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밖에서 한국말이 빛날 길을 찾다:진보와 정론의 인터넷 신문 - 대자보 -
나라밖에서 한국말이 빛날 길을 찾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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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살리고 빛내기 76] 중국과 일본 등 외국 한국어교육 실태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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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경일이 된 첫 한글날큰잔치조직위원회 사무총장으로 2006년 그 행사를 마친 뒤 중국과 일본에서 우리말 교육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보고 한말글을 외국에 알릴 길이 있는지 살펴봤다. 오래 전부터 한글은 세계 으뜸글자인데 우리만 쓸 것이 아니라 한자나 영문 로마자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쓸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1994년에 미국 교포 박양춘님이 쓴 “한글을 세계문자로 만들자”는 책을 읽고 서정수 교수를 모시고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을 하면서 한글세계화추진본부를 만들어 활동하던 2004년에 중국 심양에서 남북한과 중국 정보통신 학자들이 학술회의를 할 때에 나는 “한글을 세계 공용문자로 만들자.”는 주제발표하고 그 길을 찾고 있었다. |
그런데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2006년 ‘한국언론재단’에서 기획취재 공모가 있어 인터넷신문 ‘참말로(대표 박해전)’가 “나라 밖 한국어 교육 실태 기획 취재”라는 주제로 공모해 뽑혔고 내가 중국과 일본 조사와 취재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겨레신문 교열부차장을 지낸 박해전님이 나와 뜻이 맞아 그 공모에 참여해 해외 한국어교육실태 조사 책임을 맡게 되어서 한글 세계화라는 내 뜻을 펼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나는 그때 중국과 일본을 가보고 한국어 세계화가 헛된 꿈이 아님을 확인하고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가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그 학교에 ‘세종학당’이라는 간판을 처음 걸었고 정부에 세종학당 사업을 건의해서 현재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1. 중국에서 한국어 교육 실태 조사
중국에서는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우리 동포가 많이 살고 있고 연변자치주에서는 우리말을 공용어로 쓰기 때문에 그곳을 중심으로 우리말을 외국에 펼 수 있는 길을 살피려고 ‘참말로’신문 박득진 기자와 함께 먼저 북경 한국문화원(원장 박종대)을 방문해 중국 상황을 알아봤다. 그런데 북경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교육생을 모집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교통경찰까지 나와 교통정리를 할 정도였다며 중국에서 한국어 교육 열풍이 세차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새뜸(새소식)이었다. 그 기쁜 말을 들은 뒤 나는 그때 북경 한 호텔에서 남북한과 중국학자들이 겨레말큰사전 논의를 하고 있어서 그 회의를 참관하고 중국 연변자치주로 가서 조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침 겨레말큰사전공동편찬위원회(남측 위원장 홍윤표)에 내가 만나려던 연변대 유은종 교수가 그 회의에 중국 측 학자로 참여하고 있어서 그 회의를 참관하고 유은종 교수를 만나보려고 했는데 못하게 했다. 그 일은 나와 함께 한글운동을 하는 한글문화연구회 박용수 이사장이 만든 ‘우리말갈래사전’을 문익환 목사가 1989년 북한 김일성 주석에게 주면서 논의가 되어 1990대 초 내가 그 사업 사무총장으로 참여하기로 했던 사업이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가 감목에서 나오지 못해 시행하지 못한 일이고 한국어를 세계에 펴려면 먼저 남북 겨레말이 하나가 돼야 하기에 참관하고 국민들에게 그 진행상황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홍윤표 위원장이 안 된다고 한다며 그 회의 실무자 이승재(국어원 직원)가 참관을 막았다.
그 회의는 남한에서 비용을 모두 대고 북한 방언 조사를 위해서 북측에 돈과 차량까지 제공하는 일인데 국민들에게 알 수도 없게 하다니 기가 막혀서 거세게 항의하니 거기 참석한 한글학회 조재수 선생, 이상규 국어원장들이 그 사실을 알고 도와주어서 잠깐 참관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회의에 북한 학자들은 없었다. 북측 대표들도 북경에 왔지만 그날 회의에 나오지 않은 것 때문에 나에게 참관도 못하게 한 거 같았다. 그때 그 일이 헛돈쓰기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으나 세상에 알리지 않고 그 회의에 참석한 연변대 유은종 교수를 만나 중국 한국어 교육 실태 취재 협조를 부탁했더니 자기가 절강성 소흥에 있는 절강월수외대 한국어학과 교수로 갔으니 그곳에 가자고 했다.
유은종 교수는 2년 전 중국 심양에서 연 정보통신 학술회의 때에 만나 뜻이 통했고 연변에서 북경올림픽 대비 남북체육용어 통일논의도 함께 한 분이기에 내 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변에 가지 않고 그를 따라서 상해를 거쳐서 소흥에 있는 절강월수외대에 갔더니 한국어 교육 열기가 대단했다. 북경 한국문화원에서 중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려고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그 학교에 한국어과 학생이 2년 만에 500명으로 늘었다는 것을 보고 또 놀랐다. 옛날에는 한국인들이 중국 한문과 중국어를 배우려고 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반대로 중국인들이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려고 몰려들고 있었다. 그곳에 한국어 열풍이 분 것은 그 지역에 한국 대구에 있던 직물공장들이 많이 진출해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 일자리가 늘었고 중국 다른 지역에서도 한국어 학과가 생기고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렇게 한국어 세계화 가능성을 확인하니 기쁘고 뿌듯했다.
2. 일본에서 한국어 교육 실태 조사하다.
중국에서 뜨거운 한국어 교육 열풍을 확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참말로 이철우 기자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가서 먼저 한국민단본부에 들러 우리 동포들과 일본인들 한국어 교육 실태와 현황을 물었는데 감동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리고 조총련에 갔더니 부의장이 정중하게 반겼다. 그래서 조선학교 동포 2세들 한국어교육 실태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보다 만경봉호 사건 후유증으로 조선학교 학생들이 시달리고 있으며 그 학부모와 우리 동포들이 일본 국회 앞에서 일본정부에 항의하고 있으니 먼저 그 동포들을 위로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가보니 우리 동포들이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데 가슴이 아프고 기가 막혔다. 거기서 우리 동포들을 격려하고 우리말교육 상활을 알아봤다.
그때 내가 일본 정부에 “여기 있는 조선 동포들은 일제 강점기에 그 부모들이 강제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와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2세들이다. 왜 일본정부는 인권탄압을 하느냐!”며 항의 연설을 하니 그 옆에서 군국주의로 가려는 교육기본법을 개정하는 일본정부에 항의하는 일본 사회당 당원들을 취재하던 일본 언론이 나를 취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동포들 모임인 한청본부로 갔더니 나름대로 한국어 교재를 만들어 동포들 한국어 교육에 힘쓰고 있어 고마웠다. 그리고 ‘겨울연가’란 연속극 영향으로 일본인들이 우리말을 배우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교또에서 우리 동포 김리박 선생이 일본인들에게 한국어 교육하는 것을 보려고 갔더니 그 분이 우리말과 겨레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실천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김리박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64년이나 살았는데 집 문패는 한글로 ‘김리박’이라고 써서 달았고, 우리 토박이말만 살려서 쓴 글묶(시집)이 즐비했고 김구 선생과 최현배 교수 사진을 걸어놓고 우리 겨레 얼을 지키고 살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분은 한자나 한자말은 쓰지 않고 우리 한말글로만 맛글(시)을 써 글묶을 냈으며 김구 선생과 최현배 교수 두 분을 우러러보는 글묶 ‘한흙’을 한국어 교재로 쓰고 있었다. 한국 국회의원은 한자 이름패를 고집하고 교수들은 제 겨레말을 우습게 여기고 짓밟는데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분이 이토록 겨레말과 얼을 지키고 사랑할 수 있을까 놀랍고 고마웠다.
그곳 문화교실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은 공무원이나 학교 선생을 지낸 이들과 직장인들이었는데 기미독립선언문을 교재로 외우게 해 일본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우리 역사까지 알게 하고 있었다. 김리박 선생은 학생들에게 나를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을 만들고 한글과 한국말을 지키고 빛내려고 애쓰는 한국 애국자라며 그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게 했다. 교육을 마치고 그 교육생들과 함께 식사도 했는데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많고 호감이 가득했다. 나를 ‘겨울연가’에 나오는 배용준을 대하듯이 친절하게 맞이했다. 김리박 선생 교육 탓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인도 이렇게 한국어를 배우면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 되는가 싶었고 외국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을 힘차게 해야겠다는 걸 느끼고 다짐했다.
한글이 더욱 빛날 때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때 해외 한국어교육 실태 조사와 취재를 하면서 한글이 우리 문화를 일어나게 했고 우리말을 나라 밖에서 대우받는 시대가 왔음을 깊고 뜨겁게 느끼고 깨달았다. 지난날 우리가 중국 한문과 일본어를 배우려고 목숨을 바칠 정도였는데 오늘날 중국과 일본인들이 우리말을 배우려고 난리법석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에 “한글이 살고 빛나면 우리 한겨레와 나라가 살고 빛난다.”는 것을 깨닫고 일생을 그 뜻과 꿈을 이루려고 애썼는데 이제 나라 안에서는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하고, 나라 밖에서 우리 말글이 뜨겁게 대접받고 있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환갑이 지나도록 나라 안에서 우리말글 사랑운동을 했으니 이제 나라 밖에 우리 말글을 알리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내가 그렇게 처음 외치고 정부에 건의한 세종학당 사업은 제대로 굴러가지만 겨레말큰사전 사업은 엄청난 나라 돈만 날리고 겉돌고 있다. 추진 방향과 실무자들 생각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말글이 더욱 빛나려면 남쪽 정부와 국민이 일본 한자말과 미국말 섬기기 그만하고 우리 토박이말을 살려서 우리 글자인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뿌리내리게 하고 북쪽과 말글살이가 불편하지 않도록 해 우리말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나라 밖으로 우리 한류가 더욱 세차게 나가도록 해야 하며 남북 언론이 통하고 남북 말글부터 하나가 되어야 한다. 또 영어 섬기기 그만하고 우리 말글로 이름도 짓고 우리나라가 만든 자동차나 상품에 우리말글로 상표도 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