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학교 국사학과 윤현수

쌀쌀한 날씨였지만 부지런히 움직여서 오전 9시 경상감영공원에 도착했다. 날씨가 제법 추워 걱정을 했지만 날씨 자체는 아주 좋아 답사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답사는 우선 경상감영공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간단하게 경상감영공원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감영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공원의 면적은 약 16,500㎡이다. 이곳에는 원래 조선 선조 때 경상감영이 있었고, 1910년부터 1965년까지는 경상북도 청사가, 도청이 옮겨간 후 1970년에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원래 대구의 중심에 위치하여 '중앙공원'이라 불리다가, 1997년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공원 안에는 경상감영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대구유형문화재 1)과 경상감영 관찰사 처소로 쓰이던 징청각(대구유형문화재 2)이 남아 있고,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 그밖에 옛 건물의 멋을 살린 정문, 분수, 돌담, 자갈이 깔린 산책로,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종' 등이 있다.
위의 내용은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가져온 것인데, 현장에서 교수님께서 지적했던 오류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경상감영의 관찰사 처소가 징청각이라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것으로 징청각은 경상감영이 집무를 보던 장소라고 하며, 처소는 <내아>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현장에 있는 징청각 설명비에도 그대로 적혀있어서 이는 시급히 고쳐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작년에 교수님께서는 감영 건물을 폐쇄하고 있는 것은 건물 유지, 일자리 창출면에서 부정적이므로 개방해야 한다고 지적하셨고, 그에 대해 나도 동의를 했었다. 하지만 아직도 감영건물은 폐쇄되어 있었으므로 나에게 씁쓸함을 주었다.

<대구근대역사관>
경상감영공원을 살펴본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대구근대역사관을 들렀다. 원래 대구근대역사관 건물은 일제시대 조선식산은행 대구 지점이었다고 한다. 해방이후에는 한국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바뀌어 2008년까지 이용되었다. 이후 2011년 1월에 대구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안에는 대구 근대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으나, 작년과 마찬가지로 시간관계상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나와 아쉬웠다. 교수님께서 이 건물 옆에서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는데, 대구근대역사관 옆에 있는 길은 과거 객사와 동헌 사이로써, 여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十자로를 조성했다고 하며, 옆에 있는 주차장에는 전화국이 있었다고 한다.
동성로에서 진골목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영남제일관이 있던 장소를 지나가게 되었다. 현재 영남제일관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있는 망우공원에 있는데 원래 영남제일관은 대구읍성의 남문으로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다가 1980년 망우공원으로 옮겨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잘못된 것으로 고쳐야 하나 아직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한 번 잘못된 복원을 하게되면 다시 원상복귀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문화재 복원이나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하겠다.
다음으로 진골목을 찾아갔다. 진골목이란 이름의 유래는 크게 2가지 설이 있는데, 우선 비가 오면 길이 질다고 해서 진골목이라 한다고 한다. 다른 설은 골목이 길다고 해서 진골목이라 한다고 한다(경상도에서는 ‘ㄱ’을 구개음화하기 때문에 ‘긴’을 ‘진’으로 발음함). 이 골목에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대구 최고의 갑부 서병국,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코오롱의 이원만 회장이 여기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정소아과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정소아과는 아직도 운영되고 있다고 하는데,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건물이 병원이라기보다는 가정집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다음으로 관덕정을 찾아갔다. 원래 이 근처에는 대구천(신천)이 흐르고 있었다고 하며 도시청이라 하여 무과시험을 관장하는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도시청에는 관덕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관덕정에는 김재원 교수님이 기증하셨다는 황새바위가 있었다. 이는 그냥 보기에 부서진 돌 절구통처럼 보이지만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를 처형할 때 사용한 형구(刑具)라고 한다. 이름은 황새바위라고 하는데 이는 이 도구를 이용하여 사형을 집행하면 사형자가 마치 학처럼 팔을 벌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러한 형구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 관덕정은 과거 봉덕동, 비산동과 더불어 대구의 3대 사형장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곽재우 등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또한 천주교 박해로 25명이 사형당했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의 출신 지역은 안동, 봉화, 영양의 일월, 청송의 진보 등 경북북부 지방이었다고 하는데, 내 고향인 청송의 사람들이 여기에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에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답사를 하는 길에 영남대로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대로’라고 함이 무색하게도 많이 좁은 길이었다. 영남대로 옆에도 냇가가 흐르고 있었다고 하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의 고택을 찾아갔다.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많이 알려진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형제로 이상정, 이상백이 있으며 이들도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로써 그의 집은 장사를 통해 3만석 지기 부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집이 조그맣게 지어져 있었으며 높은 고층아파트 바로 옆에 있어 볼 때마다 매우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계산성당으로 향했다. 계산성당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다. 19세기에 천주교는 많은 박해를 받았는데,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찍이 신나무골에 은둔하고 있던 김보록 바오로(Achille Paul Robert) 초대 신부가 대구로 와서 계산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계산성당은 1899년 처음 건축될 당시에는 한옥양식이었으나 1901년 지진에 의해 성당이 전소되어, 1902년에 그 위치에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하여 현재의 서양식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계산성당은 경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이며 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계산성당은 1902년에 건축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난 답사와 다름없이 매우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여타 문화재들도 이렇게 깨끗이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계산성당을 지나 동산언덕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3.1 운동길인 90계단을 올라가게 되었다. 이 90계단이 3.1운동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유는 1919년 3월 8일에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現 경북고) 학생들이 이 길을 지나 만세운동을 하러갔기 때문이다. 동산언덕은 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푸른 담쟁이덩굴이 많아 청라 언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 이곳은 달성 서씨의 문중 산이었는데 1899년 미국인 선교사가 사들여서, 병원을 세우고 선교사 주택 등을 지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선교사 스윗즈(Switzer)의 주택을 볼 수 있었는데,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보존이 참 잘되고 있었다. 그 건물 아래에는 대구읍성의 돌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건물 옆에는 미국인 선교사 존슨이 자신의 고향인 애리조나에서 1899년에 가지고 와서 심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지난 답사에 이어서 대구 도심 답사를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동안 답사가 이뤄지면서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대구근대 유적들을 살필 수 있어 좋았고, 작년에는 알지 못했던 일부 내용들을 더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교수님이 지적하신 징청각 설명의 오류라던가, 건물의 개방 등의 문제가 1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