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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신고전주의(18후반~19초)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각 장르에 걸쳐 서구 전체를 풍미한 예술 양식. 고전, 고대(그리스 ∙ 로마)의 부활을 목표로 고고학적 정확성에 강한 관심을 두고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두었다. 고대적 모티브를 많이 쓰고 냉철한 표현의 완성을 특징으로 한다.
유럽인들의 그리스~로마에 대한 향수는 신앙수준으로 유럽 여행에서도 그리스~로마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애로사항도 많고 충분히 즐기기도 힘들다고 보아야죠!
신고전주의라는 용어는 당연히 당대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 푸생의 회화를
설명하면서부터였다.
용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용어에 걸맞은 시대상을 찾으려 시도했고, 1920년대에 미술사학자들과 여타 미술 평론가들이 이 용어를 지금과 같은 용례로 사용하게 되었다.
*니콜라 푸생(1594년 - 1665년)
프랑스의 화가이다. 그는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고전주의적인 주제들을 많이 그렸다.
1628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유명해져 1639년에 고국 프랑스의 루이 13세로부터 수석 화가로서 초빙되었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로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루살렘의 파괴〉, 〈바쿠스 제〉,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등이 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는 라틴어 경구로, 니콜라 푸생이 그린 두 그림의 제목으로 유명하다. 두 작품은 고대의 이상화된 목동들이 옛 무덤 주위로 모여든 모습을 묘사한 전원 그림이다. 가장 유명한 두 번째 그림(121 x 185cm)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으며, "아르카디아 목동"(Les bergers d'Arcadie)이란 제목이 붙어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라는 경구는 보통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의미로 해석되며, 인격화된 죽음이 말하는 것처럼 되어있다.
용어의 기원이 채 100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은 예술의 각 분야에서 동일한 시기를 지칭하지 않음이 특징적이다.
예를 들어 음악에서는 미술과 달리 용어를 19세기~20세기 음악에 적용하기도 한다.
양식의 대두는 복고주의 양식의 대두를 불러오는데, 건축양식에선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으로의 복고를 중시한 보자르(제2제정) 양식, 르네상스 시대로의 복고를 중시한 신르네상스-이탈리아네이트 양식, 중세 복고 양식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예시를 접하고 싶다면 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50개 주 주의회 건물을 검색해 보면 된다. 50개 주 대부분의 주지사 혹은 의회 건물은 모두 석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립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구서울역사가 신고전주의 양식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술가로는 프랑스의 자크 루이 다비드, 그리고 그의 제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이탈리아의 안토니아 카노바가 있다.
"아름다운 그리스여! 이제는 쓸모없게 된 슬픈 유적이여! 쇠락하여 영원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위대하도다!"
— 조지 고든 바이런
의미 심장한 바이런의 고전주의에 대한 글~
신고전주의 미술 운동은 18세기, 19세기 미술 운동에 있어서 낭만주의와 함께 유럽 미술의 한 축을 형성했던 주요한 미술 운동이다. 신고전주의가 촉발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그 계기가 된 원인은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고고학적 발굴이었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의 도시가 발굴되면서 당시의 도시문화나 도시구조, 예술작품 등이 온전하게 드러났는데 오히려 18세기 유럽보다도 더 선진적인 도시구조와 시설, 예술수준(특히 조각품)을 가졌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리스와 후신으로 일컬어진 고대 로마에 관심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계몽주의가 활개쳤기 때문에 계몽주의를 숭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교가 없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유럽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가 점령하기 이전에 유럽에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학문들을 숭상하며 그것이야말로 이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 화사함만 중시하고 정신적 이념적 가치가 없던 로코코 미술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신고전주의는 고고학의 발전으로 시작된 그란 투리스모라는 상류층의 교육·여가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측면이 있다.
18세기 상류층의 자제들은 이탈리아의 고전 문화를 보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는데 이러한 관례 속에서 형성된 여행지, 논의, 각종 문서들을 통칭 그랜드 투어의 경향으로 묶어서 부르고 있다.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랜드 투어는 단순히 여행이라는 뜻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통상 당대의 유럽인들은 그랜드 투어를 위해서 평균적으로 1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소모했는데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교적인 모임과 강좌 등이 후일 신고전주의의 미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투어가 가능하게 된 것에는 도로의 발달과 고전고대의 유물들이 발굴된 것이 첫 번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주요한 유적들이 발굴되었는데, 헤르쿨라네움 발굴이나 폼페이 발굴과 같은 것이 시기를 대표하는 발굴이라고 볼 수 있다. 고전, 고대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유적지들이 많이 발굴됨과 동시에 이에 관한 출판물들도 수도 없이 나왔다. 요한 빙켈만의 <그리스 예술 모방론>에서부터 그랜드 투어를 위해 작성한 소규모의 유적, 미술관 목록에 이르기까지 책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랜드 투어가 단순히 고전, 고대의 유물들만을 선호했던 것은 아니다. 여행자들은 이러한 유적지들뿐만 아니라 우피치 미술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을 모아 놓은 미술관들을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피렌체와 같은 도시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려야 하는 필수의례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여행자들이 받아들였던 고전, 고대의 예술, 문화의 성격이 그 이전 시기였던 르네상스인들이 받아들였던 바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신고전주의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이며 18세기 유럽인들이 받아들였던 고전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성격이었느냐는 문제가 연구자들에게 남았다. 현재까지의 일반적인 견해는 당대인들이 받아들인 고전은 르네상스의 고전과는 달리 이때의 고전이라는 것은 르네상스와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거치면서 변형된 고전에 가깝다.
이를 알 수 있는 예가 신고전주의의 성숙기로 분류되는 19세기 전반의 신고전주의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신고전주의자들은 이전의 고전주의자들과 다르게 터키와 중동,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와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다른 신고전주의자들도 고전, 고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르네상스 당시 가졌던 고전, 고대에 대한 관점에서 몇 가지 의문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오달리스크
《그랑 오달리스크》(Grande Odalisque)는 1814년에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가 완성한 그림이다. 루브르 미술관 소장. 오달리스크는 오리엔트의 후궁을 말하는 것인데 앵그르는 오리엔트의 분위기를 사랑하여 《터키탕》 등의 작품을 그렸다. 앵그르는 이 오달리스크를 로마에서 그려 1819년에 파리에서 발표했으나, 당시의 생각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탐미적인 화필(畵筆)을 나타냈었기 때문에 평판은 좋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 시작되는 그리스 복고 경향은 앞서 보았던 앵그르의 사례에서 보듯이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과는 다소 동떨어진 세계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의문점은 기본적으로 계몽주의라는 사조가 피워낸 합리적인 의심의 결과물이었다.
신고전주의의 시기적인 구분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학계에서 널리 통용된다. 하나는 양식적인 경향으로 나누어 초기의 로마 복고 경향과 후기의 그리스 복고 경향으로 설명한다.
두 경향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중심으로 크게 갈리는 측면이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두 양식이 함께 공존하다가 그리스 복고 양식이 후반기에 들어서 더 강해졌다고 봄이 적절하다.
단순한 경향일 뿐 그리스 복고가 강했던 시기에도 로마 복고의 경향으로 작품을 제작한 경우는 존재했다. 다른 방법은 전통적인 시기 구분인데 프랑스 혁명을 주요한 전환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양식적 구분과 궤를 같이한다.
흔히 말하는 앙시앵 레짐의 시대였던 18세기 중반과 후반을 형성기로 나누고 그 이후의 시기를 성숙기로 나누는 것이 신고전주의의 시대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앙시앵 레짐
앙시앵 레짐, 곧 구체제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정치적 변동과 개혁을 '누보 레짐(Nouveau Régime, 신체제)'이라 부른 것에서 이에 대응하는 어휘로 탄생했다. 이는 '오래된(old)'이라는 뜻의 '앙시앵(ancien)'과 체제라는 뜻의 '레짐(régime)'의 결합이다.
앙시앵 레짐을 봉건제(feudalism)의 비유 또는 동의어로 보기는 어렵다.
현대 학계에서 프랑스의 봉건제는 카페 왕조 초~중기에 나타난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현상에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고, 과거와 같이 경제 체제 혹은 지방분권적 특정을 통틀어 봉건제라고 설명하는 관습은 더이상 비학술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중세 이후 확립된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흐름 속에서 오랫동안 왕과 귀족층의 대립이 지속된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누적되며 형성된 체제가 앙시앵 레짐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있어서 신고전주의는 17세기 프랑스의 미술사조인 고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한 점은 소묘와 터치에 있어서 작가 본인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빛의 표현에 있어서 차가운 조명과도 같은 흰색 계열의 빛을 사용한 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미술사에 고전주의는 3번 등장합니다..
클래식중의 클래식인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에 이어 신고전주의~~
여전히 여행에서 유럽인들의 1번 엄지척 여행지들과 일맥 상통합니다.
주제에 있어서도 풍경화가 지양되거나 부수적인 요소로 물러나고 인물화, 건물을 그린 그림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묘사된 인물이나 건물은 많은 경우 영웅의 죽음과 헌신과 같은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주제 일색으로 그려졌으며 신화에 대한 그림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형식 경향에 있어서 예외가 존재하는데 특히 나폴레옹이 실각한 직후 프랑스 미술에서 이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얄궂게도 이러한 이탈 경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화가가 앞에서 이야기한 오퀴스트 앵그르다. 이국적인 주제뿐만이 아니라 고전주의 양식이 규범적으로 드러나는 인물화 분야에 있어서도 논란을 많이 일으켰다.
당대에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은 <베르탱 씨의 초상>이 이탈 경향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에서 보이는 인물의 묘사, 특히 기다림을 참지 못해 초조해보이는 표정과 그를 반영하는 듯 손가락이 모두 펴져 발톱처럼 묘사한 부분은 이 그림의 백미이자 당대의 보수적인 예술평론가들이 숱하게 많이 지적했던 부분이다.
비단 앵그르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다비드가 망명한 이후 등장한 그의 제자들의 작품들도 형식에 있어서는 역사화의 규범에 따르고는 있었지만 세세한 표현에 있어서는 낭만주의의 경향을 수용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비교에 있어서 둘을 대립되는 경향이 아니라 낭만주의에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신고전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유통된 H.W 젠슨의 <서양미술사>는 신고전주의 개괄에서 이 경향에 대해서 서술하고, 대한민국에는 번역되지 않은 최신 판본에서까지 그 서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
파리에서 출생하였고,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1774년에는 로마 상을 받았다. 이듬해 로마로 유학하여 고대 미술에 큰 감명을 받았다. 역사화를 그려 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는 한편, 근대 회화의 시조가 되었다. 다비드는 이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자 프랑스 혁명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었고, 프랑스 공화국하에서 사실상 예술의 독재자 역할을 하였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이후 나폴레옹 1세의 정치 체제에 협력했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문화재보호에 앞장섰다.
전형적인 철새 예술가로 혁명때
개혁파에 있었으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혁명 쪽에서 미술을 담당했습니다. 친구 장 폴 마라는 언론을 담당했고요. 장 폴 마
라가 죽자 자크 루이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이라는 걸작을 남깁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렸으나 뒤에 국외로 도망갔다.
#마라의 죽음/자크 루이 다비드
캔버스에 유화 165 x 128 cm/
1793
벨기에 왕립 미술 박물관, 벨기에 브뤼셀
《마라의 죽음⟫(프랑스어: La Mort de Marat)은 자크루이 다비드가 살해된 프랑스 혁명가인 장폴 마라를 그린 그림이다. 가장 유명한 프랑스 혁명의 그림 중 하나이다. 다비드는 몽테뉴이자 프랑스의 선도적인 화가였다. 이 작품은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살해된 후 1793년 7월 13일 욕조에서 죽은 채로 누워있는 마라를 묘사한다.
#사비나 여인들의 중재/자크 루이 다비드/캔버스에 유화 522 x 385 cm/1799/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파리
자크 루이 다비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을 지지했던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인인 마거리트 샤를롯 다비드는 집안 대대로 왕실 쪽이어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을 반대했고 남편에게 경멸을 느꼈던 겁니다.
둘은 11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1793년에 이혼을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이혼을~~
부인 나이 27세, 자크루이다비드는 45세!
아이들은 엄마를따라갔습니다
혁명이 복잡하게 진행되면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 당하고 곧바로 혁명을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도 체포되어 단두대에 목이 날아갔고요
"로베스피에르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거야!!"를 외쳤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식날 배탈이 나서 처형장에 참석을 못 했으나 1974년에 체포되어 파리 뤽상부르 궁전에 갇히게 됐습니다
전처 마거리트 샤를롯은 16살에 시집와서 애들 낳고 키우며 비록 정치적으로 집안싸움이 있었지만 이혼하고 보니 그래도 사랑이 있었던 만큼 면회도 갔고요. 애들 얘기도 해주고 그뿐만 아니라 전 남편 자크 루이 다비드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집안 인맥을 다 찾아 백방 천방 만방으로 쫓아다녔고 감동을 받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자신의 전처 샤를롯에서 사비니의 여인 허르실리아가 보였던 겁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마의 건국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자라서 로마를 세웠는데 결혼할 여자가 없자 파티를 열어 인근의 사비니 사람들을 초대해서 만취됐을 때 처녀들을 다 납치해가서 자신들의 아내로 삼아버렸습니다.
사비니족은 몇 년 동안 칼을 갈고 준비해서 로마를 쳐들어 갔는데 그땐 이미 사비니 처녀들이 모두 애를 낳고 로마 사람들의 엄마이자 아내가 됐단 말이죠. 근데 친정 아빠가 사위 죽이겠다고 쳐들어 왔으니 그럼 애들은?
중간에 낀 사비니 여인들은 제발 가족끼리 싸우지 말자고 친정 아빠와 남편 사이에서 전쟁을 말리는 중재를 들어간 로마 건국 이야기를 그려 전처 샤를롯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그렸습니다
작품 왼쪽에 칼자루로 거시기를 반쯤 가린 사람들이 사비니 족이고요. 오른쪽에 빵빵한 엉덩이에 늑대 젖을 먹는 쌍둥이 아기 방패를 들고 있는 쪽이 로마입니다. 중간에 여인들과 아이들이 사비니 여인들과 로마의 어린이들이고요!!
작품의 중앙에서 양팔을 벌려 중재 중인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사비니 왕 타티우스의 딸이자 로물루스의 아내 헤르실리아입니다.
"당신들이 싸우면 저는 아버지도 잃고 제 남편도 없는 과부가되며 아이들은 고아가 됩니다!"
멋진 스토리에 멋진 그림~~
전처의 노력으로 1795년에 감옥에서 풀려난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혼했던 전처 마거리트 샤를롯과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았겠죠!
*자크 루이 다비드의 변절 행각
내친 김에 우리나라 정치인같은 다비드 언행 계속 적어봅니다!
“사람들의 눈앞에 영웅적 행위와 시민적 덕목의 특징을 보여주면, 영혼은 전율하고 아버지의 땅에는 영광과 충성의 씨앗이 뿌려질 것이다.” _ 다비드
다비드는 고전적인 이상과 아름다움으로 역사화와 초상화를 그려내는 실력뿐만 아니라, 그림의 주문자가 원하는 메시지를 간파해서 절묘하게 녹여내는 정치적 감각도 갖췄다.
루이 16세의 첫 번째 주문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이 대표적이다.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고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 호라티우스 형제들은 서로의 몸을 뭉쳐 하나로 만들고 손을 곧게 뻗어 아버지(조국)에게 향한다. 국가를 향한 애국심과 충성심이 저 강건한 팔들에 단단히 배어 들끓어 오르고 있다. 로마에서 이 그림을 직접 본 괴테는 ‘프랑스 학파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말로 다비드의 실력을 극찬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년
다비드의 그림은 권력자들의 구미에 딱 맞았다. 왕은 그에게 두 번째 주문했다. 그러자 다비드는 고대 로마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연 초대 집정관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왕이 주문한 그림에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연 정치인이 주인공이라니?’ 더욱 놀라운 점은, 그림이 완성됐을 때는 프랑스가 공화정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자 평소 신념대로 공화주의자로서 왕정을 비판했다는 의견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기회주의적 처세라는 비난으로 다비드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뉘었다. 게다가 그는 혁명의 주축 인물들과 친분을 쌓으며 혁명정부의 미술계 일인자로 등극한다. ‘짐이 곧 신고전주의’라며 위풍당당하게 왕정을 찬양하던 그가 ‘짐은 곧 공화정의 대변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마라의 죽음>은 확실한 증거다.
#마라의 죽음, 1793년
#폴자크에메보드리, 마라의 죽음, 1860년
마라는 혁명 초기에 <인민의 친구>을 발간하며 여론 형성에 막강한 힘을 발휘한 언론인이자, 로베스피에르와 더불어 혁명에 반대하는 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한 급진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공포정치를 주도한 그를 죽이는 것이 프랑스를 위한 길이라 믿었던 샤를로트 코르데는 치밀한 계획 끝에 암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정부는 다비드에게 마라의 공개 장례식에 사용될 그림을 다비드에게 주문했고, 다비드는 몇몇 사실을 비틀어 조국을 위해 일하다가 안타깝게 죽은 혁명의 순교자로 표현했다. 보다 정확한 정황을 담은 폴 자크 에메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에서는 마라가 목욕하다가 죽은 남자로만 보인다. 이렇듯 다비드는 사실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주문자인 공화정 정부의 의도에 맞는 작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공화정이 몰락하고 나폴레옹이 권력의 태양으로 부상하면서 영광의 시간은 끝났다. 단두대에서 사라진 동지들과 달리 그는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곧 석방됐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에 동참해달라는 나폴레옹의 요구를 거절했다. 아마도 정치에 너무 깊이 발을 담갔다가 감옥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 때문에 더이상은 권력자들과 얽히기 싫었던 마음이 컸으리라. 그러나 운명은 그를 야인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폴들라로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48년
이탈리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의 실제 모습은 농부가 이끄는 노새를 탄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 가깝다.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1801년
잘 관리된 흰말을 타고 오렌지 망토를 휘날리며 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다비드의 나폴레옹은 살아있는 영웅 그 자체다. 들라로슈의 나폴레옹이 다큐멘터리라면, 다비드의 나폴레옹은 할리우드 영화다. 당연히 황제는 후자에 만족했고, 다비드에게 자신의 영광을 불멸로 기록할 대관식을 그리도록 한다. 이것이 루브르에서 두 번째로 유명하고 큰 그림이자, 신고전주의의 완성작으로 꼽히는 <황제의 대관식>이다.
#황제의 대관식, 1806-7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왕당파가 재집권했다. 왕정과 공화정, 제정까지 40여 년에 걸쳐 최고 권력자의 옆자리를 지킨 다비드는 자신에게 강한 반감을 품은 왕당파를 피해 브뤼셀로 망명했다. 그곳에서도 황제와 교황을 그렸던 화가의 영광과 부귀를 마음껏 누리다가 77세로 둘째 아들의 품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프랑스 혁명이 공화정으로 안착되었고, 다비드는 더러운 변절자나 혁명의 배신자로 여겨졌다. 그의 그림들은 지워지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에서 영광은 지워졌다. 왜냐하면 자크루이 다비드는 고난을 피해 성공의 꽃길만 걸으려 했고 권력의 양지만 따라다닌 부역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장점으로 몰락한다."
묵자의 말이다. 권력자의 의도를 간파하는 탁월한 능력과 그것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능력, 처세술 등이 탁월하여 40여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바로 그런 장점들로 다비드는 프랑스 역사에서 대표적인 부역자이자 변절자로 기록되었다. 겨울을 견뎌야 봄꽃은 세상과 만난다. 삶도 고난을 통과하면서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지금 철새들도 미술사 공부 시켜야 겠네요!
천수를 누리고 생전에 뽀시랍게 살았다만 기억하겠죠!
다비드 자화상, 1794년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1780년~ 1867년)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앵그르는 역사화에서 니콜라 푸생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전통을 따랐으나, 말년의 초상화는 위대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18년간 로마에서 옛 그림을 연구하였으며, 라파엘로에 심취하였으며르누아르와 에드가 드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과거를 깊이 중시했던 앵그르는, 한창 떠오르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양식을 대표하는 낭만주의에 맞서 아카데미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그의 모범상은 라파엘로처럼 영속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예술의 장엄한 영역을 정립한 때인 영광스러운 기억의 세기의 꽃을 피운 위대한 거장들이었다.
'혁신가'가 아닌 좋은 예술체계의 '보존자'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현대에는 앵그르와 당시의 다른 고전주의자들이 당대의 낭만적 정신을 구체화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앵그르는 인상적인 공간과 형태의 왜곡으로 현대 예술의 주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대표작으로 〈리뷔에르 부인의 초상〉 〈목욕하는 여자〉 〈터키 목욕탕〉 등이 있다.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1세
루이8세의 인사
리비에르 부인
오달리스크와 그 노예
베르탱씨의 초상
잔다르크와 샤를7세의 즉위식
유피테르와 테티스
터키 목욕탕
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자화상, 1804경..
#안토니오 카노바(1757년~ 1822년) 이탈리아의 조각가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조각가로 여겨진다.
1776년에는 조각 작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제작했으며 1779년에는 조각 작품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를 제작했다.
1780년 12월 28일에 로마에 정착하면서부터 고대 로마의 유적을 연구했다. 조각 작품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1781년 ~ 178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 기념비(1787년), 교황 클레멘스 13세 위령비(1787년 ~ 1792년), 조각 작품 《큐피드의 키스로 환생한 프시케》(1787년 ~ 1793년) 등을 통해 카노바의 명성은 높아졌다.
1800년에는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을 여행하면서 고대의 조각 작품을 연구했다. 1802년부터 1806년까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소재로 한 나체 조각 작품인 《조정자 마르스와 같은 나폴레옹》을 제작했고 1814년에는 조각 작품 《아름다움의 3여신》을 제작했다. 1822년 나폴리를 여행하던 도중에 과로를 이유로 베네치아로 귀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하고 만다.
후대 평론가에 의하여 예술적 영향은 그의 생애 동안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평가받으며 작품은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조각 스타일은 현대 조각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열심히 일만하고 크게 일화가 없는 조각가였는지 작품 소개는 많은데 작품 스토리는 그다지 없네요~~
카노바의 조각 작품 그림을 소개하면서 신고전주의 서술은 마감합니다.. 총총~~
오르페우스/1776/베니스 Correr 박물관
유리디스/1775/베니스 Correr 박물관
데이달루스와 이카루스/1777~9/Correr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루스/1781~3/런던 알버트 박물관
회개하는 막달레나/1796/제노아
큐피드와 푸시케/1796~80/루브르
Napoleon as Mars the Peacemaker/1803~6/런던 웰링턴 박물관
페르세우스와 메두사머리/1804~6/메트로폴리탄
Paolina Borghese as Venus Victrix/1804~8/Galleria Borghese 로마
보나파르트/1804~7
테세우스와 켄타로우스/1804~19
비너스와 Mars/1816~22
엄청나게 다작을 한 조각가로 작품 소개가 수두룩합니다만 우째 아류같은 느낌이 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