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선교는 구 소련이 해체되기 전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 소련이 해체되던 시기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직항 노선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모스크바를 거쳐 카자흐스탄에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 만난 신송태 목사 또한 한국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를 거쳐, 타슈켄트와 비쉬켁을 돌아 선교 목적지인 알마티에 도착했다고 한다.
신송태 목사는 1991년 알마티에 도착해 고려인을 대상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고려인 출신의 정상진 선생, 연성용 작가, 박일 교수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또한 '아바이의 잠언' 출판으로 한국과 카자흐스탄 외교에도 큰 공헌을 했다.
한국을 떠나며 알마티에 뼈를 묻겠다는 생각으로 왔던 시간이 어느덧 29년이 흘러, 지금은 선교 일선에서 물러나 다른 방법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는 신송태 목사를 본인이 개척한 고려장로교회 목회실에서 만났다.
- 1991년이면 알마티가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한 곳이었을텐데, 어떻게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선교를 오시게 되었습니까?
당시 과천에 소재한 문원교회를 개척하고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소련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넓은 소련 지도를 보면서 소련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련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는 공산권 국가였던 구 소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자꾸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족에게 소련으로 간다는 결정을 전했는데, 갑작스런 결정에 교인들도 충격을 받았지만, 가족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교를 가겠다고 결정할 당시 두 아들 중 큰 아들이 고3이라 대입 준비로 정신이 없을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대입 준비하는 큰 아들과 중학생인 둘째 아들, 입시 준비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아내를 남겨두고 홀로 알마티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1991년 4월 19일 아에로플로트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출발했는데, 그 날짜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떠난 그날이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 도착 1주일 후 교단에서 함께 파송된 선교사 한 분과는 타슈켄트에서 또 한 분은 비쉬켁에서 헤어지고, 마지막으로 제가 알마티에 도착했습니다.
1년 동안은 하숙을 하며, 선교 사역을 했는데 처음에 고려인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건 아마도 카작 현지인 보다는 고려인 선교 활동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 정상진 선생, 연성용 작가, 박일 교수와 남다른 인연을 맺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만나게 되셨고, 이분들과 어떤 교류를 이어가셨습니까?
초창기 사역 때 고려인들이 많이 모이면서 그 중에 정상진 선생, 연성용 작가, 박일 교수도 우리 교회 교인이 되었고, 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정상진 선생은 재일교포 박헌영 씨와 함께 북한에서 쫓겨난 가정을 돕는 ‘속청가족돕기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기도 했지만, 옳은 일이라 생각해서 그 일을 돕고 지원했습니다.
당시 어려운 한국어 용어들 까지도 잘 알았던 박일 교수는 고려장로교회에서 목사의 설교 통역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려인들의 애창곡이자 노동요로 불리는 "씨를 활활 뿌려라"를 만든 연성용 작가가 어느날 저에게 회고록을 부탁했습니다. 흔쾌히 수락하고 한국에서 만들어 와 연성용 작가에서 선물했는데, 좋아하시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연성용 작가의 딸 클라라는 고려일보에서 일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알 수 없어 궁금합니다.
- 사역을 하시면서 특별하게 생각하신 선교 방향이 있으셨습니까?
선교 활동 초기부터 고려인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있었습니다. 교회 이름을 고려장로교회로 정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크게는 '카자흐스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라는 목표를 가지고 여러가지를 실천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첫번째가 의료 봉사였습니다. 작은 건물을 매입해 '갈릴리 의원'으로 허가를 받고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의원'을 시작한 시점에는 큰 아들이 대학에 입학한 후라 가족이 들어와 아내와 함께 의료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의사로 구성된 '갈릴리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1년에 한번씩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쳤고, 제가 혼자 알마티에 있는 1년 동안 아내가 침술을 배워서 '갈릴리 선교단체'가 돌아간 후 직접 침을 놓고 뒷 일을 감당했습니다. 첫해는 '갈릴리 의원'에서 둘째 해는 지역 라이온 병원을 빌려서, 그 다음해는 아바야 인근 라이온에서, 마지막은 다른 선교사의 요청으로 사과밭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의료 봉사를 했습니다. 두번째 의료봉사 때는 국영방송에서 취재도 나오고, 해당 지역 구청장에게 감사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코이카에서 한-카 친선병원을 만들고 민병훈 박사가 온 다음에는 '갈릴리 의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을 코이카로 안내하고 '갈릴리 의원'은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번째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아바이의 잠언'을 출판한 것입니다.
당시 주민호 목사가 카작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 카자흐어 연구회가 결성되고 제가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95년이 '아바이 150 주년'으로 카자흐스탄 독립 후 국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정부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과 수교도 이뤄지고, 대사관도 개설되어 한국과 카자흐스탄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아바이의 잠언'은 러시아어와 카작어로 된 책이 있었는데, 고려일보 양원식 사장이 '아바이의 잠언'을 번역해 고려일보에 한국어로 게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원식 사장과 이야기를 하고 '아바이의 잠언'을 러시아어, 카작어, 한국어를 합쳐 출판하여 이것을 아바이 150주년 행사에 맞춰 카자흐스탄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카자흐스탄에 초대 대사로 나온 김창근 대사와 고려인 한구리 교수, 박일 교수, 그리고 카자흐스탄 문화 담당 최고 책임자까지 모두 네 명의 추천서를 받아 1000권을 한국에서 출판했습니다.
당시 그라프로 이종순 사장, 두레 박화숙 사장, 삼성물산 홍성혈 지사장, LG전자 이승조 지사장, 한화 김종석 지사장, 삼성전자 이찬구 지사장의 후원으로 제작했고, 당시 처음으로 한국과 알마티 직항이 열린 그라프로를 통해 책을 운송해 왔습니다. 그 일에 그라프로 이종순 사장이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때 직항이 열리지 않았다면 천 권이나 되는 책을 가져오는건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만들어 온 책은 대사관에 전달해 대사관에서 카자흐스탄 정부에 기증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세번째는 스포츠와 관련된 것입니다. 당시 태권도 사범 내외가 우리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외와 함께 청소년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는데, 청소년의 호응이 좋았습니다.
네번째는 서두에도 이야기 했지만, 고려인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있던 차 고려인 3,4세로 구성된 '하얀나비' 바이올린 연주단을 알게 되었습니다.
쉬콜라 학생들 15명으로 구성된 단원들을 지원하였고 연주회도 참석하며 격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사역했던 선교 방향은 이렇게 크게 네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알마티에서 선교 활동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아바이 150 주년' 행사가 끝나고 어느 날 교회로 카자흐스탄 총리의 감사장이 도착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감사장을 받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 알마티에 선교하러 오면서 "이곳에 뼈를 묻겠다"는 마음으로 오셨다고 했는데,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알마티로 오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처음에 한국을 떠나 알마티에 선교사로 오면서 '이곳에 뼈를 묻겠다'는 마음으로 왔었습니다. 그런데 알마티에 온 지 9년 째 되던 해 심장쪽에 문제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가서 심장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심장 수술 후 대림동 '효성교회'에서 13년 목회하다가 정년을 맞아 은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알마티로 오게 된 것은 아내의 꿈 때문입니다.
제 아내의 꿈은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마티에서 사역했을 때 아내는 카즈구 국립대학의 랭귀지 스쿨을 시작으로 카즈구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당시 카즈구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제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쓰러지는 바람에 한국으로 갑자기 가야만 했던거죠. 그런데 아내는 마음 속에 계속 한국어 교육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효성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아내는 한국어교원 자격증을 취득하며 한국어 교육을 위한 본인 나름대로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2018년에 다시 알마티에 오게 된 것은 아내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제가 따라온 겁니다. 지금 아내는 알마티에 있는 국제관계 및 세계언어대(인야즈)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본인의 꿈을 이루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수술 후 건강을 되찾고, 가족들과 함께 또 다른 선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목사님 가정에서 특별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선교 활동을 펼치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은퇴 후 가정선교회(SFWM)를 결성했습니다. 가정선교회를 꾸리게 된 것은 두 아들의 자발적인 결정 때문이기도 합니다. 두 아들이 아버지의 선교 활동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본인들이 직접 선교지로 갈 수 없으니 제가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가정선교회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 신학섭 장로는 영동에서 이비인후과원장으로 그의 꿈은 선교지에 10개 교회를 건축하는 것 입니다. 외부 지원없이 순수하게 가족들의 힘으로만 카자흐스탄에 2개, 남아공 4개, 인도 1개 해서 총 7개 중 5개는 완공한 상태고 2개는 건축 과정에 있습니다. 둘째 아들 신대섭 집사도 익명으로 카자흐스탄 현지에서 고아원이나 여러 방법으로 도움의 손길을 베풀고 있습니다.
제가 강요해서 자식들이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본인들이 꿈을 가지고 앞장서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에 보람과 긍지를 느낍니다.
저희 가정이 결성한 가정선교회는 해외 선교지 교회 건축, 선교사 지원, 신학교 지원, 국내 개척교회 지원, 자선사업단체를 지원하는 활동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 카자흐스탄 선교 역사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구 소련시절에 오셨든지, 카자흐스탄 독립 후에 오셨든지, 카자흐스탄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선교사들이 나름의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사역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카자흐스탄에 세워진 교회들마다 청년들이 취업 문제로 한국 및 타국으로 진출하는 일들로 교회 부흥에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바른길로 묵묵하게 선교 활동을 이어가길 후배 선교사들에게 부탁드리고, 나아가 선교활동을 기본으로 하되 카자흐스탄에 유익이 되고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퇴 후 제2의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신송태 목사는 아직도 고려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아픔이 많은 우리 동포 고려인에 대해 한국정부에서 포용하고 배려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주길 바란다"는 희망을 전했다.
김근향(한인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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