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나 노름을 해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게임이나 노름이라면 인연이 없는 편인 필자가 감히 말머리에 들먹일 얘기는 아닌 줄 안다. 하지만 웬 늦바람인지, 근래 들어 절친한 몇몇 시인들이 자주 포커 ‘법회’를 벌이곤 해서, 제법 ‘열공’(열심히 공덕(?)을 쌓자)하는 분위기에 편승해 몇 마디 운을 떼는 거다. ‘법회’에 임할 때마다, 우리의 장옥관 시인은 ‘도반’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패배의 억압이랄까, 스트레스에 때로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다시 좋은 기회가 와 줄 때를 기다릴 줄 안다. 그야말로 도를 닦듯, 마음을 다해 카드를 기다릴 줄 아는 거다. 그러나 전반적인 인물평을 한 마디로 하자면 장옥관은 필자와 더불어 ‘소심파’(소신파가 아니다)에 해당한다. 도반들 중 공력이 가장 높은 송모 시인이나 비록 공력은 일천하나 타고난 끼를 자랑하는 서모 시인과는 달리, 배짱 좋게 ‘꽁’ 한 번 제대로 ‘꽝’하고 치지 못하고, 판은 끝나게 마련이다. 일천한 편이긴 하나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소심함이란 ‘연속되는 불운’에 의해 생겨난 결과이다. 그 주어진 조건(불운)을 오로지 내가 가진 것(마음)으로 극복하는 것. 그러니 포커게임이란 것도 일종의 ‘마음공부’임에는 틀림없다. 장옥관은 어떤 산문에서 스스로의 시를 ‘소심한 노름꾼의 언어’라고 자탄한 바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자.
보행? 그렇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시에 대한 불만은 어디까지나 보행의 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비롯된다. 시의 본질이 시적 상상력의 도약이나 언어의 비약에 있다고 할 때 내 시가 갖고 있는 약점은 너무 두드러진다. 마땅히 '고'를 불러야할 고스톱 판에서 패를 던지고 잔돈푼이나 챙기는 소심한 노름꾼. 모처럼 참신한 시의 씨앗을 얻었다 하더라도 발상의 폭이 좁고 언어의 간격이 촘촘하니 시적 공간이 넓혀지는 경우가 드물다. 일을 도모할 때 안전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모범적인 생활인은 될지언정 창조적인 예술가는 되지 못하는 법이다.
어쩌면 이런 문제는 타고난 기질에 속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중략) 기실 세계의 비밀을 간취(看取)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섬세하고 치밀한 감각이 필요하다 하겠다.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세계의 경이를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아니다, 감각과 언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어쩌면 감각 이전에 언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무딘 쟁깃날 같은 소심한 노름꾼의 언어로 어떻게 사물의 배후를 훔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푸줏간 앞의 개'처럼 오도가도 못 하고 망설이며 서 있다.
--장옥관, 「소심한 노름꾼의 언어」중 (『현대시학』2003.5월호)
장옥관은 타고난 미학주의자에다 감각주의자이다. 아니 심지어 '감각과다증' 환자이기도 하다. 2002년경이던가, 그는 내게 자신의 팔뚝을 내밀어 보이면서 “온몸의 피부가 뒤집혀져 있는 듯해서, 미풍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쓰라리기 그지없다”고 호소한 적이 있다. 나는 그런 ‘감각과잉’에 따른 고통의 기간을 일종의 전신轉身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섬세한 아름다움에 매혹된 영혼’이었던 시인 장옥관이 어떤 과정을 통해 보다 밀착되게 삶 자체를 껴안는 ‘구체성의 시학’으로 시적 ‘몸바뀜’을 이루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돌이켜보자면, 장옥관의 미학주의는 아마도 그 어떤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 ‘결핍’에 대응하고 극복하려는 ‘모범적인 생활인’의 태도가 섬세한(다른 말로는 소심한) 미학주의이자 감각주의를 그에게 부여해준 것이리라. 이 부분을 말해주는 그의 산문 한 부분을 보자.
나는 결혼을 하면서 낡은 흑백사진들을 모두 버렸다. 대구시 신암동 603번지의 언덕빼기 피난민촌. 한겨울에는 루핑 지붕 위를 지나가는 고압선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불확실한 앞날을 위협했고, 아침마다 공동변소에서 낯선 이웃의 똥 위에 내 똥을 얹어야 했으며, 대낮에도 방안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지붕에 끼워놓은 유리를 통해 100원 짜리 삼중당 문고판을 읽어야 했다. 하지만 만 17세의 어린 가장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리하여 내 평생 가장 길었던 그 몇 해를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낡은 가재도구((돌아가신)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도마와 식칼, 어느 해 겨울 쥐들이 서랍에 빨간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던 앉은뱅이 책상과 비키니 옷장이 전부인)를 버렸으며 채식동물의 창자 같은 골목길과 낡은 사진첩을 버렸다. 말하자면 흑백의 시대를 마감하고 천연색의 미래를 꿈꾸었던 것. 흑백사진첩이 사라진 서재에는 컬러사진첩들이 하나둘 쌓여가기 시작했다.
--장옥관, 「감각, 추억, 이미지의 파편들」중 (『시와반시』2000년, 겨울호)
‘흑백사진’으로 상징되는 ‘결핍’의 어두운 시절을 버리고, 그는 결혼과 더불어 ‘천연색의 미래’를 꿈꾼다. 그 이전, 위의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는 일찍이 ‘죽음’을 선취(?)하기도 한다. 18세 무렵, 원인을 알 수 없는 코의 출혈이 계속되자, 그는 하수구 구멍에 얼굴을 들이밀곤 하염없이 흘러드는 코피를 내려다보면서, ‘이대로 죽는구나’하고 아뜩하게 죽음을 직시했었다고 한다. 때마침 지나시던 동네성당 수녀님의 눈에 띄어 얼마간의 무료입원 생활을 통해 겨우 목숨을 건진 우리의 소년가장은, 이른바 ‘흑백의 시대’를 거치면서 ‘결핍’에 대응하고 극복하려는 ‘모범적인 생활인’의 태도를 부여받는다. 첫 시집 『황금연못』에는 「낙동강」처럼 유년시절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 직접 묘사된 것들도 있지만, 장옥관 특유의 섬세한 감각적 언어와 이미지 구사는 「그런 날」,「황금연못」같은 지극히 아름다운 가편들에서 빛을 발한다. 둘째 시집 『바퀴소리를 듣는다』에서도 「왕관을 쓴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결핍’의 상징적 기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련의 ‘낙동’ 연작을 통해 출생지이자 생활근거지인 선산, 해평, 구미 일대의 낙동강 강변 지역에 대한 정서적 지형도를 역시 특유의 섬세한 감각적 언어와 이미지 구사를 통해 복원해 낸다.
2. 장엄송
작년 여름, 문인수 시인이 시 「장엄송」을 발표했다. ‘장엄송’이란, 시에 나타난 대로 “작당이 아니라 모국어처럼/합수처럼 친”한 세 사람, 장옥관, 엄원태, 송재학 삼인방을 말한다. 셋 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장 노릇을 했지만, 특히 장옥관은 열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열일곱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의고 소년가장으로 지낸 ‘흑백사진’시절이 유독 강하게 새겨져 있었을 터이다. 셋 모두 아버지(혹은 부모)상실의 원형적 기억이나 이미지를 시로 쓴 것들이 초기 시엔 꽤 된다. 시를 통하여 그 원형적 ‘결핍’은 애도의 과정을 거친 셈이다. 셋 다 꽤 “오래 전/아버지의 나이를 간신히 넘겼다.” 그리고는 “공것처럼, 덤이라도 얻은 것처럼 서둘러 노년을 시작하려는 눈치”다. 몸의 늙음보다 먼저 ‘마음의 늙음’을 선취했던 까닭이다. 그것도 셋 다 그런 편이다. 그건 문인수형이 특유의 관찰력으로 잘 보신 거다. 사십 대 후반을 고비로, 생의 허무랄까,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생의 불꽃을 간절한 감각으로 들여다보던 시기를 그렇게 지나왔던 탓인 게다.
세 사내는 친하다. 작당이 아니라 모국어처럼
합수처럼 친하다. 1955년생, 동갑내기에 똑같이 삼형제 중 장남이다. 세 사내는
‘오늘의 시’ 동인이다. 표정이 비슷하다.
그늘이 깊다.
나고 자란 이야기가 애솔 같아서 과목이 같은 침엽의 어둠이 전신에 예민한 것이겠다. 나는
세 사내의 성명 첫 글자를 따 ‘장엄송’이라 부른다. 셋 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중략) 오래 전
아버지 나이를 마침내 간신히 넘겼다. (중략)
세 사내는 쉬!
죽음에 대해 평소 구면인 듯한 말투다. 전력처럼,
혹은 마중이라도 나갈 것처럼 죽음을 말하곤 한다. 공것처럼, 덤이라도 얻은 것처럼 서둘러 노년을 시작하려는 눈치다. 세 사내는 자주, 근처 금호강 본다. 여기까지, 여러 굽이를 자필로 적어 본다.
어머니! 그 긴 긴 수역에 걸쳐 붉은,
저 목 깊은 저녁노을을 나는 ‘장엄송’이라 부른다.
--문인수, 「장엄송」(『서정시학』, 2005년 여름호)
3.백수 시절, 운명적 만남, 전신轉身
1996년 11월 말일 자로, 사십대 초반의 ‘모범 생활인’ 장옥관은 이십 년 가까이 잘 다니던 직장(구미중부산업단지관리공단)에서 명예퇴직을 단행한다. 퇴직의 속내를 일일이 다 알진 못하지만, 당시로선 꽤 괜찮았던 공기업 명퇴 인센티브가 적용되었던 것만 기억한다. 어쨌거나, 자발적 백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자신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대봉동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영남일보 등에 사진과 함께 여행칼럼을 연재하는 프리랜스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1997년 9월 어느 날, 갑작스런 뇌혈류장애에 따른 실어증으로 입원하게 된다. 특유의 섬세한 감각적 언어를 구사하던 시인에게 찾아 온 실어증은 이때, 언어에 대한 어떤 궁구窮究라 할 만한 것을 화두처럼 시인에게 던져주었을 것이다. 통사구조를 관장하는 신경을 다친 시인은, 육 개월 남짓한 회복기간 동안 당연히 시를 단 한 줄도 못 쓴다. 셋째 시집 『하늘우물』에 실린 「다시 살구꽃 필 때」의 마지막 두 행은 이렇듯 육 개월 만에 쓰였다고 한다. 육 개월에 걸친 회복기와 이후 얼마간의 공백기를 보낸 시인은 1999년부터 대구예술대에 ‘사진비평’과목 강의를 나가기 시작하고, 2000년부터는 모교인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창작론’ 강의를 맡게 된다. 시적 전신轉身의 직접적 계기라 할 이성복 시인과의 운명적 만남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얼마간의 공백 이후, 팔 년 만의 셋째 시집 『하늘우물』은 장옥관 특유의 감각주의 언어와 매혹적인 이미지의 섬세한 결이 그 어떤 미학적 극점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당연히 문단의 호평을 받고, 두어 개 주요 문학상 최종 후보로 경합하기도 한다. 김춘식이 해설에서 ‘매혹과 비애 사이의 미학’이라고 규정했듯, 시집 전편에 걸쳐 ‘사물의 심연에 매혹당한 자’의 섬세한 감각적 언어 미학이 돋보인다. “정서가 깃들인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영을 보여주는 이러한 언어구사는, 그가 오랜 동안 자신이 바라보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스스로의 시어로는 다 표현해내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시달려 왔음을 암시한다.”라는 김춘식의 지적은 매우 적절했던 셈이다.
한때 나는 새의 무덤이 하늘에 있는 줄 알았다.
물고기의 무덤이 물 속에 있고
풀무치가 풀숲에 제 무덤을 마련하는 것처럼
하늘에도 물앵두 피는 오래된 돌우물이 있어
늙은 새들이 거기 다 깃들이는 줄 알았다
피울음 깨무는 저 저녁의 장례
운흥사 절 마당 늙은 산벚나무 두 그루
눈썹 지우는 것 바라보며 생각하느니
어떤 죄 많은 짐승 내 뒤꿈치 감옥에 숨어들어
차마 뱉어내지 못할 붉은 꽃숭어리
하늘북으로 두드리는 것일까
하르르하르르 귀 얇은 소리들이 자꾸 빠져들고
죽지 접은 나무들 얼굴을 가리는데
실뱀장어 초록별 물고 돌아드는 어스름 우물에
누가 또 두레박을 던져 넣고 있다
-- 장옥관, 「하늘 우물」전문 (제3시집,『하늘우물』)
2003년, 오랜 침묵을 깨고 연이어 출간된 이성복 시인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과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은 장옥관 시인에게 오랜 화두정진 끝의 깨달음처럼 이른바 ‘일상/육체/무의식/환상’적 글쓰기의 전범이라 할만한 것을 보여준다. 장옥관은 이들 시집들에서 시의 언어는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이며, 시쓰기란 ‘이성과 감성, 사유와 감각, 미학과 현실을 통합하는 글쓰기’라는 새로운 시학의 ‘에센스’를 간취看取한다. 이후, 그는 강의가 없는 날이면 혼자서 강에 다니면서, 또 작업실에 칩거하면서 집중적으로 시적 전신轉身을 모색하는 시작詩作에 몰입한다. 그 몰입의 결과, 이듬해인 2004년 그는 「가오리 날아오르다」외5편의 시편들로 제15회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한다. 지난 시절, ‘소심한 노름꾼의 언어’, ‘보행의 시’라면서 (섬세한)감각적 ‘언어의 매혹’에 머물고 있는 자신의 시를 자탄하던 시인의 언어는, 드디어 ‘역동적 상상력’의 언어로 ‘날아오르’게 된 것이다. 다음은 수상소감의 한 부분인데, 장옥관 시학의 전신轉身을 핵심적으로 요약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자신의 삶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 읽기를 도외시한 채 오로지 기발한 상상력이나 멋들어진 비유, 쌈빡한 이미지에만 매달리는 수사적 태도, 그것은 인공보석인 큐빅을 진짜 다이어로 알고 죽자고 가공하는 일과 다름없었습니다. (중략)
하지만 저의 요즘 생각은 언어의 질서가 빚어내는 아름다움보다는 서툴지만 저릿한 감동을 던져주는 시, 음식찌꺼기가 뒤범벅된 구정물 같은 언어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저는 투명한 말의 매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오늘 이 수상 소식은, 이러한 갈팡질팡하고 있는 저의 행보에 마침표를 찍는 뚜렷한 언급이며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상의 진정한 의미는 이처럼 사회적 공인을 통해 작가의 척추를 곧추세워주는 일이 아닐는지요.
-- 장옥관, <김달진문학상> 수상소감 중 (『서정시학』2004년 여름호)
이 시절, 그는 오로지 ‘백수 시절’을 온몸으로 겪어본 자 만이 쓸 수 있는 좋은 시편들을 다수 남긴다. 「등꽃 그늘 아래」, 「내가 강에 가는 이유」, 「오줌꽃」등이 그런 것들인데, 모두 그의 시적 전신轉身의 과정에서 탄생한 가편들로, 지난 가을에 나온 넷째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에 실린 것들이다.
신천 둔치를 걷다가 등나무 그늘에 들었습니다
훅, 끼쳐오는 등꽃 향기 연보랏빛 조명 아래
먼저 오신 손님이 두 분
생머리 질끈 동여맨 맨발 운동화 망초꽃께서는
키 나지막한 개를 데리고 오셨고
가루분 얼룩 번진 목단꽃께서는 벤치에 엎드려
벼룩시장을 들여다보십니다
평일 한낮 시민공원에는 고요도 여윈 몸으로 비칠거리고
그러기에 구름은 자꾸만 뚱뚱해집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 저 망초꽃께서는 잇바디가 고른데
그늘 바깥의 꽃 풍경은 아랑곳없이
뚜뚜뚜 발신음만 듣고 앉아 계시고 마악
자줏빛에서 보랏빛으로 넘어가고 있는 목단꽃께서는
구인란 페이지를 보고 또 들여다보십니다
나는 물 위에 떠 있는 오리를 보다가
우두둑 구름이 무릎 펴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데
한 식경을 앉았어도 우리는 말이 없었지요
품고 있는 저마다 구름의 형상은 달라도
말없음 한 가지로 우리는 똑같았습니다
-- 장옥관, 「등꽃 그늘 아래」(제4시집『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4.상응적 상상력, 구체성의 시학
2005년 봄, 열정적인 강의로 학생들의 인기를 끌던 계명대학교에서 전임 교수 발령을 받은 시인은, 지난 해 여름 <상응적 상상력의 창작 방법론>으로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다소 만학晩學이라는 감이 없지 않지만, ‘공부하고 가르치고 싶어 못 견디는 영혼’의 소유자인 시인으로서는 뒤늦게나마 ‘천직’을 찾은 셈이다. 학위논문과 연계하여 지난 해 가을에 상재한 넷째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랜덤하우스코리아)는 장옥관 시학의 전신轉身을 이른바 ‘상응적 상상력’이란 개념으로 축약한다.
논문에 따르면, 상응적 상상력이란 “(문학의 양대 축이라 할)현실과 미학의 일방적인 단일 미학에서 벗어난 복합적, 통합적 미학 체계를 탐색하는” 것으로, 보들레르의 ‘상응(Correspondances)’개념을 차용, 발전시킨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 세계가 물질계와 정신계의 이원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물질계와 정신계에는 단절이 있지만, 시인은 시적 몽상의 도움으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공감각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영혼의 거의 초자연적인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상응’의 통합적 개념이다. 장옥관은 상응적 상상력을 형상화할 구체적인 방법으로 시적 언술방법을 고찰하였는데, 이 중 하나만 소개하자면, 자유연상과 연쇄적 진술을 ‘직관적 시쓰기’로서 중요시하였는데, ‘직관적 시쓰기’란 마치 “글도 글 쓰는 자도 없고 종이와 필기구의 거의 비물질적인 만남, 한없이 가벼운 성적 접촉만이 지속되는 상태(이성복)” 같은 것이다. 시 「꽃을 꽂는 여자」의 마지막 연 “그 여자 감춘 희디흰 몸에 핀/새카만 꽃 한 송이/복음도 피해간 멀쩡한 몸꽃 한 송이였다”와 같은 구절이나,「추상화 보는 법」의 “디자인이 좋아 사온 로가디스 양복에/굵은 몸통 기어코 끼워 넣으려는 나의 정신은,/실리콘 살색 의수에 끼워 놓은 꽃반지 같다”와 같은 어구는 무의식적 자유 연상이 아니면 떠올릴 수 없었던 표현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상응적 상상력’의 핵심은 이원론적, 이항 대립적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융합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시는 그 동안 초월/일상, 정신/육체. 의식/무의식, 현실/환상이라는 시적 방향의 대립항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한다. 장옥관은, “두 대립적 요소들이 팽팽한 척력관계를 형성하려면 한국시 전통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던 일상, 육체, 무의식, 환상의 요소를 중점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혼자 쓰는 작업실
생수 담는 피티병에 오줌을 누기도 하는데,
오줌 누러 갈 때 보는 수수꽃다리 꽃구름도 좋고 오줌 누며 보는 옷고름 풀어헤친 구 름꽃도 가끔 좋지만
뿌리내린 의자처럼 만사 귀찮고 다 귀찮을 때는
앉은자리에서 그냥 오줌을 눈다
오늘 문득 오줌을 담아 놓은 묵은 피티병 들여다보니
허옇게 곰팡이꽃이 피어 있다
어라, 내 몸이 꽃을 피웠구나!
내 몸에서 빠져나온 꽃향기 깊이 들이쉬니
암향(暗香)이 그윽하게 향그럽다
나 죽어 땅에 묻히면 이 흰 꽃들 먼저 찾아와
아득히 내 몸을 덮어주리라
―「오줌꽃」전문 (제4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시「오줌꽃」은 ‘육체와 정신의 상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오줌을 담아놓은 묵은 피티병”에 “허옇게 핀 곰팡이꽃”은 “내 몸이 피운 꽃”이다. 시인은 “오줌꽃”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또한 정신과 육체 사이를 가로지른다. “관념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죽음을 육체의 차원으로 가까이 당겨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몸’을 긍정하니, “오줌꽃”에서도 “암향(暗香)이 그윽하게 향그”로울 수 있다. 마지막 연의 반전, ‘오줌/몸’이 피워낸 “곰팡이꽃”이 “나 죽어 땅에 묻히면” 먼저 찾아와 “아득히 내 몸 덮어주리라”라는 인식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대립항의 간극을 시적 긴장(울림)으로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무화(통합)한다.
시인은 “진정한 예술이 빚어내는 감동은 ‘몸에 의한, 몸의 발견’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성을 토대로 만들어낸 ‘가공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취해야만 보다 적실한 공감이 생긴다고 말한다. “참된 생각의 집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다. 몸의 언어는 머리의 언어에 비해 훨씬 근원적이며 자연에 가깝다.”라는 점에서, 시의 언어는 당연히 ‘몸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강조한다. 필자는 이러한 장옥관의 ‘몸의 언어’로의 전신轉身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 ‘구체성의 시학’이라 이름 붙여본다. 장옥관의 ‘구체성의 시학’, 즉, ‘몸의 언어’가 어떻게 종전의 섬세한 감각으로 구축한 ‘매혹적 이미지의 언어’들에 비해 훨씬 더 근원적이며 울림이 깊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 한 편 음미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큰 수술 받은 아내하고 둘이서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는다 모름지기 밥 먹는 일의 범상하지 않음이여, 지금 우리는 한 차례 제사를 드리고 있다 살아 있는 몸에 정성껏 공양을 드린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온 맘을 다해 청포 갖춰 입은 방아깨비처럼 절을 올린다 꾸벅꾸벅 서로의 몸에 절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