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5.9 제시 리버모어, 공매도 거래 끝에 파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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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와 트레이더를 구분하기도 한다. 트레이더는 주가의 등락 기회를 포착해 차익을 추구한다면, 투자자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거나 창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자산(주식 발행 기업)의 일정 지분을 소유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트레이더 제시 리버모어의 인생은 투자와 트레이딩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 |
예측은 정확했지만 체결 지연으로 인해 파산하다
1901년 5월3일, 노던 퍼시픽 철도(NPR) 주식을 매집해 오던 유니언퍼시픽철도 대표 에드워드 해리만이 공개적으로 NPR 주식 4만 주를 매수했다. 해리만의 사실상의 상대는 금융 황제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모건은 15만 주를 매수키로 했다. 4월 말까지 100달러 정도였던 주가는 5월 6일에 주당 150달러까지 올랐고 5월 9일에는 급기야 주당 1천 달러를 돌파해 거래되는 초유의 급등이 일어났다. 5월 9일 아침 리버모어는 ‘광란의 장세’가 끝나리라는 걸 예측했다.
“1901년 5월 9일 오전 내 증권계좌에는 5만 달러 가까이 있었고 주식은 하나도 없었다.……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했다. 무시무시한 폭락에 이어 투매가 있을 것이었다.……나는 대량의 공매도 주문을 냈다. 그러나 실제로 내 주문이 체결된 것은 20포인트가 더 떨어진 뒤였다. 주가 테이프는 시장보다 훨씬 늦었고 엄청난 주문량 때문에 내역서가 늦게 나오고 있었다. 주가 테이프에서 주가가 100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매도 주문한 주식은 80달러에 체결됐다. 그것은 전일 종가에서 3-40포인트 하락한 가격이었다. 매수를 하려던 가격에 매도를 한 격이었다. 시장은 계속 하락할 것 같지 않았으므로 나는 즉시 공매도를 처분하기로 했지만, 그 매수 주문은 또다시 내가 생각한 가격이 아니라 내 주문을 받은 시각에 증권거래소에서 형성된 가격에 체결됐다.”
리버모어의 공매도 주문은 주문가보다 훨씬 더 낮은 가격에 체결되었고, 급락 가격에서 공매도 포지션 청산을 위해 낸 매수주문은 주문가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에 체결되었다. 대량 주문이 급작스럽게 몰리며 일어난 체결지연 사태 탓이었다. 리버모어는 이날 두 번의 거래를 통해 5만 달러를 모두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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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빵 꼬마'로 불리며 거래소 출입을 금지 당하다
187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액튼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제시 리버모어는 10대 초반에 단돈 5달러를 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빈농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 보스턴으로 간 리버모어는 14살 때부터 주식중개회사 페인웨버에서 주식 호가판을 관리하는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호가판을 관리하는 틈틈이 그는 주가 변동 패턴을 찾기 위한 일기를 쓰며 모의 투자도 해보았다. 15살 때 첫 거래로 3.12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이 그의 트레이더 인생의 출발이었다.
1892년 한 해 동안 그는 사설 거래소를 전전하며 주식과 상품거래를 통해 1천 달러(오늘날 가치로 약 2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는 곧 사설 거래소 업계에서 ‘몰빵 꼬마’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요주의 대상이 되었고 거래소 출입을 금지 당하기까지 했다. 회사를 그만 두고 전업 트레이더로 나선 그는 1897년 20살 무렵까지 1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21살 때 뉴욕 증권거래소를 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이듬해에 거의 모든 자산을 잃었다. 리버모어는 기회가 왔을 때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것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았다. 500달러를 빌려 세인트루이스의 사설 거래소로 간 리버모어는 이틀 만에 2천5백 달러를 만들어 뉴욕으로 돌아왔다. 빌린 돈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 그는 뉴욕 증권거래소와 사설 거래소에서 다시 주식거래에 전념했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1901년 5월의 파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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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리버모어(뒷줄 가운데)와 그의 부인 도로(뒷줄 왼쪽)가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에 둘러싸여 있다. | |
리버모어 '내 인생 최고의 날'대폭락장에서 백만장자가 되자
1902년 리버모어는 사설 거래소에서 충분한 자금을 마련하여 다시 뉴욕 증권거래소로 돌아왔다. 1906년 4월에는 유니온퍼시픽 주식을 공매도하여 25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급격한 하락장세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7년 10월 24일 정오 경, 대폭락이 주식시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리버모어는 지속적인 공매도로 약세 포지션을 쌓아놓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1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는 당시를 ‘내 인생 최고의 날’로 회고했다. 리버모어는 다음 날 아침 시가에 공매도를 시작하여 투매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상 시장을 붕괴시키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리버모어는 공매도 포지션을 청산하여 상승을 유도했다. 그는 여러 종목을 대량으로 매수했다가 다른 매수자들에게 넘기며 3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듬해 1908년 리버모어는 면화와 밀 상품거래에서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상품 전문가 퍼시 토머스의 조언에 따른 것이 화근이었다. 정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어긴 대가였다. 리버모어는 2만5천 달러의 자금을 융통해 사설 거래소에서 석 달 만에 11만2천 달러의 수익을 올려 트레이더로서 재기했지만 부채 총액이 1백만 달러를 넘어선 파산 상태였다. 이후 리버모어의 트레이딩 성적은 양호했다. 강세장에서 약세장으로 전환하는 타이밍을 포착하여 대규모 공매도 거래로 큰 수익을 올려 나갔다. 1917년에는 마침내 모든 빚을 갚았고, 가족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보장연금과 신탁자산을 확보해 두었다. 1924년과 25년에는 밀 상품시장에서 1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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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왼쪽)과 1929년 금융공황 당시 월스트리트로 몰려든 인파. 리버모어는 대폭락장에서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였다.
1929년 초여름 강세장 속에서 리버모어는 추세 전환을 예감했다. 그는 주도면밀했다. 소규모의 공매도 포지션을 시험적으로 취해보고 수익이 나기 시작하자 비로소 자신의 예감을 확신하고, 과매수권에 들어선 것으로 판단한 종목들을 점검해 모든 매수 포지션을 청산하고 공매도 포지션을 본격적으로 취했다. 사람들은 강세장 속에서 공매도하는 리버모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1929년 가을 대폭락 장세에서 리버모어는 1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주식시장에서 단기간에 올린 수익 규모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언론은 리버모어가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통해 폭락을 촉진시켰다고 비난했다. | |
그가 실패를 경험했을 떄는 자기가 정한 원칙을 스스로 어겼을 때
리버모어는 추세 발생 시점을 기다렸다가 자금의 일부를 일단 투입하고, 추세가 강화되면 자금을 추가로 속속 투입하는 이른바 추세매매기법의 창안자로 유명하다. 추세가 좀처럼 강화되지 않거나 역추세가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자금의 일부만 투입했다가 추세 역행 움직임이 나타나면 손절매하는 기법을 실천했다. 단기간 고수익을 추구하는 공격적이고 위험 수준이 높은 거래를 하면서도 실패했을 때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재기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해두는 전략인 셈이다. 확실한 추세라고 판단하면 신고가에서도 이른바 추격 매수를 과감하게 했지만, 별다른 추세를 감지하기 힘들 때는 거래를 완전히 쉬기도 했다.
남들이 말하거나 떠도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그가 지키고자 한 원칙이었고, 기분과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오로지 시세의 흐름에만 주목하는 것도 그의 원칙이었다. 거래 종목 선정에서는 시장을 주도하는 업종과 그 업종 안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종목을 선택했다. 비교적 한정된 소수의 우량주로 범위를 좁혀 거래했던 것. 투자원금 대비 수익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일정 비율의 수익을 인출하여 완전하게 수익을 실현하는 것도 그가 지키고자 한 원칙이다. 그가 실패를 경험했을 때는 자기가 정한 원칙을 스스로 어겼을 때였다. | |
"난 지쳤소. 더 이상 버틸 수 없소" - 권총 자살로 마감한 최후
1929년의 ‘대박’ 이후 그의 삶은 트레이더로서나 개인적으로나 내리막이었다. 아내 도로시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1932년 14년 만에 이혼. 리버모어는 곧 재혼함.) 자녀들과 자주 만나지도 못했으며 리버모어 자신은 낭비와 사치 속에 쇼걸이나 배우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오랜 정부였던 여배우에게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고소당하기까지 했다. 친구들과의 교류도 중단됐고 얼이 빠진 상태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트레이딩에서도 집중력, 원칙, 열정을 상실하고 낙담과 우울 증세에 시달렸다. 급기야 1934년 5월 연방법원에 파산신청을 했다. | |
1936년 제시리버 모어(왼쪽)와 그의 친구. '대박'이후 그의 삶은 트레이더로서나 개인적으로나 내리막길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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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1월 28일 오후 4시30분 경, 리버모어는 사무실을 나서 셰리-네덜란드 호텔로 갔다. 호텔 휴대품 보관소 의자에 앉아 32구경 콜트 자동권총을 자신의 오른쪽 귀 뒷부분에 겨냥하고 발사했다. 경찰은 리버모어의 주머니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유서를 발견했다. “니나에게. 이젠 어쩔 수가 없구려. 모든 게 최악이라오. 난 지쳤소. 더 이상 버틸 수 없소. 이것만이 나의 탈출구가 될 듯하오. 당신의 사랑은 내 분수에 넘친다오. 난 실패자요. 정말 미안하오만, 이것만이 내게 남겨진 유일한 길이라오.” 평생 동안 시달린 우울증이 그의 만년에 더욱 악화된 것이 자살의 사실상의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듭된 파산과 재기, 단기간에 엄청난 고수익을 올리고 또 단기간에 엄청난 손실을 보는 롤러 코스터 타는 것 같은 트레이더로서의 극적인 인생이 리버모어를 전설이자 신화로 만들어 주고 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주식 트레이딩과 거기에서 올린 수익을 낭비하는 것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시장 추세가 불분명할 때 휴가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의 유일한 휴식이었지만, ‘쉬는 것도 투자’라는 주식 격언에 따른다면 휴가 여행도 그에게는 일종의 트레이딩 행위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트레이더였다.’ 이 한 마디보다 그를 적절하게 형용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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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위대한 투자자, 제시 리버모어>(제시 리버모어, 에드윈 르페브르 지음, 원앤원북스) 이 책은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과 ‘주식 매매하는 법’을 합본한 것이다. 전자는 1922년에 에드윈 르페브르가 리버모어와 가진 집중적인 인터뷰에 바탕을 둔 비공식 전기로, 리버모어가 리빙스턴이라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사실은 리버모어 자신이 썼다는 주장도 있다.) 후자는 1939년에 제시 리버모어가 쓰고 1940년에 출간된 리버모어 나름의 주식투자 기법 안내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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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매매하는 법>(제시 리버모어 지음, 박성환 옮김, 이레미디어) 앞의 합본 도서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책으로, 일부만 리버모어가 작성한 글의 번역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리버모어의 트레이더로서의 일생과 그의 투자 원칙과 기법을 해설하는 부분이다. 이 점은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대폭락 1929>(존 K. 갤브레이스 지음, 이헌대 옮김, 일리) 리버모어가 전무후무한 수익을 올린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의 대폭락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이자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훌륭한 장편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저자의 한 마디. “호황의 끝이 임박했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역시 투기상황의 고전적 패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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