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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예배의 기본구조
입례 / 말씀 / 응답 / 파송의 순서다.
입례: 하나님께 나아감.
말씀: 구원 주시고 견고하게 하심.
응답: 감사. 헌신.
파송: 삼위의 이름으로 복 받은 후에 세상으로 나아감.
1. 입례 의식
입례 의식은 예배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서
그 분의 말씀과 성찬을 받기 위한 예배 초두의 의식이다.
입례 의식을 이스라엘 백성의 시편 찬송시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성도가 하늘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을 표현한다.
주일마다 입례 의식을 거행할 때에 하나님의 완벽한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미리 맛본다고 보면 된다.
입례 의식은 몇 가지를 일어서서 진행. 간략하게 빠르게 해야 한다.
설교 직전까지의 예배 순서가 많이 걸리면 안 된다.
예배 전에 앉아서 준비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전통이다.
입례 의식: 입례송, 예배 부름, 인사, 기원, 참회기도 및 사죄 확신, 영광송으로 구성.
예배의 준비
묵상기도
전주(The Prelude): 보통 고전적인 곡의 한 부분을 오르간으로 연주.
1) 입례송(입당송, Introit)
공예배는 예배 공동체로 모임(gathering)을 통해 시작된다.
모임의 행위 없이 찬송(입례송)을 부름으로 예배를 시작할 수도 있다.
이 때 회중들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어색하다.
눈을 뜨고, 사회자를 보며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부름에 응해야 한다.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함으로 예배의 시작부터 공동적 성격을 뚜렷이 함도 좋다.
“성가대 주악에 맞춰서 묵도하겠습니다.”
주악이란 말도 좀 순서명으로 어울리지 않고,
찬양하는데 묵도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예배의 처음을 생동감 있게 하는 것이 좋다.
2) 예배 부름(Call to Worship)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우리를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교훈이 아니고 선언임으로 간결하고 분명하게 한다.
하나님의 부름으로 예배가 시작됨을 나타내기 위해
인도자는 성구를 외워서 장엄하면서도 은혜롭게 진행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알려줌. 간결하게 하라.
칼빈은 시 124:8을 사용.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3) 인사(Greeting)
하나님과 회중 간의 인사에 이어 인도자와 회중간의 인사.
4) 기원(Invocation)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
기원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깨닫는 진정한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해 달라는 간결한 기도.
5) 영광송(Gloria Patri)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면 회중은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된다.
찬송가 2,4,5,6장 등이 적합하다.
대영광송(Gloria in Excelsis) / 소영광송(Gloria Patri)
9-55장의 찬송이 좋다.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6) 참회기도 및 사죄확신(Confession and Assurance of Pardon)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선 인생이 추하고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했을 때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참회기도는 중세 때 생긴 것이다.
사제가 성구실에서 개인적으로 고백하던 것이 예배 안으로 들어왔다.
종교개혁자들도 참회기도, 사죄확신을 받아들였다.
칼빈은 이 기도가 예배에 합당한 시작이라고 보았다.
칼빈 신학교 교장인 제임스 드용은 “정직하고 온전한 고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그 어떤 장애도 물리치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와 참 예배를 더욱더 활발하게 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처음에 있는 참회의 표현은 예배 전체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혔기에 죄 사함을 받은 죄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벅찬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라고 말했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인 또 다른 이유는
중세 때는 고해성사가 성례의 한 종류로 성직자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런데 개혁자들은 고해성사를 성례의 한 종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안이 필요했다.
참회기도는 좋은데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예배가 너무 주관주의적으로 흐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너무 내면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초대교회 예배는 주님 재림 기대 충만으로 참회기도가 없었다. 1000년 동안 참회기도가 없었다.
참회기도만 있고 사죄확신이 없으면 곤란하다. 사죄선포를 해야 한다.
참회기도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참회기도는 인도자가 간단한 언급을 한 후 함께 조용히 기도할 수도 있고
미리 주보에 기록된 기도문을 함께 읽은 후 조용히 각자를 돌아보며 기도할 수도 있다.
사죄확신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를 인도자가 선언하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의 은혜로운 약속, 죄를 용서해 준다는 약속을 인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았다.
미래에 지을 죄와 죄책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았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목사는 이 순간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죄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면 회중은 그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1) 조명기도
2) 성경봉독(lections, lesson)
예배 시의 말씀(The Word of God)은 조명기도와 성경봉독과 설교(그 말씀의 해석과 적용)로 이루어진다.
성경봉독은 설교의 기초와 근거가 되고 설교는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해준다.
이 두 가지는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음성이다.
성경봉독은 초대 교회 때부터 예배의 가장 중요한 순서 가운데 하나였다.
칼빈은 성경봉독이 예배의 비할 데 없는 보화라고 했다.
개혁주의자들은 강단을 회중석보다 높게 설치함으로 말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조명기도는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열어보여 주시는 신적인 행위이다.
영감은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 의해서 문자화되도록 인간을 사용하시는 과정이다.
선지자, 사도를 감화시켜서 하나님의 계시가 문자화되도록 하신 것이 영감이다.
계시와 영감이 없다면 성경이 없었을 것이다,
성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성령의 조명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초대 교회의 성경봉독
계 1:3, 22:18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8)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초대 교회는 성경봉독을 강조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편지가 성도들 가운데 읽혀지기를 강조했다.
계시록에는 요한도 자신의 예언이 읽혀지기를 원했다.
계시록에는 읽는 자는 단수로, 듣는 자는 복수로 적혀있다.
이는 예배 시간 중에 말씀이 공적으로 읽혀지고 선포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초대 교회 때는 구약에서 한 번, 신약에서 두 번(서신서 한 번, 복음서 한 번) 합해서 세 번의 봉독을 했다.
그 중간에 회중은 시편으로 응답했다.
4세기부터 구약봉독은 사라지고 신약의 서신서와 복음서 낭독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각 봉독의 중간에 시편을 낭송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 성도 개인은 책으로 된 성경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낭독되는 성경과 설교는 아주 중요했다.
인쇄술 발달 이후에 성경 봉독의 역할이 줄었다.
이후에 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예배 시간에 성경 사용이 극소화되었다.
한국 교회는 초창기에는 웨스트민스터 directory를 따라
성경봉독이 공예배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1934년판 예배 모범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
1934년판 예배 모범:
1. 예배 시에 성경 배독은 공식 예배의 일부분이니 반드시 목사나 기타 허락을 받은 사람이 배독할 것이니라.
2. 신구약 성경은 청중으로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본 방문[자국어] 성경을 낭독할 것이니라.
3. 배독할 성경 장절은 목사의 의향대로 작정할지니 유익한 줄로 생각할 시는 그 읽는 중에서 어떤 부분을 해석함도 가하나
성경을 읽든지 찬송하든지 기도하든지 강도하든지 각 절차의 시간이 서로 적당하게 하고
결코 모든 것이 합하야 너무 짧든지 너무 지루하게 하지 말지니라(제 3장)
오늘날은 성경봉독이 설교 전초 단계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 봉독의 두 유형
선택적 봉독(lectio selecta)
연속적 봉독(lectio continua) : 성도들이 말씀을 편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쭉 따라가며 봉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속적 봉독의 유익: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고르게 먹일 수 있다.
예배의 통일성을 기할 수 있다(미리 본문이 주어짐으로 성가대의 찬양 선곡이나 장로의 기도,
사회자의 인도 등 모든 것을 말씀과 통일해서 준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공과공부도 맞추어 할 수 있다).
성구집(lectionary)
성경봉독의 중요성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생겨난 것이 성구집(lectionary)이다.
매주일 봉독할 성경구절 모음집이다. 3년 만에 전체를 한 번 볼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성구집 사용의 장점
-하나님의 전 계시를 고루 선포할 수 있다.
-통일성 있는 예배를 가능케 한다.
-설교자의 본문 선택의 어려움을 덜어준다.
-예배와 교육의 일관성을 기할 수 있다. 공과를 만들 때부터 성구집에 맞춰서 하면 좋다.
-진리 위에 서 있는 교회들의 연합 운동을 위한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교독문의 문제점
-76편의 구절로 제한됨: 한국 교회는 성경봉독의 하나의 방편으로 교독문을 사용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세 번씩, 그 다음에는 두 번씩 봉독했는데 한국 교회는 봉독을 한 번만 하고 교독문으로 나머지를 때운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에도 말하기를 성경봉독은 연속해서 성경 전체를 낭독해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교독문에 나오는 성경 구절로 한정되어 있다.
-조합한 구절들 : 한 교독문에 여러 성경 본문이 즉흥적, 무원칙적으로 19편이나 조합되어 있다.
교회력에 해당되는 교독문 중에는 인용된 구절이 그 교회력 절기와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교독문 선택이 치밀하지 못하고 신학적, 해석학적 안목이 부족하다.
-시편: 교독문의 약 절반을 시편으로 메우고 있다는 것은 예배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소치다.
시편은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교독문을 회중을 참여시켜 낭독하는 것은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위와 같은 문제점들 때문에 예배 중에 성경 봉독을 두 번 하기 원한다면
교독문에 의존하기 보다는 성구집을 이용해서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 낫다.
교독문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교독문은 예배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봉독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8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낭독을 다한 후에 “아멘”하고 마치거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봉독자는 자신이 읽는 구절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해야 한다.
봉독자는 봉독할 말씀을 충분히 10번 20번 읽고 이해해야 한다.
본문을 되풀이 읽는 연습을 통해 본문에 숙달될 수 있어야 한다.
본문의 흐름에 따라 적절한 감정이 표현되면 좋다.
그러나 대화식으로 낭독하거나, 그룹이 읽게 하거나,
드라마식으로 극화하거나 하는 시도들은 조심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선상에서 생각할 수는 없지만 계시를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지키신다.
설교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현현이다.
설교자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정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설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이다.
복음의 필요성, 복음의 이유, 복음의 중요성은 많이 말하는데,
복음 자체는 별로 말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설교자나 청중이 다 같이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배 중 목사의 위치는 무엇인가?
일단 예배 인도자다. 전체 회중을 한 예배 공동체가 되어서 자유와 질서 중에 예배드리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예배 중에 하나님은 선포자인 동시에 선포되시는 분이시다.
설교자도 예배드리는 자인 동시에 예배드리게 하는 자이다.
찬송, 기도, 신앙고백, 연보의 순서가 있다.
1) 찬송
회중의 노래는 출애굽기 15장에서부터 나타난다.
다윗은 레위인들이 성가대와 연주단들을 조직해 종교 의례와 성전 의식들에서 노래하도록 했다.
군대 가는 남자는 20세 이상. 성가대 연주단은 25세 이상. 제사장은 30세 이상. 성숙한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야 했다.
초대 교회는 열심히 찬송했다.
초대 교회의 삶에는 운율적인 것이 뚜렷함을 볼 수 있다.
초대 교회는 찬송하라는 적극적 권고를 받았다(골 3:16, 엡 5:19, 고전 14:26).
고전 14:26
그런즉 형제(兄弟)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各各) 찬송(讚頌)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啓示)도 있으며 방언(方言)도 있으며 통역(通譯)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德)을 세우기 위(爲)하여 하라.
신약의 여러 구절들은 그 시대의 찬송 가사와 연관되어 있다(엡 5:14, 빌 2:6-11, 롬 11:33-35. 딤전 1:17, 히 1:3, 계 4:8).
2-3세기 교회는 핍박 가운데서도 찬송을 많이 불렀다(Pliny, Hippolytus등의 증거).
초기 찬송들의 특징:
그리스도 중심의 성격이 강하다.
성경 본문을 그대로 곡을 붙여서 노래하기를 따르기를 좋아했다(rhythmic prose).
4-5세기에 전 교회들에 시편 찬송이 성행하게 되었다.
5세기에 시편 찬송을 교창(antiphony)으로 불렀다.
종교 개혁자들은 음악을 회중의 것으로 회복시켰다.
루터: 작곡도 많이 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칼빈: 시편 찬송을 회복시켰다. 칼빈의 예전서 명칭도 초대 교회를 따르려고 하는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내 준다.
칼빈이 만든 찬송 시편 찬송집은 Genevan Psalter 이다.
칼빈은 예배 중의 찬송은 성경 가사가 제일 좋다고 생각하였다.
장로교, 청교도 전통: 칼빈을 따라 시편,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한다.
18세기에는 시편 아닌 hymn의 전성시대였다.
Isaac Watts: 구약 본문을 신약의 빛으로 재해석해서 작사를 많이했다.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을 성도로 바꾸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사랑으로 바꾸어 작사했다.
다윗, 아삽 ➔ 성도로 바꿈. 소와 염소의 제사 ➔ 그리스도 어린양의 제사.
John Wesley: 하나님을 바로 직접적으로 찬양하기 보다는 각각의 주제를 인간 감정에 맞추어 찬송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측면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이후로 hymnody(웨슬리식 찬송가)는 온 세계 교회로 확산되었다.
찬송의 기능
1. 찬송은 하나님을 향한 찬미이다.
많은 물소리와 같이 천상의 노래가 된다.
2. 찬송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이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 보면 찬송을 기도의 항목에 넣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레고리 찬트는 기도로 여겨졌다.
3. 찬송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 후에 부르는 찬송은 메시지를 아주 분명하게 해 주고 설교를 보다 은혜롭게 해 주는 측면이 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설교한 후에 찬송을 한 장 부를 때에 결단이 이뤄진다.
복음을 선포하는 면이 있기에 가능한 한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가 된다.
여호사밧은 전쟁 때에 찬양대를 앞세워서 행진했다.
4. 찬송은 예배자들이 함께 하는 공동적인 행위이다.
각각 다른 수 백 개의 목소리들이 연합하여 하나 되는 현장이 바로 찬양할 때이다.
콘스탄티노플은 주교가 된 이후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들이 하나가 된 것을 뜻합니다.”
5. 찬송은 예배의 축제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6. 예배자의 관점에서 보면 찬송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공예배의 찬송
입당송: 회집을 위한 찬송. 입당송부터 헌신 다짐하는 노래 부른다면 곤란하다.
찬미: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을 해야 한다.
영광송: 용서의 선언 후. 9장~55장.
찬양대의 찬양(Anthem): 말씀이 봉독된 데 대한 감사의 응답.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무 음악적인 기교에만 신경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찬양대가 부르는 찬양곡의 가사는 스크린에 띄워 주는 것이 더 좋다.
응답송(설교 후 찬송): 설교의 내용과 관련하여 헌신, 순종을 다짐하는 노래
봉헌송: 봉헌과 함께 부름. 찬송가 1장은 봉헌송이지 폐회송이 아니다.
요즘 교회들이 1장을 폐회송으로 부르는데 전적인 착오이다.
폐회송: 세상을 향한 사명을 다짐하는 노래.
한국 교회 찬송 생활
1. 시편 찬송을 더 많이 포함시켜야 한다.
2. 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 더해져야 한다.
3. 한국적 가락을 가진 곡이 보완되어야 한다. 가락이 너무 어려우면 안 된다.
한국적인 것이 멀리 할수록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문화까지 기독교적으로 바꾸자.
분명히 한국인의 심성이나 얼이 있다. 개량한복처럼 곡도 좀 더 모던한 한국적인 것으로 바꾸면 좋겠다.
4. 예배 시 복음송 사용 문제.
5. 예배의 회중 찬송에도 지휘자가 인도를 하는 것이 좋다.
찬양인도자가 설교를 하려는 것도 문제이지만 약간 은혜로운 멘트를 넣는 것은 좋다.
6. CCM의 경우에 말씀을 가사로 하는 것은 좋으나, 너무 유행을 탄다는 것이 문제다.
2) 기도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불림을 받기도 할 정도로 기도는 매우 중요했다.
공동기도문
전통적으로 공예배의 기도는 회중이 함께 참여하여 공동기도문으로 드리는 예전적인 기도였다.
성경 안에도 많은 기도문이 있다. 지금처럼 개인이 대표로 하는 형식은 후대에 형성된 것이다.
고유한 형식, 언어를 가졌다. 일정한 룰이 있었다.
너무 특수한 일이나 개인적인 제목은 피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표현 양식에서도 독립해서 드려졌다.
회중의 지적 수준, 감정의 평균적인 정도를 표현하려고 했다.
기도의 내용
-찬미(adoration): 자존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고백(confession):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
-간구(petition):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
-중보(intercession):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각 기도는 목적에 맞게 드려짐으로 공예배가 질서 있고 조화 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기원 - 입례송, 예배 부름 다음에 나오는 기도이다.
예배 시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를 하게 해 달라는 기도
참회기도 - 죄를 고백하는 기도
조명기도 - 우리 눈을 열어 주셔서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 성경봉독, 설교 전에 하는 기도
목회기도 - 설교 후에 주로 드려지는 기도. 중보적인 성격이 강한 기도
전통적으로는 설교 후에, 목회자가 기도했다. 요즘에는 거의 모두 장로들이 한다.
목회기도 마치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마감하는 것이 좋다.
“이제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기도하오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봉헌기도 - 바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는 기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고백하는 기도
3) 신앙고백
신약 안에도 신앙고백적인 진술이 있다. 고전 12:3, 15:1-3, 딤전 3:16
속사도 시대에 이단 교리의 발현에 따라 정통 교리를 고백하기 위해 신앙고백이 만들어졌다.
사도신경:
가장 오래된 신조. 사도신경은 2세기 중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다가 4세기경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착화되었다.
원래는 영지주의에 대한 방어를 위해 작성되었고, 그 후에 세례 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기초적인 고백이었다. .
니케아 신조:
니케아 회의, 325에서 교회의 표준적인 신조가 형성되었다.
삼위일체 신앙 고백. 동서방 교회가 다 사용함으로 최초의 에큐메니칼 신조가 되었다.
예배자는 신앙 고백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것을 자신들의 삶의 규범으로 삼겠다는 것을 고백한다.
또한 말씀에 헌신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예배자들의 신앙을 일치하게 증거하는 행위이다.
신앙고백은 설교 후에 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신앙고백은 반드시 사도신경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PCUSA 교단에서는 그 날의 메시지에 맞추어서 신앙고백을 한다.
예를 들어 그 날 설교가 성령의 사역이 주제라면
신조나 고백들 가운데 그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사용한다.
신앙고백은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여러 고백들을 적절히 사용해도 된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웨스트민스터, 벨직, 하이델베르그, 도르트 신경).
주보에 실린 고백을 회중이 같이 낭독한다.
눈을 감고 고백할 필요는 없다.
원래 신앙고백은 찬미의 성격이 있었다.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노래가 신앙고백이었다.
칼빈도 십계명을 노래로 고백했다.
신앙고백은 정선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설교 다 듣고 나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을 해 보는 것도 좋다.
4) 연보
예수님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구제를 많이 했다.
십일조는 성전과 관련된 일, 종교적인 일을 위한 세금으로 이해되었으나
연보는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이었다.
연보라는 말인 alms는 자비의 행위라는 뜻이다.
가난한 자들,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것은 항상 교회의 주요 관심사였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이 일을 위해서 일군들을 따로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전 16:1-16에 보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서 연보했다는 말이 나온다.
모아 두었다가 사도가 오면 전해주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도시에 전염병이 돌아도 성도들은 남아서 환자들을 돌보고 죽은 자들을 장사치루기도 했다.
고대에 페스트가 퍼지면 오히려 크리스천들이 그 마을을 지키면서 병에 걸린 자를 돌봐주었다고 한다.
중세에 수녀나 수도사는 자비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순교자 저스틴의 글에 보면: “그리고 부요한 자들 중 자원하는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것들을 바쳤다.
이렇게 모아진 것들이 대표자에게 맡겨지면 그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질병이나 기타 다른 이유로 궁핍한 중에 있는 자들,
억압당하는 자들, 나그네들을 구제한다. 한 마디로 그는 필요 가운데 있는 모든 자들을 돌본다.”
원래 예배 중에는 돈이 아니라 성찬을 거행할 때에 떡과 포도주를 바쳤다.
지금은 교회에서 미리 준비해 놓지만, 초기 교회에서는 성찬 거행하기 시작하면 각자가 떡과 포도주를 바치면
그 중에 얼마를 가지고 교역자가 성찬을 진행했다. 그게 봉헌(offering)이었다.
연보가 점차 예배의 순서 속에 포함되었다.
스트라스버그에서는 예배 후 교인들이 떠나면서 연보함에도 연보하였다.
연보가 교역자 사례, 지 교회 운영, 교회 교육, 전도와 선교 등을 위해
포괄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미국의 교파주의의 대두에 따른 결과였다.
그 전까지는 교인들의 연보로 교회 살림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가 지원해 주었다.
미국의 교파주의 등장 이후에 예배 중에 봉헌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연보는 단순히 어려운 자에 대한 동정심에서 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드림은 감사의 표시요 헌신의 표시이다.
1) 파송의 말씀(Charge)
파송의 말씀은 예배의 해산의 선언과 사명을 지워 파송함을 말한다.
공예배는 회중이 모임으로 예배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마칠 때는 해산 선언이 있어야 논리적으로 맞다.
해산 선언이 파송의 말씀에 포함된다.
그리고 회중들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띠고 나간다는 뜻으로 사명을 지워(charge) 파송한다.
그 날의 메시지와 연관되어야 한다.
너무 길지 않도록 주의한다.
진지하고 정중한 음성으로 청중들을 바라보면서 선언한다.
“평안히 돌아가셔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갑시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기도를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승리하시고 기도로 하나님 살아계심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들이 축도 안에 이 파송의 말씀을 넣어서 한다.
2) 축도
Benediction < pronouncement of good
이스라엘에서는 공동체의 평온과 보존을 위해 공동체의 리더가 축복하거나 은혜와 평강을 선포했다.
영적 지도자가 회중에게 축복하는 것도 성경에 자주 나타난다.
축도의 자세는 손을 드는 것(레 9:22)
초기 교회 때는 감독이 성찬 바로 직전에 축도. 2세기에 목사가 예배 마지막에 하는 것이 고착되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복 주심에 대한 선포이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다. 축도는 선언이다.
전통적인 자세는 한 손을 머리 위까지 든다.
손을 드는 것은 공동체에게 안수한다는 의미를 가진 상징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두 손을 다 들지만 서양에서는 한 손만 들기도 한다.
축도 자체가 무슨 마술적인 능력이 있어서 축도 행위를 통해서 복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축도를 반(半)성례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 축도의 여러 형태
(민 6:24-26)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칼빈이 늘 사용했던 축도다. ‘원하노라’는 하나님의 소원을 말한다.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엡 6:23-24)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히 13:20-21)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하관예배 다음에 이 축도를 하면 좋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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