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낯선 곳에서 하룻밤
장기오
해가 설핏 지고 있었다. 역광을 받은 강은 하얗게 빛났고 그 하얀 강폭 위로 실루엣의 배 한 척이 한가하게 떠가고 있었다. 강변에는 무수한 자갈들이 저녁노을 받아 황금의 그것처럼 찬란했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스톱! 스톱!”
버스는 끽 소리와 함께 급정거를 했고 곧이어 지독한 먼지가 온통 버스를 휘감았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나는 얼른 버스에서 내려 강가로 달려갔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강을 감고 도는 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어지간한 명산의 기암절벽 못지않을뿐더러 오밀조밀한 게 카메라를 어디에 대도 좋은 그림을 얻을 것 같았다. 나는 근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카메라 포지션을 정하고 어떻게 연출 할 것인가를 머릿속에 그리느라 어두워지는 것도 몰랐다.
참 좋은 장소를 찾아냈다고 흐뭇해하며 아까 버스에서 내렸던 장소를 향하던 나는 화들짝 놀랬다. 내가 내린 버스 정류장 뒤 야트막한 야산 위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게 한 눈에 봐도 거의 폐허다. 그리고 인적은 커녕 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순간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면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듯이 황급히 달음박질을 쳐 동네입구까지 와 눈을 닦고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봤다. 동네는 비어 있었다. 집들은 거의가 허물어졌고 건드리기만 하면 곧바로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쥐새끼들만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동네 전체가 이주해 버린 것이다.
애초부터 수몰 지구를 찾아 나서기는 했지만 이렇게 사람이 없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를 못했다. 또 장소에 홀려 앞뒤 생각 없이 막차에서 내린 것이 후회가 되었다.
요즘에는 세상이 좋아져서 방송국 차로 여러 스태프들과 같이 장소헌팅을 다녔지만 당시만 해도 출장 끊어서 PD 혼자서 돌아다니기가 예사였다. 그래서 버스타고 기차타고 오지(奧地)를 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차 가진 탤런트를 꼬여 출연을 보장해 주고 데리고 다녔다. 그 때 나는 이것마저도 마땅치 않아 혼자서 장소 헌팅을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무모하게 아무데서나 내려버린 것이다. 해는 저물고 인적 없는 폐허의 마을 한 복판에 선 것이다. 흰 옷 입은 귀신이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아 오금이 저려오고 전율로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아무도 없습니까? 누구 없습니까?”
내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만 되어 뒤돌아왔다. 늦가을이라 한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허물어져 가는 간이 버스정류장 나지막한 건물 안에서 나는 애써 두려움을 갈아 앉히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 지 생각했다. 벌써 어둠살이가 지고 있었다.
그러다 깜박 졸았던 것 같다. 멀리서 꿈결처럼 어름푸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온 신경을 모아 귀를 기우렸다. 경운기였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 경운기를 타고 나는 그 다음 마을까지 이동을 했다. 그 마을은 5일장이 섰던 그런대로 큰 마을이었고, 그 탓에 아직까지도 몇 가구가 살고 있었고 다행이도 버스 정류장에는 국밥집까지 있었으며 다방까지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잠잘 곳은 없었다.
나는 우선 국밥집에서 소주를 곁들어 요기를 하면서 하루 저녁 숙박을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는 애매하게 웃는데 주인아저씨는 터무니없는 요금을 내라고 한다. 소금 먹은 놈이 물켠다고 별 수 없었다. 나도 쓰다 검다 말도 못하고 그럼 차나 한 잔 하고 오겠다면서 나왔다.
다방은 시골 찻집다웠다. 장터 한 모퉁이에 있는 살림집을 적당히 개조한 듯 한 다방은 차만 파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대낮부터 술도 팔고 장날이면 소 팔아 오랜만에 목돈 쥔 시골 아저씨나 거간꾼들이 한 바탕 목에 힘을 주고 으스대며 돈 푼깨나 날리고 가는 곳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울긋불긋 좀 야한 벽지로 바른 벽은 쥐 오줌 자욱이 어지러웠고 천장 한 구석은 비가 샜는지 얼룩이 요란했다.
불만 켜져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누구 없어요.” 하고 두어 번 소리를 지르자 그 때서야 한 여자가 주방 쪽에서 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차(茶)는 없고요. 술은 있습니다.”
짐작대로였다.
“아무거나 주세요.”
그녀는 잠시 후 쟁반에다 맥주 몇 병과 구멍가게에서나 파는 조잡한 비닐봉지에 담긴 땅콩안주를 담아 내 왔다.
7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밖은 오밤중이다.
술을 따르면서 여자가 말했다.
“여기 남은 술만 다 팔면 떠날 거예요.”
주인은 보상비 다 챙겨 벌써 도망갔고 자기 돈으로 사서 파던 술만 다 팔리면 그녀도 떠날 거라면서 허무한 얼굴로 천정을 올려다봤다.
“아저씨가 오늘 여기 있는 술 다 팔아줘요.” 하면서 서글프게 웃는다.
둘은 앉아 어지간히 마셨다. 여자도 그새 술이 취했는지 몇 번인가 화장실을 다녀왔다. 얼굴이 불그스름 한다.
“왜, 여기까지 흘러 왔는지 묻지 않아요?”
나는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내 앞에 있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혼자서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이런데 있는 여자, 누구나 그렇듯이…… 누구나 다 그렇듯이……, 결국 삼류소설이죠 뭐.”
지지리 궁상을 떠는 가난이 싫어 집을 나와 이곳저곳 떠돌다 운명처럼 한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 돈 많고 멋있는 남자들도 많았는데 오히려 궁색해 보이는 그 남자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운명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면서 여자는 허공같이 깊어진 눈을 들어 천정을 한 번 올려다본다.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앉은 그녀는 겨울나무만큼이나 춥고 삭막해 보였다. 천년만년 같이 살자고 손가락 걸고 맹서를 해도 그게 가당치도 않다는 걸 다방레지에 불과했던 그녀가 더 잘 알았다. 늦은 시간까지 다방 문 열어놓고 휭 하니 빈 골목을 쳐다보며 하마나 올까 하마나 올까 하다가 울어버린 일이 그 얼마였는지를 말하면서 여자는 기어이 눈물을 떨어드렸다. 그래도 그녀는 그 때가 좋았다고 회상한다. 볼 대마다 가슴이 설렜고 혹시나 하는 꿈이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묵은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누구에게는 객쩍은 소설이 되겠지만 당사자에겐 가슴 저리고 여한 많은 사랑이 되리라. 여자가 흔들린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지나간다.
“그게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첫사랑인가 봐요.”
여자는 말을 끊고 가만히 바람소리를 듣는 듯 했다.
“이런 날…… 바람 불고 창문이 덜컹거리는 이런 날은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아요. 술이라도 한 잔 마셔야 잠이 들곤 해요”
하면서 빈 잔에 넘치도록 따라 마셨다.
“웃습죠?”
어깨가 들어난 라운드 티 때문인지 여자의 긴 목이 파르르하게 서러워 보였다. 때로는 속고 때로는 매달리면서 때로는 악을 쓰면서 질경이처럼 질곡의 세월을 견디어온 여자의 눈물이 이 황량한 시골 분위기에 더해져 내 감성을 자극했다.
“이제 어디로 갈 건데?”
“이제 술집 밖에 더 있겠어요?”
그녀의 절망은 깊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나 잘 때가 없는데……, 여기 홀에서 좀 자면 안 될까?”
“편한 대로 하세요. 원하시면 제 몸도 사세요. 몸 파는 여자는 아니지만 어차피
팔아야 될 몸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세상천지에 어디 등대고 비빌 곳 한 곳 없는 이 가련한 여자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웃음 팔고 몸 팔며 술 따르는 게 전부일 수 있으리라. 얼마 되지 않는 돈마저
까먹고 여자는 추한 까마귀가 되어 거리에서 연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병이라도 들면 낯선 도시 뒷골목 어느 후미진 골방에서 뒹굴다가
혼자 외롭게 죽어갈지도 모른다.
여자의 여생이 눈에 잡히듯 훤하다.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풋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그 남자를 깊이깊이 사랑했을 것이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참느라 꺼억꺼억 하는 소리만 들렸다.
이튿날 새벽, 다방 문을 나서는데 차가운 가을바람이 등을 친다. 소파에서 불편한
잠을 자서인지 한층 더 으스스하다.
온 산은 홍엽(紅葉)이고 안개는 산허리를 감고 돈다. 이따금 바람이 한 차례씩 불
때 마다 낙엽이 비 오듯 우수수 떨어진다. 먼 하늘에서는 기러기 몇 마리가 북녘을
날고 있다.
무서리인가. 들판이 허옇다.
나는 첫차로 한수를 떠났다. 서울까지 갈 수 있는 차비만 남기고 술값을 카운터
위에 남겨두고 나왔다.
아마 오후에는 그녀도 이곳을 떠나리라. 제천 어디쯤 있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하고 재수가 좋으면 오늘 저녁부터 술상에 앉아 술을 따르리라.
나는 뒤를 돌아다 봤다. 버스 뒤창으로 보이는 다방건물은 먼지에 덮여 뿌옇게
흐려 보였다. 그녀가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것 같았는데 버스는 이미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끝>
위 글을 쓴 친구는 학창시절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인데 KBS에서 大PD까지 해 먹고 정년 퇴임을 했는데, 퇴임후 육십을 넘겨서 석사학위을 받을 만큼 대단히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그는 존경할만한 친구다. 아래의 메일과 함께 보내온 위 수필을 혼자 보기에 아까워 올립니다. ----길 손
대학원 석사논문 쓰고, 또 시답잖은 대학에서 교수 자리 하나 준다 길래
교재 준비하는 등 바쁘게 지내다 오늘 조금 빠꿈하길래 메일을 점검해 보니 메일을 주고 받은지가 한 일년 쯤 되는 것 같네.너무 격조했네.
지난해에 <한국작가>라는 잡지에 실렸던 수필 한 편을 모처럼 보내네
수 년전에 한수지역(지금은 충주호가 있는곳)으로 헌팅갔다 생긴일이네.
메일으로 나마 자주 연락하도록 하세
첫댓글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지나갔다...무서리인가. 들판이 허옇다...
'여기 남은 술만 다 팔면 떠날 거예요' '아저씨가 오늘 여기 있는 술 다 팔아줘요'
꺼억꺼억 하는 소리만
우리네 인생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