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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나비가 되어 우리곁을 떠난 [김정호]
김정호의 본명 조용호. 1973년 '이름 모를 소녀'로 가요계 데뷔.
1985년 폐결핵으로 34세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소박하고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을 어둡고 깊고 그윽한 필링으로 노래했던 가수.
경기도 금촌 공원묘지 그의 비석엔 생전에 남긴
불후의 명곡 [하얀 나비]가 묘비명을 대신하여 남아있음.
사후에 [님]이 실린 유고 앨범과 추모 앨범이 잇달아 발표됨.
이것이 김정호에 관한 짧은 약력이다.
그러나 그의 약력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그의 약력은 과거의 것도 현재의 것도 아니다.
그의 약력은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그의 노래처럼
미래의 어느 한 지점에 가 붙박여 있다.
그것은 이미 선행적인 시간의 축을 벗어나 궤도를 이탈하여
무한히 질주하는 별의 운명과 닮아있다.
그것이 바로 김정호의 노래이다.
김정호의 노래가 보유하고 있는 미덕은 동심원을 그리듯 번져 가는
파문의 양상이 참으로 그 노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그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흔히들 말하는 진실이라는 가치체계, 진정성의 세계 ..
단언하건대 우리 사회에서 몇몇 위정자들에 의해 아무 반성 없이
맹목적으로 앵무새의 수다처럼 주기적인 서클에 의해 수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진실]과 [진정성]의 허울좋은 이름은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그들이 설파하고 있는 거창하고도 원대한 구호 그 어디에 진실과
진정성이 있는가. 단지 그들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나 시정의 거리에
서 약을 파는 약장수처럼 현란하고 화려한 언술과 제스처로 다수의
선량한 백성들을 우롱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기만적인 술책과 혹세무민하는 교묘한 수사학은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episteme)를 흐리게 하는 독사(doxa)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에 [미래]는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새 천년, 희망찬 신한국이야말로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 [당신들
의 천국]이자 [그들만의 천국]이다.
자,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굳이 영구혁명을 주창했던 트로츠키 당대로
까지 거슬러 갈 것 없이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한국의 한 시인의
말을 빌려와 아주 우습고도 놀라운 한 가지 전언을 감탄사의 그 허무
맹랑하고 값싼 노동력의 무게에 얹어 그들에게 되돌려줄까 한다.
[오, 장하고나. 미국식 시장경제의 위대함이여..! 신지식인아, 그러니
풍자냐 해탈이냐가 아니라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 전 세계의 아나키
스트들이여, 이제 기침을 하자~! 소리 내어 기침을 하자~! 그리하여
마침내 저 화려하고도 유치찬란한 신자유주의를 향해 침을 뱉어라~!]
그리하여 모든것은 그 너머에 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 힘든 시대,
진짜와 가짜가 마구 뒤섞여 있는 이 혼돈의 시대에 다시 진정성에 대
해서 거론하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가벼워졌다
는 반증일 수도 있으리라.
이 부박하기 이를 데 없는 에피고넨의 시대에 하물며 십 년도 훨씬 전
인 과거의 한 지점으로 [한]과 [슬픔]이라는 업을안고 천천히 소멸해
간 한사람의 대중음악인을 소급해간다는 일이 어찌 가당키나 한 노릇
일 것인가.
그러나 지하에 잠들어 있는 그를 다시 지상으로 불러 올리는 소임을
바로 이 시점에서 나의 붓끝으로 기꺼이 감당하려는 까닭은 지금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이 시작과 끝을 가름하는 분기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이다.
김정호의 소리는 분명히 여성적이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남성적이라고
보기엔 너무 여리고 가냘프다. 그의 노래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 목
소리의 주인공이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직감하겠지만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그러다가 그의 노래에 익숙해지게 되면 단지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그 무엇인가가 그 속에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한 번 듣고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그의 음성은 아주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게 되는데 그 매력은 질박함과는 구분되는 끈끈
함이다. 그 끈끈함은 옷감으로 치자면 아주 질기고 튼실한 모시 삼베
에 가까운 끈끈함이 아니라 질김 속에서도 부드러운 솔기를 간직한
명주 무명에 가까운 끈끈함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듬성듬성 빈곳이 느껴지는 허함과 그 허함 때문에
다시 그 목소리가 더 한층 빛을 발하는 중층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고나 할까.
그 말이 부적절하다면 몇개의 겹으로 그의 목소리가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면 좀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인가. 그래서 그 목소리의 정체를 제
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주의 깊게 여러 번 그의 노래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때마다 매번 감상자에게 다가오는 소리의 톤과 필링이 다를 것이다.
김정호의 노래를 들어 본 사람들의 느낌이 공통적이기보다 매우 다양
하게 엇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숨겨진
목소리의 풍부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같은 발라드라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성은 단아하고 정갈하
고 소년처럼 해맑은 유재하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님이 떠나간 시대에 님의 부재를 호소하는 김정호의 애상적인 바이브
레이션이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 만물의 기를 자신
의 소리로 되살려내는 장사익과 타악기 세계의 깊은 내공을 토해내는
최소리에게까지 그 뿌리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면에서 주목
해봐야 할 소지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고도 놀라운 것은 내가 김정호의 [님]을 알게 되기 훨씬
전에 이미 김소희의 口音(입소리)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거문고와 아쟁과 대금의 그 신명나는 음색을 무색케하는 입소리의 정
체란 무엇일까.
혹시 그것은 맺고 푸는 것, 꽉 묵혀 두었다가 시원하고 개운하게 풀어
버리는 우리 소리의 진수가 아닐까. 행여 그것은 작곡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노래를 말하듯이 중얼거리는 것,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접할
수 있었던 저녁 무렵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밖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
을 하나 둘 불러모았던 그 정겹고도 구슬픈, 그러나 지금은 주인을 잃
어버린 소리가 아닐까.
그건 내게 맡겨진 숙제와 같다. 다만 나는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오솔길 사이에서 슬픔의 파도가 거대한 산처럼 밀려오는 광경을 그려
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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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
그는 52년 3월 27일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85년 11월 29일, 그는 떠났습니다.
33년 8개월간의 짧은 생애.. 마치 [33과 3/1] 속도로 도는
레코드판처럼 그의 삶의 수치는 그 시점에서 멈췄지요.
제가 가졌던 그와의 인터뷰, 그 기억이 지금 새삼스럽습니다.
이미 15년 전 일을 떠올리기 위해 지금 이렇게 [꼼삐따(!)] 앞에 앉아
있으니.. 이제는 그만 묻어둬도 좋을 얘기를 새삼 떠올리느라 며칠이
우울하게 갔습니다.
[김정호의 노래에 대한 추억]을 [윈버드]에서 보는 순간 그에게서
느껴왔던 애잔한 슬픔과 더불어 마치 빚을 지고있다는 느낌이 한꺼번
에 다가왔습니다.
필경 요 며칠 동안은 집에서건 사무실에서건 무슨 고민이 있는 사람
처럼 보였겠지요. 지금 대충 헤아려보니 그의 잠적은, 75년 대마초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79년, 대마초 가수들이 모두 해금되어 하나, 둘씩 활동을 재개
할 때도 그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방불명설] [잠적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로 온갖 추측 보도도 많았지요.
그러던 그가 84년, 홀연히 나타났습니다.83년 6월부터 11월까지, 5개
월이라는 최장 녹음시간을 기록한 4집 앨범으로. 호흡조차 힘들어져
한 곡 녹음하는 데도 수십 번씩 끊어, 편집해야 했던 이 앨범, 그리곤
결국 [유작]이 되어버린 앨범을 들고.. 이 앨범이 나온 뒤에도 그는
공개석상을 기피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이 앨범 중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제법 방송
을 타고 있었지만 그는 어느 새 [얼굴 없는 가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폐결핵가수]라는 낙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찍혀져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요양소에서의 격리 생활은 공개적으로 얘기되었고,이 노래가
같은 요양소에서 보게 된 어느 환자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애틋한
얘기만이 화제가 된 채. 그러면서 또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그를 찾아내야겠다,그리고 그 동안의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
한 것은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와의 인터뷰를 위해 석 달을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부끄럽지만, 당시 주위에서의 제 별명은 [진돗개]였습
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온갖 안테나를 동원해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정말 어렵게 그와 통화를 시도했는데, 그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들을 얘기도, 하고 싶은 얘기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매스컴-,
즉 TV- 라디오는 물론, 여타 신문사나 잡지사의 제의까지 모두 거절
했다면서, 되려 저를 설득시키려 했습니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 입장을 이해해달라고도 했고, 또
통과의례처럼 자신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하
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저도 이 즈음에서 그와 인터뷰한다는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이러한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건강 여부를 묻는,
저와의 네 번째 통화에서였습니다.이전처럼 전화를 먼저 끊지 않는다
는 것과 기침소리 사이에 더듬더듬 말하길 [지금 힘들다, 그럼에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무료함(?)]이라고도 했고, 또한 이미 [소외]된 자신
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한편 고맙다]라는, 그 것 때문이었습
니다.
이 즈음에서 저와 매우 가까웠던(그와도 가까웠던) [몇몇]의 도움으로
그와의 인터뷰 시간과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씩이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바람, 바람, 바람], 당시의 이 노
래 구절처럼, 그 때 제 심정이 꼭 그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느샌가 그도 마음
의 반쯤은 열어놓고 있었던 게지요. 다만 조건은 그냥 만나는 것, 그리
고 자기와 나누는 얘기는 절대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의 아파트에서였습니다. 그 핏기 없는 얼굴, 그리고 기침소리 속에
겨우 나누던 얘기들..정말이지,이러한 식의 기사는 저도 결코 쓰지 않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송창식의 고집에 관해 얘길 했으며 김수철의 [별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에 관해 서로 격의 없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제 얘기에 따라 빙그레 웃기도 하고, 간호원이 주사를
놓으러 왔을 때는 저에게 [잠깐이면 되니 기다리라]고도 했습니다.
그가 주사를 다 맞길 기다리는 동안에서야 비로소 저도 마감 때라 빨
리 집에 가 밀린 원고들을 써야 한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어느 새
세시간이 지났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때부터 몇 번이나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자꾸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노래 [님]을 들어보았느냐 물었습니다. 물론 저
는 그 때까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매우 섭섭한 듯 해하더니
그 음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습니다.
[님-]
그 때, 그 느낌이란.. 그 노래를 듣는 내내 저는 매우 놀랐고 마침내
엄습해오는 불길함까지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리곤 이상스럽게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아니 사람들
을 무척이나 그리워했음을..그는 마침내 자기가 내게 해줄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지금, 이 앨범을 오늘 집에가서
밤새 듣고 싶다, 그리고 가까운 날짜에(제 마감이 끝난 뒤) 시간을 내
실수 있다면 공기 좋은 야외로 함께 나가보고 싶다고. 그가 쾌히 승낙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기왕이면 사진 잘 받는 곳으로 가지,
그리고 오늘 내가 했던 얘기 중 노래에 관한 얘기라면 기사로써도 좋
겠는걸-!?] 한번도 웃지 않고 옆에 있던 부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
습니다.
다음 다음날 아침, 우리는 사진기자 김용범과 [뚝섬]엘 갔습니다.
우리가 서로 약속한 시간은 한시간 정도였고 저희도 사실상 두 시간
밖에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날이 마감 최종일이었으니..그러나 정
작 촬영은 오후 다섯 시 무렵에나 끝났습니다.
띄엄띄엄 노래 불러 이은 그의 마지막 노래처럼 촬영도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오히려 이 정도의 사진이면 충분하다고 말렸으나
되려 그가 사진 찍는 일에 더 열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진 촬영에 임하던 그의 표정이 매우 긴장되어 있
었으며, 또 비장했음을 이제야 알아채고는, 또다시 가슴이 뭉클해옵
니다.
그가 무리를 하면 안되기에 사진 찍는 중간 중간 쉬어야 했고 그런
중에도 그는, 그 때까지 밝히지 못했다던 얘기들을 서슴없이 털어놓
기도 했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얘기, 탈영병으로써 군 영창에
갇혔던 얘기까지..
이따금씩, 그는 함께 동행했던 그의 후배(세션을 도와줬다던)에게
담배를 빼앗다시피 해서 때론 냄새만 맡기도 하고, 때때론 직접 불을
붙여 입에 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의사는 내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면 죽는다고 경고했지,
허나 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되려 죽을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난
뒤부터, 그가 사진을 계속 찍고 싶어하던 것을, 담배를 계속 피우고
싶어함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습니다.
[간다 간다 정든 님 떠나간다 간다 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님의 손목 꼭 붙들고 애원을 해도 님의 가슴 부여잡고 울어 울어도
뿌리치고 떠나가더라 속절도 없이 오는 정 가는 정에 정들어 사랑을
했던 님. 어쩌면 그렇게도 야속하게 가시나요 허-허 간다 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지금, 담배에 불을 붙여 그 [님]에게 올리는 심정으로---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lub.nate.com%2Fcindex8%2F429%2Fhj3897%2F19451731%2F1%2Ftgs2A5.tmp%5B0902090000426711cf4dc0_11eb85999c6__395a%5D.jpg)
요절가수 김정호가 그렸던
고독한 인생의 이미지는 짙은 회색빛이었다.
비범한 재주는 신조차 질투가 솟았을까..! 너무도 젊은 나이에 앗겨버
린 그의 노래세상은 온통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 등으로 뒤범벅된
삶의 반영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던
결핵균들은 오히려 숨이 끊어질 듯 가슴속의 한을 토해내게 했다.
대중들은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어느 누구도 마음 깊은 곳
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촉촉히 적셔대는 처연한 멜로디와 노랫말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팬들을 얼어붙게한 [이름모를 소녀] [하얀나비]
그리고 젊은층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랑의 진실][작은 새]등은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 드라마틱하게 짧은 삶을 살다간 김정호의 등
장은 가요계의 일대 지각 변동을 몰고 오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의 노래는 젊은 학생층의 열광적 지지를 받던 기존의 포크음악을 온
국민을 대상으로 영역을 넓히며 공감대를 형성할만큼 호소력이강했다
새마을운동으로 건설열기가 드높은 당시 사회에 [너무 어두운 곡]이
라는 이유로 일부 배척도 있었지만 창백한 얼굴에서 뿜어나오는 처절
하리만치 슬픈 멜로디는 온나라를 중독시키며 진동했다.
원로작곡가 황문평 조차 [감히 천재로 표현해도 좋다]며 34세의 나이
에 세상을 등진 김정호의 음악을 안타까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도 17년이 지났다.
자신의 음악이 세상에 울려퍼지는 달콤한 꿈을 꾸며 음악공부에 하얀
밤을 지세우며 몰두했던 김정호. 혼을 담아 기타줄을 튕겨대며 젊음을
불사르던 모습에 음악선배들도 머리를 숙였다.
본명이 조영호인 김정호는 1952년 3월 전남 광주에서 부친 조재영과
모친 박숙자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여수경찰서장을
지내고 출판사를 경영했으며 모친은 동일창극단원으로 명창 김소희
와 함께 활동했던 창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광주 수창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 교동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김정호는
밥상위에 올라가 연설흉내를내는 등 웅변에 재능을 보여 여러 대회에
서 입상할 만큼 머리좋고 활달한 개구쟁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때는 뇌염에 걸려 사지를 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대동중ㆍ상고 때는 인정많고 활달한 성격이 점차 말수가 줄고 어딘가
한이 맺힌듯한 인상으로 변해가며 고독을 즐겼다.
음악적 재능은 외가쪽의 영향이 지대했다. 모친과 함께 6ㆍ25동란중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외조부 박동신은 우리 국악의 거인. 명창
김소희의 고수이자 인간문화재인 김동준, 국립창극단장 박우성 등이
그의 제자이며 보국가, 유관순전, 해방가 등 판소리 창작에도 큰 업적
을 남겼다.
그리고 국립국악원 수석단원으로 아쟁을 연주했고 서울예전과 전남대
등에서 국악후진양성에 몰두한 박종선이 외삼촌이다.생활처럼 들려왔
던 외삼촌의 아쟁소리는 음악적 관심의 뿌리이자 시작이었다. 음악적
욕구가 꿈틀거리자 학업까지 포기하고 기타 배우기에 빠져들었다.
이때 찾아간 삼청동의 기타박사라 불리던 이생회 선생. 집을 뛰쳐나와
우이동에 골방을 얻어 두문불출하며 온종일 기타와 씨름을 했다.
당시는 통기타가 아닌 지미 핸드릭스,산타나,비틀즈등 비트강한 록사
운드에 관심이지대했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노력으로 곧 만만치않
은 기타주법으로 외국록그룹들의 레퍼토리를 제법 맛깔나게 연주할
만큼 진전이 빨랐다.
70년대초 김정호는 북한산속에서 임창제등과 미8군에 출연하던 이상
일을 음악스승으로 모시며 연주에 온 힘을 쏟았다. 임창제는 이 당시
김정호가 믿고 의지했던 절친한 음악의형제--이들은 [음악과 결혼했
다]고 할만큼 음악적 야망을 함께 키워갔다.
임창제는 [정호는 우리가 다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보면 늘 기타를
끌어안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정좌한 자세로 열심히 기타를 치고 있
던 작은 체구..정말 악착스런 정신과 사랑을 가지고 연습하는 걸 보았
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기타실력이 뒤진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극복하고 마는 완벽주의 스타일이다.]
당시 북한산 등성이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공부도 많이 못
해 무식한 우리가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을 한번 해보자]며 아이들처
럼 새끼손가락을 걸며 맹세하던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스킬보이스라는 록그룹을 결성하며 미8군 무대로 진출한 임창제가
이수영과 함께 듀엣 <어니언스>로 데뷔하려하자 자신의 일처럼 뛸
듯이 기뻐했던 김정호. 작곡한 노래들을 선물로 주었다. 어니언스의
데뷔앨범속에 수록된 김정호의 곡들은 두사람의 합의하에 임창제
이름으로 먼저 발표를 했다.
만약 히트를 하게 되면 그때가서 [이곡들은 김정호가 만든곡들]이라
고 깜짝발표를 하고 [김정호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질때 데뷔를 한다]
는 계획이었다.
의리있는 임창제는 대표곡 <작은새>외에도 <사랑의 진실><외기러기>
<저별과 달을> 등 모든 곡들이 대히트를 하자 약속대로 KBS라디오방
송에서 사실을 발표했다.
[김정호가 누구냐?]는 대중들의 궁금증이 더해가면서 임창제의 손에
이끌려 73년 [이름모를 소녀]라는 데뷔곡으로 김정호는 대중들앞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를 풍미하며 지대한 음악적 영향력을
끼친 천재대중음악가의 등장이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lub.nate.com%2Fcindex8%2F429%2Fhj3897%2F19451731%2F1%2Ftgs2A4.tmp%5B0902090000426941cf4dc0_11eb85999c6__3959%5D.jpg)
◈ 작은 가슴으로 큰 족적을 남긴 藝人
어니언스의 히트곡 <사랑의 진실> <작은 새>의 진짜 주인공이 밝혀지
자 미8군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사월과 오월> 멤버로 잠시 활동을 하
던 김정호는 TBC방송 신광철 PD에 의해 패티킴의 스페셜프로에 게스
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미 전국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가수왕으로 등극하며 솔로데뷔를
꿈꾸던 조용필과 함께 김정호의 동반 게스트 초청은 파격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속에 두사람은 대중들속으로 탄탄한 첫발을 내딛었다.
우이동시절부터 김정호의 음악성을 인정해온 기독교방송 김진성PD
는 데뷔곡 <이름모를 소녀>를 듣고 [한국의 모짜르트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이름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회한을 담은 노래---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은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점찍어 오랜 세월을 홀로 애태웠던 평생의 반려자였다.자신의 일상적
인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도 수차례 보내고 용기
를 내 집으로 찾아갔다.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
가 미덥지 못했다.그러나 순수한 심성의 사촌오빠 후배가 싫지않았던
이영희. 74년 늦봄 쉘브르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
타났다.
3년간의 열애후 77년 반포의 17평 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을 얻었다. 12번씩이나 이사를 거듭할만큼 어려운 형
편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 김정호의 부인 이영희씨
인기정상의 가수였건만 존경하던 신중현과의 첫만남에 감격스런 마음
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순수했던 김정호.7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마초는 자신의
노래 [작은 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견디기 힘든 고행길을 걷게 했다.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무성은 경제적 이중
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76년 10월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레
스토랑을 맡겼다. 83년 재개발로 헐릴때까지 [꽃잎]은 유일한 노래
무대였다.
김정호는 좌절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
지 않았다. 한달중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혼에 불을 지폈다.
77년 방위소집으로 군복무를 마칠무렵 호되게 걸린 감기는 지병을
재발시켰다.함께 활동이 금지된 하남석은 이 당시 둘도 없던 음악친구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은 물론 국악리듬에 어쿼스
틱 기타와 신디 사이저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을 함께 구상하기도
했다.
80년, 5년만에 대마초 망령에서 벗어난 김정호는 재기앨범 <인생-유
니버셜,K-APPLE-893,80년3월>을 발표했지만 해금의 달콤함도 잠깐.
오랜 정신적 고통과의 싸움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심신 때문이었다.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했다.
[과거의 화려했던 때는 흥미가 없다.인기보다는 마음에 있는 좋은 노
래를 불러 남기고 싶다]던 김정호. 일년이상 치료를 해야했건만 결핵
균보다 더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은 4개월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오게 했다.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있던 뚜아에 무아 출신 이필원과 가까워
지며 신디사이저로 창출하는 환상적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음악
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오산의 금식기도원과 삼각산 산상기
도에 매달리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님-아세아,83년11월>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배여있는 눈물겨운 음반이다.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아쟁, 가야금, 꽹과리를 직접 두둘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했다.
부인 이영희는 [신보제작은 뒷전이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다니며 1시
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그 한스런 탄식의
이미지를 담은 노래가 <님>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예견한 상여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이었다.
머리가 쭈삣 서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님>은 그야말로 온몸을
불사른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또한 수록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요양원 시절 송도해변을
걷는 여인에게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를 뽑아낸 히트곡이다. 이 앨범은
숨쉬기조차 힘들어 5개월의 최장시간 녹음을 해야만 했던 그의 유작
앨범이다.
85년 11월 29일 33세의 천재음악가 김정호는 50여곡의 주옥같은 곡을
남긴채 세상을 등졌다. 너무도 사랑했던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
라는 애틋한 유언만을 남긴 그는 흰눈이 내리던 날 경기 고양의 기독
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음악적 열정을 불태워 행복했던 진정한 대중음악가 김정호.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헌정음반과 편집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노래 [님]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부인을 여관에 드나드는
다방아가씨로... 김정호는 이복형제에게 핍박받고 무대에서 숨을 거두
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제작, 재상영 금지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86년 10월 동료들에 의해 세워진 무덤앞 노래비에 새겨진 [하얀 나비]
의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라는 노래구절처럼 인생을
구슬프게 노래한 그의 영혼은 [하얀나비]같이 그를 그리워하는 대중들
의 곁에서 영원히 순백색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큼큼~
☞ 자료출처 / 가요칼럼니스트 최규성 홈에서..
2009/02/08 - 헛제비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lub.nate.com%2Fcindex8%2F429%2Fhj3897%2F19451731%2F1%2Ftgs2A2.tmp%5B0902090000427341cf4dc0_11eb85999c6__3957%5D.jpg)
☞ 아래는 김정호의 베스트 23곡 모음임돠~!
1. 이름모를 소녀
2.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3. 그 날
4. 꽃 잎
5. 꿈속의 사랑
6. 나 그 네
7. 나는 가야해
8. 날이 갈수록
9. 눈 동 자
10. 님
11. 달맞이 꽃
12. 무정한 사람
13. 별 리
14. 봄 여름 가을 겨울
15. 빗속을 둘이서
16. 사랑의 진실
17. 사의 찬미
18. 외기러기
19. 외 길
20. 잊으리라
21. 저 별과 달을
22. 하얀나비
23. 행복의 나라로
첫댓글 본인이 소세지젹에 엄청 조아했어...지금도 그러치만...
요즘 노래방가면 산신령이 즐겨부르죠? 이제 죽을때가 됬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