라스카에 기착한 다음 여기에서 다시 비행하여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 이때가 1966년 6월 당시 나이 24세였다. 그때에 필라델피아에는 한인이 280여명 살고 있었다 한다.
정 박사가 인턴과 레지던트를 시작한 곳은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에피스콜팔 병원(Episcopal Hospital)으로 당시에는 큰 종합병원이었다. 인턴과 레지던트가 약 40여명 되었던 이 병원은 현재는 정신과 병원이다. 이 곳에서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 과정을 마쳤는데 외과를 원했던 정박사는 산부인과로 임상경험을 3년동안 쌓았다. 이 때가 1970년 이었다.
당시 미국 법에서는 미국 밖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미국에서 수련을 마치고 미국에 남아 있으려면 2년간 미국 밖에서 일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정 박사는 귀국하려고 친구와 함께 미국의 33개주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1970년에 이 조항이 없어졌다. 이것만 보아도 정 박사는 아마도 전생에 미국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정박사는 귀국하려던 마음을 바꿔 필라델피아 아이슈타인 병원에 취직을 하였다. 이곳에서 ‘불임’과정의 일을 하였다.
아이슈타인에서 일하던 중 정 박사는 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금도 암은 난치병이지만 40년 전 암은 사람에게는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정 박사에 의하면 미국에 유명한 3대 암센터가 있는데 뉴욕시에 있는 ‘Sloan Kettering’, ‘뉴욕주 버팔로에 있는 ‘Roswell park Cancer Center’, 텍사스에 있는 ‘M.D. Anderson’이라고 한다. 정 박사는 Rosewell Park Cancer Center에 지원서를 내고 당시 임시 과장인 패터슨과 인터뷰를 하였다. 정박사는 레지던트가 보는 시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받은 상태였다. 한국인에게 호의적이었던 패터슨은 1월에 정박사에게 오라고 하였다. 대개 병원은 7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를 한 텀으로 하는데 6개월 미리 오라고 한 것이다. 당시에 평균 경쟁률이 140:1 정도 되었는데 이러한 일은 매우 드문 일로 이 병원에서는 전무 후무한 일이었다고 한다. 정박사는 아이슈타인과 1971년 6월까지 계약이 되어 있으므로 난처한 상황에 처했는데 병원측에 한국 군대 간다고 하고 Rosewell Park로 갔다. 아이슈타인 병원측에서도 정 박사의 처지를 알고 묵인하였다. Rosewell park에서 정 박사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5년 동안 일을 하게 되었고 한국인 의사로는 처음으로 이 병원의 암치료 전 과정을 마친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정 박사는 부인 지문자 보살과 1971년 버팔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66년 미국에 온 이후 필라델피아와 뉴욕주 버팔로에서 약 5년씩 10년을 지낸 정 박사는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필라델피아에서 1975년 개업을 하면서 본격적인 필라델피아 사람이 되었다. 필라델피아에 정 박사가 개업을 시작하고 수술할 때는 에피스코팔, 아이슈타인, 하네만 병원 등을 이용하였다. 7월 1일 개업을 하였는데 개업하기 전부터 예약이 들어왔다. 정 박사 표현에 의하면 ‘문전성시’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환자들이 밀려왔다. 두 번째 진료소는 1987년 필라 North east 쪽에 열었다. 이곳에서도 처음에는 일주일에 3-4명 오던 환자를 3-4년 후에는 일주일에 100명 정도 진료를 하였다.
20대 중반에 미국에 와 40년을 너무도 바삐 보낸 정 박사는 1997년부터 2004년에는 현재는 없어진 필라델피아 North Eastern Hospital에서 산부인과 과장으로도 근무하고 2004년 10월에 현역에서 은퇴를 하였다.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40년 가까이 진료 활동을 한 정 박사 환송회는 크게 두 번 있었는데 병원에서 마련한 환송회와 친구들이 마련한 환송회로 각각 180여명이 참석한 성대한 환송회였다.
한국에서 알아주는 일류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온 정 박사는 미국에 와서도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었다. 가는 곳마다 정 박사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장애가 있는 것도 저절로 없어졌다. 마치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我若向刀山 刀山自嶊折) 아약향화탕 화탕자고갈(我若向火湯 火湯自枯渴) -내가 칼산지옥에 가면 칼산 지옥이 절로 무너지고, 내가 화탕지옥에 가면 화탕지옥이 말라서 없어지는- 구절이 연상되는 삶이었다.
정 박사 자신만 만사형통 삶을 산 것이 아니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과 독실한 불교집안인 버마계 중국인 며누리는 둘 다 하바드에서 레지던트를 거쳐 현재는 스탠포드 대학교 의대 교수로 있다. 아들은 비뇨기과이과 며누리는 소아내분비과이다. 이들 부부는 북가주에 살지만 화엄사에 적을 두고 법장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사경 수행을 하고 있다. 딸은 영국 명문인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았다.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정 박사는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 지문자 보살은 원래 집안이 대대로 불교신자여서 절에는 가지 못했지만 혼자 집에서 기도와 수행을 하며 불교적인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
정 박사는 우연한 일을 계기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 박사 병원 일을 도와 주던 미국인 세크러터리가 대장 암에 걸렸다. 그녀는 정 박사에게 “불교에 염주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병에 좋은 효엄이 있다고 하니 염주를 구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래서 정 박사는 부인과 함께 2003년 부처님 오신 날에 필라델피아 화엄사에 갔는데 절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렇게 하여 법장스님을 만나 스님으로부터 불교와 동양철학, 서예 등을 지도 받으면서 180도 전환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부부는 절을 매주 찾게 되고 이제는 법장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그동안 갈고닦은 서예 실력도 수준급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정 박사는 미국사회 속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면서 경기고등학교 동창회, 연세대학교 동창회, 그리고 의사협회 정도만 관계를 맺고 종교활동도 없었기 때문에 한인사회와는 별 인연없이 살았다. 이런 정 박사에게 2006년 3월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 기념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서재필 기념재단의 회장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 사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서 박사는 미국면허를 가진 의사로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한 분이기 때문에 정 박사와는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한 미국면허를 가진 의사라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정 박사는 재단의 요청을 수락하여 2007년 1월에 임기 3년의 제 8대 서재필 기념재단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동안 별 인연이 없던 한인 커뮤니티에 깊숙하게 발을 디딛게 되었다.
이 재단은 필라지역의 한인들이 운영하는 대표적인 복지단체로 풀 타임 20여명과 파트 타임 근무자, 자원봉사자들 합해서 약 40명이 일하고 있는데 정 회장은 무보수로 상근하고 있다. 서재필이 의사였기 때문에 이 단체는 전미주 한인단체로는 유일하게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내과 2명, 소아과 1명, 정신과 1명 등 총 4명의 의사가 있고 1년에 약 12,000명의 환자가 이용하고 있다. 이 외에도 건강보험, Social service, 직업알선, 서재필 박사가 살던 집을 개조해서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단체의 회장으로서 정 박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교육관 건립이다. 이 교육관은 필라델피아 외곽 Media에 있는 서재필 박사가 살던 생가를 개조해 만든 기념관을 확충해 교육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기념관 주변에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교육관을 지어 이민 2~3세대들에게 한국인의 정신과 역사 교육을 하는 장소로 활용할 예정이다. 즉 모금운동을 하여 교육관을 건립을 추진중에 있고, 또 한국 독립기념관에 있는 서 박사의 유품중 일부인 110점이 이 기념관에 오기로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서재필기념교육관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현재 활발하게 모금 운동을 하고 있다. 모금액은 330만 달러인데 한국의 보훈처에서 매칭펀드로 15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하였고 지난 5월에 가진 모금행사에서는 총 15만 달러를 모금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같이 의사로서 성공적인 삶을 산 정환순 박사가 은퇴 후 복지단체인 ‘서재필 기념재단’에서 봉사하며 제 2의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이룩한 성공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임기 3년의 8대 회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올해 다시 9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남은 임기동안 추진하는 교육관 건립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여 서재필 기념재단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기를 기원한다.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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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jaisoh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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