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미 있었던 말들을 전혀 다른 위치와 맥락 속에 놓는 일
-황폐한 땅의 소리
참회록
짐승 한 마리 컹컹 짖는
황폐한 땅의 소리를 들으시라
■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글을 쓴다는 행위는 오래도록 ‘창조’라는 이름으로 신성화되어 왔다. 작가는 자기 내면에서 어떤 독창적인 생각을 길어 올리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세계를 언어로 형상화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 믿음은 급진적인 의문에 직면한다. 과연 글쓰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행위인가, 아니면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말해지는 사건에 불과한가.
롤랑 바르트는 이 질문에 새로운 대답을 했다. 바르트는「저자의 죽음」에서 저자를 의미의 기원에서 끌어내린다. 텍스트는 이미 존재해온 언어, 관습, 신화, 문학, 담론들이 뒤엉켜 만들어진 하나의 직물로 보았다. 작가는 이 직물을 짜는 창조주가 아니라, 그 실타래들이 교차하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 글쓰기는 타인의 글, 과거의 텍스트, 문화 전체가 한 사람을 ‘통과’하여 다시 배열되는 사건일 뿐이다.
이 관점에서 새로운 텍스트란 이전에 없던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말들을 전혀 다른 위치와 맥락 속에 놓는 것이다. 작가는 이미 수없이 말해진 언어를 다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씌어진 세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 말을 고르는 일이다. 작가는 언제나 타인의 말로 말하고, 과거의 문장 위에 문장을 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가 여전히 의미를 갖는 이유는 같은 말은 결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없을지 몰라도, 다르게 말해지는 방식은 언제나 새롭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글쓰기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유의 행위로 남는다.
롤랑 바르트가「저자의 죽음」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저자(Author)'를 스크립터(Scriptor)로 대체한 것은 문학적 사유의 중심을 '창조자로서의 저자'에서 필사자로 격하시킨 것이지만 이것은 디카시론에 있어서도 시사점이 크다.
전통적 의미의 저자는 작품보다 선재한다. 그러나 스크립터는 쓰기와 동시에 발생하며 오직 쓰는 동안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자신의 내면, 감정, 사상을 작품으로 표현하지만 스크립터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들 혹은 텍스트를 혼합하고 배열할 뿐이다. 전통적인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의 완성이 '독자'에 의해 이뤄지도록 한다.
디카시가 자연이나 사물 속에 이미 존재하는 '날시'를 포착하는 것에서 창작이 시작된다. 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디카시는 이미 자연이나 사물로 존재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을 시인은 스크립터로 찍고 쓴다. 그래서 디카시의 시인은 발견자이자 스크립터이다. 날시로부터 시적 충족을 느껴 스마트폰 내장 디카로 찍고 쓴 것도 창작 과정만 보면 '받아 찍고 쓰는' 스크립터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셈이다. 바르트가 말한 스크립터는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문화적 기호들의 인용"이다.
바르트가 저자 대신 스트립터라고 말한 것은 글 쓰는 이는 더 이상 의미의 기원이 아니라는데 방점이 있다. 이미 말해진 것들, 이미 쓰인 언어들 사이를 오가며 그것들을 재배치하고 재구조화해서 필사하는 존재다. 원래 필사는 원래 원본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필사자에게는 그 원본조차 없다.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의 흔적이며, 최초의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학은 언제나 반복이자 변주이고, 인용이며 패러디고 재서술이다.
작가가 이미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온 언어의 바다를 유영하며 그 파편들을 수집하고 배열하는 '필사자'라면 특히 인유를 주목해야 한다. 문학의 가장 오래된 기법 중 하나인 '인유(Allusion)'는 단순한 수사학적 장식을 넘어 텍스트가 생성되는 근본적인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인유의 원리는 특정 작가의 독창성을 훔쳐오는 행위가 아니라, 기원도 끝도 없는 언어의 그물망 속에서 유사한 울림을 찾아내어 현재의 텍스트로 끌어들이는 공명의 과정이다. 작가는 필사자로서 과거의 목소리를 현재의 맥락 속으로 초대하여 그것을 비틀고, 패러디하며, 재서술한다. 이때 인유된 조각은 원래의 자리를 떠나 새로운 텍스트의 구조 속에 배치되면서 의미의 불꽃을 일으킨다. 인유된 텍스트로서 조각 하나하나의 인유는 이미 존재하던 것이지만, 그것들이 필사자의 손을 거쳐 재구성돼 다차원적 공간이 형성된다. 독자는 필사자가 흩어놓은 인용과 흔적들을 발견하고, 그 사이의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아내어 의미를 직조한다.
디카시 「참회록」도 인유의 퍼즐이다. 이 작품은 성서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성서의 언어와 상징이 이미 존재의 심층에서 작동하고 있다. 참회록이라는 제목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의 인유이다. [참회록]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욕망과 갈등, 그리고 의지의 나약함을 가감 없이 드러낸 최초의 내면 고백록으로, 루소의 『고백록』 등 근대 자서전 문학의 효시가 됐다. 이 책은 독자에게 말을 거는 형식이 아니라 신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방대한 기도문의 형식이다. 디카시 「참회록」도 신에 대한 기도 형식이면서도 인류 전체를 겨냥하고 있다.
사진기호 속 구름이 야수의 머리처럼 보이며, 막 울부짖을 듯한 긴장감을 품고 있다. 성서에서 짐승은 인간 안에 잠복한 폭력성과 욕망, 신의 질서에서 이탈한 본성을 상징한다. 특히 광야와 짐승은 자주 함께 등장한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이며, 동시에 세례요한의 광야의 외침이 환기하듯 회개가 요청되는 자리다.
짐승 한 마리 컹컹 짖는
황폐한 땅의 소리를 들으시라
이 문자기호도 성서 속 예언자 어법의 인유이다. ‘들으시라’는 명령형은 구약 예언서에서 자주 반복되는 어조다. 이는 화자의 감정을 토로하는 말이 아니라, 사진기호 속의 짐승은 황폐해진 땅에서 울부짖고 있으며, 그 황폐함은 곧 인간의 윤리적·영적 파탄을 가리킨다. 이 짐승은 타자의 모습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자화상이다 이 지점에서도 이 디카시의 성서적 인유는 분명해진다. 성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함께 세계가 황폐됐다고 본다. 이 디카시의 인유 퍼즐은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로 복잡하게 직조돼 있다. 인간은 여전히 짐승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며, 그 짐승의 울음이 황폐해진 세계의 소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에게 대한 참회이면서 그런 절망적 정황도 모르는 인류에게 향한 예언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 디카시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성서의 어법, 성서의 세계관 등을 다층적으로 인유한 것이다.
AI가 생성한 AI 이미지
■ 인간 스크립터와 AI 스크립터
롤랑 바르트 말대로 작가도 스크립터라면 텍스트란 독창적 창조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언어와 담론의 직조물이다. 오늘날 AI 글쓰기도 바르트의 스크립터와 맥락이 비슷하다. AI는 이미 학습한 방대한 데이터와 언어 패턴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한다. 이는 바르트가 말한 “텍스트는 인용들의 직물”이라는 명제와 상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스크립터와 AI 스크립터의 결정적 차이는 AI에게는 자의식이 없다는 사실이다. 자의식이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이 아니다. 자의식은 ‘나’라는 주체가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감각, 즉 느끼고, 기억하고, 반성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듯, 인간은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자의식을 가진다. AI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며 세계를 경험하지도 않는다. 물론 고통도 기쁨도 느끼지 않는다. AI가 수행하는 것은 오로지 생각이 아니라 연산이다.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고, 그 패턴에 따라 가장 그럴듯한 언어를 산출할 뿐이다. AI의 언어는 의미를 이해한 결과가 아니라, 의미처럼 보이도록 배열된 기호의 결과다.
더구나 디카시 창작에서 보면 AI는 '날시'를 보고 감동하거나 충동을 느끼지 못한다. AI의 글쓰기는 외부 세계와의 실존적 만남이 아니라, 입력된 프롬프트와 데이터셋 사이의 확률적 연산 작용이다. AI에게 글쓰기는 '세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데이터에 대한 최적화'이다.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 이후에도 텍스트의 직조자로서 인간이 가지는 고유성은 경험의 체득에 있다. 인간은 데카르트적 자의식을 넘어, 몸으로 세계를 앓고 느끼는 존재이다. 글쓰기는 그 고통과 기쁨의 흔적이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기호만 배열하는 AI와 달리, 인간은 기호를 직조한다고 하더라도 생의 희로애락이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