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윤님의 답글에 필자 글이 길어 별도로 올립니다.정윤님 글엔 [김정윤] 제 글엔 [천의무봉] 이렇게 하고 살펴 보지요^^ 존칭은 생략함.
[김정윤
진도산개들과 육지의 진도개들이 달라진데 대해서 몇가지 추측을 해봤던적이 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과거 박상우님 말씀처럼 육지-진도간 왕래가 어려운 시점에 진도개가 티비에 방영되는
등 홍보가 되고 육지의 사람들이 환상을 갖게 되고, 능력이 있는분들은 암암리에 진도에서 개들을 빼와다가 자랑삼아
길렀을거 같습니다.
어떤 부유층의 트렌드 비슷하게 유행된 진도개 사육붐에 따라 박상우님 표현에 의하면 견상들이 그 중간 공급책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을거 같습니다.
그러다가 대중화가 되면서 육지내에서도 번식이 이루어졌고 전람회같은게 생겼겠죠.
[천의무봉]
진행하기에 따라 상당히 방대한 내용이라 몇 편으로 나눠 본다.
해방이 된 지 오래지 않은 60~70년대는 대한민국의 전체적 완성도는 많이 부족한 시절이어서 부득이 관치위주로
사회상이 전개된다.
티비는 60년대에 등장은 하지만 70년대 초기까지 길거리 전파사에서 길가다 시청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가정에서
티비시청이 일반화 된 것은 70년대 중후반 경 컬러티비가 나온 것은 80년도이다.
진도개에 대한 방송매체의 소개는 76년 경 이윤규 선생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처음 소개하였고 이전엔 극장의 ‘대한
늬우스’에 두어번 나온 것으로 안다.
이처럼 정보나 홍보 부족으로 80년대 초까지 육지 사람들은 진도개에 대한 지식이나 그 인기가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진도개에 대한 정부나 진도군의 적극적 홍보가 거의 없고 진도 내에서 의례적인 ‘그들만의 품평회’가 치뤄질
따름이었고 그나마 정부에서 몇천만원 지원되니까 치뤄진 것이다.
두번째 당시 최고의 인기있는 견종이라면 ‘부유층의 상징’이었던 세퍼드였다.
세퍼드는 일제가 남겨놓고 간 사회상의 단면이었지만 실재 부유층도 아니면서도 세퍼드 강아지 한마리 길러보는 것이
서민들의 꿈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세퍼드 관련 유사 협회들이 난립하자 통폐합차원의 ‘전견등록협회’ 같은 것이 정부의 명령으로 등장한다.
세번째 투견의 대명사인 토좌견(土佐犬,토사켄) 즉 도사견의 전성기가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국내 투견의 역사 역시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60년대 초 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약 20년을 대도시와 중소도시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투견이성행하는데 방송매체가
홍보에 더 열심이었고 대회개최장소도 장충체육관 같은 공공장소나 공설운동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경복궁
앞마당에서도 버젓이 열렸다. 그야말로 전국이 투견에 미친 투견의 광풍시대다.
투견대회는 한국과 일본의 투견들을 몇십 두씩 선정하여 한일 대항전을 매년 열기도 했다.
충무로4가에서 최초의 애견전문병원인 중부동물병원을 60년대 말 개원한 조휴익원장은 충무로 애견거리의 대부로서
국내 애견문화의 산 증인인데 그분은 “ 우리사회에 외래견이 들어온 것은 6·25때 유엔군 편이었다…
그리고 애견센터는 1960년 한일증권 창업자인 김유성 씨가 명동에 개설하고 스핏츠, 포인터, 도벨만 핀샐, 세파드 등을
들여와 외래종이 확산됐다. 이 무렵부터 외래종과 토종간의 잡종견이 나오고 투견과 경주견도 생겨났다.” 라고 회고한다.
투견문화는 57년 처음 도사견이 도입된 이래 61년 제1회투견대회를 시작으로 10여년이 지난 70년대 초부터는
전국체전과 레슬링,권투의 인기를 능가하는 전국적 이벤트로 성장한다.
처음 일본 시코구가 원산인 도사견을 들여 왓을 때는 작았다고 한다.
이것이 오로지 승부와 돈이 걸리니까 세퍼드나 세인트버나드 그레이트덴 마스티프 등과 본격 교잡을 통해 덩치를
키우고 흉폭한 개를 양산하여 투견대회를 열게 되고 먹을 것 부족하던 60~70년대 서민들의 여름철 보신용으로도
덩치 큰 개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진도개던, 투견이던, 애견이던 견상들은 설명이 달리 필요없이 육견사업을 병행한다.
견협회 또한 견상들 조직이나 다름없고 협회라는 것이 견상들의 ‘개판매 고객 확보 차원의 조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처럼 서글프게도 80년대까지 무슨 애견문화(?)라는 것이 국내엔 없었다.
그러던 것이 86년 아시안게임이 82년도에 88올림픽 게임은 81년도에 한국에서 열리기로 결정되면서 국내
애견문화(?)는 변화가 찾아온다.
전세계 동물애호단체들과 전세계 언론을 통해 연일 보신탕문화와 투견대회가 도마선상에 오르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지 선정국가로서 부적당하다고 욕을 먹었다.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니 정부가 당시 관련규정이 미비상태라 ‘행정지도’ 라는 이름으로 지도단속을 하는데 위생과
직원들을 매일 출동시켜 괴롭히면서 실재 보신탕 식당을 면단위로 이전을 강권하고 투견대회는 늘상 대회 보조금까지
지원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영화포스터보다 더 인기 많았던 투견대회 포스터를 붙이거나 대회 홍보하는 행위
일체를 금지하고 투견 방송이나 보도를 금지하는 언론통제를 시작하는 한편 외국에 한국의 동물 애호 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홍보할 필요성도 있으므로 견협회를 움직여 기존협회 이름만 바꿔 한국애완동물보호협회 등이 설립된다.
이때 이미 천연기념물로 제정된 진도개와 풍산개 특히 남한의 진도개를 홍보해야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정부가
진도군에 대대적 자금지원을 계획하고 진도개 홍보 프로그램 차원에서 급조한 단체가 ‘한국 진도견 혈통 보존 협회’이고
회장에는 15년 전에 정년퇴임한 팔순의 노학자 최기철 박사를 위촉하여 89년 5월 설립 등기를 마치고 마침내
89년 9월 17일 장충체육관에서 한국진도견보육조합(조합장 이기담)과 공동으로 한국 진도개 품평회와 진도개
퍼레이드를 실시한다.
이 것이 사실 상 진도개 역사상 최초이자 대규모로 진도군에서 육지에 진도개를 공식 소개하는 자리였다.
아니 진도산 진도개의 육지에 대한 대대적 공습이었다.
진도개 품평 대회 직전에는 진도개 세미나도 열어 애견협회(당시 사역견 협회) 회장이신 세퍼드 이론의 태두 전창수
회장이 진도개를 설명하는데 외모는 기쥬견과 아끼다 표준서를 차용하고 보용 이론에는 세퍼드 보용을 진도개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 진도개 이론 세계의 효시였다.
그런데 대회 이후 (사)한국진도견 혈통 보존 협회는 사단법인으로 출발하였기에 전국의 진도개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리게 된다.
여기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기존 견관련 단체들의 강력한 항의(?), 그들은 담수어 전문학자이지 진도개는
구경도 못해본 회장과 학계 정계 언론계 인사들만 발기인으로 구성하여 설립한 단체의 전문성(?) 부족을 들면서
원산지 진도군의 보육조합은 조합원의 조합이지 비영리단체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켜 결국 ‘혈통서 발급 불가 협회’
상태의 기형 단체로 88보존회를 발족하게 만들었다.
설립 시에는 혈통서 발급이 뭐 그리 대수겠냐 했지만 모든 개는 결국 혈통서를 기초로 혈통관리에 따른 정부 자금
지원과 제반 행정력이 뒤따르는 것을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견상들의 논리에 밀린 협회는 단 한번의 대회를 끝으로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었다.
당시 진도개 혈통서 발급은 (사)한국애완동물보호협회(약칭:애동..현 애견연맹)가 발급하는 것으로 결론
되었는데 당시 애동회장(이동칠)과 애동 이사진들 또한 진도개 쪽으로는 거의 상식이 없던 이들이기는 88 보존회와
마찬가지였다.
애동의 전신인 전견 등록 협회라는 곳은 본래 모든 개들을 취급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인기나 유행에 따른 애완견
장사에 열을 올리고 투견대회 개최를 더 신경 쓰던 곳이지 강아지 한마리에 인기 애완견 사료 한포대 값도 안되는
진도개는 개 취급도 안하던 곳이었다.
이런 사실은 진도개 부문 심사 때 보면 안다. 애동이나 사역견 협회는 양쪽 다 사단법인이지만 90년대 후반까지
진도개 부문 출진견을 보면 한마리도 나오고 두세마리도 나오는데 한마리 나오는데도 챔피언,두마리 나오면
한마리는 챔피언 한마리는 진1석…이런 식이었다.
<안성 공도에서 97년도 사역견 협회 진도견 부문 출진한 챔피언.
이런 잡견이 홀로 출진했는데 심사원이 S국장에게 물으니 협회 실세인 S국장 왈 그것도 큰 소리로 ‘챔피언 줘~!’
이 한마디에 걍 챔피언 된 개…72년 노랭이는 필자에게 이 모양 유사한 사진이 있는데 이 개보다 더 흉물스럽다>
이처럼 진도개는 신경 전혀 아니 쓰던 기존 단체들이 90년대 들어 정부의 지원이 지속되고 진도개 애호가들이
늘어나자 시장(?)선점을 위해 말도 안되는 작태를 부리기 시작한다.
이 당시 초기 주도권(?)은 애동에 있었기에 애동 이동칠 회장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아끼다 표준 베껴 온
것으로 만든 애동 진도개 표준에 맞춰 개들을 선발하니 육지 진도개 형질은 초기엔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동네개들과
육견으로 많이 키우던 아끼다 혼혈견이 진도개로 팔렸고 조금 시간이 더 지나서는 아끼다+챠우챠우 일색이었고
언더그라운드 투견계에 등장한 기쥬견까지 90년대 초반까지 육지는 그야말로 혼혈견 천하였다.
육지가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도 진도군은 무사태평(?) 정부 보조금 받을 사용처 목록 작성하는데만 신경쓰고
법적으로는 진도관외의 개들을 관리감독하지 못하는 입장인데다 말발(?)로는 세퍼드 이론으로 무장해가는
육지개꾼들 앞에서 개소리 한마디 제대로 못한 것도 또한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급격히 진도개 시장이 활성화되자 어느정도 시장 점령(?)을 마친 개협회나 개꾼들이 원래
진도개 지식은 없어도 전람회 상력을 앞세워 혼혈견 파는 데는 지장이 없었음에도 원산지 개들이 머잖아 본격 상륙할
경우를 대비해서인지 아니면 육지 내에서도 패권을 차지할 심산이었는지 (둘 다 이겠죠)각종 옛날개 사진이나 일화를
수집하고 이를 가공하여 거짓된 논리들을 앞 다투어 무수히 뱉어내기 시작한다.
아끼다 표준에 나오는 ‘4대3소’라든지 ‘중장모’타령을 앞세워 어느 동네 똥개출신인지 알지도 못할 흑백사진들
수집해서 ‘옛날 할아버지들 키우던 진도개’로 둔갑시키고 진도대교 개통 훨씬 이전부터 진도를 제집 드나들듯이
했다던지 군대시절 진도출신 쫄병이 가져왔다던지 진도군수(부군수는 등장한 적 없음) 선물 시리즈도 매번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되는 등 애호가들에게 사기와 거짓을 일삼는 것은 당연한 풍조였다.
여기서 진도개를 등록한 등록사를 살펴보면 애동에서 처음 FCI - 전견종을 취급하는 국제 단체이긴한데 AKC나
영국켄넬클럽보다 그 권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곳-에 95년도에 등록을 한다.
진도개는 이처럼 90년대 초중반까지는 세퍼드나 미니어쳐 애완견의 득세에 투견의 전성기 등등의 이유로 각광을 받지
못한 개였는데 89년 이후 육지에 그 형질이 선을 제대로 보이고 서서히 육지 반입이 진행되다가 97년 제1회 진도개
통합품평회 즉 진도군에서 관내견과 관외견 부문으로 크게 나누어 대회를 치르는 것을 계기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계속>