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답사를 위하여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1910년 7월).
그 뒤 토민의 배척이 심하여 일상생활에 지장이 많았으나,
1911년 봄에는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것을 목적으로 1911년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등이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소장은 이동녕, 교관은 김창환(金昌煥)·남상복(南相復)·이장녕(李章寧)·이세영(李世永) 등이었다. 1911년 4월까지 제1기 졸업생으로 변영태(卞榮泰)·성준용(成駿用)·김련(金鍊) 등 유수한 애국 청년 40여명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삼원보는 교통이 번잡하였기 때문에 국제적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도 신흥학교를 인적이 드문 벽지를 택하여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통화현(通化縣) 제6구 합니하(哈泥河)로 옮겼다. 광활한 토지를 매수하고 신흥강습소 본관을 세우는 데에는 방대한 경비와 수많은 인력이 소요되었는데, 그 경비는 이회영·이시영(李始榮) 등 독립운동가족 6형제 중의 둘째인 이석영(李石榮)의 소유전답 6,000석 토지를 매각한 돈(당시 40만원,현재 약 600억원)으로 충당하였으며, 선생과 학생이 노동을 하여 마침내 거대한 신흥강습소의 본관과 사옥을 준공하였다.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했다. 교육과정은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전력하였다. 그런데 각지에서 애국 청장년들이 모여들어 합니하에서는 도저히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됨에 따라 1919년 5월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중학교를 발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부민단이 개편되어 조직된 한족회 산하의 학교로 발전했다.
신흥중학교 설립 당시 교장은 이세영(李世永), 부교장 양규열(梁圭烈), 학감 윤기섭(尹琦燮), 훈련감 이장녕, 교관으로는 본교 졸업생인 박두희(朴斗熙) ·성준용 ·백종렬(白鍾烈) ·오상세(吳祥世) ·원병상(元秉常) 등이었다. 그리고 통화현 쾌대모자(快大帽子), 린장현 토애(臨江縣土崖), 하이룽현(海龍縣) 성수하자(聖水河子)에 분교를 두었다.
교육과정으로는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 과정 등을 두었고, 폐교될 때까지 2,1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이들은 청산리전투의 대첩과 주구배(走拘輩) 주살 등 독립전선 각 분야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3 ·1운동 뒤에는 지청천(池靑天),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이곳으로 왔으며, 입학지원생도 늘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가중되는 박해와 잇달은 사고로 1920년에 폐교되었다.
신흥강습소부터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될 때까지의 10년사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역사이며 피눈물겨운 시련의 역사였다. 신흥무관학교가 탄생한 다음해부터 2년간의 대흉작, 윤치국(尹致國)이라는 학생이 지방색으로 피살된 사건, 없어서는 안될 중견간부 윤기섭 등이 마적에게 납치된 사건 등과, 이에 실망한 이시영은 봉천으로 가고, 이동녕은 노령으로 가는 등 권위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이며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사라질 뻔하였다. 그러나 절망속에서도 윤기섭·김창환·여준(呂準) 등은 굴하지 않는 기백과 인종(忍從)으로 각 촌락을 전전하면서 구걸을 하여 학생들의 굶주림을 달래며 학교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3·1운동이 종식된 다음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특히 만주황야에서 대적 무력항쟁을 서둘렀다.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출신으로 육군중위 지청천(池靑天)·윈난(雲南)사관학교출신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이곳으로 왔으며, 그들은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어 입학지원생은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현상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일제의 가중되는 박해와 잇달아 발생하는 사고로 1920년 가을 폐교되고 말았다. 폐교된 그날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안도현(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의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여기에서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동녕 외에 명문거족 경주이씨 6형제인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등이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 서간도 삼원보에 세운 사관학교의 효시로서 1911년부터 1919년까지 3천5백명의 20대 초반의 한국청년을 집중 육성한 애국의 군사학교였다. 뒤에 동교장이 된 임정요인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는 곧 우리 민족이 군인정신을 길러낸 최초의 사관집단 육성소로서 그 정신이 곧 애국애족의 효시요 요람인 것이다.
이처럼 이동녕·이시영으로 이어지는 사관학교의 역대 교장출신들은 무장독립전쟁론을 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서 40년을 죽마고우로 뒷날 대한광복군 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함께 수립, 정성스럽게 민족을 이끌어 갔다.
경학사
경학사 耕學社 |
개요 |
1911년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
설립연도 |
1911년 4월 |
설립목적 |
독립운동 |
주요활동 |
농업개발, 군사교육, 민족의식 고취 |
규모 |
사장 1인, 부사장 1인, 학무·재무·조사·조직·외무 각 2인 | |
민족의 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 농업을 장려하고 자제들의 민족교육을 실시하려고 세운 민단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1907년에 조직된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 간부들이 1909년 봄 서울의 양기탁(梁起鐸)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어,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제2의 독립운동 기지를 선정할 것과 독립군양성기관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결의함에 따라 조직이 태동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일본의 감시가 심하여 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양기탁·안태국(安泰國)·김구(金九)·이승훈(李昇薰) 등 각 도의 책임자를 선정하여 군자금을 조달하도록 하였고, 그해 여름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주진수(朱鎭洙)·강유순 등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의 기지로 적합한 곳을 물색하게 하였다.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에 걸쳐 이회영 5형제와 이상룡(李相龍)·김창환(金昌煥)·이동녕·여준(呂準)·이탁 등 각 도의 대표적 인사 100여 명이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삼원보(三源堡) 주변의 토지를 구입,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1년 4월 랴오닝성[遼寧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 고산자(孤山子)에서 300여 명이 노천군중대회를 열어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5개 조항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사장에 이철영, 부사장에 이상룡, 서무에 김동삼·이원일, 학무에 이광·여준, 재무에 이휘림·김자순, 조사에 황만영, 조직에 주진수·김창무, 외무에 송덕규 등을 선임하였다.
계몽운동의 이념이었던 식산흥업·교육구국론에 입각하여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병농일치의 원칙에 따라 농업개발과 군사교육, 민족의식 고취하여 구국인재를 양성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데 교육의 주된 활동목표로 삼았다.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신흥'이란 신민회의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의 '신(新)'과 흥왕된 독립운동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흥(興)'을 뜻한다. 곧 신민회에서 목적으로 한 무관학교의 전신으로서의 의의가 있다. 신흥강습소의 초대교장은 이동녕이 맡았으며, 교감에는 김달(金達)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1년 동안은 이회영 일가의 힘으로 운영되었으나, 1912~1913년에 걸친 흉작으로 곧바로 운영난에 부딪힌 데다가 중국정부에서는 한국인에게 토지매매를 금지했으며 한국인의 왕래마저 차단하는 등 관헌들의 탄압이 겹쳐 해산하기로 하고 이동녕과 이시영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다.
1914년에 이회영과 이상룡 등이 중심으로 하여 조직한 부민단(扶民團)에 인계되어 그 사업을 계승함으로써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비록 3년 정도 밖에 유지하지 못하였으나, 그 조직경험은 그 후 중국 동북지역을 주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부민단은 1919년 3·1운동 직후에 한족회(韓族會)로 개편되었고, 이 한족회는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신흥강습소의 후신인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사관을 양성하는 중추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운동은 만주에서 벌인 독립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
부민단
부민단 扶民團 |
개요 |
1912년 만주 퉁화[通化]에서 조직된 자치기관. |
설립연도 |
1912년 |
구분 |
자치기관 |
설립목적 |
독립운동기지 건설 |
소재지 |
중국 만주 퉁화 |
주요활동 |
교육기관, 신흥학교 운영 | |
1911년 경학사(耕學社)가 흉년과 일제의 탄압, 중국인의 배척 등으로 해산되자, 1912년 이상룡(李相龍) 등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조직한 자치기관으로, 본부는 퉁화縣 합니하(哈任河)에 두었다.( 면적 1.52㎢, 인구 231만 명(1997)이다. 1941년에 시가 되었다. 시가지는 훈장강 북쪽 연안의 구시가와 장난[江南]·장둥[江東]·얼다오커우[二道口]의 4지구로 나뉘며, 각 지구를 연결하는 철교가 놓여 있다.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남서쪽에 있으며 훈장강[渾江]이 흐른다. 남동쪽 훈장강[渾江] 부근에 다리쯔[大栗子] 철산과 퉁화 탄전이 있어 철강단지가 형성되었다. 그 밖에 농업이나 광산용 기계 및 화학·제지·포도주 제조공장 등이 있다. 주변에 잉어부[英額布] 저수지와 위황산[玉皇山] 등이 있다.)
중앙부서는 단장 허혁(許赫), 부단장 김동삼(金東三), 서무 김형식(金衡植), 유서단총 방기전(方基甸), 유동단총 황병문(黃炳文), 통동단총 최명수(崔明洙), 통서단총 최여명(崔汝明), 홍동단총 김진호(金鎭浩) 등이 맡았고, 지방은 10호 ·100호 ·1천 호를 기준으로 하여 패(牌:패장 ·십가장) ·구(區:구장 ·백가장) ·지방(천가장)으로 나누었다.
재만 한인의 자활, 복리 증진, 교육, 독립운동기지 건설 등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고, 조직 직후 부민회로 바꾸어 지방마다 총관(總管)을 두고 자치행정을 폈다. 자활과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었고, 이주 한인들의 보호와 애국청년을 육성하는 데 주력, 재만 독립운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한편, 군 간부 양성을 위해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유하 ·퉁화 ·싱징[興京] ·환런[桓仁] ·지안[集安] 등의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를 조직한 뒤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로 개편하였다. |
비상국민회의
비상국민회의 非常國民會議 |
개요 |
1946년 2월 1일 자주적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서울에서 결성된 정치단체. |
설립연도 |
1946년 |
구분 |
정치단체 |
규모 |
28명 |
소재지 |
서울 |
설립목적 |
범국민적인 과도정부 수립 |
주요활동 |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설립 | |
8·15광복 직후 좌·우익의 대립이 격심한 가운데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결정, 발표함에 따라 범국민적인 과도정부 수립을 위하여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이시영(李始榮)·안재홍(安在鴻)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다.
의장에 홍진(洪震), 부의장에 최동오(崔東旿)가 선출되었고, 안재홍 외에 7명으로 구성된 전형위원회를 두었으며, 과도정부 수립 및 기타 긴급한 조처를 행하기 위해 최고정무회의를 설치할 것을 가결했다. 애초에 이 단체는 좌·우익 진영을 합한 단체로 출발하고자 했으나, 신탁통치 찬성하기로 태도를 바꾼 좌익진영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우익진영만의 집결체가 되었다. 좌익진영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별개의 단체를 결성하여 이와 대립했다.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김규식을 포함하여 28명으로 구성되었던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는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청 사령관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개편됨으로써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명맥만 이어갔다.
1947년 2월 제2차 전국대의원총회에서 의장에 조소앙(趙素昻), 부의장에 유림(柳林)을 선출하면서 명칭을 '국민회의'로 변경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중앙상임위원회가 다시 대한국민회로 명칭을 바꾸는 등 내분이 일어났으며, 미군정청에 의해 선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이 개원되면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그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